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7
007화 자객이 아닌 손님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침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객이 신경 쓰여서 다른 건 물어볼 새도 없었다. 범한은 바로 본론을 꺼냈다.
“누가 내 방에 몰래 숨어들어 왔는데 제가 자침으로 기절시켜서 지금 바닥에 쓰러져 있어요.”
맹인 소년은 범한의 시선을 일단 피했지만 심장이 요동치는 소리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하게 표정을 숨기고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도련님, 무슨 말씀이세요?”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어쨌든 지금 날 도와줄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요.”
범한은 실실 웃으면서 맹인 소년의 손을 잡고 별저 쪽으로 끌어당겼다.
‘당신이 언제까지 날 모른 척할지 모르겠지만 상관없어요.’
“도련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맹인 소년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 아이가 어떻게 날 알아보는 거지?
눈앞의 어린아이가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당시 포대기에 싸인 범한을 담주로 보낼 때, 그는 태어난 지 몇 개월도 안 된 갓난아이였다. 자신을 기억할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면 혹시 백작가 별저에서 지내는 노부인이 그의 신분을 범한에게 얘기한 걸까.
깊은 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뉘 집인지 몰라도 밤중에 일어나서 화장실을 가려다가 방을 잘못 찾은 모양이다.
맹인 소년 오죽은 무관심한 얼굴로 몸을 살짝 기댄 채 범한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더니 잡화점의 문을 닫고 백작가 별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범한은 작은 보폭으로 열심히 그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범한이 밖으로 나왔던 방법 그대로 개구멍을 통해 별저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에 들어서자 정신을 잃은 자객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봐요, 봐요.”
여전히 쓰러져 있는 자객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범한은 조금 긴장한 눈치였다.
“오죽 아저씨, 지금까지 계속 잡화점에서 지냈으면서 왜 아는 척도 안 하신 거예요?”
오죽이라는 맹인 소년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한참 있다가 대답했다.
“도련님, 정말 절 놀라게 하시는군요.”
정말 의외였다. 물론 범한은 아가씨의 핏줄이니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오죽은 네 살도 안 된 아이가 이렇게 어른스러운 데다 경도에서 온 비개 대인을 상대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사람부터 먼저 처리하죠.”
범한은 있는 힘을 다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객의 몸을 돌려 눕혔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복면을 벗겨 내자 자객의 실체가 드러났다.
삐쩍 마른 얼굴에 나이도 어느 정도 들어 보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얗게 난 턱수염 중간중간에 푸르스름한 수염 몇 가닥이 섞여 있었다. 얼핏 봐도 호감형 얼굴은 아니었다.
깜짝 놀란 범한은 얼른 오죽 뒤로 숨었다. 그의 소매를 꽉 잡고 겁에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저씨, 이 사람 너무 무섭게 생겼어요.”
“이 사람은 감찰원 제3 부처의 비개 대인입니다.”
오죽은 천천히 몸을 숙여서 자객의 아래턱을 만져 보았다.
“천하에서 독술로 뛰어난 3인 중 하나로 꼽히는 분으로, 독을 쓰고 구별하는 것 외에도 해독에도 아주 정통한 분이십니다. 그런 엄청난 분이 겨우 도련님이 내려친 자침에 이렇게 쓰러지다니. 도련님이 운이 좋은 건지, 이분이 운이 나쁜 건지 모르겠군요.”
‘저자의 운이 나쁜 거지.’
범한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기 쓰러져 있는 사람이 이 세계에서 꽤 유명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놀랍긴 했다. 하지만 그가 상대한 어린아이는 보기에만 어릴 뿐 실제로는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이상한 괴물이었다. 그야말로 운이 지독하게 없었던 셈이다.
“손으로 만지지 마세요. 몸에 독이라도 묻어 있으면 어떻게 해요?”
범한이 맹인 소년 오죽을 걱정해 주었다. 하지만 오죽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 설명도 없이 자객의 몸을 더듬었다. 그 모습은 마치 이 세상에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독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범한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또다시 물었다.
“아저씨, 이 사람 어떻게 할까요?”
범한이 자꾸 말을 붙이는 것은 붙임성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맹인 소년이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람이자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가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췄다는 것도 이미 잘 알고 있었으므로 범한은 일부러 귀여운 척, 예를 갖추는 척 꼬박꼬박 ‘아저씨’라는 호칭을 썼다.
사방을 살피던 범한의 시선이 칼에서 멈췄다. 마음 같아서는 눈 한번 질끈 감고 쓰러져 있는 자객을 깔끔하게 해치워 버리고 싶었다.
범한의 마음을 읽었는지 몸을 일으킨 오죽이 고개를 저었다.
“도련님과 아가씨는 성격이 참 많이 다르네요. 어린 나이에 그런 무서운 생각을 하시다니 누구에게 배우신 거죠?”
“나 혼자서 터득했어요.”
범한은 자신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아서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저씨가 잡화점에 머물면서 항상 저를 지켜 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어머니의 원수가 아저씨의 존재를 알고 여기 있는 나까지 찾아낼까 봐 일부러 백작가 별저에 남지 않았다는 것도요. 그래서 저도 마음을 독하게 먹은 거예요.”
오죽은 고개를 가로저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범한은 어머니의 종이었던 이 무림 고수가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걸 눈치채고 웃었다.
“아저씨, 다음에는 뭘 하면 되죠?”
그는 오죽이 살인 같은 일을 처리하는 데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미처 생각지도 못한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도련님, 사람을 잘못 고른 것 같군요.”
“뭐라고요? 잘못 골랐다고요?”
범한은 순간 멍하니 있다가 온 얼굴이 피범벅이 된 자객의 얼굴을 다시 살펴보았다.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너무 많은 생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죽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비개 대인은 감찰원 제3 부처를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비밀 신분이긴 하지만.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도련님 아버님 부하의 부하입니다. 그가 여기 담주까지 왔다면 도련님을 죽이러 온 건 아닐 거예요. 만약 정말 그렇다면 도련님이 어떤 능력을 가졌든 이미 여러 번 죽이고도 남았을 겁니다.”
범한은 그제야 자객이 자신이 아버지가 보낸 사람이라고 했던 것을 떠올랐다. 하지만······.
“생긴 건 미국 드라마 에 나오는 티백처럼 생겼는걸요. 이런 늙은 색마를 누가 믿을 수 있겠어요.”
비개는 지금까지 경도 감찰원 소속 사물에 대해 연구하는 격물소에서 일해 온 오십 넘은 늙은이였다. 그가 가진 독술에 대한 명성은 자자했지만 이미 거의 퇴직한 것이나 다름없어서 이번처럼 유력 인사의 부탁만 아니었다면 그도 대차게 거절했을 것이다. 그는 결코 경도를 떠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처음 만난 학생이 자신을 가격해서 피범벅으로 만들어 놓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자신 앞에 서 있는 어린아이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커다란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 모양새가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뒤섞여 매우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런 어린아이에게 분노를 표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종처럼 보이는 사내아이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종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어이, 거기! 빨리 와서 이거 안 풀어! 내가 누군지 알아? 나는 백작 어르신이 보낸 스승이란 말이다!”
하지만 웬걸, 그 종은 더 교만한 태도로 아예 그를 무시해 버렸다.
“내가 당신을 보낸 그분과 협의한 사항에는 당신이 여기에 온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말입니다.”
“오죽 대인?”
비개는 게슴츠레한 눈을 번쩍 뜨고 나서야 종이 누구인지 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이고, 오죽 대인이셨군요.”
정신을 차린 자객이 자신은 비개라고 소개하는 말을 듣고 범한은 일이 간단치 않으리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