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678
1019화 강남에 불어닥친 변화 (1)
경력 10년 겨울날 청주 대첩으로 천하에 이름을 알린 대장군 이홍성은 황제의 부름을 받고 경도로 돌아가 이립(而立)의 나이에 추밀원 부사에 임명되었다. 그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경도 안에서 위대한 경국 황실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모두 추밀원 부사 자리가 한직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섭중의 통제 아래 놓인 정왕 세자 이홍성은 더는 정주성에서처럼 완전히 자신만의 세력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이홍성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과거 젊은 나이에 추밀원 부사라는 숭고한 자리에 올랐으나 말로가 좋지 못했던 진항을 떠올렸다.
이홍성은 경도로 돌아온 뒤 가장 먼저 입궁을 해서 황제 폐하를 만났다. 어서방 안에서 만난 황제 폐하는 그에게 화를 내지 않고 그저 서량의 풍경에 대해서만 담담히 이야기를 했지만, 폐하 옆에 범약약이 있는 건 본 정왕 세자는 자연스레 마음이 우울해졌다.
황궁에서 나온 뒤 추밀원에 가서 직무를 인수인계를 마친 이홍성은 마침내 왕부로 돌아와 황궁 안에 오랫동안 갇혀 있다가 방금 풀려난 아버지 정왕야와 유약하고 가련한 누이 유가 군주를 만났다. 모처럼 집안에 모인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왕야가 연달아 한숨을 내쉬다가 이홍성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아무 일 없이 지금까지 버티다가 비로소 경도로 돌아왔구나. 그쪽에 상황을 설명해야겠구나.”
정왕야의 말처럼 이홍성은 그날 밤에 직접 범씨 집안을 찾아갔다. 그는 범한이 자신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비록 정주에서 그는 폐하의 뜻과 궁전의 압력에 완강하게 맞서며 며칠 시간을 벌었지만, 결국에는 상황에 어쩔 수 없이 경국으로 돌아와 직접 범한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두 친구가 범씨 집안 후원에 있는 서재 안에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서로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달했으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황궁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정왕 세자 이홍성이 저택에 들어가는 걸 막지 않았다.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쓰디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킨 범한이 정왕 세자 이홍성을 안고는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리고는 그를 데리고 서재를 나왔다.
서재에서 나온 이홍성이 몸을 돌려 근심 가득한 눈동자로 범한을 바라보다가 작게 말했다.
“등자월은 도망을 쳤겠지만, 계년조 사람은 아마 서량로에서 죽은 것 같네. 어쨌든 이건 감찰원 내부의 일이라 나도 내막을 잘 알지는 못하네. 자네도 감정을 잘 추스르게나.”
“저는 배신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아마도 세 번의 접선 중에서 한 번을 감찰원 안에 사람이 알아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번 일은 언빙운이 직접 현지를 지키며 진행했는데, 저도 언빙운을 상대하는 건 별로 자신이 없습니다.”
범한이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저는 이런 일에 복수하는 데는 별로 흥미가 없으니까요. 그저 황당하고 당황스러울 뿐입니다.”
“자네가 정말로 황당하고 당황스러우다면 얌전하고 점잖게 지내시라 권해주고 싶군.”
이홍성이 고개를 저으며 배웅해주려는 범한을 말리고는 아버지가 그를 위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범한의 어깨를 토닥인 뒤 저택을 나왔다.
* * *
범한은 이홍성의 외로운 뒷모습이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겨울 정원 풍경을 바라보며 이홍성이 떠난 방향을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던 그가 다시 서재로 돌아왔다. 등받이 의자에 앉아 이홍성이 전해준 그에 대한 궁전의 평가를 떠올리던 범한은 입안이 씁쓸하고 떫어졌다.
‘내 이득을 챙기기 위해 이민족를 끌어들였다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범한이 동이성 일이나 서량로 상황을 통해서 자신의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약간은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가 도덕적으로 용납받기 힘든 일인 것도 틀림없었다.
대장부는 모름지기 은혜와 복수를 확실하게 처리해야 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라를 지키는 장군과 병사들의 피와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범한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해 줄 것이었다. 그는 천하에 무고한 사람들이 자신과 황제 폐하 사이의 싸움 때문에 죽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런 계획을 선택한 것이었다.
청주 대첩은 경국 황제 폐하의 원대한 안목과 주도면밀한 계략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일이었다. 호가의 거짓 공격과 선우의 반응은 모두 감찰원 또는 범한이 오랜 시간 노력을 쏟아서 다져놓은 기반이었다. 그리고 이 기반은 황제 폐하의 무정함과 침착함을 이용한 것이었다.
범한은 초원에 있는 이민족들에게 조금의 친밀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서량로 둔전에서 보았던 시체와 불탄 집들을 떠올리면 청주 대첩이 승리로 끝난 것에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다만 문제는 이번 대첩으로 범한이 서량로에 세워두었던 모든 계획이 너무 쉽게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이홍성이 만약 그 상황에서 경도로 돌아오지 않고 시간을 끌며 버티려 하는 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선택이었다.
범한은 황제 폐하의 방법과 능력에 깊은 두려움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감탄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거역할 수 없다는 약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모두 들었지요. 이번 일은 저와는 관련 없습니다.”
범한이 양손을 책상 위에 올리고는 피곤한 눈을 감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중원에서 돌아와 다시 꽃무늬 솜저고리를 입은 해당타타가 그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홍산 입구에서 벌어진 전투 이후 그녀와 정주성 안에 있던 이홍성은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이홍성은 경도로 최대한 빨리 돌아왔지만, 그녀보다 하루 늦게 도착했다. 지금은 범씨 집안 저택에 대한 황궁의 감시가 느슨해져 있었고, 게다가 발각했다고 하더라도 북제 성녀가 저택에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1년 만에 만남이었다. 해당타타가 아무 말 없이 등받이 의자에 앉아 있는 젊은 남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 나이가 많지도 않은 데 어째서 저렇게 노숙하게 변한 거지?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군.’
이어서 머릿속에 며칠 동안 경국에서 발생한 일들과 죽은 감찰원 전 원장의 일이 떠오른 해당타타는 범한의 얼굴에서 지친 기색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이해되었다.
“하지만 대인이 홍역청을 통해서 제게 전달한 말 대문에 초원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해당타타가 말했다.
범한이 두 눈을 뜨고는 차갑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그저 왕정에 호가가 출병하는 데 동의해달라 요청을 했을 뿐입니다. 선우가 이번 일을 기회로 삼아 큰 이득을 얻으려 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해당타타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우 속필달의 야심을 억누르려 했던 건 굳이 설명하지 않은 채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경국이 엄청난 이득을 얻게 되었지요.”
범한이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하다가 말했다.
“말이 어떻게 새어 나가게 됐는지는 더는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서량로에 보낸 사람은 두 사람입니다. 홍역청은 4처에서 사용하는 방법에 걸리지 않았을 테니 분명 자월 쪽에서 말을 전할 때 감찰원에게 발각이 되었을 겁니다…….”
말을 마친 범한은 깊은숨을 들이쉬다가 순간 정보에서 언급된 젊은 섭씨 장군이 떠올랐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그 젊은 장군은 4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초원으로 쳐들어가 선우 왕정의 남은 병력을 추격하고 있다고 했다. 범한은 그 장군의 용기가 감탄을 금치 못했지만, 추운 겨울날 초원 깊숙이 들어갔으니 4천 명의 기병이 살아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북쪽에서 넘어온 북만 기병이…… 낭자의 명령을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범한이 고개를 들어 해당을 바라보며 말했다.
“낭자는 설원의 왕녀인데다가 선우의 존경을 받고 있고, 지위도 높으니 분명 힘이 있으시겠군요.”
범한의 능청스러운 말에 해당타타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의 북해처럼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 순간 화가 난 눈빛이 보였고,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대인은 4천 명의 기병의 생사를 걱정하시는 겁니까? 정말 경국의 권신답게 후안무치하기 이를 데 없으시군요……. 대인은 이번 전투로 초원에 남자들이 너무 많이 죽어서 부족들이 경국 기병에 스스로를 방어하지 못할 거라는 건 걱정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경국 사람입니다. 하지만 또 중원 사람이면서 그냥 살아 있는 사람이기도 하지요.”
범한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낭자가 한 말처럼 선우 속필달이 이번에 지나친 욕심을 채우고자 각 부족 남자들을 이끌고 싸웠고, 초원에는 힘이 남지 않게 되었지요. 청주 대첩이 끝난 뒤 4천 명의 기병이 초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초원 서쪽에 있는 북만 기병이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며 대치한다면 아마 경국 기병들은 충돌하지 않고 초원을 떠나려 할 겁니다.”
“서호는 이미 끝났습니다. 만약 이 기회를 틈탄다면 북쪽에서 초원으로 이동해 온 북만이 세력을 키울 수도 있을 겁니다.”
범한이 해당의 얼굴 표정을 살피며 은근슬쩍 말했다.
“낭자도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상황을 이용해 이익을 얻을 방법을 생각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저는 대인과 다릅니다.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제 마음속 규칙과 부합하지 않으면 저는 하지 않습니다.”
해당타타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오히려 저는 대인이 초원에 있는 경국 기병을 걱정하는 게 놀랍군요. 대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민족와도 서슴없이 손을 잡을 수 있고, 경국이 이익을 고려하지도 않을 수 있는 매정한 분이지 않습니까? 그런 분이 어째서 이런 요구를 하시는 겁니까?”
“만약 제가 정말 경국, 그리고 더 나아가서 천하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렇게 저택에 갇혀 참고 견디고 있겠습니까? 피바다를 만들든지 아니면 천하 속으로 숨든지 했을 겁니다.”
“언제부터 성인 행세를 하신 겁니까?”
“저는 성인이 아닙니다. 다만 인생의 어느 단계에 이르렀을 뿐입니다. 가장 높은 욕망인 권력욕을 만족시킨 뒤 정신적인 만족을 중시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게다가 저는 사람들이 저를 무정하고 냉혈 해서 장사들의 목숨까지 이용하는 파렴치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대인은 정말 가식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해당타타가 범한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고는 품고 있던 작은 칼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범한이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만약 제가 정말 가식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저는 천하 백성들이 제 허영심에 고마워하기를 바랄 겁니다……. 저는 그쪽 황제 폐하가 여자라는 걸 알고 있으니 그걸로 낭자를 협박할 수도 있습니다.”
해당의 몸이 살짝 굳더니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범한을 바라보았다.
범한 역시 침묵했다. 숨이 막힐 듯한 침묵에 서재 안에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한참이 시간이 흐른 뒤 범한이 힘겹게 입을 열어 물었다.
“사실 저는 옆에서 의견을 주고 도와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원래는 언빙운과 왕계년이 그 역할을 해주었지만, 지금 언빙운은 그 사람에만 충성하는 신하가 되어 버렸고, 왕계년은 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멀리 나가 있어 상의할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신선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대항할 자신도 없고 저를 도와주는 사람도 없어 정말이지 어찌할 방법이 없는 상황입니다.”
“지금 제 앞에서 불쌍한 척을 하시는 겁니까?”
해당타타가 비꼬는 말투로 쏘아붙이고는 잠시 뒤 한숨을 쉬며 물었다.
“저와 상의하고 싶은 일이 뭡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