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92
091화 산속 달빛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도 범사철은 이상하게 보일 만큼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장부를 살펴보고 있었다. 장부 같은 것에는 흥미가 없는 범한은 고작 열두세 살밖에 안 된 어린 폭군(패왕)이 무미건조한 숫자 놀이에 빠져 있는 게 정말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은 각양각색이라 생각하고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고 일어섰다.
등자경이 지팡이를 짚고 따라나서려고 하자 범한은 얼른 그를 자리에 앉히고 범약약을 따라 정원 밖 논두렁으로 나가, 맞은편 산 평지 위에 떠 있는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머리 위 이름 모를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사사삭 소리를 냈다. 정말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눈앞까지 꿈이 다가왔는데도 누구는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는 의심만 한다네.”
전생의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자 감개무량해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시구가 줄줄 흘러나왔다.
“인생은 한바탕 꿈같아서 때로는 자신이 아직도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그저 깨어나기 전까지만이라도 이 꿈을 꾸고 싶다.”
범한은 혼자 감정에 취해 누이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아마 알아듣지 못하리라 생각하면서도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하지만 이백(李白)의 글에 담긴 자연스러움이 이 소녀에게 어떤 파급력을 미칠지는 깜박 잊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순간 범약약의 눈이 반짝 빛났다.
범한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근심 가득한 얼굴로 앞에 두 문구를 제외하고 나중에 말한 것은 모두 이백이라는 대가가 쓴 것이라고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낮에 범사철이 자신을 비웃었던 게 떠올랐다.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다른 사람 눈에는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아주 자연스레 행동을 멈췄다. 지금 말해 봤자 범약약이 절대로 믿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해 감찰원에서 수많은 신기질을 잡아들였지만 그들 중 시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범약약은 그저 여전히 의심을 품은 채로 다시 보름달로 시선을 돌렸다.
범한이 이 세상에서 생활한 지 벌써 10여 년이 지났지만 그 특유의 사고방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남녀 차별이나 스킨십에 대한 이런 생각들은 이 세상과 그리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나름 최고의 장점이었다. 여동생을 껴안을 때도 남녀 사이에 생기는 그런 감정이 아니라 정말 순수한 형제간의 우애로 행동했다. 범약약은 그의 품에 안길 때 왠지 모르게 따스하고 부드러운 기분을 느꼈지만 이런 것에 대해 다시 곱씹어 보진 않았다.
멀리 떨어진 나무 밑에서 쇠막대기 같은 감찰원 관원 두 명이 서서 그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내일 일찍 출발해야겠다. 돌아가서 할 일이 있거든.”
여동생의 머리카락 향을 맡으니 은은한 난향이 났다.
“뭐로 머리를 감은 거야?”
범약약은 웃으면서 대체 뭘 물어보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재스민 우린 물로 감았어. 근데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건데?”
사실 이곳 여성들은 머리를 잘 감지 않기 때문에 머리에서 향기가 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사리리를 품에 안았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아무리 절세미녀라도 퀴퀴한 냄새가 방 안 가득 퍼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범한은 경도에 온 후로 범약약과 임완아에게 머리를 감으라고 연신 잔소리를 하는 것도 모자라 직접 만든 샤워기를 주고 욕조를 설치하는 방법까지 알려 주었다. 약약과 완아는 범한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그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효과는 생각만큼 좋지 않았지만 바로 범씨 집안뿐 아니라 황실에도 널리 퍼져 나가고 심지어 유씨 집안 여인들의 머리 감는 횟수도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아버님이 분명 기뻐하실 거야.”
범한의 말에는 속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곤 범약약의 질문에 대답했다.
“내가 갈 데가 있거든. 경도는 아침에 조용하니까 다른 사람은 말고 너만 따라와.”
오라버니가 자신을 믿어 준다고 생각하니 범약약은 몹시 감동스러웠다.
“내일 경여당에 가봐야 하거든. 섭 대행수에게 이미 얘기해 뒀어. 요즘 경도가 그런대로 조용하니까 지금 가보면 딱 좋을 것 같아.”
경여당의 대행수는 과연 듣던 대로였다. 범사철이 주로 장부를 관리하면 섭 대행수는 계획대로 실행에 옮겼다. 덕분에 담박서국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고 자신의 두둑한 밑천과 든든한 관료를 배경 삼아 두 달도 채 안 되어 거리의 모든 동종 업체를 먹어 치워 버렸다. 최근에는 근방 도시까지 그 세력이 점점 뻗어 나갔다.
“그 두부 가게는 아직도 있어?”
범약약이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물었다.
“세자가 오라버니가 매일 보내는 두유를 좋아하잖아. 설마 매일 못 마실까 봐 직접 운영하려는 건 아니지?”
범한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 오라버니가 이제 곧 하루에 은전 수십만 냥을 주무르는 사람이 될 텐데 두유까지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겠니?”
물론 농담으로 하는 소리긴 했다.
“언제 시간 나면 한번 해봐. 요즘 별로 하는 거 없잖아. 잘해 봐.”
그는 대갓집 아가씨가 공개적으로 외부 활동을 하는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기에 더 이상 두부 가게에 대해 말할 필요를 못 느꼈다. 다만 범약약이 독서를 하고 시를 짓는 것이 나중에 헛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범약약은 곤란하긴 했지만 바로 그렇게 했다.
범한은 갑자기 중요한 일이라도 떠올랐는지 미간을 찌푸린 채 여동생의 어깨를 꼭 잡고 정색했다.
“약약, 내가 보기에 넌 열대여섯 살 난 여자아이라 시집가기엔 아직 이르긴 해. 하지만 지금 경도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아서 나 같은 남자도 강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장가를 가야만 하는 상황이잖아. 그러니 너도 조심해. 네가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야지. 매일 마을에 오는 하종위 같은 사람이면 내가 당장 쫓아 버릴 테다. 근데 나중에 이상한 놈한테 시집가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범한은 매우 진지했다.
“이왕 결혼할 거 웬만하면 너 스스로 잘 골라서, 정말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결혼해. 집안에서 정혼자를 정하기 전에 네가 먼저 손을 쓰라고. 정혼은 위험 부담이 큰 것 같아. 이 세상 사람들이 나와 완아처럼 운이 좋을 리 없잖아. 부모님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으니 말이야. 나야 뭐, 버틸 의지는 있지만 만약에, 만약에 혹시라도 황실에서 내려온 명령이면 어떻게? 우리 집안으로서는 따를 수밖에 없지.”
범약약은 범한의 말에 살짝 부끄러워하다가 자화자찬하는 모습에 헛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황실이라는 말에 갑자기 걱정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일반 관리 집안의 자기 나이대의 여인이 정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저 매일 오빠와 함께 지내다 보니 이 세상 남자들이 한없이 평범하고 지루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를 수 있겠는가.
둘째 날 아침. 날이 밝기 전 옅은 안개가 산기슭에 내려앉았다. 어젯밤 달빛은 이미 맞은편 논 위로 옮겨 간 지 오래였다. 백작가 사람들이 타고 온 마차는 혹여나 마을 사람들이 깰까 봐 조용히 경도를 향해 출발했다. 그들 뒤편으로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등자경과 그의 아내 그리고 아직 잠이 깨지 않아 눈을 비비고 있는 딸아이가 문에 기대서서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차가 경도 성문 앞에 다다랐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그들의 마차의 표시가 눈에 띄었다. 방금 성문을 연 순성사 병사는 검사를 마친 후 성안으로 마차를 들여보냈다. 순성사 전임 장관 초자항이 범씨 집안 장자를 칼로 찔러 직책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 순성사에 있는 병사들은 백작가 마차의 둥근 표시를 보고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굳이 곤란한 상황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마차가 백작가 앞에 도착했다. 범사철은 크게 하품하고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종들에게 말했다.
“마차 안에 있는 납제 음식들은 후원에 가져다가 잘 정리해 둬. 몰래 훔쳐 먹을 생각은 하지 마. 큰 형님이 줄 데가 있어서 준비하신 거니까 말이야!”
그러곤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내일 임씨 누이가 고라니 고기를 먹었는데 이 고기는 왜 다리가 세 개냐고 묻는다면 내 손으로 너희 다리를 부러뜨릴 테니 그런 줄 알아!”
범씨 집안 종들은 이미 범사철의 성질머리를 잘 알고 있기에 찍소리도 하지 않고 조용히 마차에서 짐을 내렸다.
호위병들도 마차에서 내렸다. 왕계년도 마차 옆으로 다가와 범한이 내리길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아무런 미동도 느껴지지 않자 왕계년은 마차에 걸린 천을 걷어 젖혔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마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범한과 범약약은 어디로 간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얼른 범사철에게 다가가 다급히 물었다.
“작은 도련님, 범한 도련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범사철은 몸을 휙 돌려 그를 한번 보더니 훈계했다.
“이 긴장한 꼴 좀 봐. 형님이랑 누이는 오는 길에 내렸어. 너희들이 계속 따라다니니까 지겨워서 소풍이라도 갔나 보지.”
왕계년은 깜짝 놀랐다. 이번에 그가 감찰원에 돌아오게 된 것은 모두 범한의 덕이었다. 진평평 원장이 친히 자기를 보러 왔을 때도 무슨 일이 있어도 범한 도련님에게 눈을 떼지 말고 그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범한 도련님이 이렇게 말도 없이 사라질지 누가 알았단 말인가. 범사철은 왕계년의 긴장한 얼굴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형님은 오후에 돌아오신다고 했어. 그렇게 초조해하지 않아도 돼.”
사실 범사철은 왕계년의 진짜 신분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아버지가 범한에게 보낸 고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왕계년도 범사철에 대해 크게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에게 눈치를 주고는 마차에 올라타 성 밖으로 나갔다.
* * *
여름의 작열하는 태양 때문이지 들려오는 매미 소리도 어딘지 모르게 힘없게 느껴졌다. 범한은 범약약을 데리고 경도 외곽에 있는 유정강 근처로 산책을 나갔다. 다행히 아직 이른 시간이라 강가에 나무 그늘이 있어서 더위를 피할 수 있었다. 범한은 이미 가슴 앞섶을 다 풀어헤친 상태였다. 범약약은 손으로 부채질을 할 뿐이었다. 범한은 그 모습을 보고는 강물에 적신 손수건을 건넸다.
“이 강 이름이 왜 유정강인지 알아?”
“기록대로라면 지금 왕조 이전부터 이 이름을 사용했다고 해. 강물이 경도를 휘감고 흐르는데 창산의 형세가 굽이굽이 높고 낮아서 어디는 강물이 엄청 세게 흐르고, 또 어디는 고요한 게 거울처럼 매끄러운 것이 마치 멈춰 있는 수정 같다고 이 이름을 붙인 거잖아.”
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물 중앙의 고요한 부분에 꽃잎이 떠다니는 걸 보니 아직 감옥에 갇혀 있는 사리리가 생각났다. 최종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조금 더 가보니 저 멀리 맞은편 강기슭 수풀 사이로 어렴풋이 집 한 채가 보였다. 아주 단아하고 아늑해 보이는 작은 정원에 담장 밖으로 대나무 가지 몇 개가 하늘을 향해 나 있었다. 오늘같이 찌는 여름날에도 꿋꿋하게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범한은 눈살을 찌푸린 채 그 집을 응시했다.
“저게 태평 별저지?”
“응, 맞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섭씨 집안 주인이 살던 집이었지. 섭씨 집안의 재산이 국고로 환수되면서 지금은 황실 소유가 되긴 했지만 말이야. 가끔 유씨 집안사람이랑 수다를 떠는데 한 번도 저기에 누가 살았었는지 들어 본 적이 없네.”
범한은 응, 하고 대답하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원래 이곳은 그의 어머니가 전투적인 삶을 살았던 곳이다. 약약은 범한의 얼굴에 번진 미소를 보고 대체 무슨 이유로 저렇게 기분이 좋은지 몰라서 슬쩍 물어봤다.
“뭐가 그렇게 즐거워?”
범한은 땀을 닦으며 고개를 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범약약을 이리로 데려온 것은 꽤나 대담한 행동이었다. 경도에서도 섭씨 집안의 이야기가 금기 사항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와 오죽이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으니 자신도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잠깐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오늘 여기 온 이유는 저기 보이는 집에 들어가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미 황실의 소유가 된 이상 당연히 마음대로 드나들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있으려니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을 낳아 준 생모라는 사람을 본 적은 없었지만 속으로는 그녀를 진짜 어머니로 여기고 있었다. 전생에는 부모님 두 분 모두 일찍 돌아가셔서 혼자 지내서 그런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생길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환생한 이후 겪어 온 모든 일, 이 모든 것의 뒤에 이 여인이 가졌던 힘이나 권력, 의지가 담겨 있어서 그를 일깨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의 어머니는 바로 섭경미라는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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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납제 음식: 소금에 절이거나 훈제한 고기 및 생선의 총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