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674
1015화 패배한 서호에서 울려 퍼진 슬픈 노랫소리 (1)
“충고할 생각이라면 이미 많은 사람에게 들었으니 하실 필요 없습니다.”
범한이 웃으며 섭령아의 어깨를 토닥였다. 두 사람은 사이가 가까웠기에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범한의 능청스러운 말에도 섭령아는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집안에서 의논하는 일이 제 귀에도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듣기 싫어도 자연스럽게 듣게 되는 일들이 있지요. 특히 이번 북쪽 일에 대해서 아버지께서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섭령아가 범한을 바라보며 뭐라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대인이나 저나 경국 사람입니다.”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이성에 보낸 계년조 요원과 목풍아가 만난 뒤 그의 뜻이 전달되었고, 소량국의 동란은 다시 심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써 조정의 뜻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핑계가 생긴 1 황자는 동이성에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북제의 반응은 범한의 예상을 훨씬 벗어났다. 왜냐하면, 시간을 계산해보면 왕계년이 상경성이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었고, 게다가 그가 전하라 한 말은 북제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달라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젊은 황제에게 두 사람의 정분을 생각해서 동이성을 좀 도와달라는 뜻을 보냈을 뿐이었다.
동이성을 도울 방법은 아주 다양했다. 하지만 지금 북제가 사용한 방법은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노골적이고, 또 범한의 입장을 가장 난처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생각을 마친 범한이 은탄을 연신 집으며 섭령아와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섭씨 집안에서 도는 말들을 통해서 추밀원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알아낼 생각이었다.
범한은 황궁에 있는 황제 폐하가 북쪽에서 일어난 전쟁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걸 보고 위협을 느꼈다. 하지만 이 위협이 무엇과 관련된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 * *
동짓날 이후 며칠이 지난 뒤 이번에는 범씨 집안에서 연회가 열렸다. 그런데 이번 연회는 황족 젊은이들이 모였던 화친 왕부의 연회와는 성격이 달랐다. 왜냐하면, 오늘 연회에 초대된 사람은 범문사자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공부 원외랑 자리에서 쫓겨난 뒤 감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한 양만리는 조용히 아랫자리에 앉아 있었다. 대리사에서 선고를 받은 이후 범한이 저택으로 데리고 와서 몸을 추스르게 해준 덕분에 아직 거동은 약간 불편했지만, 얼굴에 가득 드리워 있던 원망은 아주 옅어져 있었다.
성가림은 범문사자 중에서 가장 빠르게 승진해 소주 지주에까지 올랐지만, 범한의 일에 연루되어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황궁에서는 그에게 기생을 데리고 놀았을 뿐만 아니라 능멸했다는 대죄를 들어 강제로 경도로 잡아 왔다. 이후 한 달 동안 범한이 바쁘게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노력을 한 덕분에 목숨을 겨우 보존할 수 있었지만, 관직은 모두 잃고 벼슬길도 막히고 말았다. 그래서 양만리 아래 자리에 앉아 있는 성가림은 무기력하게 축 처져서는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응접실에는 두 개의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여자들은 병풍 뒤에 있는 탁자에 앉았고, 바깥 탁자에는 범한과 양만리, 성가림이 앉았다. 이들은 젓가락을 들지 않고 계속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접실 밖 정원에 눈발이 휘날리는 모습을 보면서 세 사람은 와야 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한 사람이 눈보라를 맞으며 종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몇 년 전 범한의 뜻을 받아 천하에 두루 다니며 기생집 사업에 매진해온 사천립이었다.
응접실에 들어온 사천립이 몸에 묻은 눈을 털지도 않고 곧장 주인석에 앉아 있는 범한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병풍 안에 있는 스승의 부인인 임완아에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몸을 돌려 양만리와 성가림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앞으로 걸어가 오랜 시간 보지 못했던 친구들이 꽉 끌어안았다.
그는 지금 상문과 함께 포월루 운영을 책임지고 있었기에 천하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을 알고 있었고, 두 친구가 수개월 동안 얼마나 참혹한 고초를 겪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말 대신 포옹으로 그동안의 그리움과 위로를 전했다.
“자네는 몸이 불편하니 일어나지 말게나.”
사천립이 성가림의 아래쪽에 앉으며 일어나서 말을 하려 하는 양만리를 향해 말했다. 비록 이미 천하를 주름잡는 거상이 되어 어디에서도 호걸로 대접을 받았지만, 오래전에 힘든 생활을 견디며 성현의 글을 공부하던 모습은 바뀌지 않고 남아 있었다. 더욱이 관리가 되고 싶던 열망은 이제 마음속 깊이 이루지 못한 아쉬움으로 남아 양만리, 성가림, 후계상을 줄곧 부러워하고 있었다. 이에 사천립은 자신은 상인의 신분이므로 마땅히 가장 아래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고리타분한 사천립의 모습을 본 양만리와 성가림이 서로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씁쓸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서로를 바라보며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대화를 나누었다. 이들은 몇 개월 동안 겪어야 했던 비참한 상황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고, 조정을 비난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두들 이 일 때문에 스승인 범한이 다시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한참을 기다렸지만, 더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안색이 어두워진 제자들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성가림이 범한의 살짝 굳은 얼굴을 힐끗 보고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눈이 많이 내려서 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나 보군.”
그러자 양만리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잔뜩 오므리다 한숨을 쉬었다. 그가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러자 사천립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범한을 향해 조심히 말했다.
“제가 여기서 얻은 소식에 따르면 계상은 이미 7일 전에 경도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다만 조정에서 그에게는 죄를 추궁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범한이 눈썹을 추켜세우고는 웃으며 말했다.
“연말이다 보니 연회를 개최한 동료 관리들이 많이 있을 거네. 시간이 맞지 않으면 오지 못할 수도 있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범한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우울했다. 후계상은 경도로 돌아오고 며칠이 지났음에도 한 번도 범씨 집안에 찾아와 인사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조정 안에 시선이나 소문을 보면 황궁은 그에게 죄를 물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모든 상황이 뭘 뜻하는지는 아주 확실했다.
이 나라에서 제자가 스승을 배신해 부귀영화를 누리려 하는 경우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범한은 자신에게 막상 이런 일이 생기자 견디기가 어려웠다. 자연스레 그가 고개를 돌려 탁자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순간 범한은 마음속에 복잡하고 기묘한 감정이 일었다. 원래 송나라 수도에 있던 사천립은 이번에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보기 위해 경도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양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소주 지주에서 쫓겨난 성가림도 오늘 이 자리에 있었다. 범한은 줄곧 자신이 성격이 유약한 편이라서 믿음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들은 관직을 뺏기고 수모를 당할지언정 스승인 그를 떠나지는 않았다.
오로지 후계상만이 모두의 예상을 깨고 오지 않았다.
“듣자 하니 오늘 하 대학사 저택에서 연회가 열린다고 하더군요.”
사천립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과거 대인께서 경도로 오시기 전에 후계상과 하종위는 함께 경도에서 뛰어난 인재라 알려졌었으니, 서로 약간의 교분이 있을 겁니다.”
양만리가 이를 악물고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계상. 얼른 암흑을 버리고 광명을 찾아가게나. 내일 내가 찾아가서 한바탕 칭찬을 해줘야겠구먼.”
양만리가 반어법으로 잔뜩 비꼬자 성가림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전에 동복 객잔에 있었을 때 계상 형님이 제게 길에서 스승님과 마주쳤던 경험을 이야기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스승님은 길을 걸을 때도 우산에 빗물이 노점 기름 솥에 떨어져 피해를 줄까 걱정하는 분이라 말하며 이처럼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니 우리가 따를 만한 대상이라고 말했었는데, 오늘 이럴 줄은…… 아…….”
한숨이 끊이질 않자 범한이 웃으면서 손짓으로 세 사람에게 식사를 시작하자는 표시를 했다.
“사람은 모두 자신만의 뜻이 있는 거네. 게다가 나는 이제 더는 조정에서 일할 수 없으니 계상이 백성들을 위해 일을 하려면 하 대학사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겠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야.”
담담한 말투로 말했기에 누구도 그의 마음속 진심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범한은 사실 범문사자 중에서 후계상을 가장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다만 세상일이란 한 치 앞도 알기 힘든 법이었고, 범한이 세운 계획이 항상 완벽한 것도 아니었다. 이에 범한의 작은 실수와 불운이 겹치면서 후계상이 피해를 보게 되었다. 범문사자 중에서 양만리는 큰 강 제방을 세운 공으로 천하에 이름을 알렸고, 성가림은 젊은 나이에 소주 지주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 폐하의 초청을 받아 입궁한 칠군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리고 사천립은 비록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포월루 사장으로 명망을 가지고 있었다.
오로지 후계상만 외진 교주에 갇혀 마음속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범한이 세력을 잃고 무너지자 줄곧 불만을 품고 있던 후계상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게 된 것이었다. 이런 점을 범한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더욱이 연회를 연 사람이 하 대학사라는 점이 더더욱 불쾌했다.
술잔이 세 번 돌자 사람들은 그동안 각자 위치해서 자신들이 해온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양만리는 눈송이처럼 하얀 은전들이 어떻게 거석과 흙으로 변해 큰 강 양쪽의 제방이 되었는지를 말했고, 성가림은 지주가 되어 국토를 지키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한 일들과 작은 범 대인의 도움을 통해서 염상과 황상들이 고분고분해지도록 만든 일, 그리고 임완아가 마련한 은전이 제대로 항주회에 쓰일 수 있도록 해서 수많은 가난한 백성을 도운 일 등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사천립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천하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들과 기생집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여자들의 삶이 얼마나 좋아졌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창 이야기 꽃을 피우던 그가 웃으면서 자랑스럽게 몇몇 포월루에서는 뒷방에 작은 범 대인의 신상을 모셔 두고 있다고 말하며, 그건 작은 범 대인이 많은 낭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이 나오자 사천립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입에 있던 술을 내뿜었다.
세 사람이 이야기한 일들은 사실 모두 그들이 한 일이자 범한과 관련된 일이었다. 모두 범한이 세 제자들을 통해서 나라의 이익과 백성들의 삶을 안락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한 일이었다. 이에 성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범한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세 사람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만리는 며칠 동안 줄곧 저택 안에서 지냈네. 경도에 집이 없는 것도 알고, 가림의 가족들이 소주에 있는 것도 알지만 이참에 여기로 이사를 오도록 하게.”
스승의 진지한 말에 세 사람도 동시에 숙연해져서는 모두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봤다.
“소주 집안일은 내게 계획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범한이 성가림을 향해 온화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다른 제자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동안 잘 견뎌주었네. 오늘 자네들을 부른 건 자네들이 조정을 원망하고 나를 미워하는 게 오히려 자신을 해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이네.”
그가 씁쓸해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물론, 오늘 보니 계상은 이미 내가 관여할 필요가 없는 것 같군.”
“하지만 자네들도 알다시피 나는 지금껏 자네들에게 한 요구라고는 처음 만났을 때 한 요구 말고 다른 요구는 한 적이 없었네. 그러니 조정이 아무리 자네들을 통해서 내 죄를 잡아내려 하더라도 할 수가 없을 거야. 계상 역시 자신만의 생각과 고려가 있겠지만, 없는 사실을 날조해서 나를 팔아넘기려고 하지는 않을 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