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488
829화 쉼 없이 주판을 굴려라 (1)
1 황자가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게다가 홍성은 정주에 있네. 비록 부황께서 계속 자네가 군사 일에 참여하는 걸 금지하고 계시기는 하지만 지금 상황을 고려해 보면 자네는 곧 3로 대군과 관계를 맺게 되는 셈이네. 자네의 주판 굴리는 솜씨도 부황 못지않아.”
“저하께서는 저를 과소평가하시고 계십니다. 이전에 언빙운이 제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 삶은 마치 여자들을 정복해서 세계를 정복하려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두 여제자를 이용해서 두 로에 있는 대군과 섭씨 집안에 어떤 영향을 끼치려 하는 바보 같은 시도는 하지 않을 겁니다.”
범한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단지 군대 쪽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을 뿐입니다.”
이 말을 하는 범한의 심정은 사실 복잡했다. 담주에서 경도에 온 뒤로 복잡한 경도 관료 사회에 진입한 그는 벌써 5년 동안 천하대세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경국 군대 쪽에 손을 뻗으려는 노력은 줄곧 허사로 돌아갔다.
비록 그에 대한 폐하의 경계심이 많이 줄어들어 이홍성이 담당하고 있는 정주 장군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지만, 원하는 데로 자신의 세력이 군대 쪽에 진입시키는 건 여전히 어려웠다.
예를 들어서 교주 수군의 경우 범한은 허무재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측근을 안에 들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이후 진씨 집안의 반란이 진압되자 그는 암암리에 교주 수군의 세력을 접수할 준비를 하려 했다.
하지만 폐하는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허무재의 정체를 확인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비록 황제 폐하가 범한의 체면을 봐서 목숨만은 살려 주었지만, 이로써 교주 수군은 범한의 손에서 완전히 떠나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이 일로 손해를 본 사람은 범한만이 아니었다. 범한이 줄곧 교주에 남겨 두었던 후계상은 이번 일로 인해 아무런 공적도 세울 수 없게 되었다. 지난 2년 동안 한 노력이 전부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2년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을 낭비하게 된 셈이니 후계상의 관직 생활에도 먹구름이 드리우게 되었다. 그는 이미 공부 안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양만리나 소주 지부로 부임한 성가림보다 한참 뒤처져 있었다.
후계상은 범문사자 중 한 명으로 범한이 가장 아끼는 제자였고, 그래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교주를 맡긴 것이었다. 범한은 역시 자신의 실수로 인해 과거 하종위와 함께 경도에서 인재로 이름을 날렸던 후계상이 외진 교주에서 아무 이름도 없는 말단 관리로 고생하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황제 폐하는 범한을 더 없이 신뢰하고 총애하면서도 그가 군대 쪽에 들어오는 건 엄격하게 막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점은 범한을 더없이 불안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황제 폐하가 뭘 알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20여 년 전 일 때문에 여전히 악몽을 꾸는 황제 폐하는 허무재가 과거 천주 수군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아들인 범한을 경계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자네는 항상 군대 쪽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네.”
1 황자의 말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범한이 고개를 들고는 어색한 미소를 억지로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하께서는 폐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제가 군대 쪽과 좋은 관계를 맺는 걸 막지 않으신다면 왕지곤도 분명 저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 할 겁니다. 아마 제가 그의 딸을 제자로 받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너무 기뻐서 자다가도 웃을 겁니다.”
1 황자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속으로 범한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지금 경국에서 가진 권력과 세력만 놓고 보면 범한보다 더 뛰어난 위치에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세상 사람들 모두 그가 경국 황제 폐하와 과거 섭가 여주인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관련이 있는 장군과 대신들은 모두 범한에게 비위를 맞추고 환심을 사고 싶어 했다.
이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다시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1 황자는 측비를 들이는 일을 없던 일로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고민에 빠져 있었고, 범한은 황궁에 있는 황제가 정말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거라면 언제 자신을 제거하려 할지를 계산하고 있었다.
“서쪽 일에 대해 말을 해보게.”
생각에 잠겨 있던 1 황자가 문득 생각이 든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도대체 이민족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2년 동안 급속도로 세력이 불어난 이유가 분명 있을 거네.”
“이틀 뒤에 관보가 발송되면 알게 되실 겁니다.”
범한은 1 황자가 이 문제를 물어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1 황자는 수년간 서쪽 정벌에 참여했기에 그 초원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1 황자가 쌓아 올린 명성은 수많은 이민족을 죽인 대가로 이룬 것이었다.
만일 황제 폐하가 장자인 1 황자가 너무 많은 공을 쌓는 걸 우려하지 않았다면 3년 전에 그를 경도로 돌아오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1 황자는 비록 몸은 경도에 머물고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곳 초원을 떠돌고 있었고 그래서 그곳의 상황 변화에 누구보다 민감했다.
범한이 선뜻 대답해 주려 하지 않자 1 황자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홍성이 지난 2년 동안 상당한 발전을 보인 건 사실이지만, 이민족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피에 굶주린 사람들인지 자네도 알아야 하네.”
범한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진지하게 물었다.
“경국은 서쪽 이민족 서호와 십여 년 동안 싸워오면서 항상 우위를 차지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런 걸 보면 이민족들의 뿌리를 완벽하게 뽑아 버릴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어째서 지금까지 그러지 못한 것입니까? 어째서 이민족들은 매년 봄바람이 불면 초원에 자라나는 잡초처럼 매번 다시 세력을 회복하는 겁니까?”
누구보다도 이 원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1 황자가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건 잡초가 너무 크고 넓게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네. 남쪽으로 가나 서쪽으로 가나 대초원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네. 그곳의 땅이 너무 넓기 때문에 경국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어도 뿌리를 뽑지 못하는 거네. 이민족들이 서쪽으로 도망쳐버리면 어찌할 방법이 없거든. 그러니 세력을 철저하게 소탕하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지.”
“하지만 제가 이번에 가서 확인해보니 서호 왕정이 정주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범한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박하자 1 황자가 상황을 모른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민족들의 왕정은 경도성이나 상경성과는 다르네. 그들은 우리가 쳐들어오면 재빨리 왕정을 초원 깊숙한 곳으로 이동시켜 버릴 수 있네······. 지금 이민족들이 왕정은 국경지대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옮긴 이유는 그들의 세력이 그만큼 강성해졌기 때문인 거네.”
말을 멈춘 1 황자는 잠시 생각을 잠긴 표정을 짓다가 다시 설명했다.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서쪽 이민족들과 전쟁을 치르기 이전에 부황께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셨던 적이 있었데. 지금으로부터 한 20년 전에 부황께서 초원 멀리까지 나가 이민족들을 모두 소탕하려 하셨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공을 눈앞에 두고 실패하셨네.”
1 황자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며시 저으며 계속 말했다.
“부황께서 나라의 힘을 전부 동원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갔는데도 이민족의 뿌리를 뽑는 데 실패했다는 말이네. 천부적인 지략과 군대 응용 능력을 가진 부황께서도 이민족들을 정복하지 못했는데,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20여 년 전에 경제가 대군을 이끌고 직접 서쪽 이민족 정벌에 나선 일이 언급되자 안색이 굳어버린 범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머릿속에 당시 황제를 따라 서쪽 정벌에 나선 부친 범건이 병영에 있을 때 경도에서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서 한 여자가 인생을 마감했고, 두 번째 생명을 얻은 그는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오죽의 품에 안겨 마차를 타고 담주로 갔었다.
옛 생각에 잠겨 있는 1 황자는 범한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계속 말을 이어갔다.
“당시 늙은 선우의 죽음으로 이민족 무리들이 혼란스러워진 것이 우리 경국에는 절호의 기회였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지······. 사실 이 부분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네. 당시 황명을 받아 경도 수비를 내놓은 섭 장군이 대군의 선봉장으로 임명되어 정예 기병을 이끌고 서호 왕정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부황께서는 병영에서 3일 동안 머무르며 움직이지 않으셨네. 서호의 왕정 귀족들을 일망타진할 수 있는 절호의 순간에 대군이 갑자기 서쪽 정벌을 멈추고 국경 안으로 병력을 철수해버렸지. 서호는 지금까지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바로 그때 절호의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야.”
아무 말 없이 1 황자의 말을 듣던 범한이 고개를 들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대군이 국경 안으로 철수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분명 폐하께서 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겠지요.”
예상치 못한 말에 1 황자는 마음이 흠칫하며 떨렸다. 그제야 그의 머릿속에 오랜 시간 언급되지 않아 잊고 있었던 옛 사건이 떠올랐다.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는 범한의 모습을 보니 안타까워 1 황자는 차마 이 화제를 가지고 계속 말을 할 수 없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1 황자가 마른기침을 하며 처음 화제로 돌아가 물었다.
“측비를 들이는 일을 막을 방법이 정말 없는 것 같은가?”
“누가 감히 폐하의 뜻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누구든 폐하에게 정면으로 대항한 사람은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합니다.”
“왕동아가 정말 가장 좋은 선택이라 생각하는가?”
“최소한 지금 상황에서는 더 좋은 선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럼······ 내가 왕비에게 뭐라고 말하면 좋겠는가?”
범한이 ‘하하’하고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이 문제는 저하가 걱정할 필요가 없으실 겁니다. 왕비께서 왕씨 집안 아가씨를 다룰 방법을 이미 가지고 계실 테니까요.”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 왕비와 왕씨 집안 아가씨가 왔다는 보고가 들렸다. 1 황자와 범한이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두 여자가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린 뒤 범한이 일어나 예를 갖춰 인사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슬쩍 두 사람의 표정을 살펴본 범한이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는 평소와 다름없이 온화하고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반면, 왕동아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부끄러운 표정을 짓는 게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범한이 강제로 왕비 곁에 붙여놓은 뒤 왕씨 집안 아가씨가 어떤 승낙을 받아 낸 것 같았다.
범한이 속으로 왕비는 과연 대단한 사람이고 생각하며 탄식했다. 왕비는 범한이 1 황자를 설득해 결정을 내리게 하기도 전에 이미 마음에 결심을 내리고는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양보하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었다.
잠시 왕비의 모습을 바라보던 범한이 속으로 굳이 왕야가 왕비를 힘들게 설득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왕비가 왕야에게 상황이 심각하니 굳이 부황의 뜻을 거역할 필요가 없다고 설득할 모양이었다. 범한이 웃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왕비를 바라보다가 몇 마디 안부 말을 전하자 왕비도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