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79
078화 선을 넘은 범한
“상처는 좀 나았어요?”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청년을 바라보며 임완아가 건넨 말이었다. 임완아는 범한이 걱정되어 침대에 눕히고는 원망하듯 말했다.
“몸도 성치 않은데 무엇 하러 온 거예요?”
그러자 범한이 앓는 소리를 하며 대답했다.
“그대가 날 걱정할까 걱정되어 왔어요.”
범한의 말에 심장이 따스해져 왔다. 걱정이란 단어가 두 번이나 중복된 걸 정확히 들은 임완아는 자기 찻잔에 있는 차 찌꺼기를 버리고는 새 찻잎을 넣어 우리고는 범한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러고는 작게 중얼거리는 듯 말했다.
“나는 공자님이 시킨 대로 내 몸을 잘 돌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공자님도 본인 몸을 잘 살폈으면 좋겠어요.”
범한은 한 손으로 찻잔을 받쳐 들고는 찻잔 위로 올라오는 김을 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군주께서 어찌하여 친히 시중을 들어 주는 겁니까?”
그러자 임완아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살짝 성을 냈다.
“다시 날 화나게 하면 당장 내쫓을 것입니다.”
“그럴 수 있겠어요?”
범한이 음흉하게 웃으며 임완아를 바라보았다.
* * *
“결정했어요. 혼례를 올린 후 우리 둘이 창산의 별장으로 가서 겨울을 보내요.”
범한은 침대에 몸을 반 정도 누였다. 그리고 옆에서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정혼자를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대의 병을 치료하는 데도 좋은 곳이에요. 그리고 그곳으로 떠나기 전에 비개 스승님께서도 반드시 경도로 돌아오시리라 확신합니다.”
“내 생각만 하지 말아요.”
임완아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자 희고 고운 치아가 붉은 입술 위로 귀엽게 드러났다.
“그런데 나중에 이런 일이 또 일어나면 어떻게 합니까?”
범한은 자주 한밤중에 규방을 드나들고 있었다. 얼마나 자주 드나들었는지 자신이 몇 번이나 왔는지 기억도 못 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별궁 호위병들은 단 한 번도 그런 범한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니 호위병들은 이 두 정혼자가 이미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에 범한은 담장을 넘나드는 자신이 매우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이곳이 황궁 밖에 있기는 하나 작은 황궁이다 보니, 역사적으로 자신처럼 황궁을 넘나들며 사랑을 나눈 사람이 어디에 또 있을까, 생각하며 우쭐해하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을 리 없지요. 북제가 바보도 아닌데. 이번에 소굴을 들켰고 다음번에 같은 수법을 쓴다면 조정에서도 쉽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거예요.”
그러자 임완아가 걱정했다.
“나는 조정에 있는 몇몇 사람들이 무서워요. 그들이 나중에 암살자를 보낸다면 또 북제 사람에게 뒤집어씌우겠지요. 그렇다면 공자님에게 거리낌 없이 손을 쓸 거예요.”
범한은 자신의 정혼자가 총명한 사람이라는 걸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아무리 황태후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고는 해도, 어려서부터 황궁이라는 주변 환경이 매우 복잡한 곳에서 자라 관리들에 관한 일은 자기보다 훨씬 잘 안다는 점도 범한은 알고 있었다.
임완아의 말을 들은 범한은 그녀의 부드러운 턱을 손으로 살짝 쥔 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걱정 말아요.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니까요.”
임완아는 아래턱이 간지러웠다. 범한의 이런 허물없이 다정한 행동은 그녀를 기분 좋게 만들면서도 또 긴장하게 만들었다. 백설 같은 피부가 잠시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러자 임완아는 이내 서둘러 범한의 손을 밀치고는 살짝 쑥스러워하며 투덜댔다.
“사람은 운에만 기대어 살 수는 없어요!”
범한은 수줍어하는 임완아의 모습을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 그녀를 놀리기 시작했다.
“운이 좋았으니 그대가 내 사람이 된 거예요.”
“내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가요?”
임완아가 고개를 살짝 떨궜다. 긴 눈썹이 살며시 떨렸다. 긴장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매우 중요한 사람입니다.”
말을 마친 범한이 얼른 임완아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자신은 닭살 돋는 표현을 잘하는 편이 아니어서 살짝 긴장한 채로 바보처럼 임완아의 입술을 찾기 시작했다.
범한의 품에 안긴 순간 임완아에게 얼굴 가득 남자의 향기가 밀려들었다. 그러자 임완아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 범한의 가슴팍에 자신을 내맡겨 버리고 말았다. 그런 임완아가 고개를 돌려 작은 소리로 말했다.
“대체 누가 공자님을 죽이려 하는 걸까요?”
그런데 하필 임완아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녀의 입술과 범한의 늑대 같은 입술이 어긋나고 말았다. 범한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임완아의 질문에 오히려 가슴팍이 살짝 서늘해진 것 같아 품 안에 있는 여인의 부드러운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등을 두 손으로 문질렀다.
“신경 쓰지 말아요.”
임완아는 등이 간질거려서 참지 못하고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웃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려 했다.
“만약 우리 부모님께서······.”
품속 여인이 주는 미묘한 감촉을 즐기고 있던 범한의 손이 멈추었다. 범한은 이내 정색을 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장 공주마마와 재상 대인은 어떻게 해야 하죠?”
이 말을 하는 순간에도 두 사람의 몸은 여전히 선정적인 자세로 밀착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이 주제가 지닌 심각성과 무서운 기분을 효과적으로 희석할 수 있었다.
그 후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임완아가 용기를 내어 범한의 두 눈을 응시하더니 그의 목덜미에 양손을 둘렀다.
“내가 공자님에게 시집가게 된다면 나는 범씨 가문의 며느리가 됩니다.”
범한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동안 한밤에 규방에서만 사랑을 속삭이느라 남모를 고충이 있기는 했지만 수확은 있었다. 범한은 자신의 정혼자가 어려서부터 황궁에서, 그것도 황태후의 손에서 자라 함께 지낸 적이 거의 없는 장 공주와는 모녀간의 정이 약하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로부터 직접 장 공주와 선을 긋는 대답을 들으니 감동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이 청춘 남녀는 비슷한 삶의 배경과 성장 과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상대방의 마음속 고충이 무엇이며 또 서로에게 자긍심을 주는 게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둘이 경묘에서 처음 눈이 마주친 순간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제왕가는 애정 따위는 없는 곳 아니던가. 한데 범한은 이 소녀에게 전에는 몰랐던 정감을 느끼게 해줌으로써 충격과 따스함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그러니 이 어두운 규방이 범한의 지친 심신을 달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 *
“언제쯤 외출이 가능할 것 같아요?”
범한이 임완아를 끌어안은 채 물었다.
임완아는 범한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왼쪽 어깨에 살포시 몸을 포개었다. 그리고 범한의 질문에 체념하듯 대답했다.
“나는 소변도 궁 안에서 본답니다. 그만큼 문밖으로 나갈 기회가 없습니다. 4년 전에 황제께서 절 군주로 책봉하신 후에는 문밖출입을 할 기회가 있었지요. 그런데 최근 들어 다시 몸이 약해지는 바람에······.”
임완아가 조심스럽게 범한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계속 이리 몰래 만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범한은 깜짝 놀랐지만 웃으면서 소리를 낮췄다.
“나는 이렇게 몰래 만나는 느낌이 너무나도 좋은데······ 단지 그대의 병에는 몸도 움직여 주고 햇볕도 좀 쐬어 주어야 좋아서 한 말이에요.”
몰래 만나는 게 좋다는 말에 임완아의 두 뺨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불현듯 그동안 자신이 해온 황당한 짓과 젊은 청년을 자기 옆에 눕혀 놓았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에 임완아가 범한을 나무랐다.
“그렇다면 내가 내일 입궁해 외삼촌께 부탁을 드려보겠습니다.”
“외삼촌요?”
범한은 그녀의 정겨운 호칭에 자기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웃고 말았다.
“그렇군요. 외삼촌 되시는 분이 천하지존이신 황제 폐하셨네요. 그분의 말 몇 마디 덕분에 그대가 나의 아내도 되고요.”
범한은 순간 오늘 성지를 받은 일이 생각나 그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임완아도 옆에 있는 이 청년이 태상사 협률랑으로 책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이번 혼사가 정해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임완아는 너무나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또 너무나 부끄러웠다.
범한은 발그레해진 임완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심성이 따뜻하고 영특한 이 소녀가 왜 이다지도 수줍어할까, 생각했다. 범한은 이 세계의 여자들도 전생에 있던 여자들과 같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밤마다 담을 넘는 건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당당한 신분인 군주의 입장에서 보면 범한의 이러한 행동은 매우 큰일 날 일이었다.
“아, 맞다. 지난번 우리가 경묘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대와 함께 있던 사람은 누군가요?”
“폐하와 함께 갔었습니다.”
임완아는 범한의 질문이 매우 이상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네?”
범한은 자신이 구오지존인 황제와 스쳤었다는 걸 알자 기분이 이상했다. 그 귀인이 황제 폐하였다면 당시 자신과 맞붙었던 고수는 당연히 호위대장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호위대장과 한판 맞붙었는데도 피만 조금 토했을 뿐이라고 생각하자, 범한은 또다시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임완아는 범한의 얼굴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흥미로웠는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왜 그러나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나요?”
“내가 바보 같았어요. 그분이 거기 오신 줄은 생각도 못 했으니까요.”
범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황태후마마 내지는 장 공주마마일 거라 생각했어요. 이런, 살면서 황제 폐하도 한번 뵙지 못하고 죽는다면 너무 아쉬울 것 같습니다.”
“비록 세상 밖 일은 잘 모르기는 하나, 사남 백작가가 황제 폐하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폐하를 뵙고 싶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요. 더군다나······.”
임완아가 고개를 떨구고 수줍게 말을 이어 나갔다.
“혼인한 후에는 어차피 황궁에 입궁해 황제께 인사를 드려야 합니다.”
임완아가 ‘혼인’이라는 단어를 말한 후 수줍어하자 범한은 그녀의 행동이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에 범한은 임완아의 왼손을 잡아끌더니 자신의 손을 슬며시 아래로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범한의 손은 임완아의 허리를 타고 계속 아래로 내려가 종착지인 부드럽고 풍만한 곳까지 도달했다.
그 순간 범한의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었고 아까보다도 더 음탕해진 상태였다. 범한의 손은 임완아의 몸을 계속해서 만지며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매끈하고 탱탱한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임완아가 부끄러움을 꾹 참고 범한을 침대 옆에 둔 채 밤새 이야기를 나눈 건 자신의 정혼자가 속되지 않은 예절 바른 군자란 걸 알게 되어서였다. 그리고 그 오랜 시간 동안 범한은 임완아의 체취만 맡고 선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임완아는 마음 놓고 그를 자기 곁에 둔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임완아에게는 일종에 자긍심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질 줄이야. 바로 오늘, 이 상처 입은 사내놈이 이리도 음탕한 짓을 하다니! 임완아는 범한의 손이 자신의 엉덩이를 주무르기 시작하자 아주 잠깐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바보처럼 눈만 멀뚱멀뚱 뜬 채 범한의 눈에 깃든 욕정이 점점 짙어져 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범한이 작게 소리를 냈고 임완아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면서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린 임완아는 있는 힘껏 범한의 음탕한 손을 자기 몸에서 떼어 놓았다.
이미 고삐가 풀려 버린 범한은 임완아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 곧바로 그녀를 다시 품에 안았다. 왼손은 상처 때문에 불편하니 그렇다면······ 범한은 다리를 사용했다. 커다란 코알라가 매달린 것처럼 발버둥 치는 임완아를 자신의 품 안에 잡아 두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임완아의 입술은 촉촉하고 따스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두 사람은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범한은 형용할 수 없이 기분이 상쾌했다. 하지만 임완아는 수치심에 눈빛이 점점 흐릿해졌고 계속해서 눈물이 맺히며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범한은 임완아의 표정을 보고 어찌할 바를 몰라 잠시 멍하니 있다가 얼렁뚱땅 웃으며 무마하려 했다.
“참을 수 없었어요. 참을 수 없었다고요.”
“나를 모욕한 거예요.”
임완아가 훌쩍이며 말했다. 대신 밖에 있는 호위병들과 아래층에 있는 보모가 알아채고 올라오지 못하도록 작은 소리로 훌쩍이며 말했다.
“내가 언제요!”
범한은 매우 억울하다는 듯 반응했다. 속으로 ‘이제 곧 부부가 될 사이인데 조금 더 진도를 나간들 어떠합니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린 낭군의 생각을 알아챈 임완아는 두 볼이 뿌루퉁해져서는 화를 냈다.
“아직 몇 달이나 더 남았다고요.”
범한이 음흉한 웃음을 지은 채 임완아를 바라보았다.
“그리도 많은 봄날 밤을 우리 둘이 함께 지냈잖아요. 그런데 왜 그 정도 일로 그럽니까.”
그 말은 임완아의 입장에서는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수치심이 들끓어 오른 임완아는 주먹을 불끈 쥐고 범한의 몸을 향해 날렸다. 하지만······ 주먹이 절반 정도 앞으로 나간 순간, 범한의 몸이 성치 않다는 게 생각나 임완아는 하는 수 없이 주먹을 거두어들이고 말았다. 그런데 그녀가 몸을 돌려 앉는 순간 하마터면 건드려서는 안 될 곳이 그녀의 몸에 닿아 버렸다.
임완아는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얌전하게 참고 넘어가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임완아는 범한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있는 힘껏 침대 아래로 밀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