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739
1080화 전원이 황폐한 데 어찌 돌아가지 않을 수 있으리 (1)
황량한 설원 위에 차가운 눈이 나부꼈다. 하늘은 온통 희뿌연 해서 낮인지 밤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고, 눈보라는 그칠 줄 모르고 쉴 새 없이 불었다. 빙원과 눈 언덕에 쌓인 눈이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숨 막힐 듯한 고요함 속에서 이따금 어디에선가 들리는 개 짖는 소리가 북쪽 끝 설원에 수천, 수만 년 동안 이어진 침묵을 깨뜨렸다.
눈보라 속에서 눈썰매 몇 대가 설원을 해치며 힘겹게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가장 앞에 있는 눈썰매에는 나무 막대기를 손에 쥔 젊은이가 서 있었는데, 눈보라를 정면으로 맞으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배치에 심혈을 기울인 듯하 두 번째 눈썰매에는 눈보라를 막아줄 장막이 둘려 있었다. 그 안에서 안색이 창백한 젊은이가 어느 여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청년을 안고 있는 여자는 온몸을 모피로 만든 외투로 두껍게 두른 채 얼굴만 내밀고 있었다.
그리고 눈썰매 대열 가장 뒤쪽에서 무명옷을 입은 사내가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그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눈썰매를 따라가고 있었다. 설견들이 끄는 눈썰매의 속도가 빨랐음에도 맹인 대사는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 눈썰매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범한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눈썰매 대열 뒤를 바라보았다. 눈보라를 맞으며 한 걸음 한 걸음 걷고 있는 오죽 아저씨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서 옅은 슬픔과 실망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두 눈을 감고는 천지 눈바람 사이에 가득한 원기를 흡수해 상처를 치료했다.
수십 마리였던 설견들은 이번 힘겨운 여정을 견디지 못해 대부분 죽었고, 큰놈과 둘째놈을 필두로 한 열한 마리만 남아 있었다. 이 설견들 중 대부분은 지금껏 살면서 이처럼 추운 지방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동물적 본능에 이끌려 불안해하고 두려워했다. 왕 십삼랑이 최선을 다해 통제하고 있었음에도 희뿌연 하늘에는 개 짖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다만 이전에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덕분에 이미 경험이 쌓인 설견들은 겁을 먹고 경로를 이탈하려 하지는 않았다.
설산 위에서 내려온 뒤에도 오죽은 차갑고 무뚝뚝한 표정을 지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범한의 대열을 따라오면서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만약 아직도 오죽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몸 안에 있는 영혼이 남아 있다면, 그는 영혼의 아주 작은 빛에 이끌려 신묘를 떠나 설산을 내려왔고, 눈썰매 대열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범한이 슬퍼하고 실망하는 이유는 이런 상황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알지 못하는 데다가 오죽 아저씨가 깨어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정말 이대로 깨어나지 못한다면 지금의 오죽을 진짜 오죽이라고 할 수 없었다.
공중에 흩날리던 눈송이가 강한 바람을 타고 곡선을 그리며 눈썰매가 있는 곳으로 날아오더니 범한의 눈꺼풀 위에 떨어졌다. 그걸 본 해당이 손가락으로 눈송이를 털어주자 범한이 두 눈을 뜨고는 그녀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범한의 온화한 미소에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해당이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돌렸다. 맨 앞에 서서 눈보라를 맞고 있는 왕 십삼랑을 바라보는 해당의 양쪽 볼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두 사람이 몇 년 동안 알고 지내면서 해당이 범한 앞에서 소녀처럼 쑥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북쪽 끝에 있는 설원 깊숙이 들어와 신묘를 찾고, 평생 동안 절대 경험해 보지 못할 일들을 겪으면서 해당타타의 마음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 거였다.
범한은 해당이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사실 그는 두 사람이 신묘를 부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상당한 심리적 충격을 받았었다. 왜냐하면, 범한은 해당타타와 왕 십삼랑이 신묘를 부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을 때 죽을 각오를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신묘를 숭상해온 두 사람은 분명 일을 하기 위해 신묘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을 억눌려야 했을 거였다. 자신을 위해 죽을 각오를 하다니, 이런 우정은 정말 얻기 힘든 것이었다.
범한이 두 눈을 가늘 게 뜨고 대설산에 위치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눈보라를 뚫고 이미 많은 길을 이동한 만큼 대설산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범한은 그곳에 대설산이 있다는 걸, 신묘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며칠 전 대설산을 떠나기 전 범한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신묘 안으로 들어갔다. 신묘 안이 쑥대밭이 된 모습을 본 그는 심경이 복잡했고, 옅은 슬픔과 안타까움도 느껴졌다. 왜냐하면, 신묘는 자신이 살았던 그 세계가 남긴 마지막 흔적이었다. 그런 흔적이 그에 의해서 사라져 버린 거였다…….
다행스러운 점은 범한의 예상대로 불빛이 다시 응집되더니 조금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온화한 목소리를 가진 신묘 노인이 다시 출현한 거였다. 신묘는 이미 첫 번째 사자이자 마지막 사자인 오죽이 이미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다고 판단을 내렸는지 더는 목표를 제거하라는 허튼소리는 하지 않았다.
범한은 신묘, 아니 이전 세상의 마지막 유물인 군사 박물관의 핵심 부분이 어디에 있는지 찾지 않았다. 해당과 왕 십삼랑은 부속 설비만 망가뜨렸을 뿐이었다.
신묘 안에서 그 노인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범한이 무슨 내용을 말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범한 자신만 알 뿐이었다. 대화를 마친 뒤 범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호히 신묘를 떠났다. 그 노인 한 사람만 설산 안에 남겨 둔 채 말이다.
앞으로 아무도 찾지 않을 대설산에서 홀로 남아 외롭게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 범한의 복수였다. 범한은 척박한 대설산 안에서 도와줄 사신 없이 신묘 홀로 있는다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신묘가 스스로 행동할 능력이 있었다면, 사자들이 하나씩 하나씩 죽어가는데도 아무 방법 없이 지켜만 보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오죽은 앞으로 인간 세상에서 섞여 함께 살아갈 것이었다.
눈을 헤치며 마차 대열을 따라 오는 맹인 아저씨를 바라보던 범한이 떫은 미소를 지었다. 오죽 아저씨를 구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남쪽으로 내려가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다. 사실 범한은 앞으로 어떤 상황이 펼쳐지든 두렵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슬플 뿐이었다.
* * *
경력 12년 가을날 관도 양쪽에 심어진 나뭇잎들이 서서히 노랗게 말라가고 있었다. 시간에 따라 날씨가 변하면서 기온도 변하기 시작했고, 거리 풍경도 서서히 변해가는 것이 이 세상의 모습을 더욱 명료하게 묘사하는 것 같았다.
마차 한 대가 조용히 관도 위를 지나고 있었다. 이 세계에서 벌써 반년 넘게 자취를 감췄던 범한이 마침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가 죽었기를 열렬히 바랐던 사람이나 그가 살아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사람들 모두 아직은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설원을 통과한 네 사람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인간 세상으로 들어왔다. 어느 세력에게도 돌아왔다는 소식을 보내지 않았다. 해당과 왕 십삼랑은 범한의 마음이 무겁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사람 냄새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맹인 대사가 신묘에서 내려온 뒤 입을 꾹 다물고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차 뒤쪽에 앉아 있는 오죽은 아무래도 인간 세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듯 보였고, 이해를 하거나 관심을 가질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북제 량야군에 위치한 객잔 밖에서 마차가 멈췄다. 잠시 뒤 홀로 객잔에서 나온 범한이 성안에서 가장 번화한 기생집으로 향했고, 멀지 않은 거리에서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오죽이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오죽이 뒤를 따라가는 건 범한의 뜻이 아니었다. 사실 범한도 무엇 하나 기억하는 게 없고, 아는 것도 없는 오죽 아저씨가 항상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이유가 뭔지 알지 못했다.
포월루 분점에 있는 밀실 안에서 범한은 족히 4개월은 기다려 사천립과 왕계년, 등자월을 만났다. 경국 황제 폐하와 조정의 모진 핍박과 압력 때문에 범한 곁은 지키는 부하들은 이미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정말 충성심이 강한 심복 몇 명이 전부였는데, 바로 지금 밀실 안에 있는 세 사람과 강남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는 하서비였다.
멀쩡히 살아 있는 범한을 보자 충성스러운 세 명의 부하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었다. 범한이 신묘로 갔다는 사실을 천하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범한의 측근들이나 적들 모두 범한이 신묘에서 죽었을 거라고 짐작했지, 살아서 돌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범한이 웃으면서 감격에 벅찬 표정을 짓고 있는 세 사람을 향해 앉으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여정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게 힘들었기에 신묘에서 있었던 일은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왕계년이 한쪽에 쪼그리고 앉더니 등자월이 반년 동안 세상에서 일어난 중요한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틈을 타서 비연호를 범한의 앞에 내려놓았다. 곁눈질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범한의 눈동자에 근심이 갈수록 짙어졌다.
한편 사천립은 밀실 한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맹인 소년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서늘해졌다. 그가 곁눈질로 힐끔힐끔 맹인 소년을 살펴보며 속으로 누구길래 스승님과 함께 이렇게 중요한 장소까지 들어올 수 있는 걸까 생각했다. 그러던 중 북벌과 관련된 내용이 나오자 그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경국 정북 진영은 6월 초에 세 차례 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측은 7일 이후에 처음으로 충돌했습니다.”
“북제가 전투에서 참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범한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사천립을 향해 물었다.
“게다가 랑야군 안에 북제 사람들만 봐도 전쟁을 두려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군.”
“조사에 따르면 북제 군대가 3백 리 후퇴했음에도 상삼호는 전장에 직접 나서지 않았습니다. 수상하게도 북제 군대가 후퇴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송나라 주성을 지키고 선택을 한 겁니다.”
옆에 있던 등자월이 앞으로 나가 대답한 뒤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에서 전쟁터를 가리켰다.
“여기가 송나라 주성인데, 경국 군대의 허리를 공격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경국 변방군이 북쪽으로 침입한다면 상삼호는 상황을 틈타 바로 여기서 경국 군대의 허리를 공격할 겁니다……. 방어전을 선택하기는 했지만, 명장이라 그런지 지키는 모습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곳은 작년에 북쪽에서 경국과 북제가 서로 충돌했을 때 상삼호가 점령한 주성이 아닌가. 지금 보니 이곳이 전략의 핵심지였군.”
범한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묘를 찾으러 간 범한은 북쪽 끝 대설산에 있으면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지 못했다. 온통 눈과 얼음뿐인 그곳에서는 시간이 흐름을 알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가 대설산에 있는 신묘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대륙에서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고, 범한 일행시 설원을 지나 남쪽을 내려올 때 경국 기병은 마침내 본격적으로 북벌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서 이미 나라의 모든 힘을 북벌에 쏟아붓기로 결정을 내리셨으니 정북 진영은 선봉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병력이 북벌에 투입될 테니 상삼호도 경국의 기세에 눌려 방어전을 선택할 수밖에는 없었을 겁니다. 이건 상삼호라는 장군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북제의 국력이 경국보다 약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