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716
1057화 여정에 오르다 (3)
“형.”
범사철은 오랜만에 보는 형을 바라보며 경국 경도에서 일어난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형이 이제 곧 세인들에게 불귀(不歸)의 길로 여겨지는 여정에 오를 거라는 사실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슬피 울기 시작했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모두 담주 계시고, 할머니께서는 몸이 편찮으신데, 형이 이렇게 떠나시면 우리는 어쩌란 말입니까?”
“으이구 이 꼬맹아!”
범한은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지만 오히려 기침을 하며 웃는 얼굴로 꾸짖어주었다.
“내가 죽으러 가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담주에 계신 아버지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겠지. 나중에 시간 나면 돌아가서 뵙고, 나 대신 효도를 해다…….”
범한은 순간 탄식을 하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범사철도 현 국면에서는 형님이 다시 담주로 돌아갈 가망성은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황제 폐하께서 형이 살아오도록 놔둘 리 없어서였다.
“요 몇 년 동안 너에게 준비해두라고 부탁한 건 잘 준비해 두었니?”
범한은 형제가 상봉하자마자 슬픈 감정으로 빠져드는 건 원치 않아 이내 억지로 화제를 돌리며 정색하며 말했다.
“이번에 위험한 곳으로 가는 거라 나도 어떤 것과 마주치게 될지 알 수 없구나. 너에게 준비해 두라고 한 물건들은 내 목숨 보호용이니 악질 상인처럼 굴면 안 될 게다.”
범한은 농담이랍시고 던졌지만 전혀 웃기지 않아 범사철은 그냥 “응.”하며 대답만 할뿐이었다. 그 물건들은 상단 대열 안에 있었다. 그리고 상단 대열은 범한을 따라 북문 천관까지 갈 예정이라 그 물건들은 굳이 지금 꺼낼 필요는 없었다.
형제가 마차 대열에서 떨어져 나와 한동안 상세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연히 담주, 경도, 부모님, 조모님, 약약과 형수, 조카들에 관한 일이었다.
헤어질 무렵이 되자 형제가 마차 대열 옆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범사철이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어느 마차 안에서 무거운 항아리를 꺼내 끌어안고 나왔다. 그가 범한 앞에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이는 1황자 마마께서 동이성에서 보내주신 거예요. 형이 신신당부한 거라 절대 잊지 않을 물건이라 하시더군요. 대체 무엇입니까? 이리 무거워도…… 감히 열어볼 엄두는 안 나더라고요.”
그러자 범한이 갑자기 엄숙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살짝 웃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체력으로는 이리 무거운 단지는 들지 못할 걸 알고 마차 위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마차에서 왕 십삼랑이 내려오자 범한이 그에게 말했다.
“이리 와보게. 자네 오른팔에 힘이 좀 달리겠지만, 얼른 자네 사부님 좀 끌어 앉아보게. 자네 사부님께서 너무 무거우셔서 내가 품에 안고 옮겨드릴 수가 없군.”
범한의 말에 마차 부근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처구니가 없어 그냥 멍하니 서 있었다. 심지어는 항아리를 안고 있는 범사철의 낯빛도 변해 버렸다. 자신이 안고 있는 게 사고검의 유골이었다니. 이게 대종사의 유해였다니!
왕 십삼랑도 낯빛이 변했다. 그가 보물 다루듯 조심스레 유골 항아리를 받아들고는 아무 소리 않고 곧장 마차 안으로 돌아갔다. 한편 범한은 방금 모든 광경을 지켜보다 참다못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설마 가는 내내 죽은 사람과 같이 있어야 하는 거야?!’
“왜입니까?”
왕 십삼랑이 갑자기 마차에서 얼굴을 내밀고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자네 사부님 분부시네. 내가 신묘로 가게 된다면 그분을 안고 가기로 했거든.”
범한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 * *
마차 대열은 천천히 움직이며 점점 멀어져갔고, 범사철은 눈밭에서 무릎을 꿇고 앉은 형을 배웅했다. 한편 성벽 위에 있는 사리리의 눈에는 감출 수 없는 실망감과 슬픔이 드리워졌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북제 황제를 바라보며 작은 음성으로 천천히 말했다.
“왜 상경성으로는 들어오려 하지 않는 걸까요?”
그러자 북제 황제가 차분한 얼굴로 뒷짐을 진 채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않다가 입을 열었다.
“그가 경국 황제와 도박을 했는데 져서 약속을 지키는 중이겠지. 짐에게는 이용당할 수 없을 터이니, 어찌 상경성으로 들어올 수 있겠느냐? 이번에 신묘로 가기 위해 범씨 집안 둘째에게 오랫동안 준비를 시켜놓은 걸 보면 분명 무슨 계산이 있는 게야. 하여 네가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하오나 해당타타는 어찌하여 우리와 말도 나눠보지 않고 떠났을까요?”
“해당타타의 현 신분은 범한의 친구니라. 이 점을 천하에 명백히 할 필요가 있는 것이겠지.”
말을 마친 황제의 눈에 지극히 복잡한 심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황제가 성벽 위를 떠나려 하는 순간 그의 눈에서 문득 담담한 만족감이 흘러나왔다.
떠나고 있는 마차 대열에서 범한이 활짝 웃는 얼굴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어서였다. 이에 북제 황제도 미소를 짓고 함께 손을 흔들어 주려 했다. 하지만 문득 이건 아니다 싶어 그는 억지로 팔을 내리고 속으로 한숨만 내쉬었다.
범한이 손을 내리고 마차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사고검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를 꼭 끌어안고 절대 내려놓지 않는 왕 십삼랑과, 창에 기대 고국의 풍경을 바라보는 해당타타를 번갈아 바라보며 속으로 자신에게 말했다.
‘여인들이여, 형제여, 잘 지내게!’
‘잘 지내게’라는 말은 주로 다시는 만나지 못할 때 쓰는데, 범한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천하에서 범한의 계획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범한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절대 신묘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범한은 그런 말 따위는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섭경미가 해냈다면 자신도 할 수 있어서였다.
* **
눈보라가 봄을 돌려보냈다. 이 대륙의 봄은 남쪽에서는 힘을 키우고 있었지만 북쪽에서는 눈보라가 일찌감치 봄기운을 요람 안에서부터 말살해버린 터였다. 이에 대륙의 북단에서는 1년에 360일 동안 칼바람과 서릿발 때문에 아예 봄이란 게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하늘 가득 날리는 눈보라는 뼛속 깊이 침투하는 칼날이 되어 왼쪽에서 오른쪽에서 쉴 새 없이 난도질을 해댔다.
사흘을 꼬박 이동하다가 처음으로 눈 위로 드러난 시커먼 색의 바위를 보았다. 그런데 이곳의 무정하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조각해 낸 것이라 그런지 흡사 죽음의 형상 같았다. 이곳은 온통 눈과 얼음으로만 뒤덮인 곳으로 그야말로 죽음의 지대였다. 그런 이곳에 작은 점이 일렬로 생겨났다. 이 점들은 백 년 동안 고독했던 설원 위를 걸으며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가끔씩 개 짖는 소리가 눈보라 치는 소리를 뚫고 저 멀리까지 퍼져나가면 아직 쌩쌩하게 살아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 대오에는 사람이 셋밖에 없었지만 설견(雪犬)은 무려 60여 마리나 되었다. 이 개들은 음식물과 장비를 실은 기다란 썰매를 끌고 계속해서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들 북극 지역을 오가는 설견은 설랑(雪狼)의 후손이며 혹한을 견딜 수 있는 북쪽 지역의 만인(蠻人) 정도만 그들을 인간이 쓸 수 있도록 훈련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요 몇 년간 대륙은 갈수록 차가워졌고, 북문 천관을 지나면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 버렸다. 이에 과거 설원에서 맨팔로 전투를 치르던 만호(蠻胡: 만인, 만족을 이른다)도 남하해 서쪽 초원으로 가버려 이제 설원은 텅 비어 있었는데, 그렇다면 이 설견들은 대체 뭘까?
두툼한 모피로 꽁꽁 싸매고, 얼굴에는 따뜻한 호피(狐皮:여우 가죽)를 쓰고, 발에는 가죽 장화를 신고, 손에는 두툼한 장갑을 껴 세 사람은 마치 이불로 동그랗게 말아 놓은 것처럼 보였다. 범한이 ‘쿨럭’ 하며 기침을 했다.
그러자 그의 입술 사이에서 나온 열기는 천지를 둘러싼 혹한에 금세 얼음알갱이가 되어 버렸다. 그의 낯빛은 살짝 창백해져 있었다. 비록 경력 5년에 신묘 위치를 안 후 몇 년 동안 몰래 준비해 왔다지만, 막상 설원을 밟고 나니 그제야 자연의 위력이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해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북제 상경성을 떠난 지 이미 여러 날이 지났다. 군사가 많이 없는 북문 천관을 지난지도 이미 7, 8일이 지났다. 눈으로 뒤덮인 성에 있던 군인들이 설원으로 들어가는 자신들과 개들을 시체 보듯 했었는데. 범한이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보아하니, 자신들 일행을 좋게 봐주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는 거였다.
그가 손을 입가에 대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60여 마리의 설견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흔들며 몸에 묻은 눈과 얼음 조각을 떨어냈다. 그런 후 긴 털에 네 발로 차가운 눈을 밟고 서 있는 설견들은 추위가 두렵지 않다는 듯 길고 붉은 혓바닥을 늘어뜨리고 주인의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눈보라가 조금 잦아든 것 같자 범한의 앞뒤에 있는 간이 썰매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앞으로 나왔다. 이불에 돌돌 말아 싸 놓은 것 같은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이 궁금한 표정으로 범한에게 다가왔다.
“눈이 잦아들었을 때 더 서둘러 가야지요.”
왕 십삼랑의 음성이 모피를 뚫고 밖으로 전달되어 그런지 조금 웅웅,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범한이 무겁게 두어 번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는 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뒤에 있는 사람들은 따라오기는 하는 건가?”
그러자 해당타타가 가죽 모자 가장자리에 있던 귀마개를 내리고 말쑥하고 귀엽게 생긴 귀를 드러냈다.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한동안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는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낙오한 거 같아요.”
눈보라가 잦아들었다고는 해도 세 사람은 잘 들리지 않아 함께 말하는 것도 버거웠다. 범한이 입가를 끌어 올려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낙오되었다니 잘 되었네요. 당신네 젊은 황제께서 보낸 사람들이 이 설원에서 얼어 죽는 건 원치 않았거든요.”
그러자 해당타타는 별 대꾸 없이 눈만 살짝 가느다랗게 뜨고 저 먼 북쪽 설원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온통 새하얀 눈뿐이었다. 천지간에 눈을 빼면 아무것도 없었다.
가뜩이나 무미건조한 여행인데 하필이면 또 위험하게도 혹한이라니.
해당타타의 눈동자에 복잡한 심기가 드리워졌다. 천관을 나와 7, 8일이나 지났지만 범한은 딱히 길을 찾지도 않으면서 설산과 얼음 언덕을 돌아가라고 명만 내린 후 말없이 이동하기만 할 뿐이었다. 마치 신묘에 어찌 가는지 아는 것처럼 말이다.
범한은 부상 정도가 심해 길을 찾는 게 아예 불가능했다. 왕 십삼랑은 오른팔이 아직 완전히 나은 건 아니었다. 그리고 세 사람 중에 해당타타는 몸이 가장 연약했다. 하지만 길을 찾아야 한다면 그녀가 해야만 했다. 그런데 해당타타는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었다. 범한에게 대체 무슨 믿는 구석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태양을 보기 힘든 곳에서, 산천의 모양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로지 눈과 얼음만 있는 황야에서 그는 길을 잃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었다.
범한이 뒤쪽에 있는 썰매에서 죽도(竹刀)를 꺼냈다. 그리고 조심스레 장화 위에 붙은 얼음 덩어리를 긁어냈다. 모든 것의 모든 것을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 그러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빠짐없이 신경 썼다면 허공을 떠돈다는 신묘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북문 천관에서 나온 지 여러 날, 범한은 썰매 대오를 이끌고 설원에서 한 바퀴 돌았다. 모두 몰래 따라붙은 그 대오를 떼어내기 위해서였다.
북제 황제가 일행의 안전을 위해, 아니면 범한 뒤를 따르며 사람들이 모르는 곳에 숨어 있는 천외(天外)의 신묘를 찾기 위해 그들을 딸려 보냈는지는 알 바 아니었다. 범한은 그들을 용납할 수 없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첫째, 그는 이 강추위 속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지 않았으면 했다. 둘째, 범한 스스로도 신묘에 대체 어떤 게 있는지 확실히 알지 못했다. 고하가 과거에 신묘의 위치를 숨긴 건 신묘에 있는 사물이 인간 세계로 흘러들어와 이 세계에 알 수 없는 위해를 끼칠 수 있다고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범한도 조금 더 조심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