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591
932화 간단한 정복 (2)
운지란은 눈을 감고 한동안 침묵하며 오랫동안 갈등했다. 그의 눈가는 점점 젖어들고 있었다. 이후 그가 천천히 전투마 옆에 있는 천자의 의장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동이성 성주가 무릎을 꿇자 모든 관원이 곧바로 그를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 제후국의 왕공들 역시 무릎을 꿇었다. 사람들이 바닥에 빽빽하게 꿇어앉아 경국 군대를 향해, 경국 천자를 향해 신하로 복종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검려 제자들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들은 스승 대인께서 임종 전 내리신 어쩔 수 없는 결정에 대해 알고 있기는 했다. 또한 대사형이 이미 검려에서 나갔으며, 동이성 백성을 위해서는 그가 경국 군대 앞에 무릎을 꿇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동이성 관원이 아닌 자유로운 몸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강호인이었다.
강호인에게는 강호인만의 행동 준칙이 있으므로 그들을 속박하는 굴레는 없는 거였다. 이에 검려 제자들은 산과 들을 가득 메우며 놀라운 기세로 국도를 통해 들어오고 있는 경국 기마병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 눈에는 두려움 대신 한없는 분노와 전의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천하 9등급 강자 중 절반이 이곳에 있었으니 그들로서는 두려울 게 없다.
말에 타고 있던 1 황자는 고집스레 몸을 낮추지 않는 검려 제자들을 싸늘한 시선으로 잠시 바라보고는 무언가 말하려 했다. 그런데 순간 사선 방향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음성에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그건 맑고 청아하지만, 한편으로는 살짝 피로가 묻어 있는 담담한 음성이었다.
“검려 제자들은 명을 들으시오.”
범한이 양 눈을 살짝 감고는 말을 이어 갔다.
“성으로 돌아가 성주부의 치안 유지를 도우시오.”
아무리 그래도 너무 황당한 핑계를 댄 터라 범한도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안 거였다. 애당초 검려 제자들을 이곳에 오도록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이들은 고수 중 고수였고, 모두 대쪽 같은 성격에 남에게 굴복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특히나 이백화와 왕 십삼랑의 경우는 하나는 천하제일 전장의 주인장이고, 다른 하나는 대종사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는 강자였다. 그러니 이런 이들이 어떻게 일국의 위력과 권세에 고개를 숙이겠는가.
동이성이 확실히 혈기는 많지 않다 쳐도, 전체 혈기에서 적어도 9할은 검려 제자들이 간직하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검려 문주의 명이 떨어지자 검려 제자들은 감히 항명하지 못했다. 작은 범 대인이 자신들에게 퇴로를 열어주었음을 알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한동안 대치 상태가 이어지자 결국 이백화가 나서서 노련하고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는 일단 잠시 침묵했다가 길게 탄식을 했다. 그런 후 소리 없이 양 눈가에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암담한 모습으로 사제들을 데리고 성 안쪽으로 향해 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터주었다.
왕 십삼랑은 둘째 사형을 따라가지도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범한 옆에 냉랭한 모습으로 서서 기세등등한 경국 기마병들을 안하무인의 자세로 주시했다.
1 황자가 깊은 뜻이 담긴 듯한 눈빛으로 범한을 쓱 보고 나자 옆에 있던 대 태감이 들고 있던 성지를 펼쳐 들었다. 대 태감이 의장 앞에 꿇어앉아 있는 동이성 관료, 상인들을 향해 낭랑한 목소리로 성지를 읽어 내려갔다.
“선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짐이 몹시 슬프고 마음이 편치 않았노라. 선생의 높은 의와 백성을 중시 여긴 마음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며…….”
범한은 국도 한쪽에 서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성지의 내용을 차분하게 경청했다. 그러다 성지에서 과거와 다른 점을 발견했다. 정해진 격식대로 작성된 것이었지만, 분명 황제 폐하의 어투로 쓰여 있었다. 더군다나 글에 담긴 슬픈 마음과 경의(敬意)는 절대 허위가 아니었다. 적어도 동이성에서 사고검을 죽인 이로 취급당하고 있는 경국 황제로서는 그야말로 의외의 행동을 한 거였다.
성지에는 정말 긴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경국 황제의 동이성 백성을 향한 안부 인사 및 천하통일이 백성에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게 구구절절 진정성 있게 담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황제 폐하는 운지란을 동이성 성주로 임명했고, 때를 정해 경도로 들어와 정식으로 책봉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맨 앞에 꿇어앉아 있던 운지란에게 성지 내용은 의외랄 것이 없었다. 동이성 성주라는 위치는 담판을 통해 갖게 된 것이기는 했어도 이 직을 계속 유지하려면 경국 황제가 친히 책봉해야 해서였다.
운지란이 침울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켜 두 손으로 성지를 받아들고는 다시 절을 했다.
의식은 계속되었다. 이는 정복과 피정복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정말 복잡하고 중요한 의식이었다.
1 황자가 말에서 내려 범한에게 다가왔다. 그가 범한을 잠시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아까 잘못했구나.”
범한은 이 친한 형님이 한 말 뜻을 알아들었다. 아까 검려 제자들을 떠나게 한 걸 지적한 거였다. 이에 범한이 한동안 침묵한 후 대꾸했다.
“제가 지금 너무 피곤해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하나 검려 제자들의 태도도 봐야 하지 않겠는가.”
1 황자가 따스한 눈길로 범한을 바라보았다. 안정을 되찾은 그가 매우 엄숙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하나, 이미 충분히 잘 하였느니라…… 내 보기엔, 온 천하에서 이 일을 자네보다 더 잘한 사람은 없을 것이야.”
그러자 범한이 살짝 웃어 보이기만 할뿐 이 말에 대해서는 대꾸하지 않고 다른 말로 받아쳤다.
“검려 제자들의 태도를 황제 폐하께 보여드려야겠습니다.”
그런 후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옆에 있는 왕 십삼랑에게 말했다.
“십삼랑, 자네는 대군의 진주(進駐) 의식을 책임지게나.”
그러자 줄곧 침묵하고 있던 왕 십삼랑이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그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범한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지만, 그 뜻만큼은 명확했다. ‘왜 하필 저입니까?’였다.
“자네가 간단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 그러네.”
범한이 왕 십삼랑에게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댔다.
“내가 자네로부터 배운 게 좀 있지. 하여 자네가 무언가를 간단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이 세계도 자네를 간단히 대해줄 것이네.”
1 황자가 살짝 의구심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범한이 왕 십삼랑을 토닥이며 말을 이어 갔다.
“자네가 이 일을 조금 더 간단하게 봤으면 하는 바람이랄까.”
* * *
검려 13번째 제자인 왕희가 기마병 앞에 섰다. 그런데 뜬금없이 여러 해 전 상문 낭자가 자신을 데리고 아가씨들을 고르러 갔던 그 밝았던 오후가 생각나 유감스러우면서 머리가 아파왔다.
그런데 왕 십삼랑은 이제야 안 거였다. 그날 오후를 시작으로 범한이 본인의 인생을 그의 인생과 한데 묶기로 결정한 거였다. 이에 간단하게 받아들이는 왕 십삼랑은 이 점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고는 이내 간단하게 받아들여 버렸다.
* * *
경국에서 파견한 1만의 주군(駐軍)은 당연히 동이성 사방에 배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동이성은 천하에서 제일로 큰 성으로 군인 1만 명이 막사를 지을 만한 후방 공간은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부 이유 때문에 원래는 닷새면 다 지어져야 하는 새 군영이 지금까지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일부 경국 군은 잠시 임시 숙영지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에 최종적으로 동이성 쪽에 5,600여 명만 남고 나머지는 각 제후소국에 나누어 주둔하게 되었고, 이는 탄압과 위협으로 비추어졌다.
그날 저녁, 대연회를 마친 1 황자는 서둘러 휴식을 취하러 가지 않고 범한을 향해 가볍게 손을 내저어 부른 후 함께 조용한 서재로 들어갔다.
1 황자는 일단 침묵했다. 그러다 우선 품에서 서한부터 한 장을 꺼냈다. 범한은 그것을 곁눈질로 힐끔 보았다. 그리고 서한 봉투의 형태를 알아차리고는 무릎을 꿇고 황제 폐하의 밀지를 받으려 했다. 한데 뜻밖에도 1 황자가 범한을 일으켜 세우며 무릎 꿇는 걸 막았다.
“우리 둘뿐 아니냐. 무엇하러 무릎을 꿇는 고생을 하는 게야.”
1 황자가 잠시 가볍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범한은 살짝 놀랐지만 이내 천천히 웃기 시작하며 더는 절을 하지 않았다. 범한이 1 황자로부터 황제 폐하의 밀지를 받아든 후 봉투를 뜯고 내용을 천천히 살폈다. 그동안 범한은 생각에 빠져 있느라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제가 먼저 경도로 돌아가고, 마마께서 대신 이곳에 3개월 동안 있으라 하십니다.”
서한에 담긴 황제 폐하의 어투는 따스했고, 언뜻언뜻 범한을 아끼는 마음도 드러나 있어 범한은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다. 이에 그가 편안한 목소리로 1 황자에게 말했다.
“이리 안배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하나 문제는 나중에 마마께서 다시 경도로 돌아가실 때 제가 이곳으로 돌아와 교대해야 하는데, 설마 우리 둘이 이런 식으로 영원히 동이성을 오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
동이성을 최대한 조용하게 정복하려면 경국의 국력, 재정력, 군사력을 최대한으로 투입하는 게 좋은 거였다. 그러니 1 황자와 범한이라는 두 황자는 동이성 혈통의 아들로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좋은 선택지였다.
비록 1개월 전 검려 개방 의식 때 포기를 모르는 사고검이 유서를 통해 범한을 동이성 사람이 되도록 끌어들여 경국 황제의 마음을 찌르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경국 황제는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가 사고검의 의도를 간파해내지 못할 리 없었다. 이에 황제는 세를 따랐고, 처음 먹었던 생각을 바꿔 1 황자에게 경국 군을 데리고 가 진주하도록 했다.
1 황자든 아니면 범한이든 모두 절반은 동이성 혈통 아닌가. 이 점은 동이성의 민심을 정복하는 데 있어 최상의 이기(利器)였다. 적어도 정복당한 사람 입장에서 자신의 머리를 짓누르는 사람이 절반은 동이성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면, 분명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건 있을 것이었다.
특히나 1 황자는 신분이 확실한 황자이고, 생모의 신분은 천하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1 황자가 동이성에 주둔하는 것만으로도 경국과 동이성 간에 피가 섞여 있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거였다. 한 나라를 제대로 정복하려면 피를 섞는 게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유력한 무기인 것이다.
황제 폐하는 그야말로 정말 멀리 바라보고 있던 거였다.
하지만 황제 폐하도 1 황자와 범한이 장기간 동이성에 머무는 건 윤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첫째, 지금 그에게는 성년이 된 황자가 둘밖에 없었고, 또한 그들이 옆에서 조정과 군사 업무를 보좌해 주어야 해서였다. 둘째, 아들들이 경도에서 너무 먼 곳에 나가떨어져 있으면 이씨 가족에 속한 황자라는 느낌이 많이 희석되는데, 경국 황제도 이 점은 은근히 걱정한 거였다.
범한도 황제 폐하의 이와 같은 걱정에 대해 잘 알고 있던 터라, 밀지 내용 때문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골치는 좀 아팠다. 1 황자 마마가 왔으니 자신은 떠나야 하는데. 나중에는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군가는 동이성에 상주해야 하는군요.”
범한이 1 황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누구를 생각하고 계신 것입니까? 마마입니까, 아니면 저 입니까?”
“나도 모른단다.”
1 황자의 미간에 옅게 걱정이 드리워졌다. 그는 평범한 경국 관원도 백성도 아니었다. 범한이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사고검을 설득해 검려를 거두어들이고, 동이성의 토착 백성들을 경국 지도 안으로 편입시킨 데에 대해 1 황자도 무한한 기쁨과 놀라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과정이 과연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을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는 중이었다.
특히나 오늘 동이성 밖에서 만 명의 경국 기마병이 대부분 동이성 사람들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위협했다고는 해도, 검려 제자들의 행동으로 1 황자는 경계심이 생긴 터였다.
1 황자가 범한을 그윽하게 잠시 바라본 후 말을 이어 갔다.
“검려 일에 관해 황제 폐하께서는 아무 말씀 안 하셨다만, 이번 행동과 관련해 살짝 달갑지 않아 하시는 건 분명해 보였단다.”
“그때는 사정상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가 그때 검려를 받지 말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어야 했어요.”
범한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마마께서도 제가 떡 사이에 낀 기름진 고기소나 되길 바랐다고 생각하십니까?”
“부황의 뜻은 명확하셨어. 적어도 네가 돌아가서 상황 보고를 하는 거…….”
1 황자가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고는 이내 탄식을 내뱉었다.
“나는 잠시 교대해주러 온 거란다. 부황께서는 내가 동이성에 장기간 주둔하는 걸 원치 않으시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