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524
865화 머리 빗기 (1)
이번 전쟁이 끝날 무렵 범한이 성공적으로 상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고집불통 여인과 셀 수 없이 많은 힘겨루기를 하다가 마지막에 상대방의 전신에서 힘이 빠졌을 때를 틈타 주도적으로 통제권을 빼앗아 온 거였다. 그야말로 거칠고 광폭한 전쟁이었다. 범한이 숨을 헐떡이며 황제의 몸 위로 엎어졌다. 그러자 눈 가장자리로 자기 어깨에 생긴 상처가 보였다. 그리고 아래 깔린 여인에게 물려 살이 뭉개진 거란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범한은 저도 모르게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범한은 고개를 숙여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품 안의 옥 같은 여인은 더는 평소 보던 고고한 제왕은 아니었다. 발그스레한 양 뺨에 초점 잃은 눈, 살짝 벌린 입술로 향기롭게 숨을 뱉어내는 게 무척이나 피로해 보였다.
평범한 여인들과 대체 뭐가 다른 거지?
범한은 심장이 ‘두근!’ 하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내가 아까 왜 이렇게 거칠게 행동한 거지?’라고 생각을 했다.
남자는 소원을 이루고 다 쏟아내고 나면, 금수에서 위선자로 변해 담배나 한 대 피우면서 신문이나 읽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품속으로 들어와 함께 엉켜 있는 여인에게서 벗어나려 한다.
범한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그는 지금 살며시 끌어안고 있는 알몸의 북제 황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대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으로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 일은 실은 이미 4년 전에 발생한 거였다. 단지 그때 범한은 인사불성이었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뿐이었다. 그래서 오늘에야 모든 걸 제대로 느낄 수 있게 된 범한은 무언가 황당한 기분을 금할 길이 없었다.
긴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내려와 있는 이 여인은 북제의 황제로 일국의 제왕인데, 지금 자그마한 토끼처럼 자신의 품안에서 웅크리고 있어서였다.
황제는 피곤해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길지 않은 속눈썹이 살며시 움직이는 걸로 보아 분명 자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범한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손을 풀지 않고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는 만족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의 반응을 보고 있는 범한은 자랑스러워해야 했다. 하지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갑자기 싸늘한 한기가 드는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전생에서 봤던 영화 한 편이 생각나서였다.
영화 제목은 바로 모두가 좋아하는 였다. 영화 막바지에 맥라이언은 콧물을 흘리며 울고불고 하다가 십년지기 친구인 빌리 크리스탈과 함께 잠자리를 하고는 큰 입매를 활짝 벌리고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쉰다. 그런데 범한에게는 그 장면이 마치 새끼를 밴 암사마귀가 잠시 후 수컷 사마귀를 먹을 준비를 하는 것처럼 다가왔었다.
오늘 범한과 젊은 황제가 침대 위에서 벌인 일은 사실은 뜬금없이 일어난 일이었지만 또 그리 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녀도 울지 않았던가. 앞서 어떤 순간에 말이다.
그래서 범한은 두려웠고, 자신이 수컷 사마귀로 전락하는 건 아닐까란 생각이 들어 무서웠다.
바로 이때, 북제 젊은 황제가 눈을 뜨고 깨어났다. 범한 앞에 거리낌이 없이 자신의 벗은 몸을 그대로 드러낸 채 이곳이 자신의 영토 안이고 범한이 자신의 신하인양 행동했다.
그녀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돌연 복잡한 감정이 담긴 시선으로 범한을 쓱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짐은 그대의 여인이니라.”
이 순간 범한은 무어라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하지만 황제의 말이 심히 거북한 건 있었다. 짐이 위에 있을 것이니라.
짐은 그대의 여인이니라. 짐은······ 짐은······. 정말 듣기만 해도 골치 아픈 단어인 건 분명했다.
젊은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범한을 마주하고는 머리를 한데 모이도록 정리했다. 그리고 두 눈은 창밖에 드리워진 어둠을 향하게 한 채 매 단어를 똑똑히 말했다.
“평생 두 번째 남자는 두지 않을 것이라고 짐이 약속하마. 물론 그대에게 다른 여인을 찾지 말라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 이거 하나만은 알아줬으면 하는데······. 짐이 그대의 여인이 되었으니, 짐의 나라는 그대의 나라이기도 하구나. 그러니 더 많이 신경 써야 할 것이야.”
등불조차 켜지 않아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그리고 검려에서는 누군가가 찾아와 방해를 하지도 않아, 이곳은 마치 잊힌 공간 같았다.
어둠 속에서 이 냉랭한 말들을 들고 있던 범한은 어느새 미간에 싸늘함을 담고 있었다. 생각과 달리 젊은 황제의······ 아니, 전두두의 눈가에서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보아서였다.
더도 덜도 않은 딱 한 방울이었다. 이 광경을 보게 된 범한은 참다못해 고개를 가로로 내젓기만 할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범한이 옆쪽을 한동안 뒤적이더니 옷에서 비단 손수건을 꺼낸 후 황제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눈물을 닦아 주었다.
젊은 황제는 순간 얼어버렸지만 이내 놀라운 속도로 차분함을 되찾았다. 그리고 맨살인 두 팔을 새하얀 옷 안으로 스르륵 집어넣었다. 어깨에는 여전히 검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 하지만 차분한 낯빛과 더는 요염하지 않은 표정, 여기에 담담한 눈동자까지 더하자 상경성에서만 볼 수 있는 고풍스런 느낌이 되살아났다.
그녀는 차분하게 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살짝 당황스러워 할 때 즈음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짐의 머리 좀 빗겨다오.”
말을 마친 황제가 몸을 돌렸다. 매끄러운 목, 가녀린 등, 칠흑처럼 검고 긴 머리카락이 범한의 눈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창산 나무로 만든 빗을 어디에서 찾아 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어느새 범한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 세계 여인은 시집간 다음날 새벽에 머리를 빗는 복잡한 의식을 치러야 했다. 부귀한 집에서는 당연히 보모나 지위가 높은 종이 그 일을 주도적으로 해주었다. 하지만 가난한 집에서는 시어머니가 직접 며느리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북제 젊은 황제는 평생 시집을 갈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니 여인의 몸으로는 비애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그녀는 이 야심한 밤에 범한에게 머리를 빗겨달라고 한 것이었다.
범한이 빗을 받아들고 천천히 팔을 움직였다. 그리고 일정하고 고르게 나 있는 나무빗 빗살이 칠흑 같은 머리카락 사이를 저절로 미끄러져 내려가도록 했다. 북제 황제의 머리카락이 점점 정갈하고 반듯하게 자리를 잡아갈수록 범한과 그녀의 마음도 점점 깨끗하게 정리되어갔다.
범한은 수도 놓을 줄 알고 머리도 빗겨줄 줄 알았으니, 그야말로 규방 내 최고의 사나이였다. 이윽고 범한이 황제의 머리를 다 빗겨 주었다. 그건 혼인을 안 한 여인이나 혼례를 올린 아낙의 머리 모양이 아니었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은은한 달빛에 기대어 황제가 한동안 거울을 바라보았다. 범한의 솜씨가 무척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머리를 빗는 동안 두 사람은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두 사람 다 마음이 무거웠다. 이제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아직은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한참 후, 범한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왜 저입니까?”
이는 오늘 일 때문에, 나랏일 때문에, 젊은 황제가 마지막에 취한 듯 건넨 말 때문에 물은 게 아니었다. 수년 전 여름 어느 날, 그 작은 사당에서 있던 일에 대해 물은 거였다. 북제 황족인 전씨 가문은 이제 1대가 내려왔을 뿐이었다.
공주 몇몇을 제외하면, 이 남장여자인 젊은 황제가 전부였다. 황족 내 장정이 전무한 상황에서 북제 황족의 혈통을 오랫동안 유지시키려면, 이 젊은 황제는 당연히 자신의 아이를 낳아야만 했다.
그러니 큰 모험을 불사하고서라도 그녀는 자신만의 아이를 낳아야만 했다. 이런 이유로 몇 년 전 여름날 밤, 해당타타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범한을 기절시켜 사당 안으로 들인 것이었다.
범한은 그저 어린 황제 전두두가 왜 자신을 씨내리할 대상으로 선택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종마(種馬)가 되는 걸 굴욕적으로 여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범한에게는 그런 느낌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어머니께서 여러 해 전에 비슷한 일을 했었던 것 같아서였다. 더군다나 종마로 선택되었다는 건, 당연히 말의 혈통이 지극히 좋고, 대단히 좋은 능력을 지녔다는 걸 의미했으니, 다른 형태로 인정을 받은 거 아닐까?
범한 앞에 앉아 있는 황제는 조용하기만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대의 머리도 흐트러졌구나. 짐이 빗겨주마.”
범한은 거절하지 않고 빗을 황제에게 건넨 후 침대 가장자리로 가서 조용히 앉았다. 젊은 황제가 침대 위에서 범한 등까지 무릎으로 걸어가 그의 머리를 빗겨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황제의 자세는 정말로 깜찍했다. 무릎을 바닥에 대고 범한 뒤에서 일어나 있다 보니, 몸이 살짝 밀착되어 영락없는 아내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놀림은 그다지 능숙하지 못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황제로 살아 손발 쓰는 일을 할 기회가 없다 보니 해본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머리 빗는 자잘한 일은 더더욱 해본 적 없는 거였다.
나무빗은 범한의 머리카락 사이를 원활히 내려가지 못했다. 건듯하면 막히고 머리카락을 당기는 바람에 범한은 그때마다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소리를 내서 티를 내지는 않고 그냥 묵묵히 있었다.
젊은 황제는 범한 등 뒤에서 무릎을 꿇고 진지하지만 서툴게 머리를 빗어 내려갔다. 그런데 그녀가 눈을 살짝 내리 깔고 범한 손 옆쪽 침대 가장자리로 시선을 보냈다. 그곳에는 침 몇 개가 단단히 꽂혀 있었다. 각기 다른 빛을 발하는 걸로 보아 어떤 것은 독이 발라져 있고 어떤 것은 독이 없는 거였다.
아까 서로 몸을 부대끼며 한창 다정하게 있을 때, 황제는 범한이 머리카락 속에서 이 물건들을 조심스레 꺼내는 걸 눈여겨 봐뒀었다.
지금은 범한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등만 볼 수 있는 상태였다. 범한에게 자신의 표정을 들킬 리 없자 젊은 황제는 안도감에 표정도 많이 편안해 졌다. 바로 이 순간, 황제의 눈에서 애정과 매혹된 기색이 옅게 흘러나왔다.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기는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이 젊은 남자를 향한 진짜 마음만은 여전히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 범한이 이해하지 못한 게 바로 이 점이었다. 왜 나를 선택한 걸까? 설마 이 어린 황제가 정말로 나를 좋아해서?
“그대는 혈통이 좋지 않은가.”
젊은 황제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의 이마 앞에서 앞머리가 가볍게 떨어지며 움직였다.
“이왕 아이를 낳는 거라면, 짐은 아이를 위해서라도 좋은 아비를 갖게 해주고 싶었다.”
“제 혈통이 어디가 좋다는 것입니까?”
범한의 머리카락 위에서 빗이 멈추어 섰다. 범한은 그걸 감지한 후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제 몸에 경국 황족의 피가 흐르고 있는데, 설마 그런데도 그 아이를 훗날 북제 통치자로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젊은 황제는 살짝 놀라는 눈치였다. 이에 서툴게 다시 빗질을 하기 시작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때 타타와 리리 그리고 짐까지 우리 모두는 그대가 경국 황제의 사생아인 걸 몰랐어.”
“그렇다면 저의 어디가 마음에 드셨던 것입니까?”
범한이 살짝 씁쓸하게 웃고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밝고 교활한 달빛의 힘을 빌려 자기 허리 옆에 와 있는 황제의 매끄러운 허벅다리를 바라보았다. 다리는 새하얀 옷에서 쭉 뻗어 나와 있었다. 그리고 등 뒤에서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게 느껴져 범한은 기분이 참 좋았다.
젊은 황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계속 범한의 머리를 빗겨주며 말했다.
“그대에게는 그 일을 계속 숨길 수는 없겠군. 굳이 말해야 한다면, 자네가 하늘의 자손이라는 혈통을 지녔기에 짐이 눈여겨봤던 건데, 말이 안 되긴 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