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718
1059화 북풍이 사납게 분 밤 (1)
밤이 되었다. 그러자 눈보라는 일었다 말았다를 반복했다.
눈보라가 일 때면 그 소리가 드넓은 벌판을 뚫고 지나가면서 어마어마한 양의 눈들을 들썩여 놓았다. 그러면 암흑으로 둘러싸인 출렁이는 식인의 땅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무서운 광폭한 소리가 쉼 없이 들려왔다.
눈보라가 잘 때면, 천지간에는 냉랭한 침묵만 흘렀다. 폭풍을 간직한 듯한 설원에 싸늘하지만 맑고 투명한 은빛이 만 리에 걸쳐 펼쳐졌지만, 백옥처럼 매끈하게 끝없이 펼쳐진 설원에는 한없는 적막감만 흘렀다.
달빛이 설원에 흩뿌려졌다. 하지만 유난히 춥고 차가운 설원은 순식간에 달빛마저 얼려버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눈보라가 크게 일든 천지가 고요하든 상관없이 어느 고지대 한편을 밝힌 점점의 등불은 꺼질 기미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미지의 것을 향한 인류의 갈망처럼 고집스레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천막 내 화로는 소중한 온기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엄청난 한기를 모두 막고 있었다. 이는 모두 특수 제작한 설원 용 천막이 바람과 추위를 효과적으로 막아주고, 화로에 사용한 연료가 오랫동안 타면서도 화력이 좋아서였다.
얼굴을 다 가려주던 가죽 모자를 벗은 해당타타는 두 뺨이 사과처럼 발그레해져 있었다. 그녀가 화로 옆에 쭈그리고 앉아 불을 쬐다가 은근히 걱정하는 모습으로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범한은 일찌감치 침낭에 들어가 있던 터라 그녀의 감정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북쪽으로 이동한지 이미 꽤 여러 날이 지났다. 날씨도 갈수록 추워졌고, 낮에 이동하는 시간도 매일 줄어들었다. 이에 범한 일행은 대부분의 시간을 천막 안에서 눈을 피하는 데 썼다. 하지만 범한은 이런 문제로 걱정하기보다는 휴대한 연료와 음식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지나 계산하고 있었다.
전에 잡은 백곰은 모피만 남았다. 그 사이 범한은 혼자서 곰 발바닥 두 개를 해치웠다.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은 범한의 느긋한 태도에 경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범한이 휴대할 물건을 챙길 때 조미료까지 잊지 않고 챙겨왔다는 사실에 그들은 더 경악해 버렸다. 솔직히 곰 발바닥은 맛있는 부위도, 또 먹기에 충분한 부위도 아닌데 말이다.
북극에 있는 신묘로 탐험 여행을 시작한 초기에는 설견들은 힘들게 썰매를 끌고 난 후 자유롭게 사냥을 해서 배를 채웠다. 하지만 설원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살아 있는 야생동물을 볼 기회가 줄어들어 범한은 어쩔 수 없이 개들에게 준비해둔 먹이를 먹이기 시작했다. 매일 힘들게 일하는 설견들을 범한은 홀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개들은 먹성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이번 신묘 행을 위해 범한은 준비를 충분히 해두었다. 설맹(雪盲)을 막기 위한 검은 안경, 특수 제작한 얇은 융으로 된 침낭 그리고 수많은 물자를 준비했다. 하지만 경계심도 늦추지 않았다. 만약 여름 전에 신묘를 찾지 못하고 북극 빙원에서 꼬박 반년 동안 극야를 보내게 된다면 지금 지닌 음식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었다. 그러면 최후의 수단으로 개를 잡아먹어야만 했다.
고하와 소은은 인육을 먹으며 버텼지만 범한은 그들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범한이 고개를 살짝 틀어 화로 옆에 있는 해당타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슴을 콕콕 찌르는 통증을 억지로 참고 입을 뗐다.
“옛날이야기 듣고 싶지 않아요?”
“무슨 이야기인데요?”
해당타타가 아직 발그레한 얼굴을 들지도 않고 물었다. 그러자 범한이 웃으며 소은과 고하가 과거 신묘를 찾으러 갔을 때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두 노선배들이 인육을 먹으며 버텼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해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해당타타가 낯빛이 점점 변했다. 마치 자신의 사부께서 그런 무서운 선택을 했다는 게 순간 이해할 수 없는 듯했다. 복잡한 기분이 마음을 휘저어 해당타타는 한동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맑고 투명한 눈동자로 범한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이런 때에 내게 그런 말을 해준 걸 보니, 불쾌감이나 타격을 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어서겠군요.”
“해당타타가 설견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범한이 눈꺼풀을 살짝 내리깔고는 피곤한 모습으로 말을 이어 갔다.
“사실 저 설견들이 우리를 많이 도와줬지만, 정말로 식량이 모두 떨어지는 날이 오면 우리는 저 개들을 잡아먹어야 해요. 하여 지금이라도 마음의 준비를 해두라고 한 말이에요.”
해당타타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범한 앞에서 그녀는 북제 성녀일 필요도, 천일도 장문인일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감정을 드러낸 거였다. 해당타타도 여인이니 날마다 행복하게 뛰어다니는 설견들이 그녀에게는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요 한 달 동안 개먹이 담당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느닷없이 저 개들이 원래……. 범한은 처음부터 안심이 되지 않았던 거였다. 그러니 힘겹게 썰매를 끄는 저 설견들도 애당초 비축 식량 중 하나로 준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신묘 행을 위해 해당타타는 이미 힘겹게 준비한 터였다. 그래서 사부님께서 인육까지 드신 참사 부분에서 그녀는 이번 일에서의 경중을 알아차렸다. 이에 해당타타는 고개만 살짝 숙이고 범한의 말에 반박도 대꾸도 하지 않았다.
천막 안은 고요했다. 그래서 밖에서 나는 눈보라 소리는 더 선명하게 들려왔고, 심지어는 얼마나 많은 눈이 천막 외피를 험악하게 때리는지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탁탁탁, 하며 치는 소리에 일행은 마음 편히 있을 수 없었다.
바로 이때 천막 밖에서 눈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해당타타와 범한은 낯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발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서였다. 아무도 없는 이 황무지에, 그것도 엄동설한의 설원에는 의지로 똘똘 뭉친 인간 세상 최강자 세 젊은이를 빼면 아무도 없었다.
왕 십삼랑이 나무로 된 문을 열고 들어오자 찬바람이 따라 들어와 화로에 있는 불꽃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이에 이 귀신 나올 것 같은 엄동의 설원은 그 자체의 저온으로 불씨마저도 얼려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해당타타가 품에서 검은색의 작은 덩어리를 꺼내 화로 안에 던졌다. 그러자 불길이 다시 안정세를 되찾았다. 이는 범한이 여러 해에 걸쳐 특수 제작해 준비한 물건들이었다. 그래서 불씨의 경우는 단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었다.
왕 십삼랑이 문 앞에 있는 담요 위에서 몸에 잔뜩 묻은 눈과 얼음을 떨어냈다. 그리고 얼굴에 두르고 있던 여러 겹의 두건을 벗은 후 얼어붙어 하얗게 변한 입술로 싸락눈 같은 짤막하게 몇 마디를 내뱉었다.
“갈무리 끝. 잡시다.”
해당타타는 잡다한 일들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현재의 극단적 환경에서 이 여인은 어느새 범한에 의해 가정주부로 개조되어 있었다. 한편 왕 십삼랑은 몇십 마리 설견을 통솔하고 천막 치고 방어하는 일을 책임지고 있었다. 이에 그가 조금 전 ‘갈무리 끝’이라고 말한 이유는 설견들을 위해 방풍, 방설 해줄 눈으로 된 집을 다 만들어 주었다는 뜻이었다.
단순히 고생하는 정도를 놓고 말한다면, 왕 십삼랑이 제일 힘든 편이었다. 이에 범한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왕 십삼랑에게 말했다.
“내일부터는 자네가 개먹이 담당이 되어주게.”
왕 십삼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로 옆에 앉았다. 해당타타가 그를 향해 뜨거운 탕을 건넸다. 그러자 왕 십삼랑이 탕을 받아들고 천천히 마시며 마실 때마다 그 맛을 더 섬세하게 음미했다. 그런데 왕 십삼랑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이 바닥으로 축 처진 채 옅게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원래대로 돌아가려면 부단히 고된 수련을 해야 할 걸세. 하나 여기는 너무 추우니 너무 억지로 연마하지는 말게.”
범한의 눈동자에 걱정이 스쳤다. 요 며칠 왕 십삼랑은 눈보라를 속에서도 강인한 모습으로 검을 연마하고 있었다. 그건 자신이 지닌 잠재력으로 천지간의 위험에 대항한 거였다. 이에 범한과 해당타타는 그가 힘들게 수련하는 모습에 실로 감명을 받았다.
두 사람은 왕 십삼랑이 절박한 심정으로 얼른 팔을 원상태로 되돌리고, 왼손 검객이 되고 싶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범한은 그런 왕 십삼랑이 몸이나 상하지 않을까 늘 걱정되었다.
“큰놈이 아까 눈토끼 굴을 발견했어요. 한데 동굴이 너무 깊어서 저 녀석들도 어쩌지 못하기에 내가 대신 토끼를 꺼내줬어요.”
왕 십삼랑이 탕 그릇을 내려놓고는 얼굴을 쓱쓱 문지르고는 고개를 가로로 내저었다.
“밖에 나간 김에 근골을 움직여주었을 뿐입니다. 이대로 얼어버리면, 정말로 그대로 얼어붙어 버릴까 걱정되어 그렇고요.”
“내일은 음식을 바꿔도 될 것 같군.”
범한이 입을 가리고 두어 번 기침을 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왕 십삼랑이 갈수록 설견들을 더 아낀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어쩌면 내일 자신이 설득해야 할 사람이 하나 더 늘은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범한은 문득 해당타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따라 말수도 적고, 얼굴은 계속 발그레 한 것이 미간에는 근심까지 드리워져 있고 말이다. 이에 범한이 더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리 정신이 나가 있는 겁니까?”
해당타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아무런 말 없이 범한을 향해 눈만 부라렸다. 그러자 옆에 있는 왕 십삼랑이 잠시 멍하니 있다가, 무척 당황한 듯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다시 두건을 묶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범한은 살짝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한참 후 이유를 알아차리고는 웃음이 터져버렸다.
“산 사람이 설마 오줌을 참다가 죽는 법도 있답니까?”
거친 말이었지만 지금 해당타타의 마음을 병이 무엇인지 정확히 맞힌 거라 여인의 눈에서 살짝 노기가 스쳤다.
범한은 천 번 만 번, 심지어는 2년 전부터 신묘 행에 대해 계산을 해보고는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을 조수로 데려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신묘까지 얼마나 먼 거리를 가야 하며, 밤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사실까지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전생에 병상에 누워서 지낸 나날이 있기에 혼자 견딘다는 게 얼마나 미칠 노릇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과거 고하와 소은 대인이 아침 해가 떠오르는 날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들이 인육까지 먹어서가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할 동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위험하고 미지로 가득 찬 여행에서 의지할 동료가 있는 게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거였다.
그런데 범한이 여정 중 일상과 연계된 세세한 부분에서 계산상의 누락을 범하고 말았다. 그건 그와 왕 십삼랑에게는 별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대충 그릇 하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설원에는 사치라 할 수 있는 천막 화장실을 하나를 더 준비했어야 했다.
그동안은 춥기는 했어도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요 이틀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자 밖에서 볼일을 보는 게 좀 곤란한 일이 되고 만 거였다.
그러니 왕 십삼랑이 밖으로 나간 건 해당타타에게 사적인 공간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해당타타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범한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당신이 준비한 이 약탕기만 아니었어도 이리 불편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범한이 잠시 가만히 있다가 웃었다. 세 사람 중 범한은 몸이 제일 허약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지금 그에게 천막 밖 눈보라 치는 곳으로 나가 있도록 한다면, 얼어 폐인이 될 수도 있었다. 이에 범한이 슬쩍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십삼랑이 혼자 나간 건 나와 당신과의 관계를 알고 있어서잖아요. 우리가 보통 사이도 아닌데, 뭘 따지고 그래요!”
* * *
추위가 한창인 깊은 밤, 천막 내 화로 안 불꽃은 연료 부족 사태를 생각해 활활 타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천막 밖에서는 여전히 눈보라가 사력을 다해 휘익휘익 불고 있었지만 사방 어둠 속에는 별다른 위험은 도사리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이곳에서 최고 위험한 건 천지간을 감싼 혹한이었다. 이에 세 사람은 화로 옆에서 삼각 대형을 이루고 침낭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침낭 속 세 젊은이는 눈을 말똥말똥 뜬 채 잠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설원을 헤치고 온 지 한 달. 그동안 이들에게는 오락 활동이란 것도 없었고, 딱히 시간을 때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길을 나서거나 잠을 자는 것뿐. 실로 무료하기 짝이 없는 날의 연속이었고 잠은 잘 만큼 자둔 상태였다. 그러니 범한은 만약 몸이 멀쩡했다면, 왕 십삼랑이란 건장한 사네가 옆에 있도록 한 걸 땅을 치고 후회를 했을 것이다. 그만 없었다면, 지금쯤 해당타타를 품에 안고 오랫동안 못 한 정담을 나누고 손을 조몰락거리며 딱 좋았을 텐데 말이다.
지난 수십일 동안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세 젊은이는 한담을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이야깃거리는 어느새 동이 났고, 이에 범한은 짓궂게도 왕 십삼랑이 어릴 때 잠자리에서 오줌을 싼 일까지 캐내고 말았다. 그 결과 세 사람은 이제 눈만 멀뚱멀뚱 뜨고 천막 밖 눈보라 소리를 연회 음악 듣듯 즐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