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737
1078화 가장 강력한 위력을 지닌 사람의 이름 (4)
범한의 처절한 고함에도 오죽의 얼굴에서는 여전히 약간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손에 들린 쇠막대기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범한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신묘 앞에는 범한의 목소리 말고는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늘색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아마도 해가 질 모양이었다. 저녁이 되자 구름은 더욱 두꺼워지고 날씨는 험해졌지만, 이상하게 범한의 머리 위에는 눈이 더는 쌓이지 않았다.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슥, 슥’하는 소리가 들렸다. 추운 날씨에도 땀으로 범벅이 된 왕 십삼랑이 소형 예비 천막을 펼쳐서 세우더니 조심스럽게 범한의 머리 위로 밀어주었다. 장막 문이 범한과 오죽 사이에 뚫려 있어서 쇠막대기를 건들지 않고 범한의 몸에 눈이 쌓이지 않도록 가려주었다.
왕 십삼랑은 눈이 많이 내리자 범한의 몸이 더욱 나빠질까 걱정이 되어 고생을 마다하고 가장 빠른 속도로 야영지로 뛰쳐 내려가서는 눈을 막아줄 소형 예비천막을 챙겨 가지고 온 거였다. 어찌나 빠른 속도로 달려왔는지 아직도 가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범한이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생기가 없는 두 눈동자를 오로지 오죽에게만 고정한 채 잔뜩 쉬어서 생기 없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계속하고 있었다. 범한은 쉴 새 없이 말하는 걸 즐기는 수다쟁이는 아니었다. 아마 오늘이 그가 평생 동안 가장 많이 말을 많이 한 날일 거였다.
할 일을 마친 왕 십삼랑이 복잡 미묘한 눈빛으로 신묘 문 앞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참 바라보던 왕 십삼랑이 자포자기한 표정을 지으며 흰 눈이 쌓은 청석 돌계단 위에 앉았다.
세 사람이 바보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 * *
하룻낮과 하룻밤이 지났다.
오죽의 손에 들린 쇠막대기는 범한의 목에서 하룻낮과 밤이 지나도록 떠나지 않았다. 그도 자신이 어째서 눈앞에 앉아서 쉴 세 없이 말하는 청년을 죽이지 않는 건지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범한은 하룻낮과 밤 동안 쉴 새 없이 말을 했다. 그 역시도 자신이 지금 하는 말이 방금 전해 했던 말인지 아닌지 모르는 것 같았다. 왕 십삼랑이 가져다준 음식과 물이 그의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침은 마르면 다시 생겨났지만 상한 성대는 쉽게 좋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갈라질 대로 갈라져 있었고, 결국에는 침도 약간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그의 목에 출혈이 생긴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듣기 싫을 정도로 쉬어 있는 데다가 발음도 부정확해서 뭐라 말하는 건지 알아듣기 힘들었고, 말하는 속도도 임종 직전에 있는 노인보다도 느렸다.
왕 십삼랑은 하룻낮과 밤이 지나는 동안 범한 옆을 지키면서 그 말들을 들었다. 처음에는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들었다. 왜냐하면 범한이 피눈물을 흘리며 간절하게 하는 말들을 통해서 과거 대륙의 역사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그는 과거 드넓은 포부를 가지고 천하를 누볐던 인물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더구나 범한의 어린 시절 생활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범한이 세 번째로 반복해서 자신의 인생 전기를 말했을 때, 네 번째로 식칼로 무채 써는 동작을 해 보이면서 오죽이 무언가를 기억해내기를 바랐을 때는 왕 십삼랑도 더는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왕 십삼랑은 두 무릎을 끌어안은 자세로 청석 돌계단 옆에 앉아 눈 앞에 펼쳐진 설산의 산맥과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으로 바닥을 쓸어 흩어져 있는 뼛가루와 잿가루를 한곳에 모았다. 스승인 사고검의 유해였다.
해당이 신묘 문 앞에 왔을 때도 똑같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신묘 앞에 앉아 있는 세 명의 백치를 바라보았다. 청석 돌계단 위에 앉아 있는 왕 십삼랑은 넋이 나간 듯 멍한 눈으로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계속해서 스승의 유골을 쓸고 있었고, 소형 천막 안에 앉아 있는 범한은 앞에 맹인 대사에게 끊임없이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치 시골에 모셔둔 작은 신상 앞에 꿇어앉아 소원을 비는 사람처럼 절실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무슨 신선이 지은 책이라도 읊는 건지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오죽은 조각상처럼 쇠막대기를 범한의 목에 겨눈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의 미동 없는 몸은 전체가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어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쇠막대기를 사이에 둔 오죽과 범한의 모습은 마치 완전히 다른 두 세계가 대치해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서로 결코 닿을 수 없는 각각의 세계에 갇힌 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평행상태가 지속되었다. 오죽이 쇠막대기를 거둬드리는 게 가장 좋겠지만, 오죽이 쇠막대기로 범한을 찌르는 상황이 지금보다 더 나을 것 같았다. 아무런 변화도 없는 이런 상황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두 사람에게는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범한은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포기할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여전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바로 지금 이 상황이었다. 가장 가깝게 생각했던 사람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없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해당은 비로소 하룻낮과 밤이 지나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챘다. 순간 해당은 마음이 쓰라리고 아팠다. 머릿속에 과거 범한이 자신에게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다고 말했던 장면이 떠오른 그녀는 비로소 그 말뜻을 이해했다.
“작은 범 대인은 미쳤어요.”
눈앞에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해당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녀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범한의 얼굴이 불길하게 상기되어 있는 걸 바라보았다. 범한의 안색은 전혀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쉬지 않고 갈라진 목소리로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범한의 입에서 피가 섞인 붉은 침방울이 튀어 오죽의 몸 위에 떨어졌다. 오죽의 몸 위에 쌓인 눈 위에 범한의 붉은색 침방울이 분진처럼 뿌려졌다. 해당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아무 말 없이 해당을 바라보던 왕 십삼랑이 힘들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모두 미쳤지요. 작은 범 대인이 아래서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왜 올라온 겁니까?”
“작은 범 대인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확인해 보려고 올라온 거예요.”
해당이 왕 십삼랑을 힐끗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이전에 입었던 상처가 다 낫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관통상을 입어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요. 지금 이대로 떠나도 빙원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가기 힘들 텐데, 그 사실을 알면서도 버티고만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죽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말도 안 되는 시도를 하고 있죠.”
왕 십삼랑이 몸을 돌려 해당 옆에 나란히 서서는 주변이 뭐라 하든 계속 오죽을 깨우려 시도하는 범한을 바라보았다. 왕 십삼랑이 한숨을 쉬며 다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루 밤낮을 쉬지 않고 말을 했습니다. 추위를 견디면서 말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죽을지도 모릅니다.”
“떠나자고 설득은 해보셨나요? 상황을 보니까 맹인 대사도 신묘 안에 있는 선인의 명령과는 다르게 작은 범 대인을 죽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요.”
“죽이는 게 오히려 나을 겁니다. 그럼 낭자는 제가 어젯밤에 들었던 절망에 가득한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왕 십삼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범 대인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요.”
해당이 범한의 창백한 얼굴에 드리운 불길한 홍조를 바라보았다. 완전히 지쳐서 간신히 말을 토해내는 범한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해당이 갑자기 몸을 살짝 떨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산맥의 얼음 골짜기보다 더욱 밝게 반짝였다.
왕 십삼랑도 갑작스러운 변화를 눈치채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당을 바라보았다.
* * *
‘푸’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와 바로 앞에 있는 검은 천을 때렸다. 핏방울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 위에 쌓인 눈들을 따라 흘러내렸다. 정말이지 보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죽이 여전히 조금도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범한이 힘겹게 손을 올려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꺼져가는 걸 느끼면서 무한한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눈앞에 있는 오죽은 여전히 낯설었고, 차가웠고, 영혼 없이…… 죽어 있었다.
다시 말을 시작하려던 범한의 머릿속에서 오죽 아저씨가 신묘를 대신해서 문명의 불꽃을 세상 이곳저곳에 퍼뜨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수천, 수만 년 동안 세상을 돌아다니며 지혜를 전수했으니 아마도 머릿속에는 수천, 수만 년의 기억이 담겨 있을 거였다.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하루 낮과 밤 동안 그가 피를 토하며 반복해서 말했던 내용들도 머릿속에 담겨 있을 수 있었다. 다만 앞에 펼쳐진 설산들처럼 차가운 육체에 담긴 기억들은 아무 의미도 없는 평범한 내용이었고, 그의 어머니인 섭경미와 관련된 기억들도 그럴 거였다.
만일 그렇다면 범한이 평범한 과거 이야기를 통해 오죽을 깨우려는 시도는 유치하고 황당한 시도일 뿐이었다. 머릿속에 수도 없이 오랜 세월 쌓인 평범한 기억들이 가득한 오죽은 범한의 이야기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할 테니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모든 기대가 사라지면서 절망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와는 달라진 그의 목소리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가 영원히 움직일 것 같지 않은 오죽 아저씨를 바라보며 부정확한 발음으로 소리쳤다.
“아저씨가 어떻게 나를 잊어버릴 수 있어요! 기억 상실증에 걸리는 걸 너무 즐기는 거 아니에요! 이전에는 최소한 섭경미는 기억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이번에는 나까지 잊어버릴 수 있어요?”
쇠막대기는 목의 핵심 부위를 겨눈 채 움직이지 않았다. 범한이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는 목이 메서 더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몸의 떨림이 갈수록 심해졌고, 눈동자 안에 절망하는 기색은 이미 광인의 분노로 변해 있었다.
그가 죽일 듯이 오죽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검은 천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얼굴에서 단호하고 고집스러운 표정이 스치더니 그가 순식간에 오죽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