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767
1108화 마지막 장 이후의 이야기 (3)
서호에서의 삶은 조용하고 안락해서 특별하다고 할 만한 일은 없었다. 다만 유일하게 범한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바로 자신이 보살펴주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였다. 아무래도 범한은 물러나서도 숨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바다를 건너 서쪽 대륙을 탐험하겠다는 바람은 짧은 시간 안에 실현될 수 없을 것 같았다.
범한이 이 대륙을 떠났다면, 얼마나 많은 풍파가 생겼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것은 자아도취나 잘난 체하는 게 아니었다. 선대의 여택과 상황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만들어진 찬란하면서도 씁쓸한 현실이었다.
수년 동안 서호에서 살면서 유일하게 신경을 쓴 일이 있다면, 범무구의 암살에 대비하는 일이었다. 과거 2 황자의 여덟 가문의 장수 중 유일하게 생존한 범무구는 2 황자와 동료들의 복수를 갚기 위해서 수년 동안 모습을 감춰 왔다. 그리고 나중에는 복수를 하고자 하종위 문하에까지 들어갔지만, 결국에는 범한에게 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감찰원은 범무구를 죽이지 않고, 범한의 뜻에 따라 놓아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범무구는 여전히 떠나지 않고 서호 주변을 서성이며 암살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범한이 당연히 암살당하지 않았고, 범무구를 죽이지도 않았다. 범한이 범무구를 살려두는 이유는 생활이 너무 따분해서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범무구의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집념이 존경스러웠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무녀가 춤을 추고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서호 옆 범씨 저택 정원에서 범한은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아 과일을 먹고 대화를 나누며 춤과 노래를 감상했다. 진원에 있던 여인들 중에서 나이가 찬 여자들에게는 감찰원에서 퇴직한 부하들과 혼일을 할지 선택하도록 했다. 이에 지금은 서호에는 열여섯 살 정도 되는 어린 티를 벗지 못한 무녀들만 남아 있었다.
앳된 얼굴을 한 무녀를 보던 범한은 절름발이 노인의 날카로운 안목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진원을 떠날 당시 이 소녀들은 고작 열 살밖에 되지 않았을 텐데, 진평평은 어떻게 그녀들이 훗날 절세 미모로 성장하리라는 걸 알아봤던 걸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상문의 여동생이었다. 진평평을 위해 오랜 시간 노래를 불렀던 그녀는 떠나지 않고 범씨 집안에서 살며 가끔씩 아름다운 노래를 지었다.
“경력 4년 봄에 등자경이 큰길 앞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동그라미를 그렸다네. 마음속으로 얼굴이 수려한 어린 공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노래가 시작되자 범한 옆에 앉아 있던 사사가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뿜었고, 임완아는 웃음을 참지 못해 범한의 어깨를 때렸다. 집안사람 중 이런 황당한 가사는 범한만이 쓸 수 있었다.
대문 외진 곳에 앉아 있던 등자경 가족들이 어리둥절해서 서로 얼굴만 쳐다봤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등자경은 난처함에 지팡이를 매만지면서 속으로 도련님이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담주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겠어? 곱상하게 생긴 소년이 훗날 대단한 일을 할 거라고 누가 알 수나 있었겠냐고.’
범한은 곁눈질로 등자경의 무척이나 난처해 하는 표정을 바라보고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던 범한이 속으로 생각했다.
“쌤통이다. 발전할 생각도 하지 않고, 관리는 죽어도 되려 하지도 않은 채 매일 집안에만 있으려 하니. 만약 주나 군의 고위 관리만 된다면 내가 그곳 이름을 파릉(巴陵)으로 바꿔줄 텐데 말이야. 그럼 큰일을 해볼 수 있지 않겠어?”
상문의 동생은 주변의 반응을 모르는 듯 진지하게 노래를 계속하며, 어느 사람의 재미있는 일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감상적인 노랫소리로 불렀다.
* * *
봄, 이제 봄도 막바지에 다다라 있었다.
담주성 밖 절벽 위에서 범한이 숙녕이의 작고 부드러운 손을 잡고 절벽 가에 서서 무척이나 익숙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살짝 근심이 어린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던 숙녕이가 앳된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 상씨 이모가 부른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요? 숙녕이가 한 소절 불러 드릴까요?”
“그래, 무지개에 대해서 불러보거라. 아버지가 가르쳐줬던 것 기억하지?”
숙녕이가 난처해 하며 말했다.
“하지만 외국말은 너무 어려운걸요. 동이성에서는 배울 스승을 찾을 수도 없었고요.”
범한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부르지 말 거라.”
숙녕이를 지긋이 바라보던 범한의 머릿속에 오래전에 담주성 안에 있던 세상 물정 모르던 여자아이가 떠올랐다. 그리고 선대 황제 폐하가 죽기 전에 했던 말도 떠올랐다. 그가 먼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어디 있는지 모르는 누이를 떠올리며 걱정했다.
* * *
“저를 계속 따라오실 필요 없어요.”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한 범씨 집안 아가씨가 말했다. 의원으로 분장한 그녀는 등 뒤에 의약 상자를 매고 외진 산야를 걷고 있었다. 그녀가 뒤에서 방랑자 행색으로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이홍성을 바라보며 매정한 말투로 말했다.
“유가가 아이를 낳아 외삼촌이 되었는데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실 거예요? 정왕야가 바라는 게 뭔지 잘 아시잖아요.”
이홍성이 머리에 쓰고 있던 밀짚모자를 벗어 부채질하며 나무 옆에 서 있는 범역약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부황이 얼른 자식을 만들라고 하는데, 나는 그럴 시간이 없는 걸 어떡하나.”
“언제까지 저를 따라오실 생각이에요?”
범약약이 입술을 깨물며 짜증이 난다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5년을 따라다녔으니 앞으로 5년은 더 따라다녀야겠지?”
정왕세자 이홍성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사람보다 더 지쳐 있는 야윈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아무 말 없이 밀짚모자를 다시 쓴 범약약은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산골 마을로 걸어가며 속으로 생각했다.
‘따라오든지 말든지 나는 아무 상관 없다고. 따라올 테면 따라오라지.’
* * *
숙녕이의 손을 잡고 있던 범한의 손가락 끝에 반질반질한 구슬이 닿았다. 낯선 촉감이 고개를 숙인 그는 오래전에 해당이 딸에게 준 홍옥 구슬을 꿴 장난감을 보고는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타타 이모는 저를 보러 언제 또 오실까요?”
또래보다 생각하는 게 성숙한 범숙녕은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는 단박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채고 질문을 한 거였다. 더구나 지금은 두 어머니도 곁에 없어서 눈치 볼 필요도 없었다.
범한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초원의 일이 지치고 힘들면 오겠지.”
그렇다. 언제부터 돌아갔는지는 모르지만, 해당은 다시 초원으로 돌아가 있었다. 범한이 속으로 북제 황제와 사리리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생각했다. 홍두반이란 아명으로 불리는 여자아이가 북제 황궁 안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내년에 홍두반은 정식으로 공주로 책봉될 예정이라는 소문이 들렸다. 하지만 북제 황제에게 아직 아들이 없어서 조정은 조용할 날이 없는 상황이었고, 북제 여황제가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를 찾아와서 다시 씨를 달라고 하지는 않겠지?’
범한은 그런 희생은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검려 안에서 있었던 일들과 마차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던 그의 눈빛이 부드럽게 변했다. 그가 상념에 젖은 눈빛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숙녕아, 상경성 구경 가고 싶지 않니? 나중에 우리 초원에도 가고 네가 나이가 더 들면 바다도 나가보자꾸나.”
“좋아요, 아버지.”
숙녕이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범한의 시선이 절벽 아래 해수면에 닿았을 때 항구로 다가오는 배 한 척이 보였다. 갑판 앞에 어렴풋하게 한 사람이 서 있었는데, 손에 푸른 깃발을 들고 거친 바닷바람을 맞고 있는 모습이 자유로워 보였다.
왕 십삼랑이 돌아온 것이었다. 범한은 말로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격한 감정에 몸이 굳고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었다. 왕 십삼랑이 북쪽에서 돌아왔다는 것은 대동산에서 줄곧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오죽 아저씨가 그곳을 떠나 돌아올 날도 멀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범한은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린 맹인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딸 아이에게 눈물을 들키지 않기 위해 범한이 몸을 돌려 담주성과 성안에 있는 민가들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담주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떠오르고, 담주를 떠난 뒤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면서 목이 메었다.
범한은 멀리 보이는 담주성 안의 풍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동아 누이는 더는 두부를 팔지 않았고, 대보는 저택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여자가 들고 가는 두부를 군침 흘리며 바라보았다. 잡화점 문을 줄곧 닫혀 있었고, 짠 냄새가 나는 바닷바람이 부는 난간에서 옷을 말리거나 비가 내린다고 소리치는 사람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떠났지만, 아직 많은 사람이 남아 있었다. 많은 일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일들이 더 많았다.
범한이 쪼그리고 앉더니 딸 아이를 품에 안고는 가볍게 흔들었다. 숙녕이가 눈을 살짝 찌푸리며 바다에 일어나는 거품과 점점 가깝게 다가오는 배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아버지, 할머니는 어떤 분이신가요?”
딸아이의 질문에 범한은 아무 말 없이 먼 바다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섭경미는 대단히 총명하고 더없이 아름다운 사람이었지. 신의 세상에서 뛰쳐나온 소녀는 초상화 속 황색 저고리를 입은 섭경미와는 달랐을 거야. 그리고 지금 딸아이에게는 할머니가 되어 있지.’
“그분은…… 인간 세상에 놀러 온 꼬마 선녀였단다.”
범한이 익살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노는 게 싫증이 나고 힘들어서 돌아갔지. 그래서 인간 세상에서는 더는 그분을 찾을 수 없는 거야.”
범숙녕이 ‘히히’ 웃으며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버지도 시선이라고 불리지만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시잖아요. 할머니가 선녀여서 하늘로 돌아갔다면, 아버지는 왜 안 돌아가시는 거예요?”
난처해진 범한은 오래전에 선대 황제 폐하가 자신에게 하사한 이름이 떠올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아마도 아버지는 할머니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겠지. 아버지는 할머니와는 다르게 쓸모없는 사람이거든. 그래서 어디에 가든 별로 차이가 없단다.”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쑥스러워하는 미소를 짓고 있는 범한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잠시 침묵하던 범한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버지는 이왕 온 김에…… 편안하게 쉬다 가려는 거야.”
드넓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부녀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꽃처럼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