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593
934화 돌아가는 길 그리고 피 (1)
서로 50장 떨어져 있는 가운데, 천자의 검을 꽉 움켜쥐고 있던 범한이 순간 착각에 빠져들었다. 왕 십삼랑의 일격은 담담했지만, 과거 동이성 성주부에서 그림자가 수십 년 공력과 원한 담긴 마음을 응축시켜 휘두른 경천동지할 검 공격을 보는 것만 같았다.
범한이 말없이 멍하니 왕 십삼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참 후 짧게 말했다.
“참으로 패도적인 검격이군.”
말을 하고 난 후에야 안 거였지만 범한의 목소리는 살짝 쉬어 있었다. 왕 십삼랑이 간단하게 휘두른 검 공격을 피하기 위해 체내 정기를 순식간에 잔뜩 끌어 올린 탓에 폐 쪽 맥이 다친 거였다.
범한이 깊이 심호흡했다. 그러자 창백해졌던 얼굴이 점점 평소 혈색으로 돌아왔다. 그가 그윽한 시선으로 왕 십삼랑을 잠시 바라보았다.
“오로지 앞만 보고 공격하는 게, 확실히 자네의 방식이군. 한데 과거의 자네는 이리 빠르지도 강력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패도의 정기를 익혔거든요.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 공결의 의미에 대해 깨달은 건 있지요.”
왕 십삼랑은 검 공격이 실패하자 천천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지나치게 욕심 부리면 감당해내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하여 내 손에 검이 있는데 무엇 하러 경국 황제의 절학을 배울 필요가 있을까요?”
무명의 공결은 너무 패도했다. 특히나 첫 번째 관문을 넘어설 때는 정신적과 신체가 완전히 갈기갈기 찢겨야 하고, 충돌해야 했다. 그건 주화입마 되는 것처럼 통제가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과거 범한이 이 관문을 쉬이 넘을 수 있었던 건 모두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 침상에서 지낸 세월 때문이었다. 일찌감치 온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뇌 활동만 하는 식물인간의 세월을 경험해서였다.
그래서 왕 십삼랑은 절대 패도 공결의 길로 들어설 수 없다는 걸 범한으로서는 충분히 알 수 있었고, 그건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범한을 놀라게 한 건 왕 십삼랑의 깨달음 정도였다. 뜻밖에도 짧은 시간 안에 패도 공결의 위험성을 알아차려 버리다니. 더군다나 높은 지혜로 패도 공결에 관해 더 파헤쳐 나가는 걸 중단해 버리다니.
“만약 조금 전 내가 자네의 검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면, 나를 죽일 생각이었나?”
범한이 입꼬리를 올리고 살짝 비웃듯 물었다.
왕 십삼랑이 한동안 침묵한 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 조금 피곤했는지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살짝 축축한 모래사장 위에 그냥 앉아버린 거였다. 얼핏 보기에는 간단한 검 동작이고, 기본적인 팔꿈치 굽히는 동작이었다. 하지만 엄청나게 폭발력 있는 속력에 대단히 결연한 태세까지 담겨 있다 보니, 정력을 이미 많이 소모한 거였다.
왕 십삼랑은 짧은 시간 내에는 더는 같은 강도로 두 번째 검 공격을 펼칠 수 없는 거였다. 그림자가 성주부에서 그와 같은 검 공격을 사고검에게 딱 한 번 펼쳤던 것과 비슷한 듯했다.
그 점을 간파해낸 범한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왕 십삼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을 담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욕심 부리다 감당하지 못하는데, 자네는 판단이 참 빠르군. 나는 예전부터 많이 배워둔다고 해서 짐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설마 내가 틀린 것인가?”
범한의 눈에서 옅게 의문이 스쳤다.
“천하 사대종사에 내 맹인 아저씨까지 더하면 모두 다섯 문파의 절학이 있지. 그중 나는 이미 네 개 문파를 섭력했다네. 섭류운의 류운 산수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비결은 알아낸 편이고.”
범한이 왕 십삼랑 앞에 앉아 그의 면전에서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천하는, 아니지, 예로부터 지금까지라고 말해야겠군. 지금까지 그리 많은 절학을 배운 사람은 나 하나뿐이야. 하나 오늘 나는 자네의 검 공격에 뒤로 후퇴했지 뭔가. 그리 많이 배워 놓고도 아무 쓸모도 없었던 거겠지?”
“그리 많이 배웠다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왕 십삼랑은 심성이 단순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임대보 같은 부류는 아니어서 범한 마음속에서 점점 차오르고 있는 좌절감을 민감하게 감지해냈다. 그런 왕 십삼랑이 범한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하나 어느 문파의 무공이든 중요한 건 집중을 해야 하지요. 평생 수련하며 완벽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더욱이 대종사께서 남기신 절학이니……. 대인은 20년이란 짧은 세월 동안 네 문파의 절학을 최고 경지까지 수련했으니, 그것만으로도 남들 입을 떡 벌리게 만들 정도는 된 거지요.”
범한은 4대 종사의 절학을 수련해 놓고도 왕 십삼랑의 검 공격에 잠시 후퇴해야만 했다. 이에 순간 사고검, 황제 아버지의 경지가 떠오른 범한은 암담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왕 십삼랑이 범한의 양 눈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대인은 깨닫는 능력이 탁월하지 않습니까. 특히나 기본기가 탄탄하고, 더군다나 운까지 좋고……. 대인이야말로 분명 천하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일 것입니다.”
“내 깨닫는 능력은 중간 정도밖에 안 되네. 특히나 자네와 해당타타 앞에서는 더더욱 그러하지.”
범한이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내 스스로에게 기댈 수 있는 건 근면함뿐일세. 다만 사람의 능력과 시간은 한계가 있는지라, 내가 아무리 배는 더 근면하게 노력한다 해도 그 종이는 도무지 깨우칠 방법이 없더군.”
오늘 범한은 왕 십삼랑의 천외(天外)의 검 공격을 맞아 멋지게 피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줄곧 소맷자락과 체내에 숨기고 있는 절학이 있었다. 그리고 특히나 음험하게 전투를 하는 성격과 감찰원에서 얻은 그 기교들까지 있으니…… 그는 세상 그 어떤 9등급 강자가 와도 모두 격퇴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다. 왕 십삼랑도, 어쩌면 해당타타도, 또 어쩌면 랑도와 운지란도 그와 맞붙으면 죽는 쪽은 분명 상대방일 거라 생각했다.
섭류운이 이 세계에서 떠난 후, 권세와 수련한 수준을 놓고 따지면, 어찌되었든 범한은 천하 2인자였다.
왕 십삼랑 역시 범한이 쉽고 가뿐하게 미끄러지듯 후퇴하는 걸 보고 그 점을 느꼈다. 마음속에서 담담하게 경외심이 인 그가 범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상대방은 이제 겨우 스무 살을 조금 넘긴 젊은이일 뿐인데 어떻게 이 정도의 경지까지 올라설 수 있는 건지.
천하 세 젊은이의 경지를 비교해 보면, 범한이 두 사람보다 더 악랄하고 수단도 더 많았다.
“아까 후퇴할 때 어떻게 한 것입니까?”
왕 십삼랑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범한에게 물었다.
그러자 범한은 한동안 침묵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단지 고개를 돌려 바다 위에서 출렁이는 새하얀 포말만 주시할 뿐이었다. 동이성에서 지낸 지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다. 고하 대사가 남긴 그 책자는 그의 머릿속에 이미 각인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매번 해변에서 명상할 때 그 글자들이 그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비록 대부분의 뜻은 알 수 없지만 대단히 현묘하게도 그것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몸 안팎에서 아주 미세한 인자들이 상호 호응을 하는 것만 같았다.
범한은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했고 동작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체내 정기의 회복 속도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천지간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원기가 언제든 생각만으로 그의 소모한 부분을 보충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데 이와 같이 정기가 보충되는 현상은 범한을 두렵게 만들었다. 설마 이런 게 정말로 서방의 법술이란 말인가? 내력을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인간은 공포감을 가지게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범한을 심드렁하게 만드는 건 그 작은 책자가 범한에게 가져다 준 변화가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거였다. 보충을 해주는 속도도 느리고, 경지를 올려주는 것도 너무 적어서…….
천하 2인자라니. 영원히 천하 2인자로 남아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이 순간, 범한은 자신이 크나큰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하 대사든 사고검이든 섭류운과 황제 폐하든 이들은 모두 인간계 정점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그러니 의지의 굳건한 정도며 열심히 수행한 정도는 분명 자기보다 훨씬 위였을 터. 하지만 대종사들은 평생 자신의 절학만을 연마하며 절대 한눈을 팔지 않은 것도 있었다.
반면 자신은 너무 많은 걸 배웠고, 너무 많은 걸 할 줄 알아 너무 어수선한 상태였다.
범한에게 어쩌면 왕 십삼랑과 해당타타가 훗날 그 종이에 있는 내용을 자기보다 훨씬 쉽게 터득할 거란 느낌이 들었다. 이는 사고검이 말해준 마음이란 것 때문이다. 범한이 봤을 때 자신은 두 사람보다 아직 굳건한 마음을 갖고 있지 못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는 두려움이 너무 컸고, 그래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줄 다른 방법을 찾고 있어서였다.
이처럼 고심하는 것 때문에 범한이 두 사람보다 떨어지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범한은 정말로 두려웠다. 죽을까 봐 두려웠고, 자신이 관심 갖고 있는 사람들이 죽을까 봐 두려웠다.
“며칠 후 경도로 돌아갈 거네.”
범한의 입가에 갑자기 미소가 지어지더니 그가 부드럽게 말을 이어 갔다.
“동이성이 혼란스럽지 않다면, 적어도 눈에 보이는 천하는 태평한 셈이네. 하여 내가 무엇 하러 그 많은 걸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다. 동이성이 경국 영토로 편입된 후 끝없이 동란이 일기는 했지만, 경국의 강대한 군사력이 그들을 억누르고 있었다. 또한 동이성 상층부 사람들로부터 조력도 받고 있으니 큰 풍파는 일지 않을 터였다.
경국 황제 폐하는 여전히 범한을 신임했고, 진평평도 이제 곧 여생을 요양하며 보내기 위해 경도를 떠날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며 해풍을 맞고 있는 범한은 그 어느 때보다 상쾌했다. 오죽 아저씨가 돌아올지 여부를 떠나, 이런 추세로 나아간다면 황제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두 번째 길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였다.
피를 보는 게 필수는 아닐 수도.
* * *
하지만 피는 꼭 봐야 하는 거였다.
초가을 바람이 동이성 뒤쪽에 자리 잡은 낮은 산을 훑고 지나갈 때 범한은 드디어 동이성 내 대부분 사무를 다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1 황자와 운지란이 돌아오면, 동이성이 경국으로 귀순한 후 발생한 첫 번째 동란의 불씨도 드디어 양측의 협력으로 소양국 국경 안에서 꺼지는 거였다. 고 선생이라는 큰 학자의 분신으로 촉발된 화염은 곧바로 핏물로 진압되어 그 불씨가 오래가지 않았다.
소양국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모두 4백 여 명. 일부 혈기 왕성한 동이성 사람이 불행하게도 그 피바다 속에 쓰러지고 만 거였다.
범한은 상주문을 대부분 다 읽은 후 1 황자 마마에게 인수인계를 하고는 마차를 타고 동이성을 떠났다. 경도로 다시 업무 보고를 하러 가야 해서였다.
한 나라를 정복하면 원정을 나온 신하들, 연속되는 긴장과 바쁜 생활, 살육도 따라붙을 수밖에 없다.
1 황자는 범한과 헤어진 후 주군을 데리고 동이성 곳곳의 동정을 옆에서 차분하게 지켜보았다. 이때 1 황자와 범한은 대세가 정해졌다는 생각에 이렇게 천천히 고민을 해나가다 보면 경국 조정이든, 천하대세든 모두 통제할 수 있는 범위에 놓이게 될 거라 보고 있었다.
이에 이들 형제는 기분이 꽤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가을이라 날씨도 좋아 기분은 더 없이 상쾌했고 둘 다 모든 번민에서 벗어나 있었다.
심지어 범한은 잠시 십가촌 문제며 과거 문제에 대해서도 잊고 있었다. 조정에서 잘 나가는 하종위가 눈에 좀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건 근본적으로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