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64
063화 입실
마차에서 내린 섭령아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길을 통해 일행을 안내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호위병이 저택 문 앞에서 일행을 막아섰다. 섭령아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왜 막는 거지?”
호위병이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는 자유롭게 들어가실 수 있지만 다른 분들은 안 됩니다.”
섭령아가 활짝 웃으며 범약약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분은 경도에서 재원으로 유명하신 사남 백작가의 아가씨야.”
설명하던 섭령아가 범약약을 힐끗 바라보고는 부연 설명을 했다.
“만 리 쓸쓸한 가을에 나그네가 되는 사람의 누이이기도 하지. 들어갈 수 없을까?”
‘만 리 쓸쓸한 가을에 나그네가 되는 그 사람이 누구지?’
수수께끼 같은 말에 호위병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 만 리 쓸쓸한 가을에 나그네가 되는 사람은 당사자는 섭령아 뒤에 숨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섭령아가 피식 웃으면서 설명했다.
“오늘 아가씨를 진찰할 의원을 데리고 왔는데도 막을 건가?”
호위병이 고개를 돌려 못생긴 꼽추 의원을 바라보았다.
‘본인 몸이 저러면서 군주의 병을 진찰하겠다고?’
하지만 섭령아의 체면을 생각해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황궁 호위병들은 많든 적든 섭가 집안과 사제 간으로 얽혀 있었다. 호위병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백작가 아가씨까지는 어떻게 해볼 수 있지만 의원이 들어가는 건 정말 안 됩니다. 황궁 소속도 아닌 일개 의원이 치료했다가 만일에라도 잘못되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범한은 이렇게 힘들게 와서 정혼자의 얼굴도 못 보고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초조해졌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게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범한이 경묘를 방문했을 때 일어난 사건 때문에 홍 태감과 대장군에게 호된 질책을 받은 호위병들은 경비를 더욱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뭐라는 거야? 이분은 감찰원 비개 대인의 제자야.”
섭령아가 호위병의 눈을 노려보았다.
비개 대인이란 말에 호위병이 반걸음 정도 뒤로 물러서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비개 대인의 제자라고요? 그런데 어떻게 여태껏 들어 본 적이 없는 겁니까?”
호위병의 말에 섭령아의 표정이 바뀌었다. 비개 대인의 의술이 상당한 만큼 그의 제자라면 이름이 알려지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까지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걸까. 섭령아가 의심하는 눈초리로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그러자 범한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젓더니 일찌감치 준비해 뒀던 요패를 꺼내 보였다.
그가 꺼낸 것은 감찰원의 요패였다. 천하의 솜씨 좋은 장인들도 모방하지 못하는 것으로 범한이 여섯 살 때 비개가 담주를 떠나면서 그에게 준 것이었다.
요패를 통해 상대방의 신분을 확인한 호위병이 다시 범한을 바라봤다. 음침한 기색에 누누리끼리한 안색을 보니 비개 대인의 제자가 확실했다. 분명 독약이 가득한 곳에 있으면서 기괴한 모습으로 변한 것이리라.
일행을 들여보낼 확실한 명분이 생기자 호위병도 물러섰다.
조용히 저택 안으로 들어간 세 사람은 꽃밭에 있는 작은 자갈길을 통해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궁으로 걸어갔다.
세 사람이 들어오자 궁녀 차를 가지고 왔다. 궁녀는 행동에 절도가 있는 게 오랜 시간 궁 안에서 훈련을 받은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안에서 늙은 궁녀가 나왔다.
“오셨습니까.”
늙은 궁녀가 거만한 목소리로 말하자 섭령아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아무래도 둘의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는?”
“아가씨는 주무시고 계십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늙은 궁녀는 비록 공손하게 서 있었지만 말투에는 교만함이 묻어났다. 의외의 복병이 나타나자 범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오늘은 늙은 궁녀와 입씨름을 벌이고 싶지 않은 섭령아가 큰 소리로 외쳤다.
“임씨 아가씨를 위해서 의원을 모시고 왔으니까 얼른 가서 말씀드려! 아가씨가 준비되면 진찰을 할 수 있도록!”
늙은 궁녀가 범한을 힐끗 보고는 쌀쌀맞게 말했다.
“아가씨의 신분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어의가 아니면 보여 드릴 수 없습니다.”
섭령아의 말에도 물러서지 않는 걸 보니 밖의 호위병보다 다루기가 더 까다로워 보였다. 범한은 황가의 규정은 잘 몰랐지만 아직 출가하지 않은 여자를 이렇게 많은 궁녀가 지키고 있으니 행동에 제약이 많을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자신이 모시는 주인의 안전을 걱정하는 늙은 궁녀의 마음도 이해는 갔다.
점점 조급해진 범한이 범약약에게 몰래 눈짓을 했다. 그 뜻을 알아들은 범약약이 웃으며 일어나서는 섭령아에게 말했다.
“규정상 그러하다니 이만 돌아가자. 어쨌든 여기는 다른 곳과는 다르잖아.”
범약약의 말에 자존심 상한 섭령아가 벌떡 일어나서는 늙은 궁녀에게 고래고래 화를 냈다. 그 모습을 본 범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저렇게 성격이 난폭하니 앞으로 누가 가르치든 고생깨나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범약약이 늙은 궁녀를 위로하며 자리에 앉히고는 차를 건넸다. 아무 의심 없이 차를 마시던 늙은 궁녀의 안색이 급격하게 변하더니 헐레벌떡 어딘가로 달려갔다.
바로 그때 임씨 아가씨 방에서 소리를 들은 궁녀가 나와서는 늙은 궁녀가 자리에 없는 걸 보고는 세 사람에게 들어오라고 말했다.
섭령아는 비록 성격은 괄괄했지만 바보는 아니었기에 의심하는 눈초리로 범한을 바라봤다. 범한은 그 시선은 무시한 채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설사약, 마취 약 등 다양한 약들과 비수, 암살 석궁 등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자신을 보호해 주는 오죽만 있다면 그는 천하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규방으로 가던 범한은 이상한 향기를 맡았다. 방 안에 병자의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는 특별한 향료가 피워져 있는 게 분명했다. 다만 그 향기가 지나칠 정도로 짙었다.
섭령아가 먼저 규방으로 들어가 뭐라 말을 한 뒤 범약약이 들어갔다. 범한은 민감한 청력을 이용해 범약약이 임씨 아가씨에게 인사하는 소리를 들었다. 범한은 기침 소리와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병세가 나빠 보인다고 생각했다. 청력을 통해서 방 안의 장면이 어느 정도 그려지기는 했지만 자신의 정혼자를 본 누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소리에 집중하던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닭 다리 먹던 흰색 옷을 입은 여인을 그리워하면서도 오늘 이렇게 향냄새가 진동하는 정혼자의 집에 와서 상대의 얼굴을 궁금해하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들어오시랍니다.”
그때 섭령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범한이 몸을 곧게 펴고 안으로 들어갔다.
범한은 의원의 신분으로 위장해 처음으로 자신의 ‘정혼자’의 규방에 들어갔다. 그의 눈에 푸른 고둥 장식과 자색 유리를 붙인 침대 그리고 세 명의 여자가 보였다. 한 명은 섭령아, 다른 한 명은 범약약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고개를 숙인 채 침대 위 장막을 내리고 있는 궁녀였다. 장막 뒤 침대에는 임씨 아가씨가 누워 있었다.
범한이 마른기침을 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궁녀가 가져온 의자에 앉은 그는 의원처럼 턱수염을 쓰다듬다 턱에 붙인 가짜 수염이 떨어지자 급히 손을 내리면서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손을 내밀어 주시기 바랍니다.”
장막 뒤로 아가씨의 마른 몸이 어렴풋이 보였다. 범한의 말에 그녀가 천천히 왼손을 뻗어 부드러운 손목 베개에 놓았다. 손목 베개가 침대 옆에 놓여 있는 걸 보니 어의가 자주 와서 진찰하는 것 같았다.
범한은 옥처럼 하얀 손목을 보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손을 가진 사람과 혼인을 해서 앞으로 살 거란 생각을 하자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손가락 하나를 손목에 가져다 댔다. 범한의 손끝이 임씨 아가씨의 손목에 닿자 두 사람은 무슨 이유인지 동시에 가늘게 떨었다.
섭령아는 범한의 진맥을 방해하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녀는 예전에 들었던 비개 대인의 방법처럼 그가 손가락 하나만 사용해 진맥하자 속으로 비개의 제자가 맞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섭령아의 기대와는 달리 사실 범한은 1년 정도밖에 의술을 배우지 않았기에 의원이라 할 만한 지식은 없었다. 그가 일부러 손가락 하나를 사용해 맥을 짚은 이유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실력 있는 의원이라 믿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그에게는 현재 세계 사람들은 모르는 이전 세계의 지식이 있었다.
분장하지 않은 손가락은 얼굴과 다르게 매끈했다. 그가 사람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손을 거둬들이고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아가씨의 맥은 약하지만 정신은 강하십니다. 허함과 왕성함이 서로 교차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게 걱정스럽군요.”
“뭐라고요?”
“제가 아가씨의 얼굴을 보고 판단해도 되겠습니까?”
“안 돼요!”
궁녀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비록 경국의 풍조는 개방적이었지만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황제의 수양딸로 특수한 신분이었다. 어의도 볼 수 없는 얼굴을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풋내기 의원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범한이 약간 실망하며 화제를 돌렸다.
“어의가 폐병이라고 진찰했다고 들었습니다. 맞나요?”
“맞아요.”
그의 질문에 궁녀가 대답했다. 침대에 누운 임씨 아가씨는 기력이 쇠약해서 그런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폐병은 이전 세계에서의 폐결핵이었다. 그는 비록 이전 세계 치료제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여러 치료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가 계속 물었다.
“아가씨께서 항상 피곤해하시나요? 기침은 어떻지요?”
“항상 피곤해하시고 기침도 자주 하세요.”
“점점 체중이 빠지고 있나요?”
“네, 맞아요.”
“종종 열이 심하게 나지 않나요?”
“네, 맞아요.”
임씨 아가씨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범한은 그녀가 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는 궁녀가 잽싸게 대답하는 게 짜증 났다. 그가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다 물었다.
“식은땀도 항상 나나요?”
“네, 맞아요.”
이번에도 궁녀가 대신 답했다.
하지만 범한은 대답을 듣지 못한 척 장막 안으로 손을 뻗어 임씨 아가씨의 부드러운 손바닥을 만졌다. 그러고는 손바닥에 땀이 찬 걸 확인한 뒤 손을 거뒀다. 범한의 대담한 행동에 놀란 임씨 아가씨가 손을 오므리며 숨겼다. 범한의 행동이 너무 빨라서 침대 옆에 있는 세 여자 모두 알아차리지 못했다.
범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각혈도 하셨나요?”
“네. 봄이 돼서 좀 나아지기는 했지만 요 며칠 동안은 계속하셨어요.”
젊은 의원이 병세를 정확하게 말하자 궁녀는 얕보던 표정을 거두고는 초조함과 희망이 뒤섞인 얼굴로 대답했다.
“음.”
한동안 심각한 표정을 짓던 범한이 진지하게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폐병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한참 동안 병세를 묻다가 고작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을 말하자 궁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범한을 쫓아내고 싶은 것 같았다. 기대하고 있던 섭령아도 실망한 눈빛으로 범한을 노려봤다. 분위기를 눈치챈 범약약이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범한은 주변 분위기는 파악하지 못한 채 일어나서 붓을 꺼내 들고는 처방전을 쓰기 시작했다. 처방전에는 다른 의원과 똑같이 백합동금탕이 적혀 있었다. 다만 다른 처방전보다 자주초와 흑산치, 그리고 황금초의 양이 많았다. 궁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황금초는 열을 제거해 주는 효과는 있지만 원기를 상하게 하는 부작용이 있는데 이렇게 많이 사용해도 될까요?”
병을 오래 앓으면 의사가 된다고, 궁녀는 몇 년 동안 아가씨의 병을 보러 온 의원들을 만나면서 폐병 치료 방법에 대해서 훤히 알고 있었다. 범한이 궁녀의 식견에 감탄하며 설명했다.
“병자의 몸이 좋은 상태이니 문제없습니다. 먼저 강한 약을 써서 병이 악화하는 걸 막은 뒤에 서서히 약을 줄여야 합니다.”
그러자 궁녀가 다소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가 폐병에 걸려 체력이 많이 약해져 있는데 이겨 내실 수 있을까요?”
쏘아붙이는 궁녀의 말에 범한은 화내지 않고 웃었다.
“아가씨께서 이미 각혈을 하셨으니 병세가 이미 깊어진 셈입니다. 그러니 먼저 몸을 보양하고 약을 사용해야 합니다.”
“도대체 뭘 먼저 해야 한다는 거예요? 독한 약을 사용하는 게 먼저예요, 아니면 몸을 보양하는 게 먼저예요?”
오락가락하는 범한의 말에 섭령아가 끼어들었다.
그러자 범한이 난감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오늘부터 매일 양젖 한 사발을 마시게 하십시오.”
이건 범한이 이전 세계에서 들었던 민간요법으로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그러고는 그가 물었다.
“아가씨께서 음식을 어떻게 드시나요?”
양젖을 드려도 되는지 생각하던 궁녀가 범한의 물음에 자긍심 넘치는 말투로 대답했다.
“매일 맑은 죽과 채소 반찬으로 식사하세요. 고기류 같은 비린내 나는 음식은 절대 드시지 않아요.”
그 말에 범한이 울컥 화를 내며 속으로 생각했다.
‘병이 저렇게까지 진행됐는데 어떻게 채소랑 죽만 먹일 수가 있지? 몸이 쇠약해졌으면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여야지 너무하는군!’
옆에서 누이와 섭령아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는 자신이 이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게 적당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임씨 아가씨의 신분 때문에 음식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왜 그렇게 드시게 하는 겁니까?”
그러자 세 여자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폐병에 걸린 환자가 비린내 나는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되는 건 천하 사람이 모두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범한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가씨는 잘 드셔야 합니다. 앞으로는 기름기 있는 고기류도, 양젖도 반드시 드리도록 하세요. 만약 드시기 힘들어하면 참마와 율무를 각각 한 냥씩 곱게 빻아 잘 익힌 뒤 곶감 반 냥을 으깨서 같이 섞어 드시도록 하세요. 그렇게 보름 정도 영양가 풍부한 음식을 드린 뒤 제가 먼저 처방한 약을 사용하면 됩니다.”
막힘 없는 범한의 말에 세 사람이 미간을 찌푸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