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66
065화 창문 밖 손님
어두운 저녁 백작가 뒷담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떨어지는 잎사귀처럼 아무런 소리도 없이 떨어졌다. 범한이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떨어냈다. 그는 어두운 밤길을 걸으면서 속으로 이 세계에 순간 이동 같은 무공은 왜 없는 걸까 생각했다.
경도는 비록 번화한 도시지만 저녁에는 불이 모두 꺼져서 어두웠다. 야시장이나 곡예 공연이 열리는 와롱 골목이나 초저녁부터 자정까지 강변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유정강을 제외하고는 저녁에 불을 밝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어두운 밤길에 이따금 민가에서 새오 나온 빛이 은은하게 거리를 비출 뿐이었다.
범한은 잘 보이지 않는 밤길을 달렸다. 시원한 밤바람이 얼굴에 스쳐 시원했다.
얼마 뒤 낮에 갔던 별궁 작은 골목에 도착한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별궁 안에는 호위병들을 있을 것이다.
오죽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7품 정도의 내공을 수련한 상태였기에 3품 정도는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만약 무턱대고 들어갔다가 고수를 만나게 된다면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반드시 임씨 아가씨를 만나야 했다. 비록 상대방의 이름은 알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누구인지는 알려야 했다. 혼인할 상대가 자신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면 그녀의 병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주변은 순찰하는 호위병들이 부딪치는 경탁 소리 말고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경탁 소리가 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잠깐은 다시 울리지 않을 거였다. 아주 작은 소리도 의심을 받을 수 있기에 범한은 조용히 골목길 담장 아래 섰다. 그는 정기를 운용해 난폭한 정기가 천천히 자신의 온몸을 감싸게 했다. 그러고는 허리 뒤에 있는 설산을 통제해 모든 근육과 정신을 다스렸다.
근처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평생 오죽에게 의지할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죽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항상 자신을 지켜 줄 수는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과거 자신의 어머니가 죽는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는 옷에 두 손에 맺힌 땀을 닦은 뒤 별궁 뒷담에서 호위병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을 만한 곳을 찾았다. 정기를 천천히 손바닥에 집중하고는 이전에 담주에서 절벽에 올랐을 때처럼 담을 가볍게 타고 올랐다.
이곳은 일반 고수들도 넘기 힘들 정도로 높고 표면도 매끄러워 호위병들의 경비가 가장 소홀했다. 아무도 오늘 밤 사랑에 빠진 남자가 이 벽을 오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담을 오르던 범한이 한 손으로 벽을 잡고 한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러고는 아내가 될 사람을 왜 이렇게 힘들게 만나야 하는지 생각했다. 하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 고개를 들어 먼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며 임씨 아가씨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잠시 뒤 달빛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정원 안으로 착지한 범한이 살쾡이처럼 수풀 사이로 들어갔다. 간결하면서도 신속한 동작이라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모두 담주에서 받은 오죽의 혹독한 훈련 때문이었다.
사실 별궁 안에는 호위병들이 많이 없었다. 이미 자정을 넘긴 시작이라서 경계가 느슨해서 멀리 있는 앞문에서만 기척이 들렸고 정원 안을 순찰하는 사람은 없었다. 범한이 한숨 돌리며 조심히 작은 궁으로 다가가 고개를 들었다. 불 꺼진 곳을 보며 그는 임씨 아가씨가 이미 잠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문이 굳게 닫혀 있는 데다가 낮에 자신이 탄 약 때문에 늙은 궁녀가 밤중에 화장실을 갈 수도 있었다. 때문에 범한은 정면으로 들어가는 걸 포기했다. 건물을 둘러보던 그가 나무 기둥을 잡고는 올라갔다.
위에 올라가 보니 2층 나무 누각에 돌출된 부분이 보였다. 거리는 대략 두 자 정도 되었다. 범한은 숨을 고른 뒤 손을 더듬어 작은 틈새를 찾아냈다. 그는 틈새를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으로 꽉 잡고는 공중에 매달린 채 허릿심을 이용해 박쥐처럼 몸을 위로 훌쩍 날렸다. 가까스로 창밖에 도착한 그가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범한은 오늘 낮에 자신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의 의미를 창 안에 있는 임씨 아가씨가 알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창문을 살짝 두드렸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약간 더 힘을 주어 창문을 두드렸지만······ 창문은 열리지 않았다.
임완아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을 자고 있지는 않았다. 보드라운 이불 안에 누워 양손으로 이불 끝을 잡고는 눈을 뜬 채 천장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창밖에서 기척이 들리자 그녀는 긴장했다. 낮에 봤던 젊은 의원이 정말로 야밤을 틈타 잠입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겁먹은 그녀는 호위병들을 부를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그 사람이 온 것이라면 호위병들에게 공격을 받아 떨어져 죽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무섭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해서 입술을 깨물고는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창문이 잠겨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녀는 상대방이 들어오지 못하면 알아서 떠나리라 생각하며 안심했다. 그녀는 자신이 곤란한 상황에 부닥치는 것도 싫었고 자신을 만나러 온 그가 큰 벌을 받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일은 예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창밖에서 소리가 들리더니 밖에서 문을 열었다.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검은색 안료가 칠해진 비수를 들고는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장막 안에서 그 모습을 본 임완아는 자지러지면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하지만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이 경묘 별전 탁자 아래에서 봤던 남자의 얼굴과 흡사해서 비명이 쏙 들어가 버렸다.
범한의 동작은 굉장히 빨랐다. 첫사랑에 빠진 남자가 보일 만한 부끄러움은 없었다. 몸을 돌려 창문을 닫은 그가 침대를 향해 다가가더니 장막을 걷었다. 곧이어 그윽한 향기가 방 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당황해 정신을 못 차리던 임완아가 향기를 맡고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러고는 앞에 있는 남자가 자신을 기절시키려 향을 피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면서 생각했다.
‘설마······ 말로만 듣던 강간범인가.’
진작에 소리를 지르지 않은 걸 후회하며 임완아가 입을 크게 벌려 소리를 지르려 했다.
범한은 그 사실도 모른 채 싱글벙글 웃으며 장막 안으로 들어왔다. 자는 줄 알았던 임씨 아가씨가 겁에 질린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크게 벌려 소리를 지르려 하는 모습이 보였다. 당황한 범한이 침대 위로 올라가 임완아의 입을 막았다.
손바닥이 그녀의 입술과 맞닿으면서 간지러웠다.
“소리 지르지 말아요.”
난생처음 첫사랑에 빠져 경험이 부족한 범한이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예요, 저라고요.”
범한에게서 악의가 없는 걸 알게 된 임완아가 점점 안정을 찾았다. 범한이 입을 막던 손을 내리며 조용히 말했다.
임완아는 방금 맡았던 이상한 향기를 떠올리고는 급히 물었다.
“내 시녀는 어떻게 했어요?”
바로 옆방 평상에서 자는 시녀가 지금쯤이면 놀라 일어나야 정상이었다. 범한이 나지막이 설명했다.
“이 향은 정신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어요. 몸에는 아무런 해가 없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냥 깊이 잠든 것뿐이에요.”
임완아가 안심하며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반가운 마음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신분은 어떻게 될까.’
임완아의 눈에 두려움이 묻어나자 범한이 안타까워했다.
“무서워하지 말아요. 오늘 낮에 봤던 의원이 저예요. 떠나기 전에 저녁에 다시 오겠다고 말했잖아요. 기억하죠?”
임완아가 갑자기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창문을 잘 닫아 두라고 하지 않았나요?”
임완아의 아름다운 미소에 범한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꽃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다시 보니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그의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임완아가 시퍼렇게 날 선 단검을 쥐고 그 칼날을 범한의 목에 겨누고 있었다.
임완아가 그의 두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어요.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면 없던 일로 해줄게요. 그러니까 나가요.”
서슬 퍼런 칼날이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음에도 범한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었다.
“조금만 있다가 갈 거예요. 오늘은 그냥 당신을 보러 온 거예요.”
그러고는 품속에서 기름종이에 싸인 무언가를 꺼냈다. 칼날이 목을 겨누고 있는 게 상관없다는 모습이었지만 임완아는 그를 해치고 싶지 않았기에 무의식적으로 칼을 거뒀다.
범한이 기름종이를 펼치자 맛있는 냄새가 나는 닭 다리가 보였다. 그가 닭 다리를 집어 그녀의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그날 경묘에서 닭 다리를 먹고 있었잖아요. 고기를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제가 가지고 왔어요.”
대담한 범한의 행동에 임완아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만약 호위병이 낯선 남자가 자신의 방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두 사람 모두 무사할 수 없었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부탁이니까 빨리 가세요.”
준비해 뒀던 말을 하려던 범한은 임씨 아가씨가 조급해하자 부드럽게 말했다.
“무서워하지 말아요, 해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범한은 이 말이 이전 세계 무협 소설에서 강간범들이 항상 하는 대사라는 걸 떠올리고는 바로 후회했다.
역시나 임완아는 대경실색하더니 단검을 다시 그의 목에 갔다 대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어요. 허튼소리 한 번만 더 하면 바로 찔러 버릴 거예요.”
범한은 그제야 자신이 몰래 규방에 들어온 것이 상대방의 명예와 정조를 손상하는 일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임완아를 바라보았다.
‘설마 남편 될 사람을 죽이기야 하겠어.’
“한동안 그대 생각만 했습니다.”
범한은 상대방의 기분은 생각 않고 계속 자기감정만 이야기했다.
“경묘에서 아가씨를 본 후 줄곧 그리워했답니다.”
임완아가 순간 너무 부끄러워하며 받아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임완아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가 말을 이어 갔다.
“나는 이미 정혼자가 있어요. 그런데 한밤에 여인의 방에 숨어들다니 너무 무례하군요.”
“사남 백작가와의 혼사를 받아들였다는 거, 이미 알고 있어요.”
범한은 싱글벙글 웃으며 임완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임완아는 이 청년과 처음 마주쳤을 때 서로 복잡 미묘한 감정으로 응시했던 게 생각나 가슴 한구석이 아려 왔다. 이에 임완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알고 있었다면서 당장 안 떠나고 무엇 하는 거죠? 정말로 내가 죽여 주기만을 바라는 건가요?”
그러자 범한은 더 이상 장난을 칠 수 없었다. 그래서 임완아를 바라보며 정색하고 말했다.
“내······ 내가 바로 범한이에요.”
죽음 같은 침묵이 흘렀다. 대체 얼마나 흘렀을까. 범한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임완아의 눈가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지자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임완아가 서둘러 눈물을 닦아 내며 소리를 낮춰 말했다.
“공자님, 부디 자중하기 바랍니다.”
범한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진실입니다. 어떻게 해야 내 말을 믿어 줄 건가요?”
임완아가 범한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마음을 추슬렀다. 그러고는 다시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공자님이······ 범 공자님이라고요?”
범한이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임완아의 얼굴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이 순간 구름의 속박에서 벗어난 달이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냈다. 달은 은은한 빛으로 대지를 물들이고, 다시 그 말간 빛을 창 안으로 들여보내 침대 아래와 침대 위에 있는 남자와 여자를 비추었다.
“정말 내가 범한이에요.”
범한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임완아는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감히 믿을 수 없었다. 이내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은 진즉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는 상태였다. 임완아가 탄식을 하고는 물었다.
“공자님이 사남 백작가의 그 싸움꾼, 검은 주먹이란 분인가요?”
순간 범한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범한은 너무나도 연약해 보이는 임완아의 모습에 문득 가슴이 아파 와 그녀의 가녀린 팔을 잡고 자신의 정기를 주입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의 정기를 조심스레 넣어 가며 임완아 체내의 맥을 정리해 주고 있는 상황에서 ‘싸움꾼’, ‘검은 주먹’이란 단어가 들리니 절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겨우 두 번 싸웠을 뿐이에요.”
그러자 임완아가 조금은 더 확신이 생겼는지 얼굴에 기쁜 기색을 띠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만 리 쓸쓸한 가을에는 언제나 나그네가 되어라, 그 시구를 지은 분이라고요?”
범한은 계속 씁쓸하게 웃었다.
“급하게 지은 것이라······별 볼 일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