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531
872화 엄청나게 큰 나무 (2)
범한의 말에 사고검은 갑자기 차분해졌다. 그리고 한참 후 느릿느릿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 나는 그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간 건지 당연히 알 수 없었지······. 하나 나중에는 자연스레 천천히 알게 되었다.”
사고검이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윽한 눈동자로 범한을 주시하며 말했다.
“설마 오죽이 어디에서 온 건지 자네는 모르는 거였어?”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죽 아저씨는 괴물이었다. 늙지도 않고, 내공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는 좋은 사람이고, 대단히 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죽 아저씨는······. 범한이 잠시 씁쓸하게 웃었다.
“오죽 아저씨께서 신묘에서 나오셨다고 해도, 그렇다면 우리 어머니는요?”
“헛소리 같으니! 맹인은 모두 신묘의 사자니라. 자네 어머니는 그들의 주인이고, 그러니 당연히 신묘의 선녀인 게지. 그게 아니라면 어찌 자네 어머니 혼자서 이 세상에서 그리 많은 일을 할 수 있었겠느냐?”
사고검이 귀찮다는 듯 한소리 했다. 마치 범한이 그 문제에 대해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범한은 그게 쓸데없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시려 씁쓸하게 웃으며 모친인 섭경미가 분명 본인과 똑같이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영혼인데, 어떻게 신묘와 관계가 있을 수 있느냐고 속으로 반문했다.
범한과 사고검의 대화는 격해지고 기억을 더듬어 올라갈수록 탄식이 터져 나왔지만, 말소리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자제해 나무 아래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북제 젊은 황제는 두 사람 옆에 서서 조용히 모든 걸 듣고만 있다가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고 소매 속에 감춰진 손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이 큰 나무 그늘 아래에서 이렇게나 놀라운 비밀을 듣게 될 줄 생각도 못해서였다. 그녀는 범한에게 여러 가지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는 왜 이 세상에 등장한 초기부터 세인에게서는 보기 힘든 자신감과 광기를 보인 걸까? 왜 인간계 황제를 이렇게나 안중에 두지 않고, 사고검 같은 대종사과 대등하게 앉아 천하에 대해 맘껏 이야기하며, 모든 일을 자기 수중에 놓고 통제하려 드는 걸까? 그녀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이 궁금증에 대한 답을 명확히 알게 된 거였다.
젊은 황제는 범한의 어머니가 섭경미란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 맹인 대사가 있다는 것도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과거 섭가 아가씨와 맹인 대사가 뜻밖에도 경묘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건 그녀로서도 오늘에서야 안 사실이었다.
신묘란 무엇이란 말인가? 구천(九天) 구름 위를 떠다니며, 인간 세상의 괴로움을 냉랭하게 주시하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 신명을 조금도 보여주지 않고, 범속의 의지를 뛰어 넘는 상태로 있는, 그야말로 전설로만 전해지는 대지의 수호자였다. 그런데 그 누구도 신묘가 어디에 있는지, 신묘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신묘를 직접 본 고하 대사만 빼고 말이다.
고하는 신묘에서 사흘 동안 머리를 조아린 것으로 대종사의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크고 푸르른 나무아래에서 섭가 아가씨는 우연히 사고검을 만났고, 그때 코흘리개였던 나이 많은 백치는 검법으로는 천하무쌍인 일대 강자로 거듭났다. 또한 경국의 황제 폐하는······.
젊은 황제의 짧은 속눈썹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떨렸다. 북위 건국 이래로 지금까지 천하 만민은 직접 신묘를 보고 싶어 했다. 그리고 아무런 단서도 근거도 없는 가운데에서 천도(天道)의 그림자를 찾고 싶어 했다. 그래서 과거 북위 황제는 불로장생을 위해 수천 명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을 북쪽으로 파견해 신묘를 찾도록 한 거였다.
그런데 애당초 범한 뒤에는 신묘의 그림자가 있었다니. 북제 젊은 황제가 범한의 옆얼굴을 슬쩍 보았다. 그녀의 속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놀라 있었고 복잡한 상태였다.
* * *
범한이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입을 열었다.
“그 후의 일은 저도 조금 아는 것 같습니다. 모친 대인께서 동이성에서 몇 년 동안 생활하셨지요. 장사를 시작하셨는데 그것은 훗날 섭가가 되었고, 현재는 경국의 황실 금고가 되었고요.”
“어떤 일이든 커지고 확대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야.”
사고검이 하나 남은 팔을 번쩍 들더니 손가락 하나를 들어보였다.
“섭경미가 신선이라고 해도 그녀 역시 어쩔 수 없었어. 그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모든 걸 하려 했으니, 그녀에게도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야.”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사고검을 바라보았다.
“그게 대인이시라고요?”
“그래, 바로 나였다.”
사고검이 냉랭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나는 백치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성주부의 도련님이었다. 내가 성주부를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섭가라는 상점은 동이성 안에서 자연스레 제일 잘 나가게 되는 거였으니까.”
“이제 알겠습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이 큰 나무 아래에서의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결코 우연한 만남은 아니었던 거군요. 바꿔 말하면, 어머니께서 동이성으로 들어오시기 전에 성 안의 상황을 이미 다 알고 계셨던 거고, 그래서 대인을 선택하신 거였어요.”
“틀렸어. 우연한 만남은 정말로 우연한 만남이었다.”
사고검이 냉랭하게 말을 이어 갔다.
“적어도 나는 그리 생각하고 싶다. 만약 그녀가 협력자를 찾고 있던 거라면, 나보다 나은 사람은 넘쳐났다. 그녀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무수히 많은 재화를 끌어들일 수 있는 거였어. 그 맹인도 있었으니, 이 세상에 그녀를 대적할 적도 없는 거였고.”
“장사를 시작하기 전 몇 년 동안 세 분은 대체 뭘 하셨던 겁니까?”
범한은 화제를 돌려보았다.
“나는 계속 개미나 봤지. 그런 후 검을 연마했고. 그러다 어느 날 비개라는 그 독쟁이가 왔다.”
사고검이 하품을 했다. 오랫동안 옛 일을 떠올리고 있다 보니 정신적으로 좀 피곤했던 거였다.
“아,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적 있습니다. 평생 하신 일 중 제일 뿌듯한 게 동이성에 있는 백치를 치료해 대종사로 만드신 거였지요.”
범한이 웃기 시작했다.
사고검이 멸시하듯 웃었다.
“머릿속으로는 어떤 일을 하고 싶은데 쉬이 굼떠져서 그랬던 것뿐이다. 진짜 백치도 아니었는데 대종사란 괴물로 변한 게 비개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이냐?”
범한이 눈가에 웃음을 담고 말했다.
“그건 당연히 제 어머니와 관련이 있는 거겠죠?”
사고검이 한동안 침묵하고 있다가 웃기 시작했다.
“자네 어머니는 천일도 무공을 고하에게 전수해 주었어. 물론 검법은 나에게 전수해 주었고······. 하나 내가 천재였던 거야. 자네 어머니의 검법은 아무 쓸모가 없었어. 진짜 쓸모 있는 건 훗날 내 힘으로 깨우친 거였으니까.”
“음, 대인께서는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자아도취적인 분이시군요.”
범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는 이 대종사의 말이 사실이란 걸 알고 있었다. 사고검결은 섭경미가 과거 신묘에서 훔쳐 온 공결 중 하나였다. 하지만 범인이 종사의 경지까지 오르려면 일단 대단한 천재여야 하고, 또한 의지가 강하고, 운이 좋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거였다.
“천재에는 여러 뜻이 담겨 있지.”
사고검은 언제든 눈을 감아버리고 다시는 뜨지 않을 것처럼 눈꺼풀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자네 어머니가 그러더구나. 나의 천재성은 집중과 냉랭함이라고.”
“개미가 움직이는 걸 10년이나 보고 있는 사람은 쉬이 볼 수 없다고 했어.”
사고검이 쉰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몇 만 마리의 개미를 가느다란 나뭇가지로 일일이 하나씩 죽이는 백치는 더더욱 찾기 힘들다고 말이다. 자네 어머니와 오죽을 만났으니, 나는 운이 좋았던 거다. 자네 어머니도 동이성에서 나를 만났으니 운이 좋았던 거고.”
범한은 오랫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속으로 방금 전 사고검에게서 들은 말을 음미해 보았다.
‘수십 년 전 대륙에서 거대한 바람과 구름이 일었고, 그때 셀 수 없이 많은 천재와 재주꾼이 쏟아져 나왔어. 고하처럼 굳센 의지를 지닌 사람, 사고검 같은 엄청난 백치, 황제 폐하처럼 참는 데는 도가 튼 사람. 모두들 그때 나타났지. 그런 후 섭경미가 오죽 아저씨를 데리고 신묘에서 도망쳐 나와 이들을 만난 거야.’
경지며 행운을 떠나 재능과 의지만 놓고 보면, 대종사가 되지 못한 지금의 강자들은 그들과는 비교 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 그러니 해당타타는 실격이었다. 그녀의 사부는 인육까지 먹었으니까. 범한도 실격이었다. 그의 황제 아버지는 경맥이 모두 부서지는 최상의 통증과 절망을 견뎌낸 거였으니까. 왕 십삼랑 역시 실격이었다. 그의 검성 사부는 사람의 목숨 따위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지 않던가. 그러니 지금의 젊은 인재들은 모두 스승만 못한 결함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 차이란 게 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이고,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메울 수 있으며, 또 그것을 이룬 후 과연 하늘과 사람 사이의 막을 뚫고 뛰어넘어 진정한 대종사가 될 수 있는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게 인연이었군요!”
범한이 사고검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사고검이 기괴한 표정으로 범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배우고 싶냐? 배우고 싶거들랑 언제든 말하거라.”
범한은 심장이 오싹했다. 이 검성이 지금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지 알거 같아서였다. 이에 범한은 저도 모르게 씁쓸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미 알고 있으실 것 같은데요. 저는 이미 그걸 할 줄 압니다.”
사고검이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말한 건 제대로 된 사고검이다.”
* * *
범한은 심장이 떨려 일단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다를 게 없습니다. 관건은 사람이지 않습니까. 저희 세대 젊은이들은 대인 세대만 못합니다. 물론 어쩌면 그 차이란 게 천천히 줄어들 수도 있겠지요. 하나 신묘에 있는 걸 모두 제 앞에 옮겨다 놓았는데도 제가 완전히 연마하지 못하면 어쩝니까?”
범한은 무한히 감동을 받기는 했다. 어머니께서 과거 신묘에서 훔쳐온 공결들은 지금 보니 이들 대종사에게 전수되어 있었다. 유래가 명확하지 않은 섭류운의 류운 산수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이미 그와 같은 사실이 충분히 증명된 거였다.
신묘 밖에서 고하는 고작 네 살밖에 안 된 섭경미를 구출했다. 그때 중상이라는 대가를 치렀고, 그 후 섭경미에게서 보상을 받았다. 바로 오늘날 천일도의 무상 법문(無上法門)이었다.
사고검의 검법은 비록 그 스스로가 최상의 정신력과 치기(痴氣)로 깨달아 얻은 것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커다란 푸른 나무 아래에서 우연한 만남이 없었더라면, 백치는 그냥 백치로 남았을 게 분명했다. 그러면 자극을 받지 못했을 터이니, 어찌 위로 도약할 수 있었을까?!
줄곧 범한 곁에 있던 누런색의 작은 책자의 경우, 상편은 ‘패도(覇道)’ 하편은 ‘왕도(王道)’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20년 동안 이 책을 지니고 있던 범한으로서는 이것이 과거 어머니께서 황제 아버지께 준 것임을, 그리고 이후에는 어찌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황제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남겨준 것임을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패도의 공결은 범한에게 좌절감을 안겨주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왕도의 경지로 들어설 수 없어서였다. 그리고 범한은 천일도의 정기 법문(法門)을 익히게 되었지만, 질적인 면에서 도움을 받은 건 없었다. 그러니 사고검이 정말로 지금 사고검 검법을 자신에게 전수해준다 하더라도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섭경미가 이 세계에 뿌려 놓은 혜택이 점점 범한에게 모이기 시작한 거였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는 하나가 더 늘어난다 해도 아무 쓸모도 없을 것만 같았다.
“섭경미는 당시 동이성에서 하늘을 뚫고 올라가는 푸르른 나무로 자라났어. 그리고 나는 쥐고 있는 검으로 동이성에서 지위를 차지한 후 섭경미라는 커다란 나무를 위해 옆에서 벌레를 잡아주는 동료가 되었다.”
범한이 웃으며 하늘 높이 치솟은 푸른 나무 아래로 걸어가 나무줄기를 가볍게 토닥였다.
“지나치게 욕심 부리다가 감당 못하게 되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대인께서 가르쳐 주시겠다 하니, 내키지 않아도 배워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