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lf a penny from the Golden Tiger RAW novel - Chapter 76
다시 시작되는 인연 (3)
“벌모세수요?”
벌모세수는 보통 어릴 때, 신체를 무공을 익히기 알맞은 체질로 개선하는 거였다.
어떻게 보면 환골탈태와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묘하게 달랐다.
“벌모세수는 어릴 때 하는 것이 일반적이긴 하지만 나이가 들고 해도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깨달음을 얻은 상태에서의 벌모세수니 신체가 더욱 완벽해지지요.”
“…. 하지만 벌모세수를 하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제가 있잖아요.”
벌모세수는 환골탈태와 달리 혼자서 할 수 없었다.
“벌모세수를 천하봉선께서 직접···?”
“훗날 그대에게 도움받을 일이 있을 터이니 미리 빚을 지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지요.”
“그걸 그리 직설적으로 말씀하십니까?”
“제가 거짓을 쉬이 말하지 못하는 성격이라서요.”
천하봉선의 미소에 나도 저절로 미소가 입에 걸렸다.
“그렇게 하면 마기가 나올까요?”
“확실한 것은 모릅니다. 하지만 나올 공산이 크지요.”
“… 믿겠습니다. 천하봉선께서 하시는 일이니 다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은 없습니다. 나중에 곱절로 값을 받아낼 거니까요.”
“예. 물론입니다.”
신의로 불리는 천하봉선이 해주는 벌모세수라니.
이건 금호장 전체를 가져다 바쳐도 모자랄 만큼 값진 일이었다.
“약초를 비롯해 준비할 것이 있으니 이틀 후, 미시에 벌모세수를 하도록 하지요.”
“그리 알고 있겠습니다.”
천하봉선은 사월향과 준비한다고 갔고 나 홀로 앉아 있었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
그 구름이 자유로이 바람에 따라 흘러가는 것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으나 사부님이 다가왔다.
“앉아 있거라.”
“오셨습니까.”
“한 가지를 물어봐도 되겠느냐?”
“예, 말씀하십시오.”
“처음부터 궁금했다.”
저벅.
“그저 내 오해라고 생각했지만, 저놈의 수련을 봐주는 것을 보며 확신을 얻었다.”
저벅.
“네 놈의 몸에서 어찌 천무신공의 내공이 흐르는 것이며, 어찌 천무신검의 검결을 아는 것이냐.”
*
왜 이 질문을 안 하는가 했다.
사부님이라면 내 몸에 흐르는 기운이 천무신공이라고 진즉에 눈치를 챘을 테니까.
“천무신공은 일인 전승의 무공이다. 어떠한 기록도 없고 오로지 구결로만 전해지는 무공이지.”
어떻게 보면 무공을 훔쳐 배웠다고도 볼 수 있기에 사부님이 내 목을 취해도 할 말이 없었다.
솔직하게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거짓말을 해야 할까.
내가 회귀를 해서 안다고 하면 미친놈이라고 생각할 것이 뻔했다.
회귀라는 것이 말만 존재할 뿐, 그 누구도 현실에서 일어날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니까.
내가 말하는 것을 망설이고 있자 사부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답을 주지 않을 것이냐?”
“….”
“서책을 많이 본다고 저절로 배울 수 있는 무공이 아니다.”
나도 안다. 천무신공은 서책을 많이 본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 검을 잡은 뒤에 수많은 이들을 상대하고 배우며 평생을 바쳐서 만든 무공인 만큼 어디에서도 배우지 못한다. 너는 대체 어디서 이 무공을 배웠느냐.”
사부님의 두 눈은 답을 요구했다.
그러나 내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여러 가지의 대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졌고 그렇게 입을 열려고 하는 그때.
“하지만 뭐 훌륭하게 진전을 잇는다면 상관없기도 하다.”
내 귀에 들려오는 말은 뜻밖이었다.
“그게 그리 쉽게 바뀌어도 되는 겁니까?”
“그게 뭐?”
“어떻게 보면 제가 훔쳐 배운 거 아닙니까? 혼을 안 내시고···.”
“어차피 내가 만든 무공이니 내가 멋대로 한다고 누가 뭐라 하겠느냐.”
“….”
“네 놈이 사특한 마음으로 무공을 다뤘다면 내 너의 목을 베었겠으나 그게 아니라 마음이 놓이는구나.”
…. 그래, 사부님은 전부터 그랬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로운 존재.
그렇기에 천무신공이라는 무공도 만든 것이겠지.
“네가 어떤 방식으로 천무신공을 익혔는지는 더 묻지 않으마. 그리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나에게 말 못 할 일이 있는 거겠지.”
“…..”
“허나 천무신공의 길을 더럽힌다면 가차 없이 그 목을 벨 것임을 명심하거라.”
“예. 만일 천무신공을 더럽힌다면 제 손으로 자결하겠다고 이 검 앞에 맹세하겠습니다.”
검객이 검 앞에 맹세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다는 의미였다.
“후일에 네가 그 답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때 하거라, 그때까지 기다려주마.”
“… 예, 꼭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일이 모두 끝나면 그때 솔직하게 다 말씀드려야겠구나.
“한데 그거 말고도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분명히 천무신공은 내가 만든 무공이지만, 난 너에게 가르친 적이 없다. 그러나 너는 내 검을 아무렇지 않게 펼치지···. 이것이 사제 지간이라 할 수 있느냐?”
중요한 건 관계의 정립이었다.
강호에서 무학을 익히며 스승과 제자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였으니까.
허나.
우리는 약간 결이 달랐다.
펼치는 무학은 같았으나 한 번도 접점이 없었다.
이것을 스승과 제자라고 부르기에는 무언가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 제가 사부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난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내가 펼치는 검을 배운 것은 사부님이라는 것에 변함이 없었으니까.
이러한 말을 원했는지 사부님의 입가는 호선을 그렸다.
“그리하겠느냐?”
“예.”
어려운 것은 없었다.
저번 삶에서 무공을 배운 스승이기에.
“제자가 됨으로써 절을 올리겠습니다.”
“그리하거라.”
배사지례(拜師之禮).
제자가 된 이가 스승에게 올리는 절이었다.
척.
“송가 삼현은 유천님을 죽는 그 순간까지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천지신명께 맹세하옵니다.”
“나 유천은 송가 삼현을 제자로 맞이해 나의 모든 것을 전수해줄 것임을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저번 삶에 이어졌던 인연이 다시금 이어졌다.
*
사부님은 방긋 웃으며 걸음을 걸었다.
“뭐가 그리 좋으십니까?”
“그야 훌륭한 제자가 생겼으니 기쁜 것이 당연하지 아니겠느냐. 천유현의 무재도 뛰어나지만, 너의 무재는 하늘이 내린 것이니 이보다 큰 복은 없느니라.”
그렇게 우리는 연무장에 도착했다.
“천무신검을 어디까지 펼칠 수 있느냐.”
“대성했습니다.”
“대성이라.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화경에 들 수 없으니까.”
사부님은 이어서 말했다.
“천무신검의 묘리는 무엇이냐?”
“하늘은 본디 하나이니 초식을 모두 연계하면 하늘에 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답이 되었는지 미소를 짓던 사부님은 돌에 기대어 있던 목검을 들었다.
“옳은 답이다. 그러면 잠시 천무신검을 보여주마.”
스릉.
그러자 사부님의 검 주위에 모이는 무형의 기운.
“천무신공은 천 가지의 무를 보고 그것들의 장점을 하나로 엮어서 만든 것이다.”
사부님은 검을 잡고 첫 번째 초식을 출수할 준비를 마쳤다.
마치 앞에 적이 있는 것처럼 갑자기 주위를 휘감은 기운이 바뀌었다.
휙.
천무신검을 펼치기 시작했다.
간결하면서도 힘이 담긴 검법, 화려하면서도 확실한 한 수가 담겨 있었다.
‘… 역시.’
사부님은 나에게 천무신검이란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자 하는 거였다.
무학의 끝자락을 바라보는 지금, 사부님의 검은 저번 삶에서 봤던 것과 달랐다.
얼마만큼 아는가.
보이는 것이 달랐다.
그 시절의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이 보였다.
‘이것이 검신, 과연 천하제일을 다투는 검객의 검이구나.’
천무신검의 마지막 초식까지 끝낸 사부님은 검을 거뒀다.
“어떠냐?”
“감사합니다. 이리 검을 견식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배움을 얻었습니다.”
“한 가지 더 알려주자면 천무신검은 하나의 검법이 아니다.”
“….”
“천 개의 무가 합쳐져 만든 천 개의 검이지. 그러니 하나의 초식에도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여러 가지를 설명해준 사부님은 나에게 목검을 건네줬다.
“한 번 해보겠느냐?”
“예, 저의 검도 보여드리겠습니다.”
*
송삼현은 두 눈을 감고 목검에 내공을 흘렸다.
그러자 목검 주위에 내공이 푸른 연기가 되어 휘감았다.
‘푸른 연기?’
평생 검을 잡고 살았으나 저러한 형태의 검강은 처음 봤다.
‘저렇게 강대한 기운을 저런 식으로 통제하다니.’
유천은 송삼현이 휘두르는 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천무신검과 결은 같았지만, 뭔가 달랐다.
‘저 초식에서 저런 궤적으로?’
그렇게 마지막으로 검을 휘두른 뒤에 검을 거뒀다.
“미흡한 후학의 검을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네가 펼치는 검은 확실히 천무신검의 검결이다. 허나 어찌 네 번째 초식인 ‘경파(鯨波)’의 두 번째 동작에서 세 번째 동작을 하지 않고 네 번째로 곧장 넘어간 거지?”
“제가 알아낸 천무신검은 패도적인 기운을 품고 있긴 하지만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다른 장점?”
“변화에 용이하다는 겁니다.”
“변화?”
유천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송삼현을 바라봤다.
“계속해서 말해보거라.”
“경파에서 세 번째 동작은 두 번째 동작의 기운을 오히려 잡아먹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동작을 곧장 이어가면 두 번째 동작의 기운을 그대로 이어가 검에 실을 수 있지요.”
이러한 초식 연계는 송삼현이 저번 삶에서 찾아낸 방법이었다.
그 말을 들은 유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일각이 지나자 눈을 뜨고 웃었다.
“…. 그렇구나.”
유천은 천무신검을 만든 사람이니 오로지 천무신검을 완벽하게 만드는 데만 초점을 맞췄다.
이것에만 집중했다.
허나 강해지는 것만이 검의 모든 것이 아니었다.
‘자유로움.’
검에 의지를 담으려면 검은 자유로워야 했다.
휙!
송삼현의 말을 들은 유천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처음에 시범을 보였던 검과는 다른 정밀하고 빈틈이 없는 검로.
콰아아아아아앙!
물 흐르듯 이어지는 초식.
목검에서 나온 검강이 바위를 반으로 쪼갰고 유천은 목검을 잡은 손을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래, 천무신검을 더 완벽한 검으로 만들겠다는 욕심에 검이 가진 장점을 이끌지 못했구나. 검은 이토록 자유로운 것이거늘.’
그저 완벽해지려는 욕심 때문에 기본적인 것을 잊은 거였다.
그리고 그것을 송삼현이 펼치는 검을 보고 깨달았다.
평생을 바친 검법, 그 검법이 한 걸음 진보하게 됐다.
“축하드립니다. 깨달음을 얻으셨군요.”
“…. 너와의 만남이 이런 변화를 줄 줄은 몰랐구나.”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보답으로 너에게 비급을 하나 보여주마.”
“비급이요?”
“천무신검의 검결이 기록된 비급이다.”
그 말에 송삼현은 화들짝 놀랐다.
천무신검은 기록이 아닌 구결로 전해졌다.
저번 삶에서도 구결로만 배웠기에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비급이 존재했다는 것에 입을 벌렸다.
“정녕 천무신검의 비급이 있는 겁니까?”
“당연하지, 아무리 내가 만들었다곤 하지만 내가 죽으면 그 검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몰래 기록해두고 있었지. 내가 죽어도 다음으로 이어질 수 있게.”
“… 어째서 천유현에게는 알려주지 않으신 겁니까?”
“그 녀석은 봐도 모르니까, 만약 그 녀석이 나와 같은 수준에 오른다면 물려주겠지만, 그전에는 독이 된다.”
“독이요?”
송삼현의 물음에 유천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검에는 지름길이 없다. 비급을 보면 요령을 익히고 쉬운 길을 택할 거다. 그러니 그 녀석이 천무신공의 모든 것을 깨달았을 때, 보여주려고 했다.”
어정쩡하게 배운 상태에서 비급을 보여주는 건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이 유천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넌 다르다. 천무신공을 대성까지 이르고 화경의 끝자락에 올랐으니 비급을 보면 부족한 것이 보일 터,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너라면 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걸어서 도착한 곳.
‘서고(書庫)’
유천이 평생을 거쳐 모은 무학들이 있는 곳이었다.
“이쪽이다.”
수많은 무공서와 서책들이 즐비한 곳, 유천의 걸음은 그곳을 지나쳐 제일 안쪽에 있는 높은 책장 앞에 멈췄다.
그곳에 있는 책들을 순서대로 나열하자 ‘덜컥’ 거리는 소리와 책장이 옆으로 밀렸다.
“와.”
입에서 감탄이 나왔다.
방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기운.
그리고 그곳에는 빛나는 원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이 있었다.
“들어오거라. 나의 모든 것이 있는 곳이다.”
하늘에 오를 자
안에 있는 것은 내 키의 곱절은 되는 비석이었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여러 흔적들이 있었다.
남들이 보면 그냥 마구잡이로 돌을 베어 새긴 것처럼 보이지만, 내 눈에 하나의 검결이 또렷이 보였다.
“… 새겨진 검결은 천무신검이군요.”
“그것이 단번에 보이냐.”
회귀하고 얻은 능력으로 천무신검의 구결을 자주 봤기에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예, 근데 이 겉의 흔적들은 무엇입니까? 이 흔적들 때문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흔적들 안에 숨겨둔 거다. 혹시라도 악한 이들에게 천무신검의 검결이 흘러가는 걸 막으려고.”
그렇구나.
그러면 이해가 된다.
천무신검의 검결을 제외하고 마구잡이로 있는 흔적들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스윽.
검결을 하나하나 눈에 새겨넣었다.
‘땅에서 시작된 초식이 바람을 타 바다를 건너 하늘로 올라가 마침내 하늘을 베어버린다.’
천무신검의 묘리가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어떠냐. 검결에서 어색한 부분이 보이느냐?”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하더냐.”
“사부님. 혹, 이 서고 안의 서적을 읽어볼 수 있도록 허락해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다. 나의 제자가 되었으니 서고는 얼마든지 출입해도 된다.”
저번 삶에서도 이 서고에 있는 서책을 많이 읽었었다.
그 덕분에 내가 모르던 검법들도 알게 됐고.
그러니 이번에는 그때 못 읽었던 것들을 읽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을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묘한 끌림이 있구나.’
내 몸 안에 있던 천지굴의 기운이 스멀스멀 몸 밖으로 나오더니 비석을 스치며 지나갔다.
비석은 ‘우우우웅’ 소리를 냈다.
스르르르르륵.
그때, 비석에서 기운이 흘러나오며 앞에 형상화가 됐다.
검을 든 사람의 형태.
그 형태는 허공에 천무신검의 검결을 수놓기 시작했다.
‘이것도 나만 보이는 건가.’
슬쩍 옆을 보니 사부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
다음 날, 서고로 가려다가 사부님께 붙잡혀 조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를 나누며 조식을 거의 다 먹었을 때.
삐이이이익.
설아가 울음소리를 내며 사부님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침입자가 있구나.”
그 신호는 누군가가 봉호산에 입산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봉호산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을 들어왔다는 것은 무슨 의도를 가진 것이 분명했다.
‘혹시 흑사회가 나의 흔적을 찾은 건가?’
사부님과 산을 내려가 설아가 알려준 곳으로 갔는데 흑사회가 아닌 그리웠던 얼굴이 보였다.
“주인이시여.”
“오랜만이다.”
내가 있는 곳으로 무조가 찾아왔다.
“아는 이냐?”
사부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벗 중 한 명입니다. 무사히 있다고 서신을 보냈더니 이리 찾아온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그러면 대화를 나누고 오거라, 난 이만 올라가 보마.”
“예.”
사부님은 먼저 올라가고 난 무조와 근처에 있는 연못으로 갔다.
“얼마나 찾았는지 모릅니다. 서신을 받자마자 천룡폭포를 뛰쳐나와 오는 길입니다.”
“서신이 늦어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지금 선무정과 마훈도 주군을 찾으려고 애쓰는 중입니다.”
“그들에게도 서신을 보내놨다. 독곡에 머무르고 있으니 조만간 만나러 갈 것이다.”
무조는 그동안 알아낸 정보를 일일이 보고했다.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며 강호가 어떤 흐름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알려줬다.
용천회가 차지하고 있던 영향력을 무림맹이 서서히 가져오기 시작한다는 것.
강서성과 호남성에서 녹림채가 행패를 부리고 있다는 것.
진왕이 금호장으로 요양을 와 있다는 것.
그 중, 제일 큰 것은 흑사회였다.
“흑사회의 움직임이 운남쪽으로 집중되고 있습니다.”
“운남? 정확하게 어디?”
“곤명 쪽입니다. 그곳에 수색대를 파견해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곤명이라.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예측이 가는 게 없나?”
“곤명 근방에 흑사회가 침을 흘리며 가지고 싶은 것이 총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지?”
“첫 번째는 무령산입니다. 그 산은 희귀한 원석이 가득해 막대한 부를 얻을 수 있지요.”
무령산은 곤륜파가 관리하는 선산이었다.
그런 곳을 노리는 것은 곧 정면 전쟁을 뜻하니 그것은 아닐 거였다.
“두 번째는 창청호입니다.”
창청호는 곤명에서 남쪽으로 이틀 정도가 가면 있는 거대한 호수였다.
“수과신단(水菓神團)이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 그것은 공산이 있군, 흑사회가 군침을 흘릴 만해.”
“그리고 세 번째는 곤명과는 조금 거리가 있으나 보이 쪽, 광천혈마의 무덤입니다.”
그 말을 듣고 머리에 무언가가 세게 부딪친 느낌이 들었다.
“혈심경인가.”
광천혈마라는 단어가 들리자마자 혈심경으로 유추가 됐다.
추혼마공은 마을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고 하면 혈심경은 무림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시발점이 되는 무공서였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수십 년 동안 아무도 찾지 못했던 혈심경이 앞으로 팔 개월 후, 세상에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차지하기 위한 이들로 인해 작은 전쟁도 벌어진다.
“무조.”
“예, 하명하시지요.”
“난 당분간 이곳에서 무학을 더 갈고 닦을 생각이다.”
“얼마나 있을 생각이십니까?”
“반년 뒤, 다시 강호에 나갈 거다.”
천무신검을 보다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이곳에 있었기에 빨리 떠나긴 어려웠다
“그때까지 흑사회의 동선을 빠짐없이 알아내거라, 반년 뒤, 혈심경은 내가 회수해야 한다.”
“존명. 그러면 계속해서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
무조와 만나고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서고에서 서책을 읽고 있는데 서고로 사월향이 찾아왔다.
“시간이 됐습니다.”
“벌써 그리됐군요.”
“같이 가시지요.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천하봉선과 약조한 벌모세수를 하는 날이었다.
서고에서 나와 사월향의 뒤를 따라 돌길을 올라갔다.
“조모님이 하시는 벌모세수는 보통의 벌모세수와 다릅니다.”
“그런가요?”
“현 무림맹주님이 받으셨을 때는 초절정에서 바로 화경으로 오르셨다고 들었어요.”
벌모세수는 누군가가 하는 가에 따라서 그 효능이 천차만별이었다.
어릴 때 하는 거라면 누가 해도 어차피 몸에 탁기가 얼마 쌓이지 않아 괜찮지만, 무공을 익히고 어느 정도 고수가 되면 하는 이에 따라서 그 효능이 나뉜다고 들었다.
“제가 큰 행운을 얻었네요.”
그렇게 도착한 곳.
사부님이 천하봉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내가 도착한 것을 본 천하봉선이 나를 데리고 약재로 달인 물이 가득 담긴 통 앞으로 갔다.
“우선 약재탕으로 심신을 안정시킨 뒤에 벌모세수를 시작하겠습니다.”
“예.”
면포로 만들어진 옷으로 갈아입은 뒤, 약재탕 안으로 들어갔다.
약재의 향과 기운으로 머리가 맑아졌고 저절로 두 눈이 감겼다.
후우.
“호흡을 조절하면서 약재의 기운을 느끼세요.”
그렇게 약재 탕에 들어간 지 두 시진이나 흘렀고 그곳을 나오자 침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노폐물이 잘 나올 신체가 마련됐으니 본격적인 벌모세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제 겨우 시작 단계였다.
그리고 천하봉선은 긴 장침을 꺼냈다.
“인당혈에 시침하겠습니다.”
눈썹 사이에 있는 중앙 혈 자리였다.
점점 가까이 오는 장침.
침 주위에 따뜻한 기운이 모여들었다.
천하봉선의 내공이었다. 따뜻하면서도 정밀하게 통제하는 기운.
툭.
침이 닿는 것과 동시에 내 의식도 서서히 흐려졌다.
*
정신을 차린 내가 있는 곳은 거대한 바다 한 가운데였다.
난 그 위에서 마치 나무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이곳이 꿈인지 현실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호접몽(胡蝶夢).’
물아일체의 경지에 오른 것인가.
스윽.
자리에서 일어나 바다 위를 걸었다.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굳이 내공을 쓸 필요도 없이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내가 수면(水面) 위를 걷자 발에서 시작된 물결은 먼 곳까지 쭉쭉 뻗어갔다.
나가는 곳이 어디인지 알 길이 없었다.
망망대해(茫茫大海)였다.
푹.
그때.
푹, 푹, 푹, 푹, 푹, 푹.
무언가가 꽂히는 느낌이 들었다.
바늘인가.
가슴에서 시작된 통증은 곧 전체로 퍼져나갔다.
“크윽.”
통증이 심해졌다.
바늘이 꽂힌 몸에서는 검은 혈흔이 뚝뚝 떨어졌다.
스르르르륵.
바다로 퍼진 검은 혈흔은 거대한 바다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쏴아아아아아!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는 파도 소리였다.
바다 근처를 지났을 때, 들었던 소리와 흡사했다.
“이게 무슨···.”
잔잔했던 망망대해가 내가 뒤로 도니 폭풍이 부는 거친 바다로 변해 있었다.
금방이라도 나를 깊은 바다 아래로 밀어 넣어 사라지게 할 만큼 거칠게 요동쳤다.
응?
그때, 형상이 보였다.
거친 파도가 내가 지금까지 싸워온 이들로 변해 있었다.
그들의 형상을 한 파도가 나를 덮치려는 그때.
스륵.
오른손에서 무언가의 감각이 느껴졌다.
그것은 검이었다.
방금까지 아무것도 없던 세상에 검 한 자루가 내 손에 쥐어졌다.
그 검에 내공을 흘려 검강을 만든 뒤.
나를 덮쳐오는 파도를 향해 출수했다.
촤아아아아아악!
검을 하늘에서 아래로.
그저 흐름대로.
휘두르자 거친 파도는 반으로 나뉘며 수면 위로 사라졌고 다시 처음 봤던 그대로 잔잔한 망망대해로 변했다.
‘이 검은.’
내가 환골탈태를 할 때, 봤던 검이었다.
수많은 검 사이에서 홀로 빛나고 있던 검, 잡으려고 했지만, 잡지 못했던 그 검이 지금 내 손에 있었다.
화악!
검은 무형의 기운으로 변해 나를 집어삼켰다.
*
번쩍.
두 눈이 떠지자 내 몸에는 하반신에만 옷이 걸쳐져 있고 상체의 옷은 전부 벗겨져 있었다.
허억.
허억.
코에서는 악취가 맡아졌다.
몇 년 동안 썩은 시체가 풍기는 냄새 같았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보자 천하봉선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환골탈태를 한 몸이라 그런지 벌모세수의 효능이 아주 좋습니다. 몸에서 배출된 탁기도 그리 많지 않고요.”
“… 마기는요?”
“다 뽑혔습니다. 이제 송 공자의 몸을 괴롭히는 일은 없을 겁니다.”
천하봉선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그곳에는 엄청난 악취를 풍기는 검은 혈흔이 있었다.
“천하봉선님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마기가 뽑혀 나간 것도 나간 거지만, 몸 내부의 구조가 많은 것이 바뀌었다.
내공을 담는 그릇이 비상식적으로 커졌고 벌모세수의 과정에서 더 많은 내공이 그릇에 담겼다.
‘이것으로 내 몸의 내공이 세 갑절하고도 반이 넘었구나.’
무려 210년의 내공량이었다.
척.
“왜, 왜 그러십니까.”
천하봉선이 갑자기 나에게 예를 갖췄다.
“현경에 오른 걸 축하드려요. 입신을 넘어 하늘의 영역에 오르셨으니 저 같은 범인은 당연히 예를 갖춰야지요.”
몸에서 기운이 폭발할 것처럼 끓어 올랐다.
당장 배출해달라는 듯이 꿈틀거리더니 잠잠해졌다.
꽉.
‘내가 현경에 올랐다고···? 벌모세수 한 번에?’
저번 삶에서도 목표로 했으나 죽기 직전에 간신히 발을 걸쳐본 경지.
그 경지에 내가 올라왔다는 것인가.
믿기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말이 거짓처럼 들렸다.
허나 몸 전체에서 느껴지기 시작하는 기운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
‘한 번 해볼까.’
멀리 떨어진 목검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목검이 허공에 떠 올랐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움직이자 마치 한 마리의 새처럼 허공을 갈랐다.
휘이이이익!
이기어검(以氣馭劍)의 경지.
내가 드디어 이곳까지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