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72
071화 외양간 거리에서 일어난 소년 살인 사건
범한은 아버지의 서재로 돌아와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붓 통 안에 꽂혀 있는 붓들을 노려보며 양미간을 강하게 찌푸린 채 이리저리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곽보곤을 때려서 정왕 세자가 자신을 비호하도록 만든 일은, 오히려 세자에게 자신을 끌어들일 빌미를 제공한 것이 되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경도에서 생존하려면 범한 자신도 누군가의 편에 서야만 했다. 아버지가 영원히 폐하 곁에 있게 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결정은 아버지의 말처럼 결국에는 직접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누군가의 편에 들어가야 한다면 그것이 꼭 2 황자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 황태자와 맞서는 편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4년 전에 황후가 자신을 죽이려 했었고, 4년 후인 지금도 황궁 안의 그 사람들은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범한은 깊은 바닷속 같은 경도에 자신은 언제든 붙잡혀 죽게 될 작은 개미에 불과해 보였다.
이에 범한은 과연 ‘나란 개미가 나무 위를 올라갈 수는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 * *
2 황자는 예정대로 유정강에서 연회를 열었다. 그리고 범한은 자신이 그곳으로 초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요 며칠 범한은 매일 밤을 임완아와 함께 지냈다. 범한에게는 가끔씩 달콤한 일도 있었고 임완아와 몸이 닿는 것도 싫지 않았다.
그런데 범한에게 임완아는 어디까지나 정혼자였다. 그래서 범한은 무언가 부끄러운 것도 있었고 또한 너무 제멋대로 구는 건 자신에게 좋지 않다는 생각에 많이 자제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2 황자의 연회에 초대받은 범한에게는 그날 밤 유정강에서 만난 옥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운 몸이 자연스레 생각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상대방의 이름도 연달아 떠올랐다.
사리리. 생각만 해도 심장이 뛰는 이름이었다. 그 순간 범한은 전생에서 알았던 정보들을 몰래 떠올려 보았다. 중세 유럽에서는 피임 기구를 창자로 만들었으며 그것을 또 어떻게 사용했는지 말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곽보곤과 소송이 있던 그날이 생각나 더욱 궁금증이 일었다. 사리리는 왜 하필 그날 경도를 떠난 걸까.
경도의 치안 상태는 언제나 그렇듯 좋았다. 최근 백작가 본가로 들어온 싸움박질이나 하고 다니는 검은 주먹 녀석만 빼면 말이다. 그것 때문에 범한이 탄 마차에는 양옆으로 모두 네 명의 호위가 붙었다. 그리고 이 마차는 지금 찬란한 봄 햇살을 맞으며 경도 서쪽을 향해 느긋하게 가고 있었다.
망춘문을 지나고 다시 범한이 사람을 때리려고 매복했던 외양간 거리를 지나칠 때였다. 범한은 마차 가림막을 열고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등자경을 포함한 네 명 중 세 명의 호위도 그날 폭행 현장에 함께 있던 이들인지라 그들은 도련님이 웃는 이유를 금세 알아차리고는 덩달아 기분 좋아진 사람처럼 범한을 따라 웃기 시작했다.
외양간 거리 주변에는 민가가 많지 않았다. 아주 옛날에 이곳에 있던 점포들이 많이 망한 후로 이곳은 ‘패문포(敗門鋪)’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은 매우 조용하고 평화로웠으며, 낮이든 밤이든 행인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러니 길을 막고 행패를 부리기엔 제격인 곳이었다.
범한은 마차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머리 위로 천천히 지나가는 넓고 커다란 오동 잎과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볕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잠시 후 2 황자를 만났을 때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상대방도 자기 아버지의 능력을 분명 잘 알고 있을 테니 분명 지나친 요구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 만남은 감정 교류 차원일 거라 예측했다. 즉 2 황자가 10여 년 후에나 발생할 일에 대비하기 위해 미리 포석을 깔아 두는 것이라 생각했다.
마차는 사람의 걸음걸이 속도로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별안간 범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콕 집어서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마음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주변에 무언가 수상한 곳이 있는 것만 같았다. 이에 범한은 마차가 지나쳐 왔던 곳을 빙 둘러보았다. 하지만 조용하기만 할 뿐 이상한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범한이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아주 연하게 단내가 났다.
바로 ‘고인감’의 냄새였다. 서쪽 오랑캐인 서만이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청개구리에서 추출해 화살촉에 발라 사용하는 독이었다.
* * *
“얼른 피해!”
범한이 소리쳤다. 그러고는 곧장 마차 창문을 통해 밖으로 뛰어내렸다. 범한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호위병의 몸을 꽉 붙잡았다.
범인을 정확히 본 건 아니었다. 아무리 어려서부터 훈련을 받아 후각이 매우 민감하기는 했어도, 이러한 이상한 향을 맡았다는 것은 결국 마차와 아주 가까운 곳에 활을 쏜 궁사가 있다는 걸 의미했다. 즉 곧 아무런 예고도 징조도 없이 암살이 개시될 것이란 뜻이었다.
범한이 마차에서 뛰어내린 그 찰나의 순간, 커다란 돌 거북이 하나도 골목 뒤편에서 날아왔다. 바람 소리를 내며 날아온 돌 거북이는 정확히 마차에 내리꽂혔고 이내 마차는 수많은 파편이 되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쾅!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이렇게나 큰 돌 거북이를 이리도 높이 솟은 담 너머로 던지다니! 그러나 그 힘센 장사가 누구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마차가 거대한 돌에 의해 산산조각 나자 곧이어 화실이 빗발치더니 마차 주위에 인정사정없이 내리꽂혔다.
만약 범한이 조금 더 빨리 이상한 낌새를 발견하지 못해 서둘러 마차에서 뛰어내리지 않고 계속 그곳에 숨어 있었다면, 그리고 살짝 비켜 앉는 것으로 돌 거북이의 공격에서 살아남았다면, 범한이 타고 있던 마차는 화살 공격으로 고슴도치가 되었을 게 뻔했다.
범한의 호위병들은 등자경을 제외하고는 모두 5등급 실력의 고수였다. 그래서 그들은 적의 기습 공격에도 전혀 우왕좌왕하지 않았다. 오히려 날아드는 화살에 맞서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 들었다. 그들은 칼을 휘두르며 날아드는 화살을 거의 대부분 막아 냈다. 궁수의 수가 많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진 공격이라 화살은 너무나도 빨랐다.
그러니 호위병들이 아무리 열심히 막아 내고 있기는 해도 놓치는 화살이 있기 마련이었다. 결국 몇 차례 헉! 소리와 함께 호위병 세 명의 다리에 화살이 내리꽂혔다. 화살을 맞은 이들은 비틀거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한차례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진 후 잠시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화살에 맞은 세 명의 호위병들은 이를 악물고 벽 위로 뛰어올라 칼을 가로로 그었다. 그러자 벽 뒤에서 화살을 쏘던 궁수들이 손이 잘려 나가며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하지만 화살촉에 묻은 독은 너무 강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명의 호위병은 온몸이 욱신거리며 아파 오는 걸 느껴야만 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몸을 가누지 못했고, 그들의 무릎은 털썩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이 순간에도 세 명의 호위병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거대한 한 쌍의 손바닥이 자신들의 머리를 내려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범한은 오동나무 뒤에 숨어 있었다. 그래서 첫 번째 화살 공격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하들을 도와주러 나갈 방도가 없어, 결국 높은 담장 뒤에서 들려오는 세 차례의 참혹한 비명 소리를 그냥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범한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고 애통했다. 그런데 이때, 옆에서 독사처럼 검 두 자루가 불쑥 나타나 범한을 찔렀다.
범한을 곤혹스럽게 한 건 두 명의 여자였다.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검 역시 빛의 반사를 막기 위해 검게 칠해져 있었다. 아주 노련한 자객임이 분명했다. 자객들은 얼굴도 가리지 않은 채 나타난 상태였다. 그래서 범한은 이들이 자신을 포함한 다섯 명을 모두 죽여 버릴 작정이란 걸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양쪽에서 검이 들어오는 순간, 범한은 몸을 돌려 발끝을 땅바닥에서 비튼 채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 그러자 왼쪽에서 들어온 검이 범한의 왼쪽 가슴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또 이 위험천만한 자세를 반복해 오른쪽에서 날아드는 검의 공격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범한은 무공의 초식을 배운 적 없었다. 그냥 오죽으로부터 10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방금 검을 피하게 해주었던 몸동작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 행동인 것이었다.
이 두 자루의 검은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뱀처럼 잽싸게 공격해 들어왔지만, 다행히 범한을 때리던 오죽의 나무 막대보다 속도와 정확도 면에서 훨씬 떨어졌다. 그 바람에 범한은 분명 위험한 순간이었지만 마치 느릿느릿한 구더기를 피하듯 검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세 사람은 담장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그리고 범한도 드디어 우왕좌왕하던 상태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리고 두 눈으로 두 자루의 검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그러자 검 끝이 자신에게 훨씬 느릿느릿하게 다가오는 것같이 느꼈다.
창백한 얼굴의 여자 자객들은 상대가 곤란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내 자신들의 손에 들린 검으로는 그의 몸을 찌를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쾅! 소리와 함께 저 멀리 구석에 있던 담장이 무너졌다. 그리고 마치 거령신(巨靈神)처럼 생긴 거구의 사내가 무너진 담벼락 사이로 걸어 나왔다. 그는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고 오동나무 아래에 쓰러져 있는 호위병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오늘 범한을 따라 나온 네 명의 호위병 중 셋은 벌써 죽고 없었다. 그리고 아직 죽지 않은 한 사람 역시 몸이 마비된 채 나무 아래 엎어져 있었다.
조금 전 범한은 자신이 누군가를 잡을 때는 그게 누구인지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검이 반짝이자 그제야 그가 등자경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등자경을 향해 달려가고 싶었지만 여인들의 손에 들린 독 발린 검은 절대 범한을 놓아주지 않았다. 범한은 순간 마음이 급해져 끄응, 하고 소리를 냈다.
바로 이 순간, 곧 숨이 떨어질 것만 같은 등자경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줄곧 허리에 둘러 몸 뒤쪽으로 숨겨 놓았던 칼을 잽싸게 빼 들어 그 거인의 목을 인정사정없이 내리쳤다.
범한은 무섭기도 했지만 기쁘기도 했다. 그리고 이내 몹시 놀라워했다.
범한이 목도한 장면은 이러했다. 우선 거인이 고개를 살짝 틀면서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등자경이 죽을 각오로 찌른 칼을 마치 파리를 짓이겨 죽이듯이 오른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피 한 줄기가 거인의 손아귀에서 흘러내렸지만 손이 잘려 나간 것은 아니었다. 대체 이 거인의 몸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단 말인지!
자신이 불리해진 걸 안 등자경은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호위병 중 등자경은 통솔자이기는 하지만 넷 중에서 무술 실력이 가장 떨어졌다. 하지만 머리를 굴리는 것만큼은 가장 뛰어났다. 등자경은 자신의 발끝을 거인의 가슴 위에 얹더니 그 반동으로 옆에 있는 담장을 넘어가려 했다.
거인이 입을 헤벌쭉 벌리고 웃더니 주먹을 한 대 날렸다. 그리고 그 순간 등자경에게는 화살에 묻어 있던 독이 발작하기 시작했다. 결국 온몸에 힘이 빠진 등자경은 거인의 주먹을 피하지 못한 채 퍽퍽 자신이 맞는 소리만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등자경이 처참하게 울부짖었다. 그의 왼쪽 허벅다리가 주먹 한 대에 부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졌고 바지는 이내 새빨간 피로 물들어 버렸다.
거인이 등자경의 칼을 손으로 움켜쥐었을 때 범한은 불길한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하고 허걱, 소리를 냈다. 그 순간 범한의 다리도 굳어 버리고 말았다. 두 자루의 검이 범한의 가슴과 복부를 교차해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면서 윗옷을 꿰뚫었다. 결국 범한의 몸에는 검 두 개가 교차하며 상처가 생겼고 상처 부위는 벌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범한은 오히려 이 상황을 기회로 활용해 재빨리 자신의 두 손을 맞잡았다. 범한의 손에서 두 개의 분홍색 불빛이 반짝하더니 연기가 발생했다.
범한은 이 연기를 곧장 두 여자 자객의 얼굴에 분사했다. 자객들은 재빨리 입을 틀어막고 여차하면 도망갈 생각으로 발끝을 살짝 세웠다. 겨우겨우 기회를 만든 범한은 이 순간을 허투루 버리지 않고 곧장 큰 소리로 기합을 넣었다. 그러자 체내에 있던 패도의 기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범한이 두 팔을 한차례 흔들자 순식간에 팔이 늘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범한의 손이 자객들의 앞 목에 착 들러붙었다.
이내 두어 번 우둑! 작은 소리가 나더니 목뼈가 으스러져 버렸다. 그녀들은 입에서 피거품을 왈칵 쏟고는 곧바로 흐느적거리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때 거인은 손을 들어 등자경의 머리를 내려치려던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