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565
906화 어지럽게 자란 봄날 정원 (2)
깊은 밤 황궁 안을 걷고 있는 범한은 자신을 향해 겸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태감과 궁녀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암울한 얼굴로 소매를 연신 털며 걸어갔다.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범한은 경국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특이했다. 범씨 집안 종과 여종들을 말할 것도 없고 황궁에 있는 태감과 궁녀들에게까지 항상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호탕하게 행동하는 모습이 다른 지체 높은 사람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마치 신분이 비천한 사람들을 멀리하거나 꺼려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는 듯했다.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황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소공야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했다. 심지어 3년 전에 감찰원 6처 쇠뇌에 맞아 죽은 후 내관도 장 공주가 몰래 심어둔 사람이었음에도 평상시에 범한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런 범한이 오늘은 좀 달라 보였다. 인사하는 태감과 궁녀들을 본체만체하면서 걸어가는 게 평상시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에 수상함을 느낀 태감과 궁녀들은 속으로 소공야가 또 어서방에서 황제 폐하와 다툼을 벌인 거라고 짐작했다.
길고 어두운 동굴 같은 황궁 문을 나온 범한이 황궁 앞 광장에 섰다. 그는 고개를 돌려 황궁 문을 보지 않은 채 어깨를 쫙 펴고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마치 마음속에 있는 우울한 감정들을 외침과 함께 토해내려는 듯이 말이다.
넓고 조용한 광장에 퍼진 뒤 붉은 황성 담장에 부딪친 범한의 외침은 한참 동안 메아리치며 사라지지 않았다.
황궁 문 안에 시위와 황궁 문밖에 금군, 그리고 열쇠를 들고 있던 태감까지 모두 화들짝 놀라 범한을 바라봤다.
만약 평범한 사람이 황궁 문 앞에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면 금군이 잽싸게 붙잡아 흠칫 두들겨 패주고는 감옥에 가둔 뒤 황궁 앞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죄명으로 가을에 참수를 당했을 거였다. 하지만 범한은 이렇게 황궁 문 앞에서 소리를 질러도 누구도 건들지 못했고, 심지어 조용히 하려고 지적할 수도 없었다.
설사 황궁 문 앞에서 누군가가 미친 듯이 발광을 하더라도 그게 범한이라면 명 시인이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친다고 미화하며 보고도 못 본 척 내버려 둘 거였다.
오늘 황궁 문에서 당직을 서고 있는 사람은 금군 대통령 궁전으로, 과거 범한이 경도에 와서 처음으로 맞붙었던 사람이므로 두 사람은 서로 잘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범한의 고함을 들은 궁전이 당직 방에서 뛰쳐나와 허겁지겁 달려가서는 범한을 잡아끌며 물었다.
“실성하신 겁니까?”
범한이 구겨진 소매를 펴면서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실성하면 바랄 게 없겠군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범한의 얼굴은 무척이나 차분했다. 방금 전까지는 정말이지 답답한 마음을 발산할 필요가 있었지만 말이다. 이 세계에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범한은 사람들 앞에서 뭘 숨기거나 할 필요가 없었고, 자신의 성격과 맞지 않은 행동을 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 앞에서만큼은······ 진심을 숨기고 연기를 해야 했기에 정신적 압력도 심했고, 기분도 좋지 않았다.
황제의 수척하고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볼 때마다 범한은 작은 전각 안에 걸려 있는 초상화를 떠올렸고,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그 일을 떠올렸다. 그러면 그의 눈앞에 피와 불길이 치솟으면서 견디기 힘든 복잡한 감정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황궁 문 앞에서 소리를 지른 건 사실 연기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지금 행동이 얼마 뒤에 어서방에 있는 황제 폐하의 귀에도 들어가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불만과 섭섭함에 괴로워하는 사생아의 역할을 연기한 거였다.
이런 연기를 하기 싫어하는 범한에게는 참 힘든 일이었다.
“저와 함께 술을 마시러 갑시다.”
마치 허기진 이재민이 맛난 삼겹살을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범한이 궁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포월루를 닫고 기생 60명을 모두 대인께 안겨 드리겠습니다.”
“정말 실성하셨군요.”
궁전이 걱정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범한을 바라보다가 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 * *
신괴 골목 옆에는 저택 한 채가 있었는데, 면적도 크지 않고 처마나 담장도 화려하지 않았으며 지리상 위치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주변 민가들과 비교해도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였다. 이 저택은 이전 왕조 시기 어사를 지낸 원로 관리의 저택으로, 주인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줄곧 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는 혹시나 자손들이 경도에서 관직 생활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줄곧 팔지 않고 동료들에게 관리를 맡겨 두었다.
그러던 중 3년 전에 이 저택이 마침내 팔렸다. 그러자 조용하던 신귀 골목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항상 인사하는 관리들이 끊이질 않았고, 매년 명절이 되면 대문에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옛 어사 저택의 새로운 주인이 승진을 거듭할수록 찾아오는 관리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 이유는 이 저택의 새로운 주인이 청렴하고 겸손하다는 소문이 퍼지자 괜히 그를 건드려서 재수 없는 꼴을 당할까 봐 관리들이 더는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찰원 좌도어사이자 문하중서의 대학사인 하종위가 바로 오랜 시간 비어 있던 옛 어사 저택의 새로운 주인이었다.
사실 동료들이나 심지어 황제 폐하까지도 관리들은 대부분 남성에 거주하니 신귀 골목에서 살면 불편한 점이 많을 거라고 지적했었다. 게다가 하종위가 신귀 골목에 위치한 옛 어사 저택에 사는 건 조정에서 그의 입지나 체면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하 대학사는 조정에서 자신의 재능을 감추고 두루 어울리며 관리 사회의 상황을 누구보다 민첩하게 꿰뚫어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황제 폐하에게도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 일에서만큼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저택을 하사해 주겠다는 황제 폐하의 뜻까지 거절한 채 충성스러운 종 두세 명과 과부인 이모, 그리고 먼 친척 형제들을 데리고 옛 어사 저택에서 살았다.
3년 동안 말이다.
하종위가 문을 열고 옛 어사 방에서 나와 약간 황폐해진 정원을 바라봤다. 봄 경치가 뒤죽박죽 어지럽게 얽혀 있고, 곳곳에 초록색 나뭇잎이 지저분하게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보던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가 줄곧 옛 어사 저택에서 지내는 이유는 이곳에 특별한 감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저택은 그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하종위가 처음 경국 무대를 밟았던 건 경력 5년으로 전임 재상 임약보가 관직을 사직한 일이었다.
‘우연히’ 재상 저택의 모사 오백안의 부인을 만난 하종위는 부당한 일을 당한 부인을 돕기 위해 도찰원에 상소를 올리게 했다. 그리고 또 ‘우연히’ 재상 저택에서 보낸 자객이 오백안의 부인을 죽이려 할 때 ‘우연히’ 2 황자와 정왕 세자 이홍성이 그 모습을 보고 구출해 주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우연들로 인해서 경국 황실과 조정의 상황이 변하게 되고 재상 임약보를 무너뜨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부모의 상을 치르기 위해서 춘시를 응시하지 못해 출세의 기회를 놓친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 취급받던 하종위는 졸지에 간사한 재상을 타도한 영웅으로 변했고, 그의 명성은 일순간에 빛나게 되었다. 서생들의 마음속에 하종위는 경도에서 후계상과 함께 인재로 명성을 떨친 사람이자 마음속에 웅장한 뜻을 품고 강직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 되어 있었다.
임약보가 실각한 일을 통해서 처음으로 황제를 만난 하종위는 폐하의 뛰어난 기개와 지략에 깊이 감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젊은 서생을 마음에 들어 한 황제 폐하는 성지를 내려 그를 도찰원 어사에 봉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하종위는 각 세력을 떠돌아다닌 끝에 마침내 윗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이에 경국 역사에서 가장 젊은 문하중서 대학사가 된 그는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종위는 그 사람과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종위가 대학사에까지 올랐음에도 경국 백성들의 마음속에 최고의 인재는 언제나 그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 사람은 하종위의 마음속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늘은 하종위의 머리를 항상 맴돌면서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가리고 춥고 서늘한 한기를 남겼다. 이처럼 하종위를 괴롭히는 그림자를 드리운 사람이 바로 범한이었다.
하종위가 임약보를 타도하여 서생들에게 널리 칭찬을 받았을 때 범한은 춘시 부정 사건을 폭로해 예부 상서를 포함해 조정 관리 15명을 모두 참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선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하종위가 도찰원의 평범한 어사였던 시절 이미 감찰원 제사 대인이었던 범한은 폐하를 부추겨 어사들에게 곤장을 때리게 했었다. 그때 곤장을 맞은 어사들은 모두 하종위의 선배나 상사들이었다.
그리고 하종위가 마침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맞이했을 때 범한은 여전히 그를 경시하며 한 손에는 감찰원을 다른 한 손에는 황실 금고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경국의 품에 동이성의 거대한 영토를 안겨주기까지 했다.
하종위가 인재라 불릴 때 상대방은 시선이라 칭송받았고, 하종위가 대학사가 되었을 때 상대방은 담박공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의 차이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종위는 가난하고 변변치 못한 집안 출신인 반면 상대방은 황제 폐하의 사생아 아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언제든지 어디에서든 쉬지 않고 이어지는 범한은 압박에 하종위는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봄기운이 가득한 정원에는 잡초가 뒤죽박죽 자라 있었지만 관리할 사람이 없었다.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하종위는 평생 동안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사람을 뛰어넘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종위가 천천히 눈을 감고는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담긴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능력과 의지에 대해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그는 자신이 범한과 비교했을 때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모진 운명으로 이길 수 없음이 정해져 있기에 어찌해볼 방법이 없을 뿐이었다.
* * *
소문에 따르면 감찰원 작은 언 공자의 저택에서는 사나운 개를 몇 마리 길러 조정 관리가 함부로 집 문턱을 넘지 못하게 막고, 범한은 집안에서 수십 명의 호위를 길러 누군가가 뻔뻔스럽게 저택에 찾아와 뇌물을 전하려 하면 흠칫 패고 쫓아낸다고 했다. 반면 개나 호위를 기르지 않는 하종위의 집에서는 검은 얼굴이 나온다고 했다.
자신의 청렴함을 지키기 위해서 하종위는 아주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는 감찰원의 두 사람처럼 막무가내로 행동할 수 없었기에 뇌물을 받으면 상대방이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정중히 거절했다. 그래서 하종위는 무척이나 피곤했고, 이에 최소한 자신이 범한보다 더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조정 관리들의 봉록은 감찰원의 동급 관리들의 봉록과 비교해 3분의 1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하종위는 청렴한 명성을 지키려 노력하며 뇌물을 받지 않았기에 저택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돈을 감당하기도 힘들었다.
비록 황제 폐하께서 그의 형편이 어려운 걸 아시고는 황실 금고의 적지 않은 은전과 용품을 하사해 주셨지만, 경도 물가가 너무 비쌌다. 그래서 하종위의 지금 최대의 고민은 경도부 손경수가 아니라 귀신 나올 것 같은 정원을 보수할지 말지였다.
하종위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내가 명성을 얻었다고만 생각하지, 그 명성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
하종위는 범한이 아니었다. 그는 은전을 낳는 황실 금고를 가지고 있지도 못했고, 책방이나 기생집을 운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참 이상하게도 생활이 가난하고 고생스러워질수록 하종위의 표정을 더욱 침착해졌고, 마음은 더욱 즐거워졌다. 마치 그는 삶이 괴로워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조정을 위해 큰일을 해서 진정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명신이 되고자 했다.
점점 더 빛나는 눈으로 밤중에 잡초들이 어지럽게 자라 있는 정원을 바라보는 하종위가 아무 말 없이 속으로 생각했다.
‘범한이 오늘 손씨 집안을 찾았으니 내일 문하중서에서 공무를 의논할 때 나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려나?’
방금 전 황궁 태감이 전한 황제의 명령을 들은 그는 마음이 침착해지면서 또 한편으로는 암울해졌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군.”
밤바람에 하종위가 고개를 숙였다. 어떤 큰일을 하든 아무리 뛰어난 관리가 되든 범한의 압박에서 벗어날 길을 없었다. 그러니 그가 폐하가 서거하신 뒤에도 목숨을 부지하려면 폐하가 서거하시기 전에 반드시 먼저 범한을 죽여 없애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