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689
1030화 평민, 단검, 그리고 조천자(朝天子) (3)
경력 11년 정월 초이레, 범한의 지시로 부하들이 거리에서 대신들을 죽였다. 그리고 황성 아래쪽에 있는 문하 중서에서는 범한이 대학사를 살해했다. 그야말로 경국 조정 역사상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황당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당사자가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그 일에 대해 떠벌리는 것도 모자라 황명을 받들어 간신을 몰아낸 것이라 호언장담을 하다니. 이는 오히려 범한 스스로 오늘 자신이 한 행위가 그야말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처사라고 털어놓은 것 같았다.
그런데 이리 황당한 언사를 듣고도 황제는 노여워하기는커녕 입가에 비꼬는 듯한 웃음을 대놓고 띄우고는 다음과 같이 묻기나 했다.
“짐이 언제 너에게 명을 내렸느냐?”
“군왕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신하로서 응당 해야 할 일입니다.”
범한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오늘은 설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경도 곳곳의 경계심이 느슨했다. 그리고 황궁에서는 감찰원 옛 부하들을 향한 범한의 영향력과 규합 능력을 얕보고 있었다. 이에 범한은 여러모로 허술하진 때를 틈타 경도에 있는 하종위파 관원 중 핵심 인사들을 맹렬하게 제거했다.
이와 같은 전략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제일 큰 요인은 범한이 갑작스레, 그러니까 뜻밖의 공격을 펼쳐서였다. 너무 뜻밖에 벌어진 일이라 황궁도 조정도 아예 예상조차 못 해서였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천둥이 치면 사람들은 두려움에 양 귀를 움켜쥐는데, 범한은 바로 여기에서 방법을 떠올렸다. 그리고 실패할 경우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까지 마련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 범한은 그동안 사냥개처럼 자신들을 주시한 관원들을 한발 앞서 죽였다.
그런데 이왕 죽이는 거 철저하게 죽여야 했다. 그래야만 나중에 일이 정말로 실패했을 경우, 자신이 보호하려는 관원 부하들이 그나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어서였다.
그런데 천둥은 계속해서 치기보다는 일반적으로 단발성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조정에서 곧바로 반격해올 것이기 때문이다. 즉, 경국의 강대한 국가 기관이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하고, 강력한 군측 세력이 경도로 들어오면, 범한파 사람들은 경도 안에서 썩은 나뭇가지처럼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즈음이면 경도수비사가 13성문사와 연합해 분명 소탕 작전에 들어갔을 것이다. 금군은 황궁을 방어하느라 가담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저들만으로도 충분한 일이었다. 물론 범한에게 충성하는 부하들도 지금 즈음이면 어둠 속으로 숨어들기 시작했겠지만, 그래도 범한이 보기에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경국 법률은 지엄하고 황제 폐하께서는 분노하실 테니, 범한은 어떻게든 자신에게 충성한 부하들을 커다란 틈으로 빠져나가도록 해주어야 했다. 이에 범한이 황제 폐하에게 그리 황당한 말을 해댄 거였다.
“하 대학사는 저택에 사나운 개 두 마리를 키우고 있어, 제법 청렴한 명성을 떨쳤지요. 하오나 그의 두 형은 하씨 가문 고향에서 사나운 개로 불리고 있습니다. 또한 전답이며 미인까지, 그들이 취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전혀 사양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범한이 입가를 살짝 올리고 말을 이어 갔다.
“매관매직과 뇌물 수수는 없었으나, 최근 3년 동안 하 대학사의 그 낡고 허름해 보이는 저택에 북위 때 그려진 명화 족자들이 수십 개나 늘었다 합니다.”
“범무구는 과거 승택의 부하로 여덟 가문 장수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왕부를 떠났음에도 다시 역모에 가담했지요. 또한 3년 전에 경도에서 반란군 평정이 있었는데도 그는 조정에 자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과 이름을 바꾸고 하 대학사 저택으로 들어갔습니다. 무엇을 노리고 들어갔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한데 하 대학사는 그자의 신분을 알고도 몰래 데리고 있었습니다. 대체 무슨 의도로 그리하였을까요?”
범한이 느긋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감찰원에서는 하종위에 대해 일찌감치 조사해놓은 터였다. 그리고 황제 폐하의 체면을 생각해 그동안 힘겹게 조사해놓은 걸 대놓고 꺼내놓지 못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범한은 더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특히나 앞에 계신 황제 폐하께서 이 일을 자신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계실 거라 확신했다.
“지난달 범무구가 우연히 공격을 당해 하마터면 죽을뻔했습니다.”
범한이 갑자기 피식 웃고는 황제 폐하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범무구가 살인멸구된 일은 황제 폐하의 분부로 이루어진 거였다.
“다행히 제 수하가 그곳을 지나던 터라 그를 구해냈지요. 하여 일부 진술을 받아냈는데, 지금 즈음이면 감찰원으로 그 진술 내용이 송달되었을 것입니다.”
예전에 하종위와 팽 대인의 과부를 재상 쪽에서 쫓아가 죽이려 했는데 2 황자와 세자 이홍성이 때마침 그 길을 지나다 구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하종위가 사람을 죽이려는데 때마침 그림자가 그곳을 지나다가 구한 거였다. 원래 사람 사는 일이란 게 다 이런 거 아니겠는가.
“제가 봤을 때 제일 이상했던 건, 하 대학사가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혼례도 올리지 않고 심지어는 첩도 여종도 취하지 않은 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과부 여인과는 함께 살고…….”
* * *
범한이 하 대학사의 죄상을 갈수록 흥미진진하게 청산유수처럼 읊어 나가는데 황제가 냉담하게 입을 열었다.
“되었느니라. 하 대인은 오로지 나라 생각뿐이다. 과거 너에게 잘못한 것 때문에 너의 손에 죽었는데, 무엇 하러 망자에게 그런 모욕적인 말로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는 것이냐.”
“황제 폐하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너도 알다시피, 짐도 그 일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알겠사옵니다, 폐하. 하오나 천하 만민은 황제 폐하께서 총애하고 믿은 하 대학사가 그런 자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이미 웃음기를 거둔 범한은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해서 차분하게 방어를 해 나갔다.
“이미 사람을 보내 하종위 저택에서 장부며 이름이 담긴 증거품 압수에 나선 상태이며, 자료가 정리되는 대로 안건을 감찰원으로 보낼 것입니다. 하면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언 원장이 황궁으로 직접 그 안건을 가지고 들어오겠지요. 원본의 경우 이미 담박서국과 서산 서방(書坊: 책을 인쇄하고 판매하는 곳),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갔을 것입니다. 하여 며칠 뒤면 온 세상 사람이 관련 사항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일을 하려 해도 감찰원 8대처는 축소되었는데, 어찌 일을 완수한다는 게냐? 또한 지금 짐을 위협하는 것이냐? 온 천하 백성에게 짐을 웃음거리로 만들 생각인 게야?”
“감히 그럴 리가요. 단지 황제 폐하께서 재고해 주셨으면 하는 생각뿐입니다. 오늘 일은 분명 천하를 놀라게 할 것입니다. 하여 사관이 당당히 제 일을 하든, 야사로 남든, 서적에 기록되어 청사에 남을 것이니 유념하여 주시옵소서.”
범한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황제 폐하께옵서는 일대 명군이십니다. 전임 감찰원 원장인 제가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든, 하 대학사가 죽어서도 여죄를 남기든, 서적에 기록으로 남으면 결국에는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하오나 황제 폐하께서는 식견이 남다르시니, 분명 다른 의견이 있으실 것입니다.”
“들었을 때는 가능한 방법 같구나. 하나 정말 그리한다면 조정의 처사가 박정해 보이지 않겠느냐?”
황제가 냉정하고 비웃는 모습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아들에게 설득당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신하란 결국에는 황제 폐하의 노비입니다. 하여 노비가 죽었다면, 단순히 죽은 것일 뿐. 하오나 죽어서도 황제 폐하께 은혜와 위엄을 베푸시게 한다면 그에게는 광영인 것이지요.”
범한의 이번 말은 너무 각박했다. 하지만 비웃는 대상이 자신인지, 조정 관원인지, 이미 죽은 하 대학사인지, 아니면…… 온화함과 인자함이란 두 글자를 늘 잊지 않고 있는 바로 앞에 계신 냉혹한 군왕인지는 알 수 없었다.
“조정 일에는 법도가 있다. 하종위에게 죄가 있다면 당연히 어느 관아에서든 그를 잡아다가 하옥하고 충분히 심문한 후 합당한 형벌을 내려야 한다. 하여 어찌하여 그리 난폭하게 죽일 수 있겠느냐?!”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오늘 의분에 차 공격에 나선 관원에게는 죄가 있습니다. 하오나 결국에는 하늘의 뜻에 따른 것이니, 그 죄는 용서해줄 수 있습니다. 반면 저는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뛴 폭도이니 당연히 사면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범한이 살짝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제 목숨으로 세상의 의론을 잠재우십시오. 하면 분명 하종위가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범한이 부드럽게 권하듯 말했어도 그 안에는 실제로는 냉혹한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도 황제는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었다.
“하면 짐은…… 결국 하 대학사에게 마음의 가책을 느끼게 될 터.”
“그저 죽은 자일 뿐이옵니다.”
범한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위와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황제가 돌연 실망한 어두운 낯빛으로 범한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한참 후 다시 입을 뗐다.
“정말로 그저 죽은 자라면, 너는 오늘 또 무엇 하러 입궁한 것이냐?!”
범한은 입을 꾹 닫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두고 황제와 그는 이미 더는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 지난번 입궁했을 때 부황과 황제 폐하라는 호칭이 주는 차이 때문에 둘 사이는 이미 갈라선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오늘 범한이 결연하게 입궁한 건 분명 명확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오늘 경도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범한은 명확히 설명해야 했다. 조정에서 오늘 일어난 살육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풍향이 바뀔 것이고, 그것이 자신에게 충성한 부하들에게 완전히 다른 타격을 가할 수 있어서였다. 그러니 범한에게는 하늘같이 무거운 천자의 약속이 필요했다.
서산 서방과 담박서국은 일찌감치 오늘 일을 글로 엮어 천하에 배포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범한은 고작 명예를 더럽히는 수단만 가지고 황제를 위협하려던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게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범한이 이해하고 있는 황제 폐하는 가혹하고 무정하며 어떻게든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하종위의 경우, 생전에 황제에게 어떻게 중용되고, 얼마나 총애 받았는지와 상관없이 일단 싸늘한 시체가 된 이상 그는 더는 쓸모없는 노비일 뿐이다. 물론 경국 황제에게 일반 신하와 관료는 모두 노비였고, 이와 같은 사실은 심장이 싸해지겠지만 모두 사실이었다.
그러니 하 대학사의 죽음으로 조정의 근간이 과하게 흔들리지는 걸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을까가 황제가 최우선으로 고려하게 될 일이었다. 이에 범한은 준비해 온 책략으로 황제를 설득하려 한 거였다. 또한 범한은 대신을 독살한 죄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고, 그것을 피할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오늘 무력을 동원한 건 봉건 왕조의 한계선을 건드린 것이었다. 그러므로 황제 입장에서든, 천하 사람 입장에서든, 경국이라는 땅덩이가 아무리 커도 범한에게는 더는 설 곳이 없었다.
그런데 더 기묘한 건 다음과 같은 거였다. 천자는 온화하고 어진 기개를 중시했다. 설령 그게 만민을 땅강아지 취급하는 군왕이어서 일개 신하의 죽음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속으로는 험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니 신하는 천자와 친할지라도 건의를 할 때는 항상 조심하고 대의란 걸 내걸어 자신을 보호해야 했다. 다시 말해, 오늘 범한처럼 적나라하고 천박하게 말할 수는 없는 거였다.
그런데 범한이 기어코 그리 말하고 행동하는데도 황제가 굳이 그걸 격에 맞지 않는 부끄러운 행동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건, 뜻밖에도 대충 들어서였다. 이 세상에서 이런 적나라하고, 피비린내 나며, 파렴치한 대화가 가능한 건 이 천자 가문의 부자밖에 없는 거였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면, 내용 때문에 놀라기도 하겠지만, 그는 분명 다른 심각한 문제에 주목했을 것이다.
겨울날 황량한 궁에서 대화하는 동안 범한은 무례함으로 일관했다. 절을 하지도, 무릎을 꿇지도, 자신을 신하라 칭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계속 ‘저’라 칭하고, 태연하게 응대하며,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며 말했으니, 그야말로 방자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