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559
900화 차 한잔에 담긴 뜨거움과 차가움 (2)
한편 천하 각지를 떠돌아다닌 지 이미 5년이 넘은 사천립은 과거 서생 시설에 가졌던 꿈을 버리고 마지못해 자신은 관직과 인연이 없는 운명이라는 걸 받아들였다. 만약 그가 정말 관직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았다면 범한이 그에게 말단 관리직이라도 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천립은 스승의 뜻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다른 세 제자들과 다르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하는 일이 비록 빛나는 일은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포월루의 정보 체계와 은전을 이동시키는 일을 위해서 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스승을 돕기로 결정했다. 물론 천하 어디를 돌아다녀도 지금 포월루 사장인 그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상인인 된 사천립은 사실 후계상이나 양만리처럼 관직에 있는 제자들보다 더 자유로운 삶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일 범한이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해주겠다고 말해도 이미 기생집 사장의 삶에 익숙해진 그는 선뜻 받아들이지 못할 거였다.
사실 그는 여전히 상문만큼 범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범한이 세상 각지에 포월루를 세운 가장 큰 이유는 사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주도하지 못하는 가련한 여자들을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포월루의 영향을 이용해 가장 천대받는 직업에 있는 그녀들을 완전히 구제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좀 더 나은 환경을 조성해 주려는 시도였다.
사천립의 서신을 읽은 범한이 미소를 지었다. 서신에서 대충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오랜 시간 함께 일해 온 사천립과 상문 사이에 어떤 감정이 생겨난 모양이었다.
사천립은 범한의 결정을 바라보면서 분명하게 말을 하지는 않았다. 범한은 이 일이 무척 흥미롭다고 느끼면서도 한 번도 두 사람을 부부로 맺어줘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상문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에게 지켜주겠다는 일념으로 옆에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 사람이 상문에 옆을 지키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상문의 부드럽고 온순한 자태와 상문의 입술과 상문의 세심함과 겸손함은 모두 범한의 취향을 저격하는 특징들이었다.
상문에게 그런 특징이 없었다면 애초에 그녀를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거였다. 다만 지금 상문과 사천립 모두 나이가 많으니 이 일을 마땅히 고려해 봐야 했다.
범한이 손에 든 서신을 비벼 가루로 만든 뒤 고개를 살짝 옆으로 숙이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신의 손에 쥔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 대략 계산해 본 적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감찰원과 황실 금고는 그가 쥔 가장 강력한 무기였지만 황제 폐하가 교지를 내린다면 아마도 감찰원에 있는 관리들 중 범한의 곁을 지킬 사람은 기껏해야 3할 정도일 거였다.
‘그 얼음덩어리는 아마도 중립을 지키려 하겠지. 황명을 거역하지도 못할 거고, 그렇다고 나와 싸우고 싶지도 않을 테니까.’
범한이 조용히 생각했다.
‘나와 언빙운의 우정은 앞으로 닥칠 시련을 견딜 수 있을 만큼 단단한 걸까?’
언빙운을 떠올리던 범한은 이어서 감찰원 전체 상황을 생각해 봤다. 감찰원에서 1처와 3처, 4처를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기는 했지만, 정말 위험한 난관이 닥친다면 기꺼이 그와 함께 불바다에 뛰어들 사람은 계년조밖에는 없었다.
범한은 황실 금고 쪽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몰래 손을 써둔 상태였다. 그는 만약 앞으로 상황이 변한다면 자신이 강력하게 대응할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쥐를 잡고 싶어도 그릇을 깨게 될까 봐 움직이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황실 금고는 지금 범한이 천자의 위엄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사천립과 소문무의 충성심은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었고, 지금 서량로에 있는 등자월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생각을 하던 범한은 문득 자신의 쥐고 있는 힘이 은근슬쩍 황제 폐하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기미를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황제 폐하가 앞으로 조정의 안정을 위한 계획을 시작하려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범한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아직도 가장 중요한 그 부분을 포착하지 못하신 것인가. 내가 앞으로 그와 겨루려면 손에 쥔 권력을 확실히 보호하며 더 많은 세월을 버텨야겠지.’
이전에 그와 해당이 말했던 것처럼 이 세상은 연장자들의 것이자 그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결국 그들의 것이 될 거였다.
그러니 그들에게 필요한 건 시간뿐이었다.
* * *
4월이 끝나가는 어느 날 아직 여름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도 봄꽃들이 갑자기 내린 비에 땅에 떨어졌다. 경도 남성 거리 저택들에 드리운 꽃나무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땅에 떨어진 꽃들을 바라보았다. 무정한 봄바람이 나뭇가지를 휘감을 때마다 꽃들이 저택 담장 밖 돌판 위에 떨어져서, 급히 길을 걸어가는 행인들에게 짓밟혀 산산이 부서졌다.
경도 부윤 손경수 대인의 저택은 남성 대로에 위치해 있었다. 이 저택 뒤로 멀지 않은 곳에 경도부 관아가 있었지만, 관아 대문은 다른 골목과 이어져 있었기에 조용히 서로 의지할 뿐 간섭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손경수의 생일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의 80세 생신이었다. 중요한 날인 건 분명했지만, 범약약이 이전에 잘못 들었다고 말한 건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한 거였다. 손씨 집안 노부인은 봉호를 받은 사람인만큼 손경수는 업무를 최대한 줄이고 각 로에 초대장을 보내 관리들을 초청했다.
오늘 손씨 집안 대문에는 붉은 끈이나 화려한 등불이 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애써 떠들썩하게 축하하는 분위기를 내려고 노력했고, 찾아와 선물을 주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다만, 마차를 타고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거리에는 평범한 선물함을 든 채 자신의 집 어르신을 대신해서 사죄의 말만 올리고 손씨 집안을 떠나는 집사와 종들로 가득했다.
사정을 모르는 하급 관리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반 귀족 집안에서 떠들썩하고 화려하게 치르는 것과 달리 경도 부윤 집안에서 마련한 생일잔치는 무척이나 조용하고 쓸쓸한 모습이었다.
경도부는 경도 전체 치안과 민생을 담당하는 만큼 각 부의 관아와 왕공 귀족들과 교재도 잦은 편이었다. 그래서 경도부 차사는 일을 진행하기가 힘들었지만, 경도부가 자체가 가진 지위는 아주 높았다. 과거 2 황자가 황위를 찬탈하려 했을 때 경도부에 엄청난 노력을 투자하기도 했었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말해서 관리 중에서 경도부의 체면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오늘 이러한 광경은 정말이지 보기 드문 희한한 것이었다. 쪽문 앞에 둘러선 사람들이 남몰래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속삭이고 있었는데, 뭘 이야기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사람들은 관리 사회에 들리는 경도 부윤 손경수에 대한 소문을 떠올리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손경수는 의심할 여지없이 경국 관료 사회에서 운이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정정당당하게 향시에 합격하지 않은 말단 관리 출신이었다. 그가 관리가 되고 맨 처음 맡은 일은 경도부에서 문서를 담당하는 일이었다. 이처럼 그는 출신도 변변치 않고 배경도 가지지 못했기에 원래는 아무리 노력해도 경도 부윤직에 오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경국 6, 7년 사이에 황태자와 2 황자는 서로 용상을 차지하려고 경쟁했고, 그 와중에 작은 범 대인이 경도로 와서 싸움을 벌였다. 이에 자연스럽게도 경도의 핵심인 경도부는 각 세력이 반드시 차지하고 싶어 하는 곳이 되었다.
경도 부윤은 중앙의 입심이 미치지 않아 명철보신할 수 있었던 각 로의 총독이나 각지의 지부와는 달랐다. 싸움이 중심지인 경도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세력들은 경도부를 가만히 내버려 두려 하지 않았고, 이에 경도 부윤은 어느 쪽이든 태도를 밝혀야만 했다.
과거 매집례가 억지로 쫓겨난 뒤 2 황자가 올린 경도 부윤이 범한에 의해 쫓겨나면서 5, 6년 사이에 여러 사람이 경도 부윤의 자리에 올랐다가 처량하게 내려가야 했다. 이에 관리들은 모두들 경도 부윤 자리에 오르는 걸 꺼리자 당시 경도부 편수였던 손경수가 이런 이유로 경도 부윤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과거 경도 부윤은 반드시 조정에서 대학사의 직을 겸임해야 했다. 다만 매집례 이후부터 이 규정이 엉망이 되어 손경수는 경도 부윤이었지만 작위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조정 관리들은 모두들 손경수를 질투하고 무시하면서 그를 역사상 가장 운이 좋은 경도 부윤이라고 비꼬아 불렀다. 하지만 지금껏 권력이 가장 작은 경도 부윤이라서 언제든지 자리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것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 * *
하지만 손경수에게 훌륭한 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문서 업무를 담당했던 그는 관리들과 교제하는 걸 좋아하지도 않았고, 문하중서 대학사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정무에만 집중하며 정직하고 신중하게 처신할 뿐 외부에서 들리는 소문에 휘둘리지 않았다.
이처럼 고지식한 성격을 가진 그는 경력 7년 가을날 황제 폐하가 남겼다는 유훈을 직접 확인하지 못한 탓에 황태후 마마의 교지에 따라 모든 힘을 동원에 경도에 들어온 범한을 체포하려 했다.
사실 이걸 그의 탓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황제 폐하가 살아 있을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작은 범 대인이 천하의 충신이라는 걸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매번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손경수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다행히 딸 덕분에 그는 조정에서 처음으로 기댈 수 있는 배경을 얻었고,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가 얻은 배경은 조정에서 가장 대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관리들은 손경수를 더욱 질투했다. 범한이 소문을 잠재울 때까지 경도 안에서는 그가 딸을 팔아서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소문이 한참 동안 떠돌았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관리들은 범씨 집안과 경도부의 관계가 생각처럼 각별하지는 않다는 걸 알고 되었고, 비로소 당시 규방의 사랑이야기가 단순히 이야기일 뿐이라고 믿게 되었다.
사람들은 작은 범 대인과 경도부가 남녀 간의 사랑으로 얽힌 관계가 아니라고 믿었고, 그래서 오늘 손씨 집안 대문은 꽃이 떨어진 꽃나무보다도 더 처량한 모습이었다.
* * *
선물만 건네고는 손씨 집안을 떠난 각 집안의 집사들은 곧장 남성을 떠나지 않았다. 이들은 영리하게도 거리 끝에 있는 찻집에서 올라가 차를 마시며 쉬기로 했다. 아직 정오가 되지 않은 시간인데도 화려하게 꾸며진 찻집 안은 손님들도 시끌벅적했다. 서로 안면이 있는 집사들이 손을 맞잡고 웃으며 인사한 뒤 탁자에 같이 앉았다. 일순간에 찻집 절반이 집사들로 가득 찼다.
집사들이 웃는 얼굴은 무척이나 어색했다. 이들의 웃음에는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눈빛과 경도부를 살짝 경시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들 집사들이 모시는 주인은 6부를 책임지는 관리가 아니라 3사 안에 있는 대인들로 국공가 거리 쪽에 있는 권문귀족들이었다. 이들은 오늘 집사를 시켜 선물만 보내고 직접 오지는 않았다.
집사들이 당장 저택으로 돌아가 보고를 하지 않고 찻집 안에 모여 있는 걸 통해서 왕공 관리들의 생각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오늘 손씨 집안 생일잔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고 싶어 했다.
손경수가 눈치 없이 어리석게 행동한다는 게 문무백관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문하중서 하 대학사가 황궁 안에 계시는 그분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했는데도 재빨리 관직에서 물러날 생각은 하지 않고 생일잔치를 열다니 얼마나 후안무치한 짓인가?
황궁 안의 태도가 보이지 않는 것인가? 관료 사회에서의 소문이 들리지 않는 것인가? 도대체 뭘 바라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