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636
977화 빗속에서 진평평과의 이별 (2)
사형장인 나무로 만든 작은 대에서 구슬픈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울음소리는 가을바람과 가을비를 뚫고 황궁의 상하좌우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가 모든 이들의 귀로 파고들었다. 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간 슬퍼하고 또 오싹함을 느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소리가 몇몇 누군가의 귀로 들어갔을 때는 짙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킨 것은 물론, 명확한 다른 신호가 되어 있었다.
진 노원장이 드디어 죽은 거였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 일로 몰래 기쁨의 춤을 추거나 또는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비바람 속에 서 있던 관리들은 얼굴에 아무런 감정을 내비추지 않았다. 비애란 감정이 언뜻 눈동자를 스치고 갔을 수는 있었겠지만, 대개는 엄숙함과 살짝 긴장한 모습이었고, 마음속은 담담하면서도 멍한 상태였다.
대경국 왕조의 대들보를 떠받치고 있던 기둥 하나가 이렇게 쓰러졌다. 그러자 어둠의 감찰원에게 수십 년 동안 압박 받으며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그리고 조정 내 정쟁에서 물과 불처럼 지냈던 문관들에게 느닷없이 오싹한 기분을 들었다. 감찰원의 조상격인 제일 큰 인물이 그냥 이렇게 죽었다고? 그들은 순간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이 보기에 온 몸에 시커먼 안개를 두른 그 두려운 인물은 영원히 죽을 리 없을 것만 같아서였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진평평의 사망으로 무수히 많은 화면을 떠올렸다. 그건 비바람이 몰아 친 경국 몇십 년간의 화면이었다. 그 누구도 진평평이 경국 강산을 위해 세운 업적과 공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역사라는 길고 긴 족자를 환하게 밝혀준 짙은 묵적은 이 사람 및 이 사람이 만든 감찰원에게서 온 거였으니까. 그러니 이 묵적이 없었다면, 이 긴 역사의 족자가 어찌 활기를 띌 수 있었겠는가?!
범한의 울음소리가 비바람을 뚫고 높은 황성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용포를 입고 압도하는 듯한 기세로 서 있는 경국 황제 폐하가 아주 미세한 움직임을 보였음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그는 아래쪽을 향해 몸을 아주 살짝 숙였다.
대략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높이로 몸을 움직이고는 한참 후 다시 사납게 허리를 쭉 폈다. 이로써 자신의 무정한 얼굴과 비를 맞으며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는 사형장과의 거리를 원래 상태로 되돌렸다.
그러니 황제 폐하가 용포에 감춰두고 있던 양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는 걸 알아차릴 사람은 없었다.
그 순간 황제는 자신을 수십 년 간 따랐던 늙은 동료이자 늙은 종이 죽은 걸 지켜보고 있었다. 별 볼 일 없던 세자 시절부터 천하에서 가장 이목을 끄는 강자가 될 때까지, 자신을 지켜봐온 오래된 동료가 이렇게 의연히 죽어버렸는데, 황제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또 어떤 느낌이었을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공허함이었을까? 아니면 자신도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어디에서 나온 건지 모를 분노였을까?
황성 아래에 있던 언빙운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것도 옆에 있는 관원들보다 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몸은 사형장 방향을 향하고 있어서 장대비 사이로 작은 범 대인이 노원장의 시신을 안고 우두커니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몸이 살며시 떨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래 전의 일인지 정확히 생각나지는 않지만, 감찰원의 네모반듯한 건물 안에서 노원장이 자신에게 한 말들을 떠올라서였다.
나는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지만, 범한은 미쳐 날뛸 것이니라…….
* * *
언빙운이 고개를 홱 치켜들고 한 차례 심호흡을 한 후 얼굴에 묻은 빗물을 닦아 냈다. 그리고 암암리에 여기저기에 명령을 내보냈다. 구경꾼 사이에 있던 밀정들에게 언제든 손을 써 곧이어 벌어질 범한의 발광을 최소한의 범위 안에 묶어두도록 한 거였다. 물론, 언빙운은 그 모든 게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랐다.
* * *
당사자가 죽었다고는 해도 능지처참하는 형 집행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망나니가 범한에게 두 동강이 났으니, 이 형 집행은 더는 계속할 필요가 없어졌다. 가을비는 여전히 처량하게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황궁 앞 광장에 모인 이들은 곧이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기라도 하는 듯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사형장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고행자들이 천천히 나무로 만든 대를 향해 나아갔다. 그들이 쓰고 있는 삿갓은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표정까지 가려주고 있었다. 범한은 대 아래에서 다가오고 있는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대 위에서 멍하니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진평평의 시신을 끌어안은 채 놓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눈물은 빗물과 섞이면서 언제부턴가 점점 멎고 있었다. 범한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몸을 휘청였다. 며칠 밤낮 동안 천 리 길을 내달려오다 보니 기력이 바닥을 친 거였다. 그리고 본심에서 나온 분노와 슬픔 때문에 그의 정신도 좀 쇠약해진 징조를 보인 거였다.
하지만 대 주변에 있던 고행자들은 비를 맞으며 휘청인 범한의 모습에도 크게 놀라 본능적으로 뒤로 살짝 물러섰다.
범한은 진평평의 시신을 안은 채 나무 대 아래로 멍하니 내려오면서 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범한에게는 그들이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고행자들은 나무로 만든 대 주변을 포위한 채 황궁 위쪽에 계신 구오지존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 * *
황제 폐하는 창백한 얼굴로 황성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윽한 눈동자에서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현공 사당에서의 일을 시작으로 그는 범한을 좋아하게 되었고, 저 아들이 정과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범한이 서둘러 돌아온 건 예상하지 못했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 건 그에게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우리들의 황제 폐하께서는 걱정 같은 건 전혀 없으셨다. 그에게 안지는 진평평이란 저 늙은 검둥개에게 속은 불쌍한 아이일 뿐이었다. 그리고 안지가 오늘에서야 진평평이 짐을 얼마나 죽이고 싶어 했으며, 짐의 아들들을 죽여 대를 끊어 놓고 싶어 했는지 등등을 대략적으로나마 알게 되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범한이 쓸쓸한 모습을 보이자 황제는 슬픔과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슬픔은 범한의 행동 때문이었고, 분노는 진평평이란 저 늙은 개가 죽어 놓고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마음을 쉬이 빼앗아 간 때문이었다.
이미 여러 해 전에 죽은 그 여인처럼 말이다.
황제는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동안 강제로 압박해두고 있던 상처가 요동치는 정신 때문에 서서히 벌어져 가슴과 배에 피가 흐르고 용포 밖에까지 베어 나와 깜짝 놀란 탓이었다.
황제가 소맷자락을 털고는 냉담한 얼굴로 황궁 성벽 위를 떠났다.
황궁 아래쪽에서는 범한이 진평평을 품에 안고 빗물에 젖은 나무 대에서 떠났다. 범한은 광장 서쪽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유난히 느리고 무거웠다. 그때까지 범한은 황궁 성벽 꼭대기를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황제 폐하께서 물러나셨으니 이 세상에서 감히 범한의 앞길을 막을 자는 없었다. 이에 모두들 본능적으로 범한에게 길을 터주었다. 그러자 사람들로 이루어진 바다에서 물결이 일고 두 갈래로 갈라져 암초가 보이는 길이 생겨났다.
범한은 그렇게 비를 맞으며 진평평을 품에 안고 떠났다.
* * *
초가을로 접어들어 느닷없이 내린 두 번의 비는 미묘한 분위기만 남겨놓고는 갑자기 뚝 그쳐 버렸다. 첫 번째 비는 진평평의 귀환을 환영하기 위해 내린 것만 같았고, 두 번째 비는 세상을 떠난 진평평을 배웅하기 위해 내린 것만 같았다. 황궁 앞 사형장에서 모든 게 끝나자 무성히 내리던 가을비도 그렇게 뚝 멎고 하늘에 있던 먹구름도 물러나 높고 깨끗한 하늘이 드러났다. 그러자 거리와 푸른 기와를 적신 빗물을 제외하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경도 백성들은 오늘 이리 놀라운 광경을 봐 놓고도 그 누구도 감히 입도 뻥끗할 수 없어 그냥 왔던 길을 따라가며 조용히 흩어져 버렸다. 황궁 앞에 있던 관원들은 이제 뭘 해야 좋을지 몰라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황제 폐하께서도 회궁 하셨고, 작은 공작 어르신께서도 노원장의 시신을 안고 떠났고, 또 주룩주룩 내리던 비도 한데 모일 생각이 없자 그들은 그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급습하기 위해 경도로 돌아오느라 범한과 흑기 500명은 경국 법률과 감찰원 규정을 수도 없이 위반했다. 더욱이 범한은 경도로 들어올 때 조정 관원 여럿을 손 가는 대로 죽였고, 황제 폐하가 친히 지켜보는 사형장에서도 큰 소란을 일으킨 터였다. 그러니 원칙대로 따져본다면, 범한은 절대 용서 받지 못할 대죄를 저지른 거였다. 하지만 황제 폐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누가 범한을 벌하고 또 누가 범한의 죄를 다스릴 수 있을까?!
바로 이때, 호 대학사가 황궁 성벽 꼭대기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여러 관원들이 그에게 속히 예를 차려 인사를 했다. 오늘 호 대학사는 줄곧 침묵을 유지했다. 그가 나무로 만든 대 위의 빗물에 씻겨 희미해진 혈흔을 보며 돌연 미간을 잠시 찌푸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세 열 몇 살은 더 늙은 듯한 전임 학사 서무가 관리들과 인사도 나누지 않고 성 담벼락을 따라 쓸쓸히 떠나는 게 눈에 들어왔다.
호 대학사는 마음이 좀 암담했다. 하지만 자신은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 대인이 이미 황궁으로 들어갔으니, 어떻게든 이곳 일은 자신이 갈무리해야만 했다. 그가 6부 3사 3원의 관원들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형 집행이 끝났으니, 성문을 열고 모든 걸 평소대로 돌려놓읍시다.”
황궁 앞에 있던 관원들은 호 대학사의 말에 저도 모르게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이제 작은 범 대인 일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줄곧 공황상태에 처해 있던 터였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니, 적어도 단시간 동안은, 황제 폐하는 본인의 분노를 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고, 이 위험한 작업을 신하에게 처리하도록 맡길 리 없어 보였다.
호 대학사는 대신들의 반응에는 일단 관심을 끄고 살짝 실눈을 뜨기 시작했다. 6부 3사 3원 소속 중에 감찰원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는 지극히 당연한 거였다. 감찰원 8대 처의 주판(主辦: 수장을 의미)들은 모두 감옥에 갇혀 있었고, 작은 언 대인은 일찌감치 몰래 자리를 떠난 것으로 보여서였다.
안팎의 공조로 감찰원만 통제되고 있는 게 아니었다니. 호 대학사의 미간에서 한 가닥 무거운 기색이 흘렀다. 황궁이 누군가에 의해 통제되고 있음을 알아차린 거였다. 오늘 새벽 죽음을 무릅쓰고 황제 폐하께 간언을 올린 영 재인과 정왕야만 봐도 지금 황궁 안에 연금되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는 터였다.
더군다나 범씨 가문의 여식은 어젯밤에 황제 폐하의 상처를 치료한 후 아직도 황궁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일들과 아직까지 감찰원 밖을 지키고 있는 만 명의 경국 정예 부대가 머릿속에 떠오르자 호 대학사는 심장이 오싹했다. 이에 그는 어떻게든 속히 범한을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황궁과 맞설 수 있는 실력과 담력을 겸비한 작은 공작 어르신을 만나 무언가 말을 해줘야만 한다고 생각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