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584
925화 체외 공기에 있는 것 그리고 손에 쥔 검 (1)
섭류운과 스승 비개가 떠난 후에도 범한은 한동안 바닷가를 떠나지 않았다. 거대한 선박 형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바람은 약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아 범한은 잔뜩 젖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정말 이상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귀여운 소년처럼 양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거였다. 물론 누구나 다 알다시피, 범한이 순수한 어린 아이가 되는 건 실제로는 불가능했다.
범한 체내에서는 두 개의 정기가 천천히 흐르며 일렁이고 있었다. 아까 섭류운이 일부러 풀어놓은 세(勢)에 자극을 받은 정기가 비교적 평온하고 조화롭게, 그리고 빠른 속도로 몸 안과 밖으로 운행하고 있었다. 범한은 지금 이 상황이 일종의 계기인 것만 같았다. 마음의 변화로 기분 변화가 일고, 그러다 느닷없이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게 있고, 그리고 그것이 조심스레 범한의 마음을 비추고 있었다.
범한이 두 눈을 감은 상태에서 빗속으로 양 손바닥을 뻗었다. 빗물이 자신의 손바닥을 때리도록 자연스럽게 뻗고만 있었다.
* * *
한참 후가 지났지만 범한의 양손은 여전히 빗물에 젖지 않은 상태로 매끄러웠다. 빗물은 영원히 그의 손바닥을, 더 나아가 그의 피부 그 어느 곳도 적실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범한의 손바닥 위에는 담담한 정기가 덧입혀져 있었다. 모든 모공에서 정기가 빠져나와 다시 모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고, 이로써 매우 얇고도 재밌는 정기의 회로(回路)가 만들어진 거였다. 그것도 그가 어려서부터 수행한 이상하지만 전혀 쓸모가 없는 법문(法門)을 통해 말이다.
물론 이 법문으로 범한은 이 세계에서 오르기의 고수가 되었다. 이에 일찌감치 황궁과 서산을 기어서 올라가고 내려갔었으며,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험지를 오르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소년 시절 그가 이 방법을 익히기까지 꼬박 6년이란 시간과 정력을 들인 걸 생각하면, 그 정도의 성과는 너무 수지가 안 맞아 보이는 건 있었다.
오죽은 과거 범한의 이러한 잘못을 교정해주지는 않았다. 모두 알다시피, 오죽은 내공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오늘은 느낌이 달랐다. 과거와 비교했을 때 너무 세밀해 모호한 차이 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범한이 천천히 눈을 뜨고 얼굴을 적신 빗물을 닦아 냈다. 그리고 넋이 나가 멍하니 손바닥만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정기를 몸 밖으로 내보내 사람을 다치게 할 날카로운 무기로 쓸 수 있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강력한 경지이다. 그런데 이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경지도 아니었다. 수행이 어느 수준에 다다르면, 또 여기에 충분히 고명한 운기(運氣) 법문만 있다면, 강자는 어떻게든 그와 같은 걸 해낼 수 있었다.
특히 범한은 직접 섭류운의 산수(散手)를 본 적 있었다. 대종사의 고목 같은 손가락에서 매화꽃이 만발하듯 손끝에서 정기가 섬세하게 분사되어 나와 순식간에 공기를 찌르고 갈랐었다. 그리고 담주 절벽 아래 모래사장에서는 만 여 개의 매화 구멍이 생겨났었다. 이처럼 손가락에서 기운이 이리저리 뿜어져 나왔다는 건 인간이 육신의 제한을 뛰어넘는 기운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최고 경지에 갔다는 걸 의미했다.
그런데 범한은 오늘 무언가 다른 느낌이었다. 그것도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이에 비바람을 맞고 있으면서도 범한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빗물이 그의 머리카락을 타고 양 뺨에 떨어지고, 또 강한 바닷바람에 몸이 밀려 잠시 걷게 되기는 했어도 말이다.
정기가 몸에서 떠났다가 능숙하게 다시 돌아올 때 무언가 달라진 게 있는 것만 같았다. 범한은 자신의 정신 경계만 살펴봤을 때는 무언가 많아졌다는 건 알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범한은 그 작은 변화를 감지했다.
이에 그는 너무 놀라 순간 의문이 들었다. 세상 만물은 총량이 일정하니, 체내에서 얼마만큼의 정기가 방출되면 그만큼 몸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기를 회수하는 건 이미 범한의 독보적인 절기였다.
그런데…… 어떻게 체내로 돌아온 정기의 양이 많아질 수 있는 거지?
어떻게 명상도 없이 부단히 순환하는 정기만 가지고 자신 체내의 정기를 더 많게 만들 수 있는 거지?
그렇다면 늘어난 정기는 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범한의 동공이 살짝 수축했다. 심지어는 그의 손가락 끝도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범한은 자신이 과거 아무도 생각해보지 않은, 생각하지 못한, 도달해보지 않은 문을 건드렸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그 문 뒤에는 뭐가 있을까?
왜 갑자기 이런 변화가 일어난 거지? 범한은 문득 어떤 기회와 인연을 맞이한 것만 같았다. 그래서 비바람을 맞고 있는데도 그 느낌을 따라 바닷가에 앉아보았다. 그런데 그 기회와 인연은 대체 뭘까? 바다에서 나타난 섭류운 때문인가? 사고검이 바다를 바라보며 사망한 것 때문일까? 친한 사람과 떨어지게 되어 생긴 허전함 때문인가?
범한은 어딘가가 허전했다. 그래서 최근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을 차분히 훑어보았다. 왜 지금 기회와 인연이란 게 느껴진 건지 이유를 찾아야만 그 문이 어떤 색이며, 또 그 뒤에서 자기 앞에 나타나 줄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아서였다.
이는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십가촌에서 동이성으로 서둘러 와 검려에서 하룻밤을 지냈으니, 그에게 변화를 일으킬 만한 한 건 그 두 권의 책자뿐이었다. 특히 괴상한 음역 단어로 이루어진 두 번째 책자가 그러했다.
범한은 그 책자를 스승 비개에게 넘겨 신비한 서양 대륙으로 가져가도록 해놓은 상태였지만 안에 있는 내용은 완전히 외우고 있었다. 비록 뜻을 모르는 단어가 훨씬 더 많았지만, 그래도 그 안에 있는 내용 중 일부는 이해한 터였다.
주술 같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전생에 본 시처럼 보였고, 단테 신곡에 있는 내용과 비슷한 것 같았다.
이탈리아어가 라틴어에서 나온 거였지?
비바람 속에 앉아 있는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이리저리 생각을 해봤지만 일찌감치 흐릿해진 지식들은 기억이 떠오를 기미가 없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어에 방언이 많았다는 점과 원문은 단테 신곡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설마 몇 구절이 마음에 새겨졌다고 정기 운행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마음을 움직여 지금의 이 이상한 상황이 나타났다는 거야?
법술이라고 했지?
범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미간을 찌푸린 채 배가 사라진 빈 곳을,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푸른 수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에게 바다 저쪽 너머에 있는 대륙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 * *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봄날 아름다운 바람아.
나는 전심전력을 다해 공기 중에서 약동하는 봄의 XX를 느끼노라.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고,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라.
* * *
이건 시이지 법술과 주술이 아니다. 범한은 빗속에 멍하니 서서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시처럼 보이는 언어를 통해 그는 무언가를 배우고 또 감응하게 된 건 분명했다. 원래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체외 공기 안에, 설마 정말로 대륙의 원기가 있는 거였어? 그래서 앞서 운기 했을 때 정기가 몸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 들어올 때 이 시 속 정취와 비슷한 마음이 생겨나 무언가가 딸려 들어온 거야?
범한이 모래사장에서 서둘러 두어 번 발을 굴러 보았다. 그리고 비바람이 부는 동해 바닷가에서 두 바퀴 돌며 주변 공기와 빗물을 바라보았다.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로 눈빛을 번뜩였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이 투명하고 자연적인 것들 속에서 무언가 잡히지 않는 걸 찾아내려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범한의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너무 많은 추측, 의문, 판단이 밀려들었다. 과부하가 걸린 범한이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미간을 문질렀다.
그 책은 고하 대사가 남긴 유품이었다. 그리고 사고검이 우연히 흘린 말을 통해 북제의 전 국사가 서양 계륵 법사들에게 대단히 흥미를 지니고 있었음을, 심지어는 대동산에서도 살짝 그것을 시전 했었음을 범한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전부 이탈리아어라, 그 국사가 제아무리 놀랄 만한 재능을 지녔다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을 텐데. 그런데도 고하 대사는 대체 어떻게 익힌 거지? 그가 연마하게 된 건 뭐였을까?
그리고 법술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시 모음집은 그 자차만으로도 이상했다. 연대만 봐도 이미 오래 전 것으로, 심지어는 고하 출생 이전에 지어진 것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이 대륙의 어느 선배님께서 우연히 서양 대륙의 법술 정수를 접하게 되어 억지로라도 기록해둔 것일 수도 있었다.
범한은 순간 살짝 후회가 밀려왔다. 그 책자를 그리 급하게 스승님과 함께 저 서양으로 보내면 안 되는 거였다. 조금 더 직접 연구를 해보고, 감찰원 역량도 동원해야 했다. 그러면 일찌감치 백골이 된 선배님이 대체 누구인지 알아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 되면, 그걸 단서로 과거로 파고들면 되는데.
빗물이 범한의 얼굴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범한이 느닷없이 해탈한 사람처럼 웃기 시작하더니, 자조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생각했다.
‘내가 압박감이 너무 컸던 게야. 확실히 주화입마가 된 거 같아.’
대동산에서의 승부로 이미 증명되지 않았는가. 고하 대사가 얼마나 연마했고 또 이 괴상한 법문을 얼마나 익혔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황제 폐하에게 졌으니, 본질적으로 변한 건 없으니 말이다.
법술은, 그러니까 법술은 어쩌면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계륵 수준은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걸 바꿀 만한 이기(利器)는 되지 못하는 거였다.
범한이 살짝 고개를 떨구듯 숙이고 해변을 떠나 비 내리는 동이성으로 향했다. 사고검이 세상을 떠났으니 동이성은 분명 비애와 절망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러니 범한은 반드시 동이성으로 돌아가 검려 제자들을 만나고 현 형세를 통제해야 했다.
그런데 범한은 자신이 지금 아주 귀한 기회를 잃었다는 건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로 그 문을 열 기회 말이다. 그건 이 대륙에서든, 저쪽 대륙에서든 지극히 얻기 어려운 거였다. 그리고 일단 놓친 이상 다시 잡으려면 몇 달,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기회와 인연, 운이라는 손에 잡히지 않는 건 항상 인간의 의지 및 호기심과 연계되어 있었다. 그래서 범한 정도의 근면함과 탐구욕이면 분명 그것을 열 기회를 더듬더듬 찾아낼 것이고, 거기까지 가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 * *
오두막 깊은 곳에서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건 밥 짓는 연기도, 늦가을 떨어진 낙엽을 태울 때 코를 찌르는 냄새를 지닌 연무도 아니었다. 흰 연기는 어떤 일을 알려주는 거였다. 그래서 흰 연기를 보거나 또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는 말을 들은 백성들은 모두 놀라고 불안한 모습으로 그것이 올라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들 중 일부는 이미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 방향을 향해 쉼 없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검성 대인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된 거였다.
범한은 검려 문 앞으로 걸어갔다. 검려 밖을 둘러싸고 있는 제자들이 일제히 분노한 눈으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들 눈에서는 범한을 소각이라도 해버리려는 듯한 복수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이에 의지가 강한 범한도 지금만큼은 두려움에 심장이 떨려왔다.
범한은 검려 제자들이 왜 분노하는지 알았다. 사고검이 경국 황제 폐하와 경국 대종사 섭류운의 음험한 협공에 당해서였다. 그리고 본인은 경국의 권신이니 의심할 여지 없이 대신 복수받이가 된 거였다.
하지만 범한에게는 검려 제자들의 감정을 풀어 줄 생각이나 하고 있을 새가 없었다. 그는 검려 오두막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흰 연기만 바라볼 뿐이었다. 범한의 눈에 잠시 걱정이 스치더니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 곧장 검려 내 검갱 옆 평지로 갔다. 그곳에서는 장작더미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쉽게 그곳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범한은 서둘러 장작 속으로 어떤 물건 하나를 던져 넣었다.
그러자 불꽃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 속에 있는 대종사의 유해는 벌써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범한의 행동이 있은 후 촥, 하는 소리를 내며 검려 깊은 곳 사방에서 검의가 출몰했다. 그리고 11개의 장검이 범한 주변을 둘러쌌다. 뱀과 같은 빛을 토해낸 검의는 언제든 이곳에서 범한을 죽여 버릴 기세였다.
검려의 13 제자가, 가장 앞에 있는 운지란과 왕 십삼랑을 제외한 모든 이가 범한의 행동에 분노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