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54
053화 호수 맞은편
처음 시 모임에 참석해 잘 모르는 범한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는 좌석들 가운데 자신의 성격과 어울리는 구석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러고는 앞에 놓인 술을 따라 홀짝이며 주변을 살폈다.
귀족들이 서로 인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 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늘 햇볕이 너무 뜨겁지 않아 다행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녀도 보이지 않는 지루한 시 모임에서 햇살을 받으며 쓸데없는 공론을 듣고 있자니 마치 자신이 노릇노릇 구워지는 닭처럼 느껴졌다.
편한 대로 중앙을 둘러싸고 앉은 문인 중 구석에 앉은 범한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따금 가까운 자리에 앉은 귀족 자제들이 그를 발견하고는 세자가 직접 맞이한 이유가 궁금해 예를 갖춰 인사하며 배경을 알아보려 할 뿐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말은 제대로 하지 않고 그저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름다운 청년이 어느 집 자제인지 알지 못한 채 몇 마디 하고는 흥미를 잃고 떠났다.
그러던 중 시 모임이 시작되었다.
며칠 전보다 햇살도 부드럽고 바람도 시원했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봄바람은 겨울바람처럼 매섭지 않고 포근했다. 마침 낮잠 자기 딱 좋은 시간이라 졸음이 몰려왔다. 하지만 체면상 졸 수는 없었기에 범한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자꾸 내려오는 눈꺼풀과 사투를 벌였다. 술을 홀짝이며 들려오는 시에 집중하려고 해봤다. 하지만 봄바람은 너무 포근했고 햇볕은 따뜻했다. 더구나 시 모임은 지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결국 범한은 졸음을 못 이기고 스르륵 잠들고 말았다.
그렇게 얕은 잠에 들어 있는데 시를 읊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속에서 뢰주에 가니 또 만나는구나. 산인도 아니면서 높은 곳에 앉아 나를 비웃네.”
이어서 다른 문장도 들렸다.
“술잔은 깊고 조롱박 안에 담긴 술은······.”
“동이 사람이 몰락하여······.”
사람들이 읊는 시를 들으며 범한은 잠에서 깨려고 허벅지를 꼬집었다. 비록 시를 짓는 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런 자리에서 지난 16년 동안 버리지 못한, 이전 세계에서의 제멋대로인 성격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이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주변 사람들을 살펴보던 그의 눈에 가장 편안한 호숫가 자리에 곽보곤과 하종위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범한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정왕 세자는 술집에서 일어난 싸움을 알면서도 양쪽을 모두 시 모임에 초대한 건가.’
호수를 바라보고 있던 곽보곤이 우아한 풍채를 뽐내며 고개를 돌려 범한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그 순간 범한과 눈이 마주친 그가 정색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무의식적으로 살랑살랑 흔들고 있던 부채를 탁자에 내려놨다.
당시 태학생 중 한 명이 경서를 해설하고 있었기에 아무도 곽보곤의 행동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잠시 뒤 같은 탁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굳어 있는 곽보곤을 발견하고는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순간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는 범한을 발견한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호위병도 없는 상황에서 범한이 주먹을 휘두르면 어떻게 하나 생각하며 겁을 먹었다.
그런데 걱정과는 다르게 범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호숫가에 앉은 사람들은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상의하더니 곽보곤과 함께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옆에 앉은 하종위만 굳은 표정이었다.
그때 흰 천에 가려져 안이 보이지 않는 맞은편 정자에서 여자들이 쓴 시를 보내왔다. 아직 남자들은 시를 쓰지도 않은 상황에서 여자들이 쓴 시가 도착하자 정왕 세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비록 여인들은 남자처럼 수염은 나지 않지만 문학에서만큼은 무서운 실력을 갖추고 있군요. 자, 모두 분발합시다. 연약한 여인들에게 져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모두가 한목소리로 호응하며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바로 그때 곽보곤이 탁자에 앉아 있는 문객들과 눈을 맞추고는 두 손을 모아 정중히 인사하며 말했다.
“제가 학식이 없어 호수를 주제로 어떤 시를 써야 할지 모르겠군요.”
“오늘 푸른 물결이 아름다우니 이것으로 시를 쓰시지요.”
누군가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좋군요. 아니면 호수와 산이 어우러진 경치를 쓰심이 어떠합니까?”
다른 사람이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하며 말했다. 곽보곤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다 범한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범씨 자제분께서 오늘 시 모임에 참석한 것은 몰랐네요. 먼저 써보시겠습니까?”
범한은 경도 자제들 앞에서 두각을 드러내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이곳에 오긴 했다. 하지만 시를 쓸 생각이 없었기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에게는 그럴 만한 솜씨가 없으니 여러분께서 먼저 써보시기 바랍니다.”
범한이 한 발짝 물러서자 곽보곤은 속으로 실력이 형편없어 피하는 거라 확신했다.
“지난번에 학식 있다 알려진 인재들을 무시하며 장광설을 늘어놓으시길래 가르침을 받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도도하게 거절하시는 걸 보니 과연 저희 같은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을 만큼 안목이 높으신 것 같습니다.”
곽보곤의 비꼬는 말투를 들은 사람들은 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아 시를 핑계로 트집을 잡으려 한다는 걸 눈치챘다. 범한이 누군지 모르는 문객들은 세자와 친한 걸 보고 범씨 가문의 자제일 거라고만 추측할 뿐 그가 사남 백작 범건의 아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옆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곽보곤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는 말했다.
“범씨 자제께서 최근 경도에 오셨다는 것은 모두 아시겠지요?”
그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 바보가 아니기에 곽보곤의 말에 담긴 뜻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순간 범한의 신분을 알게 된 사람들의 시선이 차갑게 변했다. 놀라움과 경멸이 뒤섞인 복잡한 눈빛이었다.
곽보곤의 말에도 범한은 흔들림 없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고집스럽게 시를 쓰지 않고 가만히 있는 범한의 얼굴을 지켜보던 정왕 세자의 눈빛이 빛났다. 세자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시는 쓸 마음이 있을 때 쓰는 것이요. 범씨 자제분께서는 쓸 마음이 없으신 것 같으니 다른 분께서 먼저 써보시지요?”
범한은 의자에 반쯤 기대앉아 문객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읊는 시를 들었다. 아무 의미 없는 볼품없는 시를 듣자니 너무나도 지루했다. 그러던 중 옆에 있던 문객이 비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백작가 아가씨께서는 시를 잘 쓰기로 명성이 자자하신데 범씨 자제분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니 의외입니다.”
곽보근이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같은 집에서 자라지 않았으니 같을 수가 없지요.”
작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모두가 그 말을 들었다. 경국은 비록 개방적인 나라이긴 하나 서자에게만큼은 엄격했다. 이에 모두가 범한의 신분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곽보곤의 말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정자에는 대여섯 명의 여자들이 오순도순 앉아 있었다. 일부는 호수 맞은편을 바라보며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고 일부는 미간을 찌푸리며 시제를 떠올리고 있었다. 모두 비싼 옷을 입은 것이 경도 고관대작의 자제들이었다. 그중에 몸에 꽉 끼는 연노란색 갑옷을 입은 여자의 눈동자는 서쪽 바다에 있는 반투명 옥처럼 푸르렀다. 바로 범한이 경도 성문 밖에서 봤던 섭중 장군의 독녀 섭령아였다.
호수 맞은편을 살펴보던 섭령아가 고개를 돌려 범약약을 바라보았다.
“약약아, 백작가의 그 떳떳하지 못하신 분도 오늘 시 모임에 오셨어?”
그 말을 들은 범약약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으며 손에 쥐고 있던 붓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섭령아, 네 집에 있는 칼처럼 입을 함부로 다뤄서 되겠니. 성격이 너무 괄괄한 것도 안 좋아. 게다가 오늘은 또 어느 장아찌 상점에 있다 왔길래 몸에서 쉰내를 풍기는 거니?”
정자에 있던 여자들이 범약약의 말을 듣고는 얼어붙었다. 훌륭한 문장력을 갖춘 데다 성격도 온화한 그녀가 이런 거친 말을 하자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섭령아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백작가 서자인 범한을 무척 미워했다. 그래서 신분을 가지고 비꼬며 예의 없는 말을 한 것이다. 항상 온화하던 범약약이 자신에게 매몰찬 말을 내뱉자 섭령아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반격할 말을 찾지 못했다.
범약약 옆에서 먹을 갈고 있던 유가 군주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은 평상시에 사이가 좋더니 오늘 왜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세요.”
유가 군주는 여기 있는 사람 중 나이는 가장 어렸지만 신분은 가장 높았다. 더구나 가장 성격이 순했다. 유가 군주의 상냥한 목소리에 두 사람은 화를 누그러뜨리면서도 호시탐탐 서로를 경계했다.
섭령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범씨 집안 아가씨가 오늘 날카로운 이유를 아시는 분?”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화를 참는 범약약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범약약은 평소 귀족 집안의 여식 중 재능이 많기로 유명했지만 어쨌든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이기에 화를 참기가 쉽지 않았다. 범약약이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오라버니에 대해서 예의 없이 말하니까 그렇지.”
섭령아가 냉소 지었다.
“내가 예의가 없다고? 오늘 같이 온 그분이 벌써 범씨 집안 족보에라도 오른 건가?”
범약약은 영리했기에 섭령아가 범한을 미워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자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섭령아도 따라 나갔다. 유가 군주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섭령아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갑자기 화를 내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정자 밖으로 나온 범약약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임씨 집안 아가씨와 친한 건 네 일이고 그분이 오라버니와 혼인하기 싫어하는 건 그분 일이야. 그분 일로 인해서 내 오라버니에 대해 예의 없이 말한다면 나는 다시는 너를 보지 않을 거야.”
섭령아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어제 네가 우리 집에 왔을 때 신아가 네 오라버니와 혼인하길 원치 않으니 집에 돌아가서 말해 달라고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오늘 여기에 같이 올 수가 있어? 두 사람이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 줄 모를 것 같아? 이번 시 모임에서 이름을 알려서······.”
섭령아가 입을 다물고는 거칠게 소매를 흔들었다. 범약약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섭령아가 자신의 오라버니를 함부로 말하는 것만큼 일을 너무 단순하게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 말하라는 거야? 아버지에게 말할까, 아니면 오라버니에게 말할까? 혼사 같은 일은 우리가 결정할 수 없다는 걸 너도 알잖아.”
섭령아가 이를 갈며 범약약을 노려보았다.
“그럼 너희 오라버니가 경도를 떠나면 되겠네.”
황당한 제안에 범약약이 인상을 찌푸리며 노려봤다. 그녀는 자신이 범한의 영향을 받아 어른스러워졌다는 건 알지 못한 채 섭령아가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만 생각했다. 범약약이 한숨 쉬며 말했다.
“혼사에 대해서는 그만 이야기하자.”
그러자 섭령아가 지치지 않고 차갑게 쏘아붙였다.
“너의 오라버니가 무슨 신분이지? 그리고 임씨 아가씨는 무슨 신분이야?”
범약약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 오라버니는 어머니가 안 계시고 임씨 아가씨는 부모 모두 안 계신 마당에 신분은 무슨 신분이야. 똑같은 신분인 거지.”
임씨 아가씨는 비록 재상의 사생아 딸이었지만 재상은 딸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경국에서 그녀의 친모는 감히 알아도 말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공식적으로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상황이었다.
범약약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알지 못한 섭령아가 분노에 입술을 떨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혼사가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하는 거야? 상황이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보지?”
그 말에 범약약은 속으로 약간 무서워졌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온화한 미소를 유지했다. 천천히 섭령아 앞으로 걸어가 당당하게 말했다.
“너도 우리 오라버니에 대해서는 잘 모르잖아. 내가 충고해 주자면 해서는 안 될 짓은 하지 마. 이번 혼사는······ 나도 정해진 건지 아닌지 잘 몰라. 어쩌면 오라버니가 네가 그렇게 아끼는 임씨 아가씨를 보고는 곧장 경도를 떠날지도 모르지.”
섭령아는 집안의 무공을 수련했음에도 연약한 범약약의 기에 눌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말은 너희 오라버니가 신아를 이용하고 도망갈 거라는 거야?”
범약약이 한숨을 쉬며 범한이 답답할 때 가끔 짓는 표정과 똑같은 얼굴을 했다.
“나는 그냥 이번 혼사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을 한 거야. 너는 왜 그렇게 조급해하는 건데?”
섭령아가 잠시 고민하다 화를 누그러뜨렸다.
“너도 임씨 아가씨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잖아. 그런데 굳이 원치 않는 사람과 혼인하게 할 필요가 있냐는 거지.”
이 말이 범약약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혼인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범약약도 그렇기에 힘없이 상황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임씨 아가씨에게 동정이 가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일은 어른들께서 결정하신 다음에 오라버니의 의견을 알아보실 거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바로 그때 두 사람이 싸울까 걱정된 유가 군주가 정자에서 나왔다. 두 사람을 발견한 유가 군주는 상황이 나아진 것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그만 정자로 돌아가요.”
그 순간 범약약이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눈을 반짝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임씨 아가씨께서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니 내가 아는 명의에게 진찰을 받게 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