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yeongyeon RAW novel - Chapter 99
098화 마음을 담은 비연호
재상가에서 임약보가 비연호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녹주석을 갈아 윤을 내 만든 거군. 마개 부분도 정교하고 내화 공예 솜씨도 훌륭하지만, 여백이 좀 많은 게 흠이군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원굉도가 재상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웃었다.
“사위가 장인을 뵙고 싶어 선물을 보냈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임약보가 싱긋 웃으며 일어나 탁자에 놓여 있는 족자를 펼쳐 보였다. 안에는 눈으로 덮인 겨울 풍경을 배경으로 끝없이 이어진 강가에서 홀로 앉아 낚시하는 노인이 그려져 있었다. 임약보가 그림 위에 적힌 시를 읊었다.
“산에는 새가 날지 않고 길에는 사람의 발길이 끊겼구나. 도롱이를 걸치고 삿갓 쓴 노인이 외로운 배에 앉아 눈 내리는 강에서 홀로 낚시질을 하네.”
시를 읽은 그가 탄식했다.
“그림도 괜찮고 붓글씨도 봐줄 만하고 시도 훌륭하군요. 범한이 시를 잘 쓴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이제 보니 정말 사실이군요. 이 시를 보고도 사위가 장인을 위해서 보낸 선물이라 생각하십니까?”
원굉도가 쓴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범 공자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야. 재상 대인이 아들을 잃어 슬퍼하는 걸 알면서도 처량함을 노래하는 시화를 보내다니.’
난처한 표정으로 시화를 지그시 바라보던 원굉도가 순간 눈을 반짝이며 손가락으로 그림을 가리켰다.
“대인, 저기를 보십시오.”
원굉도가 여백에 찍힌 작은 점을 가리켰다. 절벽 옆 두 길이 만나는 지점에 작은 풀 한 포기가 눈을 뚫고 피어난 것처럼 보였다.
“이건······?”
재상이 눈을 찌푸리며 중얼거리자 원굉도가 웃으며 설명했다.
“눈을 뚫고 피어난 풀 한 포기지요.”
그림 속 작은 풀을 바라보던 임약보의 표정이 점차 누그러지더니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원 형님도 범한을 좋게 보고 있나 보군요.”
원굉도가 변명하지 않고 웃었다.
“범 공자는 집안이 좋을 뿐만 아니라 학식도 높고 성격도 좋지 않습니까.”
“꼭 완벽한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하는군요.”
임약보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아가 행복하게 살 수만 있다면 나는 더 바랄 게 없습니다.”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일은 확인했습니까?”
원굉도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창산 부근에서 일어난 일은 이미 확인했습니다. 비개가 동이성 쪽과 접촉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임약보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나도 그러리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범한이란 청년의 집안이나 학식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냥 성품이 좋으면서도 잔인한 수단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래야 내가 죽은 뒤에 우리 임씨 집안과 내 하나밖에 없는 딸을 보호해 줄 수 있을 테니까요.”
임공이 죽은 후 재상은 삶의 의욕을 잃어버렸다. 큰아들은 바보고, 딸은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자신을 따르는 관리들과 가족들을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임완아가 시집가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였다.
“바깥은 어떠합니까?”
임약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좋습니다. 대인과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좋습니다.”
* * *
“하늘은 왜 파란색일까?”
“바다가 파란색이니까요.”
“바다는 왜 파란색이지?”
“햇빛이 바닷속으로 들어가면 파란색으로 변하니까요. 아, 저도 몰라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한 거니까 귀담아듣지 마세요.”
“연못의 물은 왜 파랗지 않지?”
“그건 연못은 물이 얕으니까.”
“그래?”
“그렇지 않을까요?”
정원 안에서 임완아의 큰오빠가 비대한 몸을 의자 안에 욱여넣은 채 범한에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 눈동자는 가끔 멍하니 생기를 잃긴 했지만 아이처럼 순진무구해 보였다.
범한은 재상의 장남이 몸이 좋지 않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저능아인 건 모르고 있었다. 그는 재상을 만나기 위해 후원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우연히 손위 처남을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성함이 뭐예요?”
범한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위 처남을 바라봤다. 잠깐 대화를 나누면서 범한은 그의 반응이 아이처럼 느린 게 귀여웠다. 최소한 매일 주판만 끌어안고 있는 범사철보다는 귀여웠다.
손위 처남이 통통한 양 볼을 움직이며 말했다.
“나는 대보고 내 동생은 이보야. 이보는 집에 없어.”
임공의 죽음이 생각난 범한의 표정이 굳었다. 할 말이 없어진 그가 난처한 표정으로 바보 손위 처남을 바라봤다.
만약 일반 성인이었다면 지능이 낮은 사람과 대화하는 게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범한은 달랐다. 이전 세계에서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지내기도 했고, 지금 세계에서 패도공결을 수행하면서 식물인간 상태로 들어가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인내심이 훨씬 컸다. 게다가 손위 처남에게 안타까운 마음도 들어서 더욱 인내심을 가지고 대화를 나눴다.
다른 사람보다 행동이 굼뜬 손위 처남은 자신의 이익만 밝히는 경도 사람들보다 진실해 보여 사랑스러웠다.
“내가 왜 손위 처남이야? 그리고 대보는 이렇게 뚱뚱한데 너는 왜 말랐어?”
대보가 엄청 중요한 고민을 하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범한은 그 모습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손위 처남인 건 제가 매부가 될 거라서 그래요. 그리고 제가 마른 게 아니라 대보가 뚱뚱한 거예요.”
대보가 고개를 저으며 하품하더니 옆 탁자에 놓인 과자를 집어 먹으며 웅얼웅얼 말했다.
“대보는 뚱뚱하지 않아. 먹는 걸 좋아하는 것뿐이야.”
재상은 아직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잠시 눈동자를 굴리며 고민하던 범한이 대보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대보, 언제 나랑 같이 놀러 갈래요?”
“놀······ 놀자고? 나······ 격구 하고 싶어.”
“네?”
대보가 활짝 웃으며 말하자 범한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손위 처남을 꾀어서 여름 피서에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그럼 그 핑계로 경비가 삼엄한 별궁에 갇혀 있는 임완아도 데려갈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격구라니? 당황해 눈동자가 흔들리던 범한이 말을 바꿨다.
“대보, 하고 싶은 게 뭐예요?”
대보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크게 두어 번 숨을 들이쉬더니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보는 이야기는 듣는 게 가장 좋아!”
곧이어 재상가 정원에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름다운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숲속에서 행복하게 살았어요. 어느 날 백설 공주가 버섯을 고르는데······.”
* * *
“의외군.”
재상 임약보가 창을 통해 정원을 바라보다 웃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일까요?”
원굉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즐겁게 웃으며 말하는 모습을 보니 진심입니다.”
임약보가 한숨을 쉬었다.
“그럼 들어오라고 하세요.”
범한은 재상의 저택에 들어설 때부터 긴장되었다. 더구나 재상의 개인 서재 앞에서 기다릴 때는 미래의 장인을 만난다는 생각에 긴장되어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저절로 떨릴 지경이었다. 재상의 희망이었던 작은아들이 죽은 사건에 어쨌든 자신도 연관이 있었다. 그는 애써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인사했다.
“임 대인을 뵙니다.”
오랫동안 고민한 호칭이었다. 재상 대인이란 호칭은 장소와 맞지 않았고 아버님이란 호칭 역시 너무 지나쳤다. 임 대인이라 칭한다면 범씨 집안과 임씨 집안의 관계를 친근하게 표현할 수 있고 앞으로 있을 혼사에 대한 긍정적인 신호도 줄 수 있었다.
임약보가 범한의 얼굴을 바라보며 약간 뜸 들이다가 말했다.
“어서 오게. 범 공자를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
범한이 웃으며 재빨리 대답했다.
“이름을 불러 주시면 됩니다.”
임약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범한······ 이 혼사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범한은 속으로 하루빨리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표정을 본 임약보가 속으로 안심했다.
“자네도 봐서 알겠지만 공이가 죽어서 이제 나에게는 아들과 딸이 하나씩밖에 남지 않았네. 혼인하면 자네가 완아를 잘 보살펴 주게.”
범한이 재빨리 고개를 숙이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나도 이제 늙었으니 언젠가는 죽을 거야.”
서글픈 표정으로 말하던 임약보가 잠시 머뭇거렸다.
“지나친 말이긴 하지만, 만약에 어느 날 내가 자네에게 아들을 부탁한다면 맡아 줄 수 있겠나?”
잠시 고민하던 범한은 몸을 일으켜 두 손을 맞잡고 인사하며 말했다.
“당연히 그렇게 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한 가족이니 몇 마디 일러 줄 게 있네.”
임약보가 말을 멈추고 범한의 두 눈을 바라봤다. 그의 마음속 진심을 간파하려는 듯 시선을 고정한 채 한마디 한마디 또박또박 말했다.
“비록 완아와 만난 적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내 딸이야. 사남 백작도 알고 있으리라 믿네만 일단 혼사를 치르면 나와 자네 집안은 상부상조하는 관계가 되네. 그러니 앞으로는 조정 안에서나 밖에서나 자신이 처한 위치를 잊지 말고, 범씨 가문뿐만 아니라 임씨 가문의 이익도 생각해서 처신해 주었으면 하네.”
직설적인 요구였지만 한편으로는 임약보가 확실하게 혼사를 허락한 것이기도 했다. 재상의 허락을 받았다는 생각에 범한은 속으로 기뻤다. 비록 황실에서 추진하고 있는 혼사지만 미래 장인에게 허락을 받는다면 더욱 순조로울 터이니.
하지만 재상의 말에 담긴 뜻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 왔다. 재상이 동궁과 인연을 끊은 건 확실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2 황자의 편에 서는 것도 아니었다. 순간 범한은 백작가가 정왕부와 함께 2 황자를 도우려 한다는 소문이 난 상황에서 재상가와 혼인을 맺었으니 아버지의 마음이 복잡하겠다고 생각했다.
범한과 재상의 만남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임완아는 기회를 엿보다 황궁으로 들어갔다. 먼저 황태후의 마음을 얻은 그녀는 황제를 설득해 별궁을 나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임완아의 몸은 범한과 황궁 어의들이 조심스럽게 관리한 덕분에 많이 회복되어 있어 밖에 나갈 수 있는 상태였다. 소식을 들은 범한은 매우 기뻐하면서 다음 날 새벽부터 마차를 끌고 별궁 앞에서 기다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별궁 안이 시끌벅적해지더니 별궁 시위 몇 명이 밖으로 나왔다. 이후 보모의 인솔에 따라 여종들이 나왔고, 마지막으로 여종 사기의 부축을 받으며 임완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임완아는 말끔한 흰색 홑치마에 대나무로 만든 갈모를 쓰고 있었다. 갈모 아래 얇은 천이 붙어 있어 완전히 햇빛을 가려 줬다. 모자 아래 임완아의 표정에서 설렘과 기쁨이 묻어났다.
신난 범한이 다가가자 여종들이 긴장하며 마치 홍수와 맞서 싸우는 영웅들처럼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범한은 화난 표정으로 여종들을 노려봤다.
‘내가 연애 좀 하겠다는 데 방해를 해? 확! 설사약을 타서 먹여 버릴까 보다!’
노기등등한 표정으로 여종들을 노려보는 범한을 향해 임완아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여종 사기의 손을 있는 힘껏 꼬집었다. 사기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애써 막으며 속으로 ‘왜 내가 벌을 받아야 하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다가 임완아의 뜻을 이해하고는 범한에게 말했다.
“범 공자, 일단 마차 두 대로 가신 뒤 피서 장원에서 만나시죠.”
피서 장원은 황실에서 여름을 보내는 장원으로 경도에서 서쪽으로 2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만약 임완아가 오늘 나오지 않았다면 범한은 갈 수 없는 곳이었다.
범한은 아쉬운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혼인하기 전에 마차에 같이 탄다면 임완아가 수치스럽게 생각할 것이고, 보모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에 아무 말 없이 옆에 있는 범약약을 바라봤다. 범한의 생각을 알아챈 범약약이 웃으며 미래의 새언니가 될 임완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맞고는 다정히 황실 마차에 올라탔다.
“형님, 부마가 되는 거······ 정말 짜증 나는 일 같아요.”
범사철이 동정 어린 시선으로 범한을 바라봤다.
“가을이 빨리 됐으면 좋겠어. 그래도 누이가 같이 타고 있으니까 문제는 없겠지. 저 고지식한 보모들은 융통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으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어.”
해도 보이지 않는 새벽 어스름에 출발한 마차가 피서 장원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올라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황실에서 일찌감치 이런 문제를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연약한 황족들은 뜨거운 햇볕을 쬐는 걸 싫어해서인지 장원은 숲 깊숙한 곳에 있었다. 산을 등지고 있는 장원은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여 햇볕도 들어오지 않았고 바람도 시원했다. 게다가 앞에는 호수도 있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범한은 호숫가에 서서 경치를 감상했다.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던 그는 황족의 삶은 신하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고풍스럽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피서 장원에 들어갈 때 범약약이 무슨 말로 설득했는지는 몰라도 보모들은 전부 장원에 남아 차를 마시며 마작을 했고, 호숫가에는 젊은 사람들만 있었다. 시위들은 멀리 서 있었고 오랜만에 밖에 나온 여종들은 재잘거리며 즐거워했다. 호숫가에 방해하는 사람이 없자 범한은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모두가 멀리 떠난 뒤에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기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떠나자 호수에는 범한과 임완아만 남게 되었다.
“정말, 같이 있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범한은 한숨을 쉬며 오른손으로 임완아의 작고 부드러운 손을 잡았다. 손을 잡힌 임완아는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손을 빼지는 않았다.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여기서는 공손하게 행동하시네요. 매일 밤 예의 없이 창으로 들어오시던 분은 어디 가셨나 봐요?”
범한이 웃으며 반박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정혼자의 손바닥을 긁었다. 이전 세계에서 숫총각으로만 있다가 이번 세계에 와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니 참기가 힘들었다. 범한이 가깝게 다가오자 화들짝 놀란 임완아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비틀거렸다. 그러자 범한이 넉살맞게 웃었다.
“제 품에 기대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