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lf Price Pawn Shop RAW novel - Chapter (17)
실화 (4)
“좋은 아침〜.”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사장님, 촬영은 잘 끝내셨습니 까‘?”
“어어, 별거 없었다.”
“별거 없었던 게 아닌 거 같던 데요.”
유성은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뉴스가 주르르륵이다.
“거기에 내 얼굴 나왔냐? 뭐만 하면 다 나야?”
“에이〜. 척 하면 딱 아닙니까. 이만한 사이즈로 일할 수 있는 분이 사장님 아니고야 누가 있습 니까?”
“아유, 됐어요. 가게는 별일 없 었지?”
“예, 별일 없었습니다.”
“저건 뭐야?”
소파가 있는 자리에 못 보던 병 풍이 하나 생겼다.
“제가 구해다 놨습니다.”
“웬걸?”
“요즘 부쩍 손님이 많아져서요. 사장님 쉬시기 불편할까 싶어서 가져다 놔 봤습니다. 치울까요?”
“아니야. 곰팡내 좀 날 것 같은 게 느낌 있네.”
태식은 가까이 가 병풍을 보았 다.
틀을 이루는 나무는 군데군데 옻칠이 깨지고 벗겨져 있었다.
한지는 누렇게 바랬고 먹으로 휘갈겨 쓴 글자도 색이 많이 빠 져 있었다.
“빵우야, 이거 비싼 거냐? 낙관 까지 있는 거 같은데.”
“비싼 거 아닙니다. 그, 인사동 에서 하나 받아 온 겁니다.”
“인사동?”
태식의 눈동자가 찌릿하다.
“아, 저, 그러니까 제가 따로 안 면 있는 형님에게서요. 인사동 쪽 쥐고 있는 형님입니다.”
“깡패?”
“에…… 그게 깡패이긴 한데, 저는 그래도 건달이라고 생각합 니다. 아주 정통이냐고 하면 그 건 아니겠지만서도, 그래도 칼침 놓고 그러는 양아치 계보는 아닙 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그래서, 인사 간 거냐?”
“예? 인사요?”
“그래, 인사. 너 맨날 건달은 인 사를 못 받으면 끝난 거니 어쩌 니 했잖아. 그러면 너도 인사를 다니겠지.”
태식이 물끄러미 쳐다본다.
방우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다 가 이내 아차 하며 손사래를 쳤 다.
“아휴, 아닙니다, 아닙니다. 저 이 병풍 억지로 사 온 거 아닙니 다. 정말 사장님 쉬시기 편하시 라고 고심에 고심을 해서 사 온 겁니다. 일부러 수훈 형님한테 좋은 걸로 골라 달라고 한 건데 요. 정말입니다.”
“야, 야, 숨넘어가겠다. 아니면 아닌 거지, 무슨 변명을-.”
“진짜 아닙니다, 사장님. 저 지 방우, 그렇게 좀생이 같은 비겁 한 거짓말 안 합니다. 야, 냥꾼 아! 뭐라고 좀 해 줘.”
“맞습니다, 사장님. 어제 방우가 먼저 손님도 많아졌는데 소파에 가림막 같은 거 설치하는 게 낫 지 않겠고 말했었습니다.”
“아휴, 알았다니까, 이 자식들 아. 조회나 하자.”
태식이 먼저 계단을 올랐다.
이젠 아침인데도 제법 햇볕이 따갑다.
“차광막이라도 쳐야겠어. 한여 름 되면 조회도 못 하겠네.”
“하는 김에 그냥 옥상정원으로 꾸미는 건 어떻습니까?”
“다 쓰러져 가는 건물에 뭘 또 돈을 발라. 그냥 파라솔이나 하 나 가져다 놓으면 되는 걸.”
“깡패가 의자 하나 부숴 먹었지 않습니까. 방우더러 다 고쳐 놓 으라고 하시죠.”
삭은 플라스틱 의자가 방우의 무게를 건지 못하고 제 소임을 다한 게 얼마 전이다.
사실 남은 것들도 먼저 간 녀석 을 따라가겠다며 끼긱끼긱 아우 성이다.
“그걸 왜 나한테 떠넘기냐. 네 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면서.”
“내가 해 놓으면 너는 올라와서 담배 안 피울 거냐? 그냥 한다고 하면 같이하는 거지, 뭘.”
“오〜 둘이 싸우려고?”
“아, 아닙니다. 전혀요. 싸울 리 가 없지 않습니까.”
“예, 사장님. 저희 싸울 일 없습 니다. 냥꾼이가 이렇게 시건방을 떨어도 저 도와준다고 하고 그랬
습니다.”
“도와줘? 뭘?”
“그, 조직 운영하는 것 있지 않 습니까.”
방우더러 전국 조직을 다 잡아 먹으라고 했다.
이현과 함께 돌면서 웬만한 곳 은 전부 털었다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쟁에서 승리한 것 밖에 안 된다.
전쟁에서의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복지의 안정화다.
이현이라는 막강한 전력까지 배 제되어 있는 상태에다가 철권파 와 의절까지 한 마당이니, 아무 리 철권파 2인자의 경력이 있다 고 한들 전국구 조직들을 손안에 쥐고 관리한다는 게 마냥 쉽지만 은 않을 것이다.
그 빈자리를 유성이 채워 주겠 다고 한 것이다.
“파하하, 유성이 너 깡패라면 아주 질겁하더니.”
“건달 일이라기보다는 직장 동 료 일이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래, 그러면 된 거다. 식구끼리 부족한 거 있으면 메꿔 주고 하면 좋잖아.”
시키지 않아도 그리했다는 게 퍽 기분이 좋았다.
“저, 사장님. 저 명함이 나왔습 니다.”
방우가 고급스러운 은색 명함을 내밀었다.
“BK 금융투자, 전무이사 스티 브 지. 이야, 스티브 이사님이 야‘?”
코디네이터 팀에서 파 준 것이
“예, 외국 이름이 있는 게 좋다 고 해서요.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너 영어 못하잖아. 영 어 이름 쓰면 더 의심받는 거 아 니야?”
“아, 그러니까 이게 속이지 않 고 가는 게 속이는 거라고 했습 니다. 검은 머리 외국인이란 콘 셉트인 겁니다.”
“아하하하. 뭐야, 그러니까 처음 부터 사기꾼인 걸 까고 들어간 다‘?”
“예, 어차피 그런 부류들은 편 법적으로 큰 수익을 내는 걸 더 좋아하니까 이게 나을 거라고 했 습니다.”
“듣고 보니까 그러네. 쓰레기 냄새를 풍겨야 파리가 꼬이지. 코디팀에서 기획을 잘 잡네.”
“듣고 있다 보면 저도 될 것 같 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 는 저도 제가 어떻게 엘리트 사 업가 흉내로 재벌 3세들을 속일 수 있을까 했는데,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엘리트 사업가인 척을 하는 사기꾼을 하면 되는 거지. 그래, 명함 나왔으면 이제 실전 일 거 아니냐. 언제부터 나가?”
“나가기는 그제부터 나갔습니 다. 그런 부류가 모이는 비밀 부 티크 같은 곳이 있는데, 거기 가 서 커피도 마시고 돈 냄새도 좀 풍기고 그러고 있습니다.”
태식은 맛깔나게 연기를 뿜었 다.
말마따나 이런 곰이 그런 빠꼼 이 여우들을 잘 속여 넘길 수 있 을까 했는데, 코디팀에서 정말 어울리는 기획을 잡아 준 셈이 다.
그냥 훈련받은 그 정도, 적당히 어설픈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 다.
뭔가 태는 내 보려고 하지만 어 딘지 부족한 티가 나는 그런 모 습.
그들이 얕잡고 방심하기 딱 좋 은 모습 아니겠나.
“어떻게, 잘 낚여?”
“일단 괜찮은 것 같긴 합니다. 제가 그래도 특형이 있지 않습니 까. 헌터들한테 아이템을 받아서 중국으로 밀매하는 걸로 돈을 번 다고 했습니다.”
“그거면 말할 게 많겠네, 아는 분야니까.”
“예. 그래도 이쪽은 그 사람들 보다는 아는 게 많아서 빈틈이 걸리진 않았습니다.”
“그래, 잘해 봐라. 그 자식들 전 부 다 똥개한테 접대받던 놈들이 다. 사정 봐줄 필요 없어.”
“예, 사장님. 알고 있습니다. 저 도 어쩔 수 없이 옆에 있어 봤는 데, 아주 개차반 같은 것들입니 다.”
“깡패야,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정도면 진짜 쓰레기들인가 보다?”
“아주 더럽게 놀더라고. 방석집 에서도 그렇게 놀면 쫓겨날 거 다.”
“방우, 비위 맞출 때 약은 같이 하면 안 된다.”
태식은 걱정스레 당부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정말 위험 한 약이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 들었습니다. 혹시 몰라서 해독제 도 먼저 먹고 들어갑니다.”
“그래, 고생 많다. 전날 과음하 면 좀 천천히 출근해. 너한테는 그것도 근무잖아.”
“그래도 어떻게 그럽니까. 죽더 라도 출근해서 죽겠습니다.”
“말은 하여간-. 그러면 그냥 아 예 3층에 들어와서 자든가.”
“예, 사장님. 너무 늦을 것 같으 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둘 다 수고 많다. 오늘 일은 별거 없지?”
“네, 없습니다. 차징 한 번 해 주시면 출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그래. 며칠 바빠서 차징을 신경 안 썼네. 바로 해 놓을게.”
태식은 기분 좋게 담뱃불을 튕 겨 끄곤 1층으로 내려갔다.
입고실에 아이템이 수북하다.
승주의 방엔 더 이상 놓을 자리 가 없어서 그 밖에까지 늘어져 있다.
태식은 차징할 아이템을 쭉 훑 었다. 특별히 손이 더 갈 만한 아이템은 없다. 간단히 차징을 진행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아직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이 다.
“승주 왔냐. 어째 오늘은 좀 일 찍 왔다?”
“오늘 원서 접수하고 왔어요!”
“원서 접수? 대학? 수시까진 한 참 남았잖아.”
“수시 모집 말고요. 저는 특형 능력자 특별 전형으로 넣었어 요.”
“요즘은 그런 것도 있어? 하기 야, 고급 인력인데 국가에서 관 리를 잘해야지. 어때, 잘될 거 같 아?”
“고작해야 원서만 넣은걸요.”
고작해야 원서만이라곤 하지만 표정은 아주 의기양양하다.
“원서 접수도 비빌 만한 곳에 넣는 거지. 커트라인 같은 게 있 을 거 아니야. 그거 보고 원서 넣는 거잖아.”
“헤헤, 네, 그렇긴 하죠. 국과심 에서 검사했는데, 게오르그 수치 랑 기본 능력 평가에서 1등급 나 왔어요. 특형 분류에서는 10종 특형 나왔고요.”
“1등급은 알겠는데, 10종은 뭐 야‘?”
“특형에 따라 분류되는 포지션 요. 공격 특화, 방어 특화 뭐 그 런 거 있잖아요.”
“그럼 10종은? 생산 특화야?”
“아니요. 규정 외요.”
승주는 씨익 웃었다. 아주 신나 죽겠다는 표정이다.
“좋은 건가 보다?”
“그럼요! 10종은 수많은 연구가 필요한 특형이란 인식이거든요. 국과심 연구원님에게 들었는데, 10종 분류 특형은 가산점이 진 짜 많이 붙는대요.”
“종류에 상관없이?”
“네. 연구 목적성 때문에 10종 특형 학생이 있는 대학으로 연구 비 지원이 엄청 많이 되나 봐 요.”
“이야- 그럼 대학은 거의 골라 가는 거겠네?”
“히히, 꼭 그렇지만은 않기도 하고요. 서울대는 아무리 10종이 라도 면접을 엄청 어렵게 본다고 해서요. 인성 평가가 정말 어렵
대요.”
“그래서 어디 넣었는데?”
“ 범우대학요.”
“거기만 넣었어?”
“네. 다른 곳은 안 넣었어요.”
범우대학은 실질적으로 대호 그 룹에서 운영하는 대학이다.
졸업생 중 대다수가 대호 그룹 계열사로 들어가고 대호 그룹 내 의 파벌에서도 서울대보다 강력 한 영향력을 가진 라인이기도 하 다.
태식은 승주가 그걸 알고 지원 했을까 싶었다.
“왜? 혹시 모르는데 다른 곳도 넣어 두지.”
“국과심의 연구원님이 그랬어 요. 범우대로 가라고요. 범우대가 대호에서 하는 거라서, 1학년부 터 심계과 교수님의 연구실 소속 이 되면 장학금에 연구 지원비까 지 받는다고 했어요.”
“그러게. 진짜 끝내주네.”
“히히, 이제 실기랑 면접 준비 에 더 집중해야 되거든요. 그래 서 말인데, 저 내일부터는 조금 더 일찍 오면 안 될까요?”
“ 얼마나?”
“가게 문 여실 때요. 저도 다른 삼촌분들 하는 것처럼 청소도 하 고 오픈 준비도 할게요. 부탁드 려요, 사장님.”
승주는 허리를 푹 숙였다. 책가 방이 뒷목을 타고 넘어올 정도 다.
“그럼 아주 학교에 안 가겠다는 건데?”
“선생님한테도 허락받았어요. 사실 학교에서는 특형 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별달리 없잖아 요. 다른 학교 학생들도 대부분 학교 수업 말고 과외를 받는대 요.”
“학교에서 허락받았다고 하면 뭐. 그래, 그렇게 해.”
“네, 사장님! 감사합니다!”
승주는 후다닥 1층으로 내려갔 다. 아직 점심시간이 안 되었으 니 사혁이 오려면 한참 남았다. 사혁이 없어도 혼자 할 것은 많 다.
책상에 앉은 승주의 등은 금세 잔뜩 굽었다.
책상에 놓인 아이템을 이리 살 피고 저리 살피고, 박음질을 뜯 어볼까, 매듭을 다시 묶어 볼까.
그 옆에 놓인 노트는 빼곡한 스 케치와 필기로 검게 물들어 간 다.
누군가가 몰입하고 있는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좋은 풍경이 되기 도 한다.
‘마빈이 딱 저랬었는데.’
마빈은 개인 연구실에 틀어박히 면 며칠이고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손으로 만지는 작업을 할 때도 그 옆에는 항상 노트와 펜이 있 었다.
이따금 책등이 터져 낱장이 흩 어질 때가 되어서야 겨우 다리를 펼까, 그렇지 않고서는 일어나는 일이 없었다.
무언가에 몰입하는 것, 그것도 재능이다. 무언가를 익힐 때 저 만한 재능이 없다.
태식은 아공간을 열어 마빈의 캐비닛을 꺼냈다.
구궁-. 소리와 잔진동을 느끼고 나서야 승주가 고개를 돌렸다.
“사장님?”
“와서 좀 봐라.”
태식이 캐비닛을 열어 줬다.
글자는 로아어로 쓰여 있으니 책등만 봐서는 뭐가 뭔지 알 수 있을 턱이 없다.
“아래 칸 먼저 보면 된다.”
“맨 아래 칸요?”
“얼추 그쯤. 칸마다 쭉 뽑아서 한번 봐 봐. 딱 보면 알아볼 거 다.”
“네, 사장님.”
승주는 맨 아래 칸에서부터 한 권씩 책을 뽑아 봤다.
“이건 비밀 암호문인 거죠?”
“문자 신경 쓰지 말고. 너는 혈 관사잖아. 그 책도 혈관사가 쓴 거니까 그림만 봐도 이해될 거 야.”
“정말요? 저 말고 혈관사가 또 있어요? 이게 전부 그 혈관사가 쓴 건가요?”
“너는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해 야지.”
“헤헤, 넵!”
승주는 혀를 빼물고는 빼 놓은 책들을 훑어봤다.
어느 것은 한 페이지에서 몇 분 씩 골몰하는가 하면 어떤 책은 첫 장만 딱 보고 덮어 두기도 했 다.
“어느 거 볼래?”
“여러 권 골라도 되는 건가요?” “아니. 너는 지금 넓고 얕게 보 는 것보다 좁고 깊게 보는 게 중 요하다. 한 권씩 확실히 떼고 넘 어가는 게 나아.”
“그러면……
승주는 고민 없이 가장 아래 칸 의 책을 골랐다.
가장 아래 칸은 기초 중의 기 초, 사실상 설계도라고 할 수도 없는 책들이 있다. 다크매터 도 식이 나오지도 않는, 흔하디흔한 아이템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 는 책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초보적 인 책. 승주는 그 책을 골랐다.
마빈이 태식의 분신의 돌잡이용 으로 만들었던 그림책을.
연지 ⑴
“저 이것부터 볼게요.”
“그거 너한테 도움 하나도 안 될 텐데?”
“그냥 빼놓는 게 싫어서요.”
“빼놓는 게 싫어?”
“네. 사장님이 이렇게 가지고 있을 정도면 정말정말 대단한 혈 관사님이 만든 거잖아요. 가장 기초적인 책부터 다 소화시키고 넘어갈 거예요. 이 책은 그림이 많고 암호문이 적잖아요. 보다 보면 암호도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르고요.”
“그래, 그래라. 대신 깨끗하 게…… 아니, 아니야. 필기도 하 고 그렇게 봐라.”
“아니에요. 깨끗하게 보고 그대 로 반납할게요. 감사합니다, 사장 님.”
“뭘. 네가 열심히 하니까 주는 거지.”
“그래도요. 감사합니다, 사장 님.”
“됐어, 인마. 지금까지 공부한 거 체크나 한번 하자.”
“네!”
승주는 지금 가장 공들여 손보 고 있는 아이템을 가져왔다.
심하게 손상된 군화였다.
“설명해 봐.”
“네, 이 군화는 다크매터를 받 으면 반발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 어요. 달리기를 할 때 한 번에 수 미터씩 달릴 수 있는 좋은 아 이템이라고 생각해요.”
승주가 혈관을 열었다. 이제 별 달리 어려운 기색도 없이 금방이 다.
“외관은 손상이 많이 되어 있지 만 혈관은 딱히 손상된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양호 해요. 여기에 제 나름의 목적에 맞게 튜닝을 해 보려고요.”
혈관에 변화를 주어 효과의 방 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이미 가르 쳐 주었다.
물론 한번 배웠다고 당장 습득 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만큼 승주가 열심히 노력했다 는 뜻이다.
“어떤 식으로?”
“일단 현재 상태는 큰 에너지를 받아서 큰 반발을 만드는 식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저는 이걸 작은 에너지에 작은 반발로 만들 려고 해요.”
승주는 혈관의 한 부분을 가리 켰다.
“그리고 여기가 핵심이에요. 작 은 에너지를 받는다곤 하지만 그 렇다고 해서 매번 다크매터를 주 입하고 있으면 피곤한 일이잖아 요.”
“그렇지. 그래서?”
“그래서 한 번에 큰 에너지를 넣어도 이 안에서 대류하면서 밖 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잡아 두 도록 했어요.”
고개를 주억거리는 태식의 입꼬 리가 자연스럽게 말려 올라가 있 다.
“그러면 한 번에 많은 에너지를 주입해서 지속적인 효과가 발현
되게 할 수 있잖아요.”
“좋아. 그럼 목적은 뭔데?”
“목적은 장거리 행군에 최적화 된 신발요. 발을 디딜 때마다 작 은 반발로 발을 계속 밀어 주도 록 하려고요. 헌터들은 헌팅을 할 때 오랫동안 걸어야 하잖아 요.”
“그런데 그 신발이 왜 그렇게 상한 곳이 많을까? 생각해 봤 어?”
“험하게 신어서 그런 거 아닌가 요? 오래, 험하게 신어서요.”
“반은 정답이네, 험하게가 나왔 으니, 앞코 부분을 봐. 스터드가 뜯겨 나간 자국이야.”
“아…… 전투용이란 말씀이신 거죠?”
“그래. 발 차기를 주로 구사하 는 헌터가 타격용 무기로 상용했 을 가능성이 커. 전직 태권도 선 수였다거나, 그럴 수 있잖아.”
“네, 그럴 수 있어요. 그럼 큰 반발은 멀리 뛰기 위한 게 아니 라 강력한 발 차기를 위한 거였 겠네요.”
“그렇겠지. 네 튜닝이 나쁘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튜닝은 본래 의 맥을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효율성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하 는 게 가장 효과가 좋아.”
“네……. 하지만 전에 가르쳐 주실 때는 성격을 완전 바꾸셔 서…….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 요.”
“그때는 이런 게 가능하다는 식 으로 알려 준 거고. 그런데 이런 건 내가 말 안 해도 알 텐데?”
승주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감으로 혈관을 보는 녀석이다.
그렇기에 튜닝의 결과물에 대한 느낌도 충분히 사전에 감지할 수 있다.
“보면 알 거 아니야. 네가 말한 것보다 기존의 특징을 살리는 쪽 이 더 예쁜 혈관을 가지게 된다 는 거.”
“네. 알, 알긴 아는데요……. 그 냥 이렇게 만들어 보고 싶어서 요……
말꼬리가 길게 늘어진다.
“왜? 이유가 있어?”
“그러니까요••••••. 그게, 저희 아 빠가 쓰면 좋을 것 같아서요 목소리가 아주 기어들어 간다.
“저, 그러니까요. 이걸 제가 그 냥 가져가겠다는 건 아니고요, 저번에 매니저님이 저한테도 물 품 판매 대금이 정산될 거라고 하셨거든요. 그 돈 들어오면 제 가 사 가려고 했어요. 전당포에 서 물건 파는 가격이 반값이라고 해서……. 그리고 저는 직원 할 인도 된다고 해서요.”
“뭘 그렇게 구구절절 꼬리를 붙 이냐. 아들이 아버지 선물해 드 리겠다는데 그거 책잡을까 봐?’’
“그, 그래도요. 사장님께서 이렇 게 전부 다 해 주셨는데 저는 이 런 거 가져갈 생각 먼저 하는 것 같아서요……. 죄송해요.”
하고많은 장비 중에 하필 왜 신 발이겠나.
다이브를 준비함이 아니다. 지 금 당장 쓰기 위함이다.
“됐다, 이 녀석아. 아버지 다리 는 어떤데? 걷기 많이 불편하 셔?”
“골반이 뒤틀렸다고 해서요. 조 금 쩔뚝거리세요. 오른발에 힘이 잘 전달이 안 돼서요.”
“그럼 이왕 하는 거 출력을 다 르게 먹여야지. 오른 신발에 더 강하게.”
태식이 전투화를 끌어왔다.
혈관을 이리저리 손본다.
승주는 눈을 부릅떠도 그 속도 를 쫓아가지 못할 정도다.
“자, 해석해 봐.”
“으으……”
가자미눈을 떠 가며 집중한다.
“이게, 그러니까. 그, 느낌적으 로 말하자면요, 오른발은 튀어 나가고 싶어 하는데 그걸 왼발이 붙잡고 있는 느낌이에요.”
태식은 또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그럼 이걸 신으면 오른발 출력이 높다고 해도 과하게 튀어 오르지 않겠네요?”
“그래. 걸음걸이 보조용이니까, 그 정도만 해도 쓰임에는 맞을 거다.”
“네, 감사해요. 정말 감사합니 다.”
“그거 그냥 가져가지 말고 해석 확실히 해서 가져가. 그래야 아 버지 몸에 딱 맞게 세팅해 드리 지.”
“네, 저 더 열심히 일할게요. 하 루에 아이템 열 개씩 뽑아 놓을 게요.”
“열 개씩은 무슨. 코피나 뽑지 마라.”
태식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아, 하는 생각에 다시 승주를 바라봤다.
스스로 생각해서 목적에 맞는 튜닝을 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시 민 영웅 지급용 아이템 제작을 온전히 맡겨도 될 법했다.
“승주야.”
“네, 사장님.”
“너에게 막중한 일을 맡겨야겠 다.”
“마, 막중한 임무요?”
“그래. 이 세상에 실존하는 영 웅들을 무장해 주는 일이지.” 태식은 승주에게 일반인 맞춤용 튜닝법을 세세하게 풀어서 설명 해 줬다.
변주는 가르칠 필요가 없다.
수학의 공식처럼, 절대 변하지 않는 맥만 확실하게 잡아 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할 것이다.
이미 튜닝을 홀로 진행할 정도 의 실력이니 문제없을 것이고,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도 탈 날 게 없다.
고쳐 나가면 되는 것이고 분명 성장할 것이니 말이다.
“네, 열심히 할게요. 정말 정말 열심히 할게요. 사장님께서 저한 테 이렇게 지원해 주신 거 아깝 지 않게, 진짜 열심히 할게요.”
의욕이 남다르니 구태여 새로운 동기부여는 필요가 없었다.
“감독님〜 바쁘세요?”
“연지야, 편집실까지 막 찾아오 면 어떻게 하냐. 그리고 당연히 바쁘지. 안 바쁠까 봐 물어?” 이 감독의 눈동자는 흰자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충혈되어 있 다.
레드불, 바카스, 커피. 이런 것 들은 기본이다.
이 감독은 지금 링거를 맞아 가 며 철야 작업을 하는 중이다.
“짜증 내지 말고요.”
“너니까 짜증만 내고 말지, 다 른 놈들 같았으면 쌍욕 박았어.”
“아후, 쩐내. 아무리 바빠도 세 수는 좀 하지.”
“그래서 왜? 짜증 나게 하지 말 고 빨리 용건만 말해.”
“지금쯤이면 필름이 나와야 되 니까요.”
“아, 회장님 심부름 온 거야?”
“네.”
연지는 큰 눈을 얇게 뜨며 배시 시 웃었다.
“연지야, 시간 조금만 더 줘라. 최종 편집 남았어.”
“그럼 지금 있는 거라도 주세 요. 된 부분 있으면 된 부분만 줘도 되고요. 그래도 러프하게라 도 한번 보여 드려야 재촬영을 할지 그냥 갈지 정할 거 아니에 요.”
“그, 그거야 그렇지. 연지야, 그 런데 재촬영은 안 돼. 진짜 죽어. 절대 일정 못 맞춰. 다음 주부터 는 예고편도 나간다고.”
“알았어요, 알았어. 내가 최대한 잘 이야기해 볼게요. 그러니까 빨리 필름 줘요.”
“알았다, USB에 넣어 줄게.”
연지는 그렇게 건네받은 USB를 들고 대호호텔로 향했다.
프런트에 선 연지는 포효하는 호랑이 홀로그램이 박힌 검은 카 드를 내밀었다.
대호 방계가족들에게 지급되는 카드다.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대 호호텔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 까요?”
“호텔 사장님 자리에 계신가 요?”
“그 부분은 비서실에 문의하여 야 합니다. 실례지만 귀빈분의 방문을 어떻게 전달드려야 할까 요?”
얼굴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리하 는 것은 이게 매뉴얼이기 때문이 다.
이린의 호텔이니 이린이 정한 매뉴얼이다. 그렇기에 연지는 이 과정을 다분히 존중한다.
“조카가 찾아왔다고 해 주세 요.”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통화는 짧았지만 기다리는 시간 은 제법 길었다.
연지는 인내심을 발휘하며 그 시간을 버텼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바로 안 내해 드리겠습니다.”
연지는 귀빈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장실로 올라갔다.
“어떤 용무로 찾아오셨는지요?” 프런트에서는 매뉴얼이지만 비 서실까지 이런 매뉴얼이 있진 않 았다.
제일 최근에 왔을 때까지만 해 도 말이다.
“깐깐하다〜.”
“죄송합니다. 사장님께서 항상 크런치 모드로 일정을 소화하시
는 탓에……
“조카가 이모 보러 왔어요.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한가요?”
“아닙니다. 일단 말씀드리겠습 니다.”
다른 사촌 오빠들의 사무실이었 다면 당장 문을 박차고 들어갔을 테지만 이린에겐 어림도 없다.
연지에게 이린은 닮고 싶은 롤 모델이자 넘어서고 싶은 우상이 다.
밉보이는 것도 싫고 지적받는 건 더 싫다.
연지는 이린이 그러는 것처럼 손가락을 튕기며 비서가 돌아오 길 기다렸다.
“예, 들어오시라고 하셨습니다.”
연지는 비서실을 가로질러 사장 실로 들어갔다.
“이모〜. 안녕하세요〜!”
“그래, 연지야. 웬일이야?”
이린은 다소 사무적으로 연지를 맞이했다.
다른 이유는 없다. 단지 피곤해 서 그렇다.
“어머머, 이모, 엄청 피곤해 보 여요.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 에요?”
“무리는- 일이잖아. 너도 네 일 할 때는 제법 치열하던데?”
“헤에-. 아닌 척하시면서도 다 보고 계셨군요.”
“그럼, 우리 연지인데.”
이린은 태블릿을 잠시 옆으로 밀어 두고 접객용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저 조금 서운했어요.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줄 줄 알고 기대했 단 말이에요.”
연지는 살랑거리며 이린의 팔짱 을 꼈다.
“아이구, 우리 연지도 20살이 넘었으면 이제 어른스럽게 해야 지.”
“피이- 이모도 참. 내가 아무한 테 이러나, 이모한테만 이러지.”
“오구구구, 그랬어요? 우리 연 지 까까 사 줘야겠네!”
이린이 연지의 볼을 꼬집었다. 싫은 내색 하나 없다. 연지의 눈 매가 초승달처럼 기운다. 연지는 이린에게 아양 떨길 좋 아했고 귀여움받는 건 더 좋아한 다.
“그럼 갈 때 케이크 하나 사 주 세요. 치즈 케이크.”
“그래, 그러자. 그래서 무슨 일 로 온 거야? 얼굴 보고 싶다고 온 건 아닐 테고.”
“얼굴 보고 싶다고 찾아오면 실 례잖아요, 이모 엄청 바쁜데. 이 거요, 편집본이 어느 정도 나와 서 일단 가지고 왔어요.”
연지가 챙겨 온 USB를 내밀었 다.
“분량이 꽤 많네?”
“보니까 한 80%는 된 것 같더 라고요. 일단 가편집이긴 한데 거의 최종본이긴 해요. 지적할 만한 거 있으면 지금 말해야 재 촬영이 가능할 거예요.”
“이 감독이 일부러 널 보낸 거 야?”
“아니요, 제가 먼저 눈치 빠르 게 움직인 거죠. 저번에도 콘티 다 나오고 나서 수정됐잖아요. 한발 빨리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래, 맞는 말이야. 안 그래도 나도 확인하려던 참이었는데, 잘 가져왔어.”
이린은 배속을 높여 영상을 돌 렸다.
“음-. 괜찮네, 너도 표정 좋다. 연기 많이 늘었구나.”
어째 어투가 건성이다.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다른 것에 더 정신이 팔려 있는 느낌이랄 까.
이린은 시간을 점프해 가며 영 상을 건너뛰었다. 금세 클라이맥 스 장면이다.
“이모, 여기서는 천천히 봐요. 영상미 진짜 좋아요.”
62인치 텔레비전 화면은 극장 스크린이 주는 광활함은 없지만 그보다 압도적인 선명도를 선사 했다.
“경쟁력이 있다. 확실히 실사라 그런가 사실감이 엄청나.”
“그죠? 저도 처음 보고 깜짝 놀 랐어요. 생각보다 정말 잘 나와 서. 얼굴에 빗줄기 때리는 장면 진짜 리얼하지 않아요?”
“후훗, 리얼이었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리얼하겠지.”
“꺄하하, 맞아요, 맞아요. 여기 선단 신도 끝내주죠? 파도에 넘 실거리는 장면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을 바라보 게 잡은 앵글로 화면 가득 쏟아 질 듯 파도와 함께 수십 척의 어 선이 들이닥친다.
주인공의 어선이 포위되고 수백 의 중국 어민들에게 위협받는 모 습은 표정 하나하나가 살아 있을 정도로 생생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중국인들은 전부 입 쪽만 클로즈업했네. 일 부러 이렇게 한 거라니?”
“그건 초상권 때문에 그렇게 한 거래요. 그런데 그게 더 낫지 않 아요? 더 기괴하고 무서운 분위 기가 나잖아요.”
“음…… 그래. 나쁘지 않네, 몰 입감이 있어.”
“여기서부터는 세트 촬영분이에 요.”
그렇게 둘러싸인 주인공 어선으 로 중국인들이 들이닥치고, 무차 별적인 폭력이 쏟아졌다.
그 와중에 연지는 상반신이 노 출되기까지 했다.
“연지야? 이거 설마 이 감독이 시켰니?”
피곤함이 가득했던 이린의 눈이 단번에 맹수의 눈으로 돌변했다.
연지는 그 애정이 좋아 히죽 웃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