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536
877화 검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니 마음만 아득하여라 (2)
범한이 바퀴 달린 의자 등받이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돌계단 위의 고요함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처참한 비명 소리가 잦아들고 있었지만, 그는 그냥 망연자실한 상태로 있기만 했다. 드디어 사고검의 종사 경지를 실감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는 종사의 경지로 들어서는 방법을 찾은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자신은 영원히 할 수 없는 방법이기도 했다.
세간의 풀 한 포기 돌 하나, 꽃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는 모두 그만의 생존의 도가 있는 법이다. 그러니 사람에게도 모두 그만의 도가 있는 것이었으니, 경계를 뚫고 종사의 경지에 닿기 위해 범한은 자신에게만 속한 진정한 법문을 찾아야만 했다.
* * *
바로 이때,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있던 사고검이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그의 자그마한 몸이 의자에서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러자 의자를 받치고 있던 범한의 손도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돌계단에서 일렬로 늘어서 있던 성주부 고수들은 이 광경을 보자마자 하늘을 가득 메운 검은 그림자로 변했다. 모두 7개의 방향에서 독수리가 사냥감을 덮치듯 바퀴 달린 의자를 덮쳤다.
기침은 기회이자 암호인 것만 같았다. 이에 성주부의 고수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공격력을 폭발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동이성 백성들은, 특히나 해변에서 검을 연마하는 강자들을 포함한 모두는 검성 대인을 격퇴시킬 수 없다는 사실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수십 년 동안 신의 빛을 받아온 사람들이어서 자신이 그 신을 죽이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최후의 도박을 해야만 했다. 검성 대인이 분명 기침을 했기 때문이다. 기회일 수도 있고, 기회가 아닐 수도 있었지만, 결국 죽는 거 대종사의 손에 죽을 수만 있다면 그 역시 그들에게는 영광이었다.
사람의 형체가 도착하기도 전인데 거센 바람이 먼저 덮쳐왔다. 성주부에 있던 고수들은 의자 뒤에 서 있는 두 젊은이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이 두 젊은이가 일찌감치 벗어나기 힘들 정도로 정신적인 곤경에 처해 있음을 알아차려서였다.
하지만 범한은 달리 생각했다. 만약 죽음을 앞두고 가장 장렬한 일격을 퍼붓는 고수들과 맞닥뜨린 거라면, 어쩌면 자신에게는 반격할 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때 사고검은 여전히 의자에 웅크린 채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그의 하나 남은 손은 입을 가리고 있었으며, 옆에는 검도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사고검은 손짓을 해 지면에 있는 검 한 자루를 움직였다. 그러자 검이 번갯불 치듯 재빨리 날아와 그의 손에 착지했다.
사고검이 검을 휘둘렀다. 둥글게 원을 그리듯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일곱 개의 산봉우리를 오르내리듯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러자 바깥쪽에 있는 나무의 수피가 갑자기 찢어지고 아래쪽에서 바늘 모양으로 기이하게 솟아 있는 암석이 드러났다. 그 암석은 하늘에 일곱 개의 구멍을 뚫어 놓을 듯한 기세였다.
성주부에 남아 있던 최후의 일곱 고수가 목숨을 걸고 장렬하게 공격을 해 왔다. 그러자 사고검은 검을 대충 휘둘렀다. 장렬함 속에 들어 있는 냉혈한 흡혈 의지를 거둬들이면서 그 순간 검을 네 번 찌르는 동작을 한 거였다. 그런데 이 사검(四劍) 동작은 일곱 개의 방향을 찌른 것이었다.
그야말로 세속의 경지를 뛰어 넘은 검 놀림이었다.
그 안에는 앞뒤 재지 않는 기세가 들어 있었다. 한편 기세 뒤에는 기세를 초탈한 무상(無上)의 의지가 숨어 있었다. 그래서 냉담하기에 시원시원했고, 피를 원하고 있는데도 담담했다.
사검으로, 즉 검을 네 번 찌르는 동작으로 일곱 명을 맞추니, 고수 일곱은 순식간에 땅으로 추락해 소리도 내지 않고 숨도 쉬지 않았다.
이어 사고검이 소매 자락을 한 차례 털었다. 그러자 평범한 강철 검이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 동이성 성주의 가슴으로 향해 칼자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박혀버렸다.
사고검이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성주부로 들어오자 동이성 성주는 해명 한 마디도 못하고 탄식도 내뱉지 못했다. 단지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며 죽음이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는 먼 친척 아저씨가 검려에 직접 행차하셨으니 자신은 죽음 목숨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친 대종사에게, 피를 갈구하는 검성에게, 자신의 친족도 무정하게 도륙해버린 괴물에게 성주 대인은 그 어떤 감정도 없었다.
성주는 피를 토했다. 그리고 자신을 떠나가고 있는 생명을 느끼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죽음을 앞둔 찰나, 어쩌면 그에게는 이건 아니라는 생각과 원망이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경국 황제가 여러 해 전에 가졌던 원망처럼, 이 세상에는 대종사가 존재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이 세상은, 너무 비합리적이었다.
범한은 사고검의 공격 동작을 시종일관 진지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성주부로 들어온 후 그가 손에 검을 들고 제대로 펼친 첫 번째 공격이기 때문이었다. 범한의 눈은 민첩하고 예민했다. 그래서 마지막에 사고검이 검으로 네 번 찌를 때의 방법과 손이 나간 궤적을 포착해 내고는 어마어마하게 놀라고 말았다.
이제 보니,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사고검(四顧劍)이었다. 그것은 하늘을 나는 새와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를 닮아 움직임과 멈춤 사이에 아무런 예고 동작이 없었으며, 단지 마음에만 의지해 검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뒤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본다거나, 본질은 무시한 편벽됨에서 나오는 장렬함은 아니었다.
‘깔끔하고 수려하고 냉혹함이 극에 달한 사검(四劍)이 있어, 일고(一顧: 한 번 뒤돌아 보다, 여기에서는 한 번 신경 써서 검을 휘두르다의 뜻도 있다)하니 성이 무너지고, 이고(二顧)하니 나라가 무너지네. 하여 삼고(三顧)에 빈번히 천하 계책을 세워보지만, 출사한 영웅들은 외려 눈물로 소맷자락이나 가득 적신다지. 검을 뽑아 사고검(四顧劍: 네 번 신경 써서 검을 휘두르다)하니, 마음만 망연자실하게 하여라. 앞으로는 옛 사람이 보이지 않고, 뒤로는 새로 오는 사람 없으니, 아득한 천지를 바라보며 비애 속에 홀로 눈물만 흘리노라!’
* * *
소주성에서 섭류운은 검으로 건물 반을 날려버렸다. 이에 범한은 그날 본 검술이 세상에서 최고의 경지일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사고검이 검을 쓰는 걸 통해 그는 이제야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 원래 살인 무기인 검은 마음과 합일을 이룰 때 강력한 상징성을 지니는 거였다. 세상에 마음이 가장 빠른 표현 방식이기 때문이다.
즉 마음이 닿는 곳에 칼끝이 닿는 거였다.
천지의 일상적 이치에 역행하는 검법은 천지간에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어서, 검을 다루는 자도 어쩌면 겁을 먹고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검을 다루는 자도 자신이 어떻게 그러한 검법을 쓸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를 수 있었다. 그러니 검객은 검을 휘두른 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검을 손에 쥔 채 망망한 황야를 이리저리 바라보며 아득하게 멍하니 있을 수 있는 거였다.
즉 사고검의 진정한 의의는 애당초 마지막까지 아득하고 멍한 거였다.
범한의 손은 젊은 황제의 팔을 잡고 부축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이러한 검법에 대해 깨닫게 된 게 그에게는 행복이면서 동시에 고통이었던 것이다.
성주부 옆에 있는 이름 모를 푸른 나무 위에서는 하루 종일 까마귀 한 마리가 몸을 웅크리고 이 광경을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그런데 의지가 천지간에 가득 들어차자 더는 견디지 못하겠는지 ‘구우’ 하는 소리와 함께 속히 달아나 버렸다.
사고검 눈에는 온통 냉랭함뿐이었고, 입가에는 기침할 때 나온 피가 묻어 있었다. 낯빛은 소름끼칠 정도로 새하얗게 보였으며, 웅크리고 있는 작고 마른 몸은 바퀴 달린 의자 안에 폭 들어가 있었다. 그의 뒤에는 젊은이 두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아득한 모습으로, 다른 하나는 엄숙한 모습으로 있었으며, 그들 옆은 시체들이 나뒹구는 피바다였다. 범한이 고개를 숙였다. 마음속에서 괴이한 생각이 퍼뜩 들어서였다. 마치 바퀴 달린 의자에 있는 이 대종사가 이제 곧 기름이 다 떨어진 등불이 되리란 걸 감지한 것만 같아서였다.
왜냐하면 그가 최후의 검을 뽑아 들어서였다. 이 사검(四劍)은 우아하면서도 냉혹함이 극에 달해 있기는 했다. 하지만 3년 전 대동산에서 그가 호위 백 명을 단번에 해치워버린 것에 비하면, 오늘 사고검 검법은 확실히 많이 약해져 있었다.
바로 이때, 동이성 성주의 시신이 천천히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시신이 바퀴 달린 의자 앞에 무릎을 꿇는 모습은 마치 그가 신하로서 마지막 복종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범한이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그리고 성주의 시체가 엎어질 때 세 사람 앞에 나타난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을 경악한 모습으로 쳐다보았다.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 손에도 검이 들려 있었다.
검은색 옷을 입은 사람은 그림자였다. 당연히 그림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림자와 범한은 아무도 모르게 동이성으로 들어왔다. 감찰원 부하들과 함께 모든 사유를 적절히 꾸며낸 후 몰래 빠져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범한이 검려로 들어올 때 그림자는 그곳에 없었다. 감찰원 6처 수뇌가 사고검을 보는 순간 어떤 행동을 할지 범한은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런 그림자가 갑자기 성주부에, 그것도 성주의 시체 뒤에서 나타난 거였다.
사고검은 오늘밤 성주부에 있는 사람들을 또 모두 죽이는 중이었고,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이 죽고 살고를 떠나 사고검의 육신이 존재하고 태양 아래에로 그림자가 지는 한 그 음영 안에는 그림자가 숨어 있는 거였다.
대종사의 감지 능력을 속일 수 있고, 세 사람 앞에 갑자기 나타날 수 있고, 사고검의 가장 약한 순간을 포착해 낼 수 있는 자. 바로 천하 제일자객인 그림자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는 자신이 갈고 닦은 경지를 오늘 최고로 끌어올린 상태였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고검은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하고 있었다. 살짝 웅크린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낯빛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검으로 일곱 명을 베어버린 건 중상을 입은 후 억지로 3년을 버틴 대종사를 피곤하게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정신력을 제일 많이 소모시키고 있는 건 의자 등받이에 있는, 그러니까 패도의 정기를 주입하고 있는 범한의 손이었다.
성주부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범한은 사고검에 반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고검은 강하고 사나운 기세로 범한의 생각을 강제로 억눌러야 했다. 현재 범한은 어찌되었든 9등급 상의 강자였다. 그래서 사고검은 살인을 하는 것 말고도 범한의 정신을 통제하는 데에도 신경을 써야 했고, 결국 시간이 길어지자 사고검의 몸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에게 제일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는 건 3년 전 대동산에서 입은 상처였다. 섭류운의 구름에서 튀어나온 용의 발톱과 같은 공격, 그리고 경국 황제의 하늘을 뚫고 땅을 가를 왕도(王道)의 살권(殺拳) 공격이 사고검을 중상에 이르게 해서였다. 그리고 그 후 사고검은 겨우 목숨을 부지해 오다가 이제는 기름이 거의 다 떨어진 등불이 된 상태였다.
그래서 그림자는 지금 이 순간 공격에 나선 것이었다. 가장 유리한 때를 고른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