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676
1017화 서량 (1)
찬 바람이 부는 하늘 위에서 참매 한 마리가 날아왔다. 참매는 서슬이 퍼런 칼날과 날아오는 화살이 두렵지 않은 듯 아랑곳하지 않고 아래로 활강해 몇 리에 걸쳐 이어져 있는 전장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윽고 참매의 눈에 적의 공격에 죽은 서호 용사들의 시체가 보였다.
모래와 자갈을 붉게 물들인 피와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물씬 났다. 홍산 입구에서 매복 공격을 한 경국 군대는 이제 전쟁터를 수습하고 대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초원 서호 용사들과 전력을 다한 싸움을 벌였기에 최정예 병사인 정주군도 아주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날개를 퍼덕여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간 참매는 두려운 광경을 목격했다. 바로 동북쪽 습지대에서 경국 기병 부대가 기습 공격을 하기 위해 쥐 죽은 듯 기척 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이 부대의 인원수는 적어도 4천 명 이상은 되어 보였고, 모래 언덕과 습지대의 굴국에 몸을 숨긴 채 조용히 초원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참매가 ‘키익’ 하고 기이한 울음소리를 냈다. 마치 기병들의 살기등등하고 공포스러운 모습에 겁을 먹은 것처럼 차가운 구름을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한참 동안 아래를 바라보던 참매가 마침내 차가운 구름을 뚫고 호수 옆 작은 언덕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작은 언덕에는 수천 명의 서호 장사들이 있었는데, 드문드문 북쪽 설원에서 내려온 북쪽 용사들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모두 방금 전 홍산 입구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가까스로 도망을 친 사람들로 사기가 아주 낮은 데다가 대부분이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선우 속필달의 입술은 살짝 말라 있었지만, 몸에는 혈흔이 전혀 묻어 있지 않았다. 그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멀리 홍산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는 정주군이 그곳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으니 단시간 안에 추격을 해오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경국 사람들도 초원 깊숙이 들어와 추격전을 벌이고 싶어 하지는 않을 거였다.
그가 주변에 있는 왕장 용사들과 그들의 몸에 난 상처를 살폈다. 순간 방금 전 홍산 입구에서 벌어졌던 대전이 떠오른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초원에 겨울이 오면 병력을 최소한으로 움직인다. 이건 서호와 경국 사이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규칙이었다. 겨울에 싸움을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날씨가 추워져서 군량미를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또 겨울에는 이민족들이 즐겨 사용하는 바람처럼 신속와서 공격한 뒤 재빨리 사라지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올해 겨울에 선우는 호가의 건의를 받아 수중에 있는 가장 뛰어난 기병들은 이끌고 서량로를 쳐들어갔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은 당시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를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선우 속필달이 어떤 인물인가? 갈수록 쇠락해 가던 선우 왕정 출신인 그는 30년 동안 좌현왕과 우현왕 사이에서 생존하며 세력을 키웠고, 현명하게 북쪽 눈보라를 뚫고 온 북만을 받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넓은 마음을 가지고 중원 사람까지 자신의 왕장에 들어오게 해주었다…….
만약 지금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만약 동쪽 대륙에서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선우 속필달은 의심할 여지 없이 초원의 맹주로 성장해 서쪽에서 위세를 떨치는 인물이 되었을 거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그가 이처럼 초보적인 실수를 할 수 있을까? 속필달의 눈빛이 산언덕을 지나 말을 탄 채 언덕 위에 있는 여자에게로 향했다. 순간 속필달의 눈동자에서 아주 복잡한 감정이 보였다.
선우 속필달이 올해 겨울 추위를 무릅쓰고 호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경국 서량로를 공격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나름의 계획이 섰기 때문이었다. 그는 경국 조정이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 경국 황제 폐하와 그가 가장 총애했던 권신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고, 호가는 그 상황에서 서량로를 공격하자고 건의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선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참매처럼 멀리 홍산 입구 쪽을 바라보며 속으로 말했다.
‘감히 초원 사람들을 배신하고 감찰원과 결탁했으니 호가는 죽어 마땅하지.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감찰원과 결탁해 놓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1년 동안 호가가 초원에서 세력을 키운 걸 보면 어떤 세력이 뒤에 있는 게 분명했고, 선우는 이미 소문을 조사해 진상을 파악해둔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호가가 겨울에 서량로를 침공하자고 제안한 한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경국 경도의 정치 상황과 관련된 소문에 관심이 많은 선우 속필달은 약간의 계산을 통해 권력을 잃은 작은 범 대인이 이번 일과 관련이 있다는 걸 추측해냈다.
범한은 이전에 초원이 들어왔을 때 서량로 안에 있던 밀정과 초원에서 보낸 첩자들을 대부분 제거해 왕정의 세력에 심각한 손실을 입혔다. 게다가 마지막에 범한은 선우 앞에서 몇백 명의 흑기를 이끌고 득의양양하게 도망을 쳤다. 이 일로 속필달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을 느꼈고, 더욱이 매번 송지선령을 볼 때마다 당시의 수치심이 떠올라 견디기 힘들었다.
올해 겨울 호가가 서량로를 공격하려 한 건 선우에게는 기회였다. 이에 송지선령과 오랜 대화를 나눈 그는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왕녀의 건의를 거절했다. 그는 이 기회로 상대방의 계략을 역이용할 생각이었다. 거짓 공격을 이용해 정주 대장군의 자리를 견고히 하려는 범한의 생각을 역이용해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모아 진짜로 서량로를 공격할 생각이었다.
분명 정주성 안에 있는 대장군 이홍성은 범한에게 소식을 받아 호가가 거짓으로 공격을 해올 거라고만 알고 있을 거였다. 그러니 선우가 이 일을 이용해 정말로 대군을 이끌고 공격을 해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고, 당연히 대비도 해놓지 않을 거였다.
하지만 선우 속필달 역시 예상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 사실 그 누구도 홍상 입구 좌우에 10만이 넘는 경국 정예병이 집결해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 * *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양쪽 사이의 규칙을 깨고 단행된 후안무치한 공격은 예상치 못한 치열한 전투로 이어졌고, 호가는 매복 공격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왕장과 우현왕 쪽 모두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최소한 3만여 명 이상의 초원 장사들이 이번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방금 전 참혹한 광경을 생각할수록 선우의 눈동자에 깃든 살기도 더욱 짙어졌고, 마음도 차가워졌다. 말을 타고 선지선령 곁으로 간 그가 차갑게 말했다.
“그가 초원이 병력을 동원해 이홍성이 지위가 안정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란다고 말하지 않았소?”
해당타타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외투가 차가운 겨울바람에 부들부들 떨었다.
“선우의 신분으로 이런 위험한 도박을 해서는 안 됐습니다. 저는 지금껏 그를 진심으로 믿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봤을 때 이번 일은 그와는 무관한 것 같군요. 그 역시 불쌍한 장기 말에 불과합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침묵했다. 이홍성의 자리를 지켜주기 위한 범한의 계획과 초원 서호가 범한의 계획을 역이용하리라는 것까지 모두 예측하고, 30년 만에 초원에 참혹한 패배를 안겨 줄 수 있는 인물은 경국에 단 한 명 밖에는 없었다.
경국 황제 폐하에게 다른 이들의 음모와 계략은 전부 그의 바둑판에서 벌어지는 놀이에 불과했다.
참매가 마침내 활강해 속필달이 뻗은 팔 위에 내려앉았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뚫고 구름 속을 날은 참매가 추운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참매의 깃털 색깔이 유독 어둡게 보였다.
속필달의 두 눈동자가 수축하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북쪽에 수천 명의 기병이 매복해 있소…….”
그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경국 사람들이 이번에 아주 큰 계략을 세운 것 같소. 도대체 어느 고위 장군이 대전을 치른 뒤 곧바로 다시 대군을 초원 깊숙이 침투시킬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오늘처럼 추운 날씨에 경국 사람들은 왕정을 일망타진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인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선우는 사실 경국의 용맹함과 모든 걸 무찌르려는 결의에 적지 않게 놀란 상태였다. 이때 호수 주변에는 아직 수천 명의 초원 장사들이 있었지만, 조금 전 대전으로 사기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그러니 만반의 준비를 마친 4천 명의 기병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면 승패는 불 보듯 뻔했다.
속필달은 속으로 경국 사람들의 비열함과 한숨을 돌릴 기회도 주지 않는 야비함을 욕했다. 하지만 제왕으로서 분노가 이성을 망가뜨리는 게 할 수는 없었기에 당장 비탈 아래 부하들에게 경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순식간에 호수 주변에 있던 왕장 용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방금 전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사기가 저하되었음에도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반응해 움직였다.
“본왕을 따라가겠는가?”
선우가 고개를 돌려 언덕 위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는 경국으로 가겠습니다.”
해당타타는 고개를 살짝 숙일 뿐 여전히 홍상 입구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얼굴 표정은 평온했지만, 목소리를 들으니 자책하고 반성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무수히 많은 원혼이 홍산 입구에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 호가가 그 사람을 믿은 탓에, 자신이 그 사람을 믿은 탓에, 그리고 선우가 자신을 믿은 탓에 초원에 사는 수만 명의 장사들이 경국 기병에게 포위당해 참혹하게 죽어야 했다. 주인을 잃은 머리와 잘린 팔다리들이 썩은 고목처럼 땅 위에 나뒹굴었다.
전쟁이 만들어낸 지옥 같은 장면을 바라보니 해당타타도 마음이 흔들렸다. 천일도 문파를 책임지고 있는 그녀는 순간 한 사람의 힘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깨달았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갖춘 사람이라도 거대한 군사력 앞에서는 무엇도 변화시킬 수 없었다.
“들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여기 죽은 사람들을 대신해 해줘야 할 말도 있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해당타타가 말을 몰아 연기처럼 순식간에 산언덕을 내려갔다. 그녀가 태양과 정반대 방향으로 질주했다.
범한이 홍역청을 통해서 보낸 말을 해당타타는 이미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서량로와 초원 사이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해당타타는 잠시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은 당장 경도에 가야만 했다.
선우 속필달은 고개를 돌려 떠나는 해당을 바라보지 않았다. 우렁찬 목소리로 명령한 뒤 남은 패잔병들을 이끌고 초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진짜 고향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뒤에서 늑대처럼 돌진해 오는 경국 기병들도 더는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초원 서쪽에는 선지선령 왕녀의 명령만 따르는 1만 명의 북만 기병 중 7천 명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대륙 중북부에서 발생한 원인 모를 충돌과 비교하면, 경국 서량로에서 이민족들과 벌인 전쟁은 역사적 지위나 영향 면에서 훨씬 중요했다. 사실 이번 전쟁은 경국 경도 어느 곳에 있는 은전 1백여 냥을 들여 구입한 작은 저택에서 범한이 계년조에게 내린 명령으로 시작된 거였다.
이 명령 때문에 호가는 좌현왕의 부하들을 이끌고 서량로에 거짓 공격을 하려 했고, 선우 속필달은 날카로운 눈으로 호가와 감찰원 범한 사이의 관계를 꿰뚫어 보고는 다른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뜻밖에도 정주군은 이 모든 걸 파악하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홍산 입구에 쳐 놓은 거대한 그물에 걸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서호 용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전투로 좌현왕 쪽 세력은 전멸했으며, 왕정과 우현왕 쪽도 심각한 손실을 입고 위신을 잃게 되었다. 이에 초원의 각 부족들이 서서히 다른 생각을 품고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송지선령이라 불리는 왕녀를 통해 북제 천일도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나라를 건국하겠다는 선우 속필달의 야심은 산산조각 나 버리고 말았다. 이제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초원에서는 혼란이 계속될 것이었고, 이들을 하나로 통합할 계기도 찾기 힘들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