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691
1032화 평민, 단검, 그리고 조천자(朝天子) (5)
범한이 하려는 말은 명백했다. 황제 폐하는 천하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니 황제 폐하가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하려면 범한에게는 그에게 충분히 신경 쓰일만한 패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번 전쟁이 일어나는 범위를 황성으로 국한시켜도 황제에게는 범한의 사람들을 거둬들일 방법이 충분히 있었다. 그러므로 범한은 황제 폐하가 그들에게 손을 못 쓰도록 압박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얼핏 보면 유치하고, 아이 같고, 또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요구사항처럼 들렸다.
이렇게 말이다.
‘황제 폐하! 제가 이제 곧 반역할 거거든요. 한데 만약 제가 반역에 실패해도 저를 따르던 부하들은 괴롭히지 말아 주세요!……’
하지만 눈 내리는 황궁에는 죽음과도 같은 침묵만 흐를 뿐이었다. 이러한 제안을 내놓은 범한과 차분하기만 한 황제 폐하는 그 말을 평범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거였다. 왜냐하면 범한의 손에 경국의 근간을 잘라 버리기에 충분한 거대한 살상 무기가 들려 있어서였다.
하지만 이 황제 폐하란 인물은 누군가에게 위협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범한이 황실 금고의 명줄을 쥐고 있는데도 그는 냉랭하게 범한을 쓱 보고는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었다.
“계속해 보아라.”
범한이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예를 올렸다.
“황제 폐하께서는 재능이 넘치시고, 오늘날 경국 국고는 가득 차 있으며, 민중의 의기는 높고, 군은 용맹합니다. 명장은 비록 죽었어도 명장의 자식들은 아직 군대에 남아 있으니, 경국에는 여전히 인재가 많습니다. 황실 금고가 제 손에 무너져도 단시간 안에 한꺼번에 붕괴될 리도 없습니다. 또한 황제 폐하의 능력이면, 북제 황제와 상삼호가 아무리 굳건히 저항해도 우리 대경국 군대는 북으로 맹렬히 밀고 올라가 주변을 삼킬 것입니다. 하여 황제 폐하께서는 천하통일의 숙원을 분명 생전에 이루실 것입니다.”
“이는 누구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화실 금고의 급소를 쥐고 있어도 그 정도로는 황제 폐하를 위협할 수 없다는 거 인정합니다. 하여 황제 폐하께서는 그런 건 전부 무시하셔도 됩니다.”
범한이 고개를 숙이고 차분하게 한 자 한 자 말을 이어 갔다.
“하오나…… 황제 폐하께서는 멀리 내다보고 계시니, 그것이 어찌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지겠습니까?”
범한이 고개를 들어 경국 황제의 두 눈을 차분하게 응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황제 폐하께서는 천하를 통일해 거대한 제국을 이루려 하십니다. 또한 이로써 이 대륙에서 이어져 오던 전쟁을 끝내 온 백성에게 안락한 미래를 주고, 청사에 길이 남는 영명한 군왕이 되려 하십니다……. 하여 폐하께옵서 추구하시는 건 천하 통일을 이룬 후 천추만대까지 이어지는 경국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살아 계시는 동안 북제와 동이를 병합하고, 항거하는 이들을 강력한 군사력으로 억누르고, 천재적인 지혜로 민심을 한데 모을 것이니, 분명 천하 통일을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오나 폐하께서 붕어하신다면요?”
범한이 입가를 살짝 올리고는 말을 이어 갔다.
“세상에 폐하 같은 분은 없습니다. 하여 천하를 합병한 대경국 조정은 대체 어디에서 뛰어난 통치자를 다시 찾아야 할까요? 북제는 영토도 넓고, 인재도 많고, 인구도 많은데 또한 북위의 기개까지 이어받아 자신들이 적통이라 자부하지요. 한데 만약 이런 북제를 억누를 사람이 없는 와중에 이들 억 만의 이국민이 군사를 일으켜 항거하면 누가 막을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 대경국의 맹장들이 이곳저곳을 휩쓸며 살인이나 해야 할까요? 그리하면 통일된 초기의 천하는 다시 전쟁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 대경국은 통일된 강토를 유지하기는커녕 천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반란 때문에 경도마저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사서(史書)를 통독하셨으니 군사력으로 사람을 통제하면 결국에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걸 자연스레 알고 계실 것입니다. 모 시황제(始皇帝: 자신을 처음 황제라 칭한 자)는 천하 사람들을 죽였으나 두 세대도 안 되어 멸망했습니다.”
“3년 동안, 황제 폐하의 원대한 위업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황실 금고가 끊임없이 뒷받침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경국의 중추인 조정이 새로 병합된 지역보다 국력 면에서 절대적 우세를 유지함으로써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어야 합니다. 즉, 국력의 우세로 시간을 벌고, 교류를 명목으로 내세워 융합의 세를 키워야 하지요. 하여 이것이 쌓이고 쌓여 여러 대가 지나면, 예전 조정은 잊힐지언정 새로 유입된 백성의 마음은 얻게 되니 이로써 진정한 통일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하오나 만약 황실 금고가 무너지면, 우리 대경국이 그동안 국력과 군사력 면에서 유지했던 우세를 누가 보장해줄 수 있을까요? 황제 폐하께서 살아 계시는 한은 본질적으로 변하는 건 없겠지요. 하오나 폐하께서 붕어하시고, 또 황실 금고마저 없다면 누가 이 대륙의 국면을 예전처럼 유지해 나갈 수 있을까요?”
“한데 사람이란 언젠가는 죽기 마련입니다.”
범한이 황제의 양 눈동자를 차분하게 주시하며 말을 이어 갔다.
“폐하 같은 분도 결국에는 생로병사에서 자유로우실 수 없습니다. 또한 3년간 조정에서 이루어진 계획을 보니, 황제 폐하께옵서도 장래의 일에 대해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폐하께옵서는 자신감이 넘치시는데, 그럴 만한 자격을 지닌 분이십니다. 또한 폐하께서는 육합(六合: 우주, 온 세계)을 쓸어버리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북제 황제와 상삼호는 절대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계시지요.”
범한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하여 오늘 황실 금고가 없어져도, 황제 폐하께옵서는 수십 년 동안 일궈 오신 원대한 위업을 완성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대경국이 반짝 피었다가 반항의 폭풍우 속에서 무너지는 건 바라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란 늘 승리자가 쓰는 것이므로, 천하 통일 후 대경국이 천추만대 이어지지 않으면 위대한 폐하께서는 청사에 근시안적인 폭군으로만 남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한이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는 우리 대경국이…… 천추만대 이어지기를 바라십니다. 하여 폐하께는 제 손에 있는 황실 금고가 필요합니다.”
* * *
“네가 짐에게 허락이란 걸 해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냐?”
황제가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런데 그건 기쁨과 위안이 담긴 웃음이었다. 심계가 깊은 황제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아들 때문에 즐거워진 게 분명했다. 쉬이 알기 힘든 자신의 진심에 범한이 차근차근 말로 풀어가며 다가오고, 그로써 자신의 원대한 계획에까지 거의 접근하였기 때문이었다.
“제가 죽으면, 필사해 놓은 제품 제작 공정은 조정으로 돌아가고 민북을 파괴하는 작업도 곧 멈추겠지요. 황제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에게는 비교적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있습니다.”
범한은 간절한 어투로 말하기는 했어도 자신이 패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늘 홀로 입궁해 황성을 전쟁터로 만들어 놓았으니, 패하는 쪽에게는 당연히 죽음밖에 없는 거였다. 그러니 어찌 두 번째 길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
범한이 말을 하면서 몸을 돌려 황제와 나란히 섰다. 그런 후 앞쪽에 있는 눈이 쌓여 은 부스러기처럼 깔린 우거진 긴 풀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왼손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황제 폐하의 공격으로 초원의 선우는 이미 재기할 힘을 잃었습니다. 하오나 제일 서쪽에 있는 산 아래에는 아직 설원에서 이주해 온 7천 명의 만(蠻)족 기마병이 있습니다. 이들 신예 병사들은 대단히 강인하지요. 만약 황제 폐하께서 제 요구를 들어주신다면, 이 만인 기마병들이 영원히 서량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범한의 시선을 따라 왼쪽 잔설(殘雪)로 눈빛을 보내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번 청주 대첩에서 속필달의 왕정을 모두 축출했는데, 만족 기마병은 고작 2, 3천 명만 데려온 거였더구나. 궁전이 만족 기마병의 전투력이 우리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만약 하늘께서 북쪽 설원에 3년간 대설을 내리지 않으셨다면, 그들도 그 먼 서호의 초원까지 가지는 않았을 게야. 과거 몇 년 동안 북문 천관에서 만족을 막은 상삼호는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한 거였군.”
“하나 인원수가 너무 적어서 국면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게다.”
황제가 미간을 펴고는 냉정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금 전 범한이 제시한 패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사 표시였다.
“우리 두 사람은 지금 천추만대의 일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범한은 오늘 내내 경박하게 말했는데, 그걸로 모자랐는지 이번에는 대역무도하게도 ‘우리 두 사람은’이라는 표현까지 쓰고 말았다. 그런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청년과 장년 남자의 수가 7천이고, 실력이 대단히 높습니다. 부녀자의 수도 적지 않고요. 게다가 서호가 크게 타격을 입었으니, 이번 일로 만족의 기마병이 초원에서 중요한 실력자로 부상할 것입니다. 그들이 각 부락으로 가 서호 여인들을 빼앗는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황제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서호인들은 자식을 많이 낳습니다. 하여 십여 년이나 이십 년 정도면, 이 부족도 대단해질 것입니다.”
“한데 그들을 억누르고, 통제하고, 인도하는 사람이 없다면요? 갑자기 커 나온 부족이 어찌 두 번째 왕정이 아니라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범한이 왼손 쪽에 깔린 눈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어 갔다.
“서량로 백성들은 너무 참담하게 살고 있습니다. 설마 그들이 몇십 년을 더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그러자 황제가 옅게 웃었다.
“짐이 이해가 안 되는 게 있구나. 서량로와 초원에 있는 네 부하들이 짐에게 대부분 죽었다. 한데 대체 누가 더 남았기에 그들 만족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냐?”
“송지선령입니다.”
범한이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옛 부족의 여왕으로 신분은 존귀하나 실질적으로 그들을 호령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 송지선령은 이곳에서도 신분이 있고 초원에서도 지위가 높으니, 그녀가 지닌 강력한 능력으로 이미 만인(蠻人) 대부분의 역량을 한데 모았을 것입니다. 하여 그녀를 통제할 수 있다는 건 그들 만인까지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설마 너는 그녀를 통제할 수 있는데 짐과 조정에서는 못한다는 뜻인 게냐?”
황제가 살짝 비꼬며 반문했다.
그러자 범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송지선령이 바로 해당타타입니다. 그녀는 제 여인이고요. 하여 저만 그녀를 통제할 수 있습니다.”
황제는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 한동안 아무 말 못 하다가 결국에는 웃음이 터져 고개만 절레절레 내젓고 말았다. 그런 후 황제는 두 사람 앞에 펼쳐진 눈밭에서 동남쪽 방향에 있는 구석으로 시선을 보냈다.
“황실 금고의 제품 제작 공정은 양손으로 공손히 들고 와서 돌려놓거라. 다른 건 또 없느냐? 강남에서는 혼란이 일지 못할 게다. 짐이 그에게 먼저 혼란을 일으키도록 했느니라. 네 부하들의 충성심에 짐이 좀 놀라기는 했으나, 하서비는 이틀 안에 끝장이 날 것이고, 소문무는 황실 금고에 사람을 숨겨 놓기는 했어도 그자 자체는 이미 끝난 게다.”
“짐은 성계림도 소환했고, 임백안의 집안 형이란 자도 3대 작업장이 있는 군(軍)에서 소환했다.”
황제가 양손으로 뒷짐을 지고는 아무 윤곽도 없는 눈 내린 땅을 범한과 함께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범한도 눈밭 동남쪽 구석으로 시선을 보낸 후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오나 강남에서는 여전히 혼란이 일 수 있습니다. 황실 금고 쪽은 이미 황제 폐하께 답변을 들었으니, 제가 더는 무슨 짓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데 강남은 상업이 흥성한 곳이고, 황실 금고와 함께 조정에 약 4할의 세금을 내고 있습니다. 하여 강남에서 혼란이 인다면 조정이 어찌 버틸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