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83
082화 다정한 말 한마디
범한은 필살기로 준비했던 시와 탄식을 모두 동원해 봤지만 결과는 무용지물이었다. 이에 범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여자라면 모두 이와 같은 상황에 빠져들기 마련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당한 일이 너무나 황당했다. 그래서 잠시 마음을 안정시키는 사이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범한은 이 작은 약병을 감옥 안으로 던지며 쌀쌀맞게 말했다.
“독약이다. 누군가 자백을 강요할 것이야. 만약 생고생하기 싫다면 삼켜라.”
작은 약병이 건초 더미 위에서 두어 번 구르더니 사리리 바로 옆에서 멈추었다. 사리리는 이 작은 병을 꽉 움켜쥐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부드럽고 친절했던 범한 공자가 순식간에 죽으라고 유혹하는 마귀로 변할 줄이야. 전혀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만약 죽고자 했다면 애당초 경도에서 도망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범한은 바로 이 점을 노리고 있었다. 사리리의 두 눈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날 죽이려 했는데 설마 내가 널 아끼리라고 생각한 거냐? 그렇다면, 네 생각이 너무 황당하고 웃기구나. 내가 너에게 덜 고생할 길을 열어 주었는데 왜 고마워하지 않는 것이냐? 죽는 게 그리도 두려웠다면 무엇 하러 첩자가 된 것이냐!”
사리리가 분노에 차 이를 갈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단히 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깊고 그윽한 눈동자가 범한의 얼굴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범한의 얼굴은 매우 평안해 보였다.
“죽겠다는 따위의 말은 이제 그만하거라. 사실 너는 바보가 아니다. 만약 북제와 결탁한 조정 관원들의 명단을 넘긴다 하더라도 너는 결국 죽게 되겠지. 그러니 이만 악물고 참고 있는 거겠지.”
사리리는 범한 공자의 말소리가 점점 멀게, 점점 작게 그리고 점점 더 무섭게 느껴졌다.
“나는 조정 사람이 아니다. 단지 날 해치려던 사람을 찾아 복수하고 싶을 뿐이다.”
“너와 거래를 하고 싶구나.”
“너에게는 나를 믿는 것 말고 다른 길은 없다.”
범한은 담담하게 말을 해나갔지만 그 어떤 말보다도 음산했다. 그러다 점차 목소리를 줄이더니 이내 혼자 중얼거리는 것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인에게 고문을 한다 해도 전혀 개의치 않아. 왜냐면 네가 먼저 나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야. 게다가 나는 여권주의자이기도 해. 그래서 생사를 다투는 싸움에서 남자와 여자는 원래 평등하다고 생각하지.”
범한은 어렸을 때 무덤을 판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겉으로는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기는 해도 내면에 잠재된 음울함과 잔인함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고 가끔씩 폭발시켰다.
왕계년이 조용히 자리를 뜨더니 간수에게 문을 열라고 했다. 그리고 필요한 고문을 하기 위한 형구(刑具)를 챙기기 시작했다.
* * *
연약한 여인이 내지르는 절규가 깊은 감옥 안에 수없이 울려 퍼졌다.
한참 후, 범한은 살짝 얼굴을 찡그린 채 건초 더미 위에 기절해 있는 사리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범벅이 된 그녀의 손가락을 보고 있건만 범한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옆에서 줄곧 조용히 있던 왕계년에게 마음의 동요가 있었다.
때 묻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는 공자가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침착하게 무시무시한 고문 도구를 사용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왕계년은 범한의 따스한 얼굴 아래에 냉혹한 얼굴들이 수도 없이 숨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고문을 하면 효과가 좋다지만 그래도 최소한 연달아 닷새를 해야 합니다.”
왕계년이 곤란하다는 듯 침을 꿀꺽 삼키며 낮은 소리로 설명을 이어 갔다.
“사리리는 분명 풋내기가 맞습니다. 그러니 대인께서도 정보를 일부 얻어 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사리리도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지켜야 할 중요한 정보가 있다면 차라리 몸이 부서지는 고통을 받다가 혼절하는 편을 택할 것입니다.”
무섭게 생긴 간수가 나타났다. 그런데 이때 범한은 이미 자신의 얼굴을 도포 안에 감춰 놓은 상태였다. 간수가 몸을 구부려 고문 도구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는 물건을 챙기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보시오, 젊은 대인. 형을 가해 고문하는 것도 다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고작 반 시진 안에 답을 얻어 내려 하시다니 우리같이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너무 얕잡아 보셨군요.”
범한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서 몸을 옆으로 돌리고는 간수에게 감옥에서 나가라고 했다. 범한은 그가 멀리 사라진 걸 보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왕계년에게 말했다.
“이제 보니 전문가에게 맡겨야 하나 봅니다. 며칠 지난 후에 소식만 기다리면 되니까요. 이곳의 방비 상태를 보니 누군가 잠입해서 사리리를 입막음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막 감옥에서 나가려 하는데 사리리가 천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문으로 다친 손가락이 쓸렸는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평소에 화려하게 꾸민 놀잇배에서 악기나 타며 노래나 부르던 손과 입술이었다. 그런데 오늘 두 손은 모두 망가졌고 입술은 처참한 절규만 내지르고 있었다.
범한은 잠시 쉬다가 몸을 돌려 철창 너머에 있는 사리리를 한번 쳐다보았다.
사리리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온통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그녀의 두 눈은 마치 다친 암사자처럼 매섭게 범한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그의 생김새를 모두 머릿속에 기억해 두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범한은 가만히 서서 사리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왕계년은 어느새 눈치 빠르게 어느 정도 뒤로 물러나 있었다.
“너에게 준 약병을 잘 간직하거라. 그리고 다음번에 고문을 받다가 정말로 참을 수 없으면 먹거라.”
범한은 매우 냉담한 음성으로 다시 한번 죽음을 가지고 그녀를 시험했다.
사리리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아주 분한 눈으로 범한을 쏘아보았다. 사리리의 두 눈에는 원망으로 똘똘 뭉친 독기가 서려 있었다.
통로 끝 감옥 밖에서 눅눅한 공기에 피비린내가 섞여 역하게 발효되고 있었다. 한 달 전 침대 위에서 거짓으로 사랑을 나누었던 남녀는 이미 서로의 역할이 바뀐 상태였다. 범한은 이 여인의 처참한 몰골을 보며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처음에는 자신도 전생에 있던 중국 명나라, 청나라 시대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이 여인과 미묘한 일이 벌어지거나, 아니면 이 여인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찌 알았으랴. 이야기가 시작도 하기 전에 그 같은 상상은 없던 것이 되어 결말을 맺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범한 입장에서는 한탄할 필요가 없었다. 상대방은 자신을 죽이려 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스승인 비개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지금 지나친 동정심을 발휘하면 오히려 자신과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무책임한 행동만 될 뿐이었다.
여인의 원망과 독기에 찬 눈빛을 보면서도 범한은 여전히 따스하고 차분하게 설명을 해나갔다.
“목숨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된다. 그러니 내가 너에게 독약을 주었어도, 사실 그것 때문에 내가 덕을 볼 건 없다는 걸 너도 잘 알 거야. 그런 눈빛으로 날 봐도 소용없어. 내가 아직도 너를 동정하면서도 아끼고 있기는 하다만, 그래도 이 일로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않으니까. 나를 따르던 호위병 세 명의 머리통이 너희들 때문에 박살 나버렸어. 그런데 너희들 중 그 누구도 그들의 죽음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적 있었나?”
범한은 손을 내저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너는 믿지 못할 게다. 나도 예전에는 하늘을 원망했었다. 평생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에는 가장 비참한 결말을 안겨 주더군. 만약 내 원망이 통했다면 내 원망 때문에 하늘에 수백만 개의 구멍이 뚫렸을 거야. 그러다가 나중에서야 알았어. 자신의 몸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을 때 행복도 느끼고 계속 살아 나갈 힘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지.”
사리리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오직 거친 건초 더미에 상처투성이인 양손이 닿지 않도록 손만 살며시 들어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사리리, 생각을 좀 해보거라. 이 세상에 자기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범한이 침착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너는 본래 경국 사람이다. 그런데 북제에게 네 목숨을 팔아넘겼어. 네가 이렇게나 많은 걸 포기하다니 분명 돈 때문은 아닐 거야. 오히려 복수심 때문일지도 모르지. 경도에서 너에 대해 떠도는 소문들이 진짜인지는 나도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네가 복수란 걸 하고 싶었다면 우선 너부터 살아남아야 옳다. 그리고 이 순간 네가 계속 살고 싶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가능할 거다.”
사리리가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여전히 암담한 빛이 번뜩였고 그 빛은 마치 무덤 위에서 피어나는 도깨비불처럼 꺼질 줄을 몰랐다.
한참이 지난 후 그녀가 이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
“제가 살아 있으리란 걸 어떻게 보장하시렵니까?”
정신이 번쩍 든 범한이 무릎을 반 정도 꿇고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오늘 경도에 도착했고, 내가 바로 오늘 중범죄자 감옥으로 들어와 널 심문했다. 그러니 감찰원에서의 내 지위를 충분히 짐작했을 것 같구나.”
사리리가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공자님을 믿을 것 같습니까?”
“이건 믿음 따위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범한이 부드럽게 말을 이어 갔다.
“이건 도박이야. 너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도박. 왜냐하면 삶과 죽음을 건 도박에서 너에게는 선택권이 없거든.”
사리리의 눈동자가 방황하는 걸로 보아 마음의 동요가 있는 것 같았다. 사리리가 얼굴을 돌려 범한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불현듯 그날 밤 배 위에서 서로 뒤엉켰던 일이 생각나더니 불쑥 미움이 솟구쳐 올랐다. 사리리는 미친 사람처럼 범한에게 달려들어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범한은 깜짝 놀라 몸을 돌려 사리리의 공격을 피했다. 범한이 보기에 이 여인은 분명 단단히 걸어 두었던 마음의 빗장을 느슨하게 푼 듯 보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돌변한 걸까?
범한이 모르는 게 있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그리고 직업을 불문하고 여인의 마음을 알기란 광활한 바닷속에서 바늘 찾기와 같고, 또한 산속에서 백사장 걷기처럼 쉬운 일이 아니란 사실을 말이다.
범한은 살짝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버드나무 잎같이 수려한 눈썹이 잔뜩 찌푸려지더니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표정이 계속해서 변했다.
범한은 어젯밤에 일어난 참장의 자살 사건을 떠올렸다. 그러자 곧이어 오주에서 잡아들인 사람도 이미 죽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이 이처럼 신속하고 잔인하게 손을 썼으니, 자신이 대적해야 할 진짜 적을 잡으려면 이제는 사리리의 증언만이 유일한 수단인 것 같았다.
그런데 사리리가 너무 늦게 증언을 한다면 사리리와 관계된 사람도 그사이 모두 죽거나 자리 보존을 못 할 것만 같았다. 형구를 사용해 고문을 한다 해도 이 북제 간첩의 정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범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 아니던가. 시간만 충분하다면 몇 날 며칠이 걸린다고 해도 아무 걱정 없을 것을!
그런데 지금 사리리의 태도를 보니 그녀의 입에서는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철창 앞에 있던 범한은 실망한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왕계년과 함께 감옥을 나가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별안간 범한이 심호흡을 했다. 미간을 펴고 다시 감옥 앞으로 다가가 철창을 사이에 두고 사리리라는 여인을 차갑게 쳐다보았다.
왕계년은 그런 범한을 살짝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범한의 음성이 맑고 담담하게 감옥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누구 짓인지 밝힌다면 내가 이 세계의 모든 선조님의 명예를 걸고 너를 반드시 풀어 주겠노라 맹세하겠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었다. 하지만 범한은 포기하지 않았다. 따스한 눈빛으로 사리리의 얼굴을 바라보고 또 사리리가 가슴 높이로 들고 있는 피가 낭자한 손을 응시했다.
감옥의 습한 공기에서는 곰팡내가 났다. 범한과 사리리 사이에 가로 놓인 문에도 점점 곰팡이가 슬어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리리는 아직까지 아랫입술을 꽉 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매우 고통스럽게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범한이 그녀에게 던진 독약은 청색으로 된 도자기 병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 순간 그녀의 손아래 그리고 건초 더미 위에서 가만히 가로누운 채 기이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