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533
874화 눈 깜짝할 사이 (2)
옷을 벗자 범한은 우레에 심장을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몸에서는 갑자기 땀이 흘러나와 옷이 모두 젖어버렸다. 범한에게는 아주 익숙한 말이었다. 왜냐하면 다섯 경전에 속하는 《숙어록(宿語錄)》에 등장하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고하 대사의 조사(祖師)인 근진 대사가 깨달음을 얻을 때 ‘사람의 신체는 겉껍질일 뿐이니, 벗어버리면 큰 도를 이룰 수 있다.’에서 나온 말이었다.
담주 절벽에서 패도 공결을 수행하다가 가장 중요한 관문에 봉착했을 때였다. 오죽 아저씨가 범한의 머리와 심장에 정체된 걸 풀어주기 위해 막대로 때리면서 외친 말이기도 했다.
그러다 오늘 범한은 생각지도 못하게 사고검 입에서 같은 말을 듣게 된 거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하늘의 뜻이 그 말 속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범한에게 확실히 알려 주려는 것만 같았다. 아울러 그에게 신비해서 측정 불가능하고 지극히 매력적인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려는 것만 같았다.
대종사 사고검은 말을 마친 후로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크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차분히 침묵만 지켰다.
범한은 온통 땀투성이가 되었다. 그래서 은연중에 자신이 무언가를 깨달았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사고검의 말이 진짜이고 옳다는 건 알았지만, 다만 그 법문이란 게 너무 뜬구름 같은 거라 어떻게 찾을 방도가 없었다.
제일 관건은 이 유심론적인 설법이 그가 어려서부터 수행한 패도공결과 완전히 다른 방법이란 거였다. 인체라는 다리를 안 쓰고, 설마 마음만으로도 이 실제 하는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건가?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 만물과 다른 게 있다면 그건 뭘까? 마음이란 두 글자는 사람과 만물의 영(靈)이니, 말도 하고 생각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꽃을 보면 즐겁고, 꽃이 지면 슬프고, 또한 달이 차면 달이 이지러지는 것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천지가 영원하다 하여 고단하게 느끼고, 만조가 되고 간조가 되는 것에서 인생 무상함으로 인한 적적함을 느끼게도 만드는 것 역시 마음이다.
땅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노인들도 그림자 연극이 주는 즐거움을 알고, 노비도 반랑과 함께 오랫동안 자고 싶고······. 이런 것은 모두 본능에서 오는 쾌락이다. 그런데 쾌락도 본능이나 물질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간악하기 짝이 없는 권신이 오히려 하루 종일 차분하게 앉아 중간 족자 크기 되는 글 한 폭을 써 놓고는 한동안 득의양양해하며 자신에게 감동해 눈물 콧물을 질질 짜기는 게 그런 것이다.
사람보다 복잡한 생물은 없다. 오로지 사람만 풍부한 감정, 일시적이거나 잊히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거다. 그리고 천지가 싸늘하게 변하고 중생이 죽어 없어지는 걸 보았을 때 천지간을 둘러보고 은근히 마음으로 소통하는 것도 사람뿐이다.
범한의 몸에 흘렀던 땀이 점점 말라갔다. 범한은 이와 같은 경지가 어떻게 사람을 진심으로 감탄하게 만드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경지는 이루고 싶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은 더 잘 알고 있었다. 범한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진정한 사고검 검법은 검을 쓰지 않아도 되는 거군요······. 저를 어찌 가르치신 것입니까?”
“법문은 두 귀로 전달하는 게 아니며, 전달하기를 바라지 않으면 실제로는 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사고검이 침묵을 깨고 싸늘하게 말을 이어 갔다.
“자네는 오늘 나와 함께 동이성에서 한가롭게 거닐어 보았다. 나는 자네에게 보여주기만 할 수 있을 뿐. 그러니 얼마나 깨우치는 가는 모두 자네 하기에 달린 거지.”
범한이 간절한 모습으로 인사를 올렸다.
“제가 모시고 가고 싶습니다.”
두 사람 옆에서 두 눈을 감고 있던 젊은 황제의 눈꺼풀이 빠르게 떨렸다. 늙은이와 젊은이가 오늘 나눈 대화 내용을 단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고검은 두 젊은이가 무슨 생각중인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범한에게 자신의 바퀴 달린 의자나 밀라는 의사 표시를 하고는 커다란 푸른 나무 아래를 떠나 동이성 내 번화가 쪽으로 향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사고검이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던 순간이었을 수 있다. 크고 푸르른 나무 아래에 있던 행인과 여행객들은 깜짝 놀라 일찌감치 사방으로 흩어지고 없었다. 그래서 세 사람이 떠난 나무 아래는 정적만이 흐르고 은은한 그림자만 나무 아래 땅을 덮고 있을 뿐이었다.
‘훅-’ 하는 소리와 함께 해풍이 불어왔다. 그리고 커다란 푸른 나무 아래로 갑자기 푸른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나뭇잎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두 개의 구멍이 나 구멍 사이로 새파란 하늘이 보였다. 마치 신의 눈빛이 어느 순간 하늘 위를 잠시 담담하게 훑어 본 것만 같았다.
* * *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걷다 보면, 그 안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했다.
범한과 젊은 황제가 사고검이 앉아 있는 바퀴 달린 의자를 밀고 큰 나무 아래를 조용히 떠났다. 이들은 길게 뻗은 직선의 길을 따라 동이성 안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 걸어갔다. 아까 커다란 푸른 나무 아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여행객들은 일찌감치 놀라 흩어지고 없었다. 이에 앞서 여행객들이 본 광경은 천천히 사람들 귀로 전해지고 있었다.
이때,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몸이 성치 않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챈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사고검은 동이성의 신이라 자연스레 평범한 사람들과는 별로 접촉하지 않았던 터라 거리의 행인들은 이 세 사람의 조합이 조금 기묘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잘생긴 두 젊은이와 바퀴 의자에 앉아 있는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은 행인들에게도 물건을 사고팔러 온 상인이나 손님도, 동이성을 동경해 찾아 온 여행자로도 안 보였다.
범한은 사람들의 눈빛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차분하게 바퀴 달린 의자나 밀 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눈빛은 자연스레 사고검 어깨 위와 뒤통수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편 그의 머리는 앞서 커다란 푸른 나무 아래에서 들었던 종사의 경지에 대해 꼼꼼하게 되새김질 하고 있었다.
범한은 배움을 좋아했다. 과거 소은을 북제로 돌려보낼 때에도 그에게 조정 일과 관련한 가르침을 구하는 걸 잊지 않았었다. 비록 범한과 사고검 사이에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은원이 있고, 둘의 관계는 정말 복잡하면서도 대단히 미묘했지만, 그래도 대종사가 자신에게 경지란 것에 대해 알려주고 자세히 연구할 기회까지 주자 범한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사고검의 행동 이면에 흉악한 살의가 숨어 있다 하더라도 범한은 이번 배움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동이성에서 고작 하루만 지낸다 하더라도 범한은 사고검을 진정한 스승으로 대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었다.
세 사람 중 처지가 난처한 건 북제 젊은 황제뿐이었다. 그녀는 사고검의 손님인 것 같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범한 수중에 있는 인질이었으며, 지금은 순수한 여행의 동행자일 뿐이었다. 그녀는 범한과 사고검이 침묵 속에서 마음으로 소통하는 걸 느낄 수도 없었다. 이에 난처한 기분으로 조용히 옆이나 지키고 있었다.
커다란 푸른 나무를 떠난 후 사고검은 더는 그 현묘한 말들을 하지 않았다. 범한도 더는 그에게 진지하게 가르침을 구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앞서 이야기 나누었던 걸, 그리고 하려고 했던 걸 잊어버리고 차분하고 자유롭게 동이성 번화가나 거닐었다. 주변 행인들이 자신들을 주시하고 수근 대도 신경 쓰지 않고 그들 사이를 걸었다.
사고검이 말했던 것처럼, 어떤 많은 일들은 직접 깨달아야 하고 말만 가지고는 알 수 없는 거였다. 그렇다면 말을 많이 해봤자 도움될 건 없는 거였다.
걸은 지 한참이 지났을 때였다. 범한은 그제야 젊은 황제가 불편해 한다는 걸 눈치 챘는지 미소 지은 얼굴로 그녀를 잠시 바라보며 부드럽게 몇 마디 말을 건네주었다. 그러자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던 황제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고검이 두 후배를 데리고 오래되고 낡은 건물로 왔다. 이곳은 여러 해 전 섭가가 태어난 자리였지만, 일찌감치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여기가 과거에 천하제일 상인이 살았던 자리임을 알지 못했다.
범한은 사고검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 하고, 어떤 영향을 미치려 하는지 알고 있던 터라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과거 섭가의 유리 거리에 도착하자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인께서는 훗날 동이성의 수호자가 되셨는데, 왜 섭경미를······ 우리 어머니가 오죽 아저씨와 함께 떠나시도록 내버려 두신 건가요?”
범한은 그와 관련한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섭경미와 종인 오죽은 동이성을 떠난 후 주변에 있는 제후 소국으로 가지 않았다. 동이성 남쪽과 담주성 북쪽 사이에 있는 원시 산림과 험준한 절벽 사이에 난 길을 어떻게 알아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들은 곧바로 담주로 갔다.
그 길은 양의 내장처럼 복잡했고,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처럼 가팔라서 걸어가기에는 정말 힘든 곳이었다. 그런데도 연소을은 3년 전 대동산 사건에서 그 길을 이용해 5천의 병사들을 몰래 데리고 들어와 대동산을 포위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경국도 동이성도 자연스레 그 비밀 통로에 대해 무궁한 관심과 경계심이 생겼고 그 결과 양측은 길 양 끝에 병사들을 배치해버렸다.
범한은 그 길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과거 섭경미가 왜 동이성을 떠나야 했는지만 궁금했다. 왜냐하면 섭경미가 담주 해변에서 황제 폐하, 부친 대인, 진평평 그 늙은이를 만나 경국 4인방으로 빛나는 생애를 시작한 때문이었다.
“그때는 내가 막 성주부를 차지하고, 검려를 열었던 때였다.”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는 사고검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냉담한 말 속에 억누르지 못한 분노가 섞여 있었다.
“하나 자네 어머니가 떠난 건 내가 강대해지는 것과는 무관했어. 고작 동이성 하나가 강대해 지는 것과는 무관했지······. 그녀는 야심이 컸어. 큰일을 하려 했지. 그러려면 더 큰 세력에 기대야만 했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 일을 벌일 수 있었거든.”
사고검이 고개를 돌려 범한을 잠시 바라보고는 찬바람이 쌩쌩 돌게 말을 이어 갔다.
“그녀가 보기에, 동이성은 자신의 생각을 지지해주기엔 힘이 모자란 곳이었어.”
범한은 조용히 의자나 밀었다. 속으로는 섭경미가 왜 그랬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섭경미는 세상 사람들의 질곡을 안타까워했고, 그 때문에 동이성에 있을 때 세상으로 들어갈 결정을 내린 거였다. 일찌감치 무한한 빛을 뿜어냈던 이상주의 여인이니 분명 그 일을 더 완벽하게 실천할 방법을 찾았던 것이다.
동이성은 바다와 맞닿아 있어 천하의 재화와 부가 모이기는 했지만, 이곳은 과거 북위의 속지일 뿐이었다. 즉 대륙에서는 그다지 눈에 띄는 위치는 아니었던 것이다. 가장 관건은 동이성 사람들이 상업을 업으로 삼아 총명하기가 이를 데 없었지만 집념이 살짝 부족하다는 거였다. 그래서 큰 국면을 만들고, 자신의 이념으로 온 천하에 영향을 미치고 싶다면 동이성은 의심할 여지없이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왜 북제로는 가지 않은 거지? 과거 북위를 이어 받았는데 말이지.”
줄곧 침묵하고 있던 북제 젊은 황제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러자 범한과 사고검이 동시에 그녀를 쳐다보았다. 황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탄식을 했다.
“짐도 하루 종일 벙어리처럼 있을 수만은 없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