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487
828화 이건 측비를 들일지 말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3)
범한의 말에 1 황자는 마음이 서늘해지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의 머릿속에 사람들이 굵은 막대기에 암퇘지의 사지를 묶고 몸에는 붉은 천을 두르게 한 뒤 시끄러운 나팔을 불며 왕부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떠올랐다.
“저는 돌아오는 길 위에서 이미 깨달았습니다. 이 일은 저하나 제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저희 두 사람의 힘만으로 어찌 조정 전체에 대항할 수가 있겠습니까?”
범한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저하께서는 혼사를 없던 일로 하는 동시에 황제 폐하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어 하시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잔뜩 풀이 죽어 앉아 있는 1 황자의 모습은 과거 군대를 이끌고 서쪽 이민족들을 몰아내던 용맹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잠시 고민하다가 혼잣말을 하는 듯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말은 내가 측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인가?”
“이 일이 너무 시끄러워지기를 원치 않으신다면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폐하의 인내심이 바닥나 진노하게 되신다면 결국 왕비가 질투심이 너무 많다거나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직접 폐위하려 하실 테니까요. 하지만 저하께서 측비를 들이면 최소한 시간을 끌어 볼 수 있습니다.”
범한이 동정 어린 시선으로 1 황자를 바라보았다. 군대 쪽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1 황자는 확실히 군대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범한보다 힘든 점이 많았다. 그런 사실을 아는 범한이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이르듯이 말했다.
“조정의 대신 중에서도 첩을 많이 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점잖다고 알려진 서무 대학사도 스물 몇 살짜리 첩을 집안에 두고 있지요. 왕비는 사리를 분간할 줄 알고 예절에도 밝은 분이시니 측비를 들이는 일에 크게 반대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조정 대신 중 첩을 많이 둔 사람이 있다고? 그럼 자네는 왜 많이 들이지 않는 것인가?”
1 황자가 발끈하며 쏘아붙이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 황자 역시 측비를 들이는 일을 언제까지 거절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범한이 차마 말하지 않은 측비를 들이는 일에 숨겨진 내막을 알고 있었다. 측비를 들이는 일이 훗날 왕비를 폐위하기 위한 사전 준비라는 사실 말이다.
1 황자와 왕비는 양국의 사이가 좋았던 시기 정치적 계산에 의해 맺어진 사이였지만 부부관계가 화목했고,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그러니 1 황자는 왕비를 폐위하는 일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늘 처음 왕동아를 만나 몇 마디 대화를 나눠봤습니다.”
1 황자의 표정 변화를 살피며 범한이 온화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대화를 나눈 뒤 저는 저하께서 측비를 들일 수밖에 없다면 그녀가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에 대한 제 생각도 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범한의 말에 1 황자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도량이 넓은 1 황자도 도저히 왕씨 집안 아가씨를 받아들일 마음은 서지 않는 모양이었다.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저도 왕씨 집안 아가씨가 성격이 난폭하고 제멋대로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앞으로 저하의 집안이 평온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왕씨 집안 아가씨를 제자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저하께서는 제가 아무 일도 안 하고 한가롭게 노는 사람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잊지 마십시오. 저는 이름으로 한가로운 한(閑)자를 쓰고 있지만, 한시도 쉬지 않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걸 말입니다.”
왕동아가 왕부의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욕을 퍼부으며 추태를 부렸음에도, 1 황자는 여전히 성숙한 남자라면 마땅히 갖춰야할 진중한 모습을 유지하며 범한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1 황자는 왕동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음에도 범한 앞에서 그녀를 험담하는 나쁜 말은 하지 않았다. 왕씨 집안 아가씨가 연경 대도독의 천금과 같은 귀한 딸이라고 해도 존귀한 친왕인 1 황자보다 신분이 높지는 않았다. 그러니 1 황자는 굳이 이렇게 언행에 조심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1 황자는 여전히 침착하게 말을 조심히 가려서 했다.
예를 들어서 범한의 말을 들은 뒤에도 1 황자는 왕씨 집안 아가씨의 난폭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을 직접 거론하며 그녀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저 근심 가득한 표정을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자네가 왕씨 집안 아가씨를 제자로 받아들여 무엇을 하려 할 거라고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저는 저하께서 예측하지 못하셨다는 말은 믿지 않습니다.”
범한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물론 이미 왕부 안에 성질 사나운 암컷 호랑이가 있는 상황에서 어린 표범까지 들어온다는 게 걱정되시겠지요. 하지만 만약 제가 왕씨 집안 아가씨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쳐 단정하고 예의 바른 낭자로 만들면 왕부에 들어와도 걱정되지 않으실 것 아닙니까?”
범한이 화제를 바꾸면서까지 계속해서 측비를 들이라고 설득하자 1 황자가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으며 살짝 화를 냈다.
“자네의 평소 남달랐던 식견은 어디에다가 버려두고 온 것인가? 어떻게 세상 물정을 모르는 여자아이가 가장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나쁠 건 또 뭐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범한이 미소를 거두고 정색하며 물었다.
“제가 일러드리지 않아도 저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하의 기반은 군에 있습니다. 그리고 왕씨 집안 아가씨는 왕지곤 장군의 딸입니다. 만약 저하께서 왕씨 집안 아가씨를 측비로 들이신다면 군대 측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으실 수 있을 겁니다. 비록 군대 안에서 저하의 위신이 높은 편이지만, 과거 서정군은 이미 뿔뿔이 흩어진 상태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게다가 지금 저하는 다시 정주로 돌아갈 수도 없는데다가 금군 대통령의 자리에서도 물러난 상황이 아닙니까.”
“그건 부황의 뜻이셨네.”
1 황자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자네의 생각이 부황과 같은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네.”
눈썹을 치켜세운 범한이 허리를 펴고 바르게 앉으며 말했다.
“지금 폐하의 뜻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왕부에 들어간 여자는 항상 왕비의 자리를 노리기 마련입니다. 만일 저하께서 왕비가 폐위되는 상황을 보고 싶지 않으신다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왕동아를 왕부에 들이셔야 합니다. 그게 가장 좋은 선택이니까요.”
1 황자가 의문 가득한 눈빛으로 범한을 노려보며 속으로 그가 갑자기 왕동아를 저택으로 들이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했다.
사실 1 황자는 왕동아가 상당한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왕부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만일 왕동아가 왕부에 들어온다면 군대 연경파의 적극적인 지원과 황제 폐하의 묵인 하에 곧바로 왕비의 자리를 위협할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제가 왕동아를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녀가 저하를 좋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황자의 생각을 읽은 듯 범한이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물론 왕동아는 성격이 심술궂고 제멋대로이니 왕부 안에서도 철없이 마구잡이라 날뛰려 할 겁니다. 왕동아처럼 성격이 거칠고 과격한 사람은 겉보기에는 다루기 어려워 보이지만, 실상 부딪치면 다루기가 훨씬 쉽습니다······. 저하께서 측비를 들이는 걸 꺼리시는 이유도 과거 장 공주 마마처럼 겉으로는 유약해 보이면서 속은 차갑고 무서운 사람이 왕부에 들어올까 봐 두려워 그러시는 게 아닙니까.”
곰곰이 고민해 보던 1 황자는 범한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궁에서 아직 교지가 내려오지 않은 상황에서 겁도 없이 왕부로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걸 보면 왕동아는 분명 장 공주처럼 속과 겉이 다른 사람이 될 유형은 아니었다. 다만 1 황자는 다른 생각에 근심 어린 표정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왕동아는 이제 겨우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네. 세상일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지 않은가. 만일 왕부에 들어온 뒤 매일 식칼을 들고 날뛰면 어찌하는가?”
“폐하의 뜻을 저희가 공개적으로 저항할 수는 없습니다.”
범한이 1 황자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설득했다.
“하지만 방법을 바꿔서 처리해볼 수는 있겠지요. 왕동아가 앞으로 난동을 부릴지 부리지 않을지는 스승인 제가 어떻게 가르치는지와 저하와 왕비가 어떻게 대하냐에 따라 정해지지 않겠습니까.”
차를 한 모금 마신 범한은 순간 자신의 마음이 갈수록 단단해진다는 생각에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왕동아는 저하를 좋아하고 있으니 왕부에 들어온다면 분명 저하를 하늘처럼 우러러보며 따를 겁니다. 사람을 만족시키려면 그 사람이 원하는 게 뭔지 알고 들어줘야 합니다. 만약 다른 집안 아가씨를 측비로 맞이한다면 왕비가 될 때까지 만족할 줄 모르겠지만, 왕동아는 저하를 좋아하니 혼인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겁니다.”
1 황자가 확신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면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뭘 근거로 왕씨 집안 아가씨가 나를 좋아한다고 단정을 짓는 것인가? 자네 말대로 그녀를 왕부로 들였다가 집안이 시끄러워지면 자네가 책임질 것인가?”
“책임지라 하시면 지겠습니다.”
범한이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이 세상에서 저보다 더 여자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 이 부분은 저를 믿으셔도 됩니다.”
1 황자가 입을 쩍 벌리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낭자들이 석두기에 홀딱 빠져버린 점과 그동안 범한의 여자관계를 떠올리면, 저 말을 단순히 잘난체한다고 생각하며 무시할 수는 없었다.
1 황자가 아끼는 임완아는 일편단심으로 범한을 사랑하고 있었고, 심지어 북제 천일도 성녀라 불리는 해당타타도 범한에게 푹 빠져 있으니 말이다. 이런 점을 보면 범한은 여자의 마음을 잘 아는 게 확실했다.
“하지만 나는 왕씨 집안 아가씨가 나를 왜 좋아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네. 우리는 사비 장군의 연회에서 한 번 만난 게 다란 말이네.”
1 황자가 범한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상대의 호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자네와 같은 요물이라면 단 한 번의 만남만으로도 여자의 마음을 쉽게 훔칠 수 있겠지만 나는 아니네.”
“여자와 남자는 다른 생물입니다.”
범한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1 황자의 어깨를 다독였다.
“저하 같은 남자들은 이해하실 수 없으실 테니 굳이 알려 하지 마십시오.”
화가 나 안색이 붉어진 1 황자가 ‘퉤’ 하고 침을 내뱉고는 물었다.
“자네같이 바쁜 권신이 오로지 내 문제 하나 해결해주겠다고 왕동아를 제자로 받아들인 건 아니지 않은가?”
정곡을 찔린 범한이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알고 계시면서 뭘 물어보십니까? 저는 저하와 처지가 다릅니다. 저는 흑기를 제외하면 손에 쥐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군대 쪽 원로와 관계를 돈독하게 해두면 항상 좋지 않습니까? 저는 군대 쪽에서 진씨 집안처럼 저를 뼈에 사무치게 미워하는 집안이 또 나오는 걸 원치 않습니다.”
1 황자가 멍하니 범한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섭씨 집안 아가씨도 줄곧 자네 말을 듣고 있는데, 이제는 왕지곤을 딸도 자네의 말을 듣게 되겠군. 정말이지······.”
“그 말은 좀 듣기에 거북합니다.”
범한이 코를 비비며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나쁜 뜻에서 그런 게 아닙니다. 두 사람이 황실 쪽과 관련된 사람들이라고 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모두 자네의 여제자들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