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496
837화 한밤중에 은은히 들리는 노랫소리 (2)
범한이 긁던 손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대인을 평범한 신하들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확실히 다르지. 이 점은 내가 폐하에게 정말 감사해하는 부분이야.”
진평평이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나도 평범한 신하와는 다르다네. 2년 전에 일에서 네가 의심을 했었지. 나도 네 의견을 듣고 계속하지 않았네만······. 폐하께서는 2년 전에 일도 약간 의심하며 마음을 불편해하고 계시네.”
범한이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2년 전에 경도 반란이 평정된 뒤 범한은 진평평에게 이번 일에서 감찰원이 맡은 역할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었고, 언빙운도 사후에 그에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넌지시 말했었다.
비록 겉으로 진평평은 황제 폐하의 대업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범한은 당시 상황에 약간 미묘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섭류운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지 않았거나 황제 폐하가 대종사가 아니었다면 진평평은 아마도 천하를 뒤흔들 만한 행동을 했을 수도 있었다.
“대동산의 사건에서 내가 약간의 기대심에 마음이 움직였던 건 사실이다. 나는 이런 마음을 아주 깊이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장 공주가 어렴풋하게나마 알아채더구나. 그래서 경도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장 공주가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거지. 왜냐하면, 그녀는 우리가 당시에 세운 큰 목표에 아주 근접했다는 걸 알았거든. 나중에 고하도 이 점을 약간은 알아챘고, 그래서 임종 전에 목봉에게 경국에 가서 내 목숨을 연장시키라고 명령한 거야.”
무슨 마음이 움직였다는 걸까? 범한은 이미 그게 어떤 마음인지 알고 있었지만, 지금 직접 진평평의 입을 통해 들으니 심장이 떨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폐하가 대동산에서 살아 내려오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진평평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그날 위주에서 폐하의 서신을 받았을 때 한 사람을 죽이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며 연신 탄식을 내뱉었지. 폐하께서는 대동산 사건을 계획을 세웠을 때 내게 진실 중 절반만 보여주셨단다. 황제 폐하는 대종사들을 그 일에 참여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나까지도 그 수렁에 빠지게 만들려 했던 거야.”
“물론, 나는 장 공주처럼 부리나케 뛰어들지 않았지만.”
진평평이 마른기침을 하며 말했다.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폐하가 쉽게 죽을 리 없다고 생각했거든.”
범한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뛰어들지 않으셨으니 어떤 증거도 없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폐하께서도 대인을 의심하지 못하실 겁니다.”
“폐하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않니? 폐하가 나를 조사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단지 그동안 서로가 쌓은 믿음이 있는데다가 내가 그런 마음을 품는 이유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뿐이지.”
진평평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폐하도 내가 앞으로 살날이 몇 년 남지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란다. 나와 폐하 사이의 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과거 목숨을 바쳐 폐하를 구한 일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 폐하께서는 내게 편안히 죽음을 맞이할 기회를 주시려는 것뿐이야.”
“만약 내가 늙어 죽거나 병들어 죽으면 폐하가 나를 의심했든 내가 폐하를 의심했든 모두 땅 아래 묻히게 될 것이 아닌가. 나는 천고에 남을 충신이라는 명예를 얻고 폐하는 며칠 슬퍼하신 뒤 모든 게 바람에 쓸려 떠나갔다며 안심하시겠지. 이거야말로 가장 완벽한 결말이 아닌가?”
진평평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내게 온정을 베푸시고 있는 거지. 내게 가장 좋은 결말을 맞이할 기회를 주신 거야. 그래서 2년 전에 나는 네가 손을 놓으라 했을 때 손을 놓고 늙어 죽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 거란다.”
잠시 말을 멈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 문제는······.”
진평평이 자신도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나와 폐하가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내가 만신창이인 몸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거지. 게다가 만일 별다른 일이 없다면 앞으로 몇 년은 더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야······. 내가 오래 살면 살수록 폐하는 마음이 불편해지실 거고, 어느 날 나에게 옛일을 묻으시는 날이 오겠지. 아마도 고하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았겠나?”
범한이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황제 폐하기 정말 의심을 시작한데다가 진평평이 불충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까지 믿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결국 조정은 크게 출렁일 것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있는 범한은 진평평이 죽는 걸 두 눈 뜨고 가만히 지켜볼 수 없는 만큼 경국은 내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고하 대사는 죽음을 앞두고 세상의 번잡한 일들 가운데 경국이 분열될 수 있는 유일한 약점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었다.
범한은 진평평의 말을 맞는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진평평에게 충분한 기회를 베풀고 있었다. 만약 진평평이 자연스럽게 죽는다면 폐하는 어떠한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을 것이고, 대동산 사건에서 진평평이 다른 마음을 품었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게 될 테니 경국에 혼란도 생기지 않을 거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진평평은 건강을 회복해서 계속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이나 황제나 진평평에게 죽으라고 부드러운 말로 설득할 수는 없었다. 어찌 경국 조정을 위해서 평생을 헌신한 원장 대인에게 일찍 죽어야 한다고, 당신이 죽어야 경국이 평안할 수 있다고 설득할 수 있겠는가······.
“나는 진작 죽었어야 할 사람이네.”
진평평이 마른 입술을 오므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런데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비로소 내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
감찰원의 창시자이자 천하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진평평이 죽음이 두려워한다는 말을 만약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의외라고 생각했을 거였다.
하지만 범한은 아무 말 없이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해 본 그는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 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과정인지 잘 알고 있었다.
수십 년 전에 대륙 전체가 큰 혼란에 휩싸였을 때 북쪽에서는 소은이 남쪽에서는 진평평이 서로의 능력을 펼치며 치열한 싸움을 벌였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어둠의 세계 안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친 인물이었지만 죽음 앞에서는 하염없이 약해졌다.
과거 소은은 세상을 떠나던 순간 옆을 지킨 범한은 이제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왜소한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범한이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속으로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아내도 자식도 없이 외롭게 삶을 산 진평평이 세상을 떠날 때 자신이 반드시 옆을 지켜줄 수 있기를 기도했다.
“폐하는 고하 대사가 생각했던 것만큼 냉혹한 분은 아니십니다.”
범한이 갑자기 소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폐하의 성정이 많이 변하셨어요. 설사 대인을 의심한다고 해도 2년 전에 아무 뜻도 없음을 증명하셨으니 폐하도 대인을 건들지 않으실 겁니다.”
진평평도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어깨 위에 있는 범한의 손을 토닥였다.
“폐하는 이미 줄 수 있는 모든 성의를 다 베푸셨으니, 나는 아무것도 걱정하고 있지 않아. 설사 내가 몇 년 더 살면 어떤가? 폐하보다 더 오래 살지는 못할 텐데.”
이 말을 듣자 범한은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그가 자신의 발 옆 땅을 손으로 더듬더니 겨울바람을 이겨내고 피어난 노란 꽃을 꺾어 진평평의 하얀 구레나룻에 꽂아 주었다.
진평평이 ‘하하’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범한이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진평평은 자신이 폐하에게 불충한 마음을 품었던 이유를 말하지 않았고, 범한도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그 이유가 뭔지 짐작하고 있었고, 더구나 짐작이 사실로 밝혀졌을 때 자신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늙은 종이 다가와 진평평의 바퀴 달린 의자를 밀며 정원을 거닐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진평평이 미약한 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고하는 너무 오래 살면서 너무 많은 일을 보았기에 이런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거야. 다행인 점은 범한의 말처럼 폐하의 성정이 많이 변하셨다는 점이지. 그러니 아마 내가 늙어 죽기를 때까지 기다리실 거야. 다만······.”
진평평이 미간을 찌푸리며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보기에 어떤가? 범한이 내 시체를 끌어안고 통곡할 때 자신을 속이고 이용했다고 탓하지 않을 것 같은가?”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황제 폐하는 진평평의 죽음에 충분한 인내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범한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겨울바람을 맞으며 진원 밖으로 걸어갔다. 마음속에 있는 큰 문제가 해결되자 마음이 약간은 가벼워졌다.
이때 진원 안 여자들의 노랫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몹시도 처량하면서도 하염없이 높이 내지르는 노랫소리가 상당히 의연하고 결연하게 들렸다. 겨울바람을 이겨내고 피운 노란 꽃이나 진원 안에서 살고 있는 노인처럼 말이다.
* * *
뼛속까지 스미는 차가운 바람에 범한이 참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11월이니 이 시간에 해가 떠오를 리가 없었다. 이따금 신발 가죽 사이로 스며들어 오는 추운 기운에 발가락에 얼어 감각이 없었다.
범한이 속으로 해가 늦게 뜨는 겨울에는 조회 시간을 늦춰야 하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그는 고집스럽게 대위의 오래된 예법을 따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지금 하늘을 찌를 만큼의 권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모든 걸 다 바꿀 수는 없었다. 주변 어둠 속에서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고 하는 붉은 등불을 바라보며 범한이 마음이 뒤숭숭해 했다.
오늘은 대조회가 열리는 날이라서 문무백관들은 모두 조정의 관례에 따라 한밤중에 포근한 침대에서 일어나 황궁 정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많은 사람이 범한처럼 추위에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호 대학사도 그의 옆에서 함께 발을 동동 굴렀다. 조정 문신들의 수장임에도 체통과 존엄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폐하께서 대인께 가마를 타고 입궁해도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뭣 하러 제 옆에서 고생을 하고 계신 겁니까?”
난로를 끌어안은 채 입김을 불고 있던 범한이 작은 목소리로 호 대학사에게 물었다. 이때 서 대학사는 이미 후임에게 임무를 넘겨준 뒤 영광스럽게 은퇴한 상황이라서 문하중서의 수장은 자연스럽게 호 대학사게 되었다. 이에 황제 폐하는 호 대학사의 몸이 건강함에도 그의 나이가 많은 걸 생각해서 가마를 타고 입궁할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
호 대학사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제가 아니면 누가 대인과 이렇게 말동무를 하려 하겠습니까. 설마 제가 반갑지 않으신 겁니까?”
예상치 못한 대답에 범한이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곧이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조정에 있던 오주 장인어른의 세력들은 황제 폐하에 의해서 뿔뿔이 흩어진데다가 감찰원에서 몇 년 동안 관리들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어 조정 관리들은 범한을 무서워했다. 그래서 범한을 보면 공손히 인사만 할 뿐 아무도 그의 옆에 있으려 하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등불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도찰원 좌도어사이자 문하중서성을 겸임하고 있는 하종위가 종의 인솔을 받으며 두 사람 앞에 서더니 평온한 얼굴로 겸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등불이 젊은 대신의 지극히 온순하고 순종적인 얼굴을 비췄다.
하지만 범한은 눈을 가늘 게 뜨고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