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542
883화 우리는 모두 색깔이 다른 바다 (1)
이때 검려 깊은 곳에 있는 범한은 문밖에 서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사고검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자는 깨어난 뒤 상처를 치료할 곳을 찾아 떠났다. 최고의 자객들은 항상 상처를 돌볼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범한은 이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범한이 검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다시 검려 안 깊은 곳으로 들어간 이유는 북제 젊은 황제가 예측했던 ‘사고검이 훗날 자신에게 안겨줄 골칫거리’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왕 십삼랑이 마른기침을 하며 범한을 한 번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뜨거운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그의 옆을 지나갔다.
범한이 고개를 돌려 그의 등에 있는 핏자국을 보고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방금 스승을 배반하는 상황을 통해서 그는 사고검이 저 어린 제자를 얼마나 아끼는지를 확인했다.
범한이 대야 안에 담긴 뜨거운 물에 수건을 적셔 사고검의 몸을 닦아주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천하를 호령하는 대종사라도 시간이 흘러 약해지면 충성심 가득한 제자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가련한 노인이 되어야 했다.
사실 사고검이 왕 십삼랑을 총애할수록 범한으로서는 안심되는 일이었다. 그가 마른기침을 하며 머릿속 생각을 정리한 뒤 문지방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옆 의자에 앉은 그가 눈을 감고 있는 사고검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림자는 검려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때 검려 깊은 곳에 위치한 방안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감찰원에 속해 있는 왕 십삼랑을 제외하면 누구도 이곳에 머물 수 없었다. 심지어 옆에서 사고검의 시중을 드는 검동들도 재빨리 자리를 피해야 했다.
갑작스럽게 나온 범한의 목소리가 조용한 방안에 울려 메아리쳤다. 끝날 줄 모르고 계속 메아리치는 범한의 말은 터무니없으면서 기묘하게 느껴졌다.
그림자는 사고검을 죽이겠다는 일념에 살아온 사람이자 경국 감찰원의 관리였다. 범한은 어째서 이처럼 진지하게 그림자가 검려를 받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걸까?
설마 사고검이 자신에 평생을 바쳐 이룩한 가장 진귀한 보물을 그림자에게 유산으로 넘겨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말이었지만 사고검은 범한의 판단을 비웃지 않았다. 두 눈을 천천히 뜬 그가 간담 서늘한 살기등등한 눈동자로 범한을 바라보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받을 수 없다는 거지?”
사고검이 이렇게 말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범한은 너무 놀라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대종사가 직설적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자 범한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림자는 제 사람이니까요.”
“너는 절반만 동이성 사람인 반면 그는 온전히 동이성 사람이야.”
사고검이 천천히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
“그는 내 친아우이자 검려의 진정한 수제자이지. 내가 죽은 뒤 그 애가 검려를 받지 않는다면 설마 네가 받으려 하는 거냐?”
“저요?”
범한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저는 따로 스승님이 계십니다. 게다가 저는 종파를 열고 파벌을 세울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사고검이 두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너는 어떻게 내가 생각을 알아챈 거냐?”
“운지란도 괜찮은 선택입니다만, 안타깝게도 운지란이 이번에 대인의 뜻을 거스른데다가 사무 업무에 익숙해져 있어 검술이 발전시키기 힘들 겁니다. 대인은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 검려가 점차 몰락해가는 모습은 절대 보지 못하시겠지요.”
“왕 십삼랑도 좋은 선택이지만, 대인께서 그를 너무 아끼시고 거는 기대가 높다 보니 검려에 묶여 있는 걸 절대 원치 않으시겠지요.”
“그러니 그림자 말고 다른 선택이 있겠습니까.”
범한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대인은 그를 죽이지 않았고, 그가 죽는 걸 절대 용인할 수 없었죠. 성인은 무정하다는 건 대인이 이전에 스스로 인정한 일입니다. 그러니 대인이 그림자의 목숨을 살려둔 것은 나중에 이용하기 위해서였겠지요. 하지만 그에게 검려 주인의 자리를 물려준다면 훗날 골칫거리가 될 수 있다는 걸 대인이나 저나 모두 알고 있지 않습니까.”
“현공 사당의 일을 꾸민 사람이 진평평이었더군.”
사고검이 갑자기 무척이나 즐겁다는 표정으로 히죽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그동안 늙은 개를 잘 못 알고 있었어. 너희 황제 폐하의 충성스러운 개인 줄만 알았는데, 인제 보니 아니었어.”
범한은 발끈하지 않고 오히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원장 대인께서 경국의 충신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만약 종사께서 그림자의 정체를 폭로해 저희 폐하와 진 원장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려 하시는 거라면 당장 포기하라 권해드리고 싶군요.”
사고검이 아무 말 없이 범한을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 침묵이 이어지자 검려 안은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였다. 어젯밤부터 오늘까지 범한을 지켜본 사고검은 비로소 범한이 옛사람의 아들답게 일반 사람에게는 찾아보기 힘든 침착함과 차가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범한은 사고검의 사소한 행동을 보고 그가 줄곧 숨기고 있던 속마음을 간파해내었다.
“그림자가 내 아우인 사실을 얼마나 오래 숨길 수 있을 것 같으냐? 1년? 2년?”
사고검이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동이성 안에서 발생한 일이 곧 있으면 경국 경도에도 전해질 텐데. 너는 네 황제가 정말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황제 폐하께서 뭘 눈치채시든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숨기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종사께서 이 일을 밝히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범한이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사고검의 홀쭉한 뺨을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 동이성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림자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단 6명뿐입니다. 검려 안에 있는 셋째 사제와 넷째 사제는 이미 종사를 만나 전날 밤 일을 전부 설명했으니 분명 종사께서도 그들의 입을 막으셨겠지요. 그들의 마음속에 종사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고려해보면 그들은 아마 평생 침묵을 지킬 겁니다. 그리고 왕 십삼랑의 경우 저는 그의 심성과 덕성을 믿기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제 남은 사람은 저와 종사와 북제 황제뿐이지요. 그러니 종사께서 입을 다무시고 저도 입을 다물면 새어나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사고검이 차갑게 범한을 노려보며 천천히 말했다.
“문제는 네게는 나를 설득할 방법이 없다는 거지. 내가 뭣 때문에 입을 다물어야 한단 말이냐? 일단 천하에 이 일이 알려지면 네 황제는 분명 진평평을 죽이려 할 텐데. 만일 진평평이 죽게 된다면 너는 어쩔 거냐?”
범한이 오랜 시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종사께서는 거짓으로 저와의 협상을 동의하신 뒤 다른 생각을 품고 계셨군요. 원장께서 돌아가시면 경국이 내란이 일어날 테고 그럼 동쪽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게 될 테니까요.”
“나는 네 황제를 믿지 않아.”
사고검이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뜨고 범한을 노려봤다.
“나는 너를 믿는다만, 문제는 네가 용상에 오를 날이 오지 않으리라는 거지. 그러니 내가 너를 믿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 너는 경국의 주인이 되지 않을 텐데.”
범한이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비록 한 나라의 주인이 될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폐하가 전쟁을 결심하지 않도록 말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종사께서 저를 계속 건드신다면 제가 직접 나서서 경국이 군대를 일으켜 동이성을 쑥대밭으로 만들도록 할 것입니다.”
그가 일어나며 천천히 말했다.
“경국에 내란이 일어나도록 만들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제가 가장 아끼는 원장 대인을 위험에 빠뜨릴 시도는 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만일 종사께서 계속 그런 생각을 품고 계신다면 저는 어떠한 협의도 하지 않을 겁니다.”
사고검이 한참 동안 아무 말 하지 않다가 히죽 웃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만일 일이 터진다면 과연 네게 동이성에 신경을 쓸 여유가 있을까?”
“모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이런 위협으로 사전에 경고할 수는 있지요.”
사고검이 범한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어떤 무지막지한 방법을 사용해서 북제 여황제의 입을 막을 생각인 거냐?”
범한은 북제가 혼란에 빠져 무너지는 상황을 사고검이 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기에 그가 북제 황제의 성별을 폭로할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에 당당하게 대답했다.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해야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기는 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종사께서 배움을 청하고 싶습니다.”
“다만 저를 이용하거나 통제할 시도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이 말을 하는 범한의 눈빛이 약간은 흔들렸다. 마치 아주 오래전 경도 범씨 저택에서 아버지와 대화를 했을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범한이 이 세상에 온 뒤로 모든 일을 자신이 생각하고 바라는 대로 자유롭게 해온 것 같았지만, 사실은 늙은이들이 정확하게 설계해둔 계획에 따라 움직인 것이었다.
이러한 늙은이 중에는 여러 괴물이 있었고, 세상을 떠난 고하나 지금 침대에 누워 있는 사고검처럼 과거의 일을 이용해서 암암리에 범한을 조정하려 했다.
만약 범한이 범한이 아니었다면 그는 아마도 쉬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해진 길을 따라 걸어간다면 아마도 뜻대로 생존할 수 있을 거였다. 하지만 범한은 이렇게 되길 원치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항상 섭경미라는 이름이 드리워져 있었음에도 그는 원치 않았다.
* * *
이틀이 지난 뒤 경국과 북제 사신단은 관도 위에서 품위 있게 느릿느릿한 속도로 마차를 몰고 있었다. 두 사신단이 송국에서 헤어진 뒤 도로 위에서 누가 더 느리게 갈 수 있는지에 대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마치 양쪽 모두 첫 번째로 동이성 영토를 밟아 정치 공세를 시작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렴풋하게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해낸 북제 사신단 정사 위화는 마음속으로 범한이 아마도 이미 동이성에 도착해 있을 거라고 추측했지만, 이미 이 모든 걸 바꿀 방법은 없었다. 한편, 경국 사신단 예부 관리는 북제에서 협상을 먼저 진행하기 위해 보낸 사람이 그들의 황제 폐하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사신단이 도착하자 동이성에서 환영 의식이 아주 떠들썩하게 진행되었지만, 성주부 관리들이 모두 죽은 탓에 진행 과정에서 여러 차례 문제들이 일어났다. 운지란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각 영지에 관리를 파견하고 정신없이 일을 처리했음에도 환영 의식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이런 세세한 문제들은 전부 양국 사신단 관리들의 눈에 들어왔고, 곧이어 성주부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사신단 관리들을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한 거냐는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협상은 이미 사신단이 동이성이 들어오기도 전에 끝난 상황이었다. 양측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암암리에 여러 차례 경합을 벌인 끝에 동이성이 어느 쪽 손에 들어갈지가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이날 봄 경치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포근한 바람과 따뜻한 햇볕이 비추는 가운데 경국 사신단이 머무르는 별궁 안에서 경국 관리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상석에 앉아 있는 작은 범 대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국 관리들은 자신들이 들은 소식에 너무 놀라서 입만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작은 범 대인이 자신들보다 앞서 동이성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 뒤에 상황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작은 범 대인은 단 3일 만에 북제 쪽의 기세등등한 공세를 물리치고 거만하기 이를 데 없는 대종사에게 동이성 내부 반대 세력을 진압하게 해서 경국의 역사에 길이 남을 공을 세웠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