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lf Price Pawn Shop RAW novel - Chapter (36)
그 탓에 빼곡했던 진열장이 수 확을 끝낸 당근밭 모양이지만, 태식은 별 신경 쓰지 않았다.
TV를 틀어 아침 드라마에 채널 을 맞춘다.
이젠 특별 편성 방송이 없으니 제대로 드라마가 나온다.
솔이 듬성듬성 빠진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쓰레기통을 정리한 다.
진열장에 걸레질을 할까 하다 별반 얼룩진 게 없으니 그냥 넘 어간다.
유성에게 배운 더치커피는 내려 먹기 귀찮으니 믹스커피로 퉁 친 다.
태식의 입맛에는 이거나 그거나 아무렴 상관없다. 담배가 주고 커피는 곁들임이니 말이다.
믹스커피 더블샷으로 잔을 채우 고 옥상에 오른다.
가스가 다 떨어져 가는 라이터 로 겨우 불을 붙이곤 옅은 숨으 로 연기를 내쉰다.
“날씨 좋네.”
하늘이 높고 맑다.
펑- 퍼버벙!
그 높고 맑은 하늘에 섬광이 펑 펑 터져 나온다.
“아침부터 기운들 넘치는구먼.”
대낮에 공짜 불꽃놀이를 보게 생겼다.
이제 서울 하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능력자들이 공중 전을 치르는 모습 말이다.
능력자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 어나다 보니, 관련 사건 사고를 수호단과 기존의 경찰 인력으로 전부 커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 능력자들에 게 일정 범위의 영공을 허용해 준 것이다.
대신 그 이외의 공간에서 사고 치는 자들은 이유 불문하고 심계 행이다.
당연히 잡음이 없을 수 없는 강 력한 조치였다만, 테러리스트가 대놓고 활동하는 시국이니 괜히 나서서 허튼 말을 부르짖는 자는 없었다.
이런 시스템이 나름 자리 잡고 나니 어떠한 방식으로든 하늘을 날지 못하는 자들은 자연스럽게 걸러지게 되고 능력자 영공에는 일정 수준 이상의 고위 능력자들 이 모여들게 되었다.
그 탓에 그 일대가 능력자들의 공원 같은 개념이 되었다고나 할 까.
모르긴 몰라도 그 주변에 푸드 트럭이며 망원경 파는 좌판이며 이것저것 많이 들어섰을 것이다.
“사장님, 일찍 나오셨네요. 오픈 준비가 되어 있길래 올라와 봤어 요.”
출근한 제니가 옥상으로 와 인 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오픈 준비는 무슨, 할 것도 없는데.”
“그럼 내려가 보겠습니다.”
“잠깐.”
태식은 돌아 내려가려던 제니를 불러왔다.
“하실 말씀 있어요?”
“가서 국장한테 거래 진행하자 고 전해. 차원이동 기술 알려 준 다고.”
제니는 눈을 껌뻑거렸다.
“지금 바로요?”
“응. 기술 이전해 주는 건 딱히 어렵지 않거든.”
기술 이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왜 하필 지금 타이밍이냐가 중요 하다. 제니로서는 가늠해 봐야 답을 내지 못한다.
“국장이랑은 전에 이야기해 둔 게 있으니까 어느 정도는 준비되 어 있을 거야. 실무진 섭외해서 한번 보자고 해.”
“예, 전달할게요.”
“그리고 DCA 요원들 다시 들 어오라고 해. 능력자가 너무 많 이 늘어나서 관리하기 힘들어 죽 겠어.”
태식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앓는 소리를 했다.
제니의 시선이 태식의 시선을 따라 저 하늘로 올라간다.
“DCA가 실질적인 제어 능력이 있을까요?”
“위험 인자 색출해서 마킹해 두 는 건 잘하잖아.”
“그거야…… 수행해야 할 임무 였으니까요.”
“지금도 필요하다고 여기면 되 잖아.”
제니의 입술이 꾹 다물어진다.
“왜? 안 돼?”
“그 부분은 동기부여의 영역인 것 같아요. 요원들의 마음에 어 떠한 자긍심이 고취되는 임무여 야 할 텐데요……
“그러게. 자기 나라를 위한 것 도 아니고 남의 나라 뒤치다꺼리 나 해 주는 건데, 자긍심이 생길 수 없지. 그러면 의욕도 없을 거 고.”
“상부와 합의된 명령이라고 한 다면 따르긴 하겠지만……. 능동 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느냐는 다 른 문제니까요. 불쾌하셨다면 죄 송해요. 솔직한 임무 수행 능력 을 말씀드리려는 의도였어요.”
그간 독단적인 임무 명령을 내 리며 들은 성화가 적지 않다. 제 니로서는 전하고 싶은 속내였다.
“불쾌하긴, 그게 당연한 건데.” 태식은 정말 불쾌함 한 톨 없는 웃는 얼굴이었다.
“DCA의 자긍심이 뭐야. 위기를 관리하는 요원으로서의 자긍심이 잖아. 그런 것과 딱 맞는 일감이 생길 거거든.”
태식은 자신의 상상을 환상으로 구체화시켜 제니에게 보여 줬다.
바다 위에 성조기와 오성홍기가 나부끼는 전함들이 대치하고 있 는 풍경이 길게 이어지고 그 사 이사이 DCA의 요원들이 암약 하는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계획을 생각하시는 건가요? 세계 대전이라도 준비하 시는 겁니까?”
제니는 두 눈 동그랗게 뜨며 물 었다. 적잖이 놀란 눈이다.
“무슨 소리야. 나처럼 전쟁 싫 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태식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제니는 태식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뭔가를 더 물어볼 분위 기는 아니었다.
입매는 웃고 있어도 그 눈동자 가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깊게 가라앉아 있는 탓이다.
“저 사람이 무슨 의도가 있는지 너무 꼬아서 생각하다 보면 오히 려 본인 생각이 꼬여. 그럴 것 같아서 직접 보여 주는 거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태식은 담뱃불 툭 튕겨 냈다.
“내려가자. 손님도 딱히 없는데 본부나 갔다가 와. 일 많으면 거 기서 퇴근해도 되고.”
태식은 제니를 내보냈다.
제니는 부모의 둥지를 떠나는 참새처럼 몇 번이고 뒤돌아보며 가게를 나섰다.
작은 일은 곧잘 하는데, 자신의 판단을 벗어나는 일을 앞에 두면 갈피를 잃는 모습이 쉽게 나온 다.
나이와 경험을 생각하면 그게 그렇게 큰 허물이라고 보진 않는 다.
그리고 처음부터 한 조직을 알 차게 휘어잡을 인재라고 여기고 곁에 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제니는 메신저 역할만 잘해 줘 도 충분하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출근한 승주가 고개를 꾸뻑 숙 였다.
볼이 홀쭉하다.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 야?”
“전혀요. 기운 넘치는데요.”
“쉬엄쉬엄해. 그러다 골병든다.”
“헤헤, 네.”
승주는 책가방을 내던지며 작업 실로 틀어 박혔다.
말한다고 통하지 않음을 안다.
일부러 어기는 게 아니라 몰입 을 통해 자연히 그리되는 것이 다.
요즘은 사혁도 할인 매장에 가 있는 통에 옆에서 페이스 조절을 해 주는 사람이 없다.
마감 시간을 넘겨서까지도 틀어 박혀서 나오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으니 볼이 홀쭉해질 법도 하 다.
“몰입도 과하면 병이다 이 녀석 아.”
태식은 작은 유리창 너머로 보 이는 승주의 등에 가벼운 핀잔 한마디 던져 주곤 피로 회복용 칵테일 몇 병 챙겨 놓았다.
이젠 차징 센터까지 전부 할인 매장으로 옮겨 버린 탓에 1층도 북적거리는 느낌이 없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가벽 허물 어서 전부 작업실로 줘도 되겠 네.”
태식은 빈 소리가 나는 가벽에 손을 튕겨 보곤 건물을 나섰다.
아침 일정을 소화하러 나갈 참 이다.
우선은 심계의 반달섬이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오늘은 여기 있네?”
“예. 헌터 인가가 나지 않은 능 력자들이 심계로 대거 입장하고 있는 문제가 있어서요. 사안 좀 살펴보려고 들어와 있었습니다.”
“심각해?”
“사람들이 유입되는 것 자체는 어차피 행정적인 문제라 제가 상 관할 바는 아닙니다만, 서로 간 의 충돌이 좀 심각한 편입니다.” “사람이 원래 그렇지. 돈이 들 어오면 쓰고 싶은 거고 검을 쥐 면 휘두르고 싶은 거고. 머리 아 프겠네.”
“그래도 이젠 수호단 구성이 어 느 정도 기틀이 잡혀서 잠깐 신 경 쓸 틈은 나옵니다.”
수호단의 조직 구성은 여러 행 정 실무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 다.
아무리 위상이 높았다 한들 고 작해야 50명도 안 되는 조직을 운영하던 유성이 수천, 수만 단 위 인력을 효율적으로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 실무 행정 관들 덕분이었다.
“여기는 어떻게 하려고?”
“일단 머리 굴려 보고 있습니 다. 수호단 중 일부를 빼서 관리 를 할까 싶기도 하고요.”
“그러지 말고 수호단 실무자분 들 도움 받아. 일 잘한다며.”
“일 잘하는 거야 두말할 것도 없죠. 이번에 공무원들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달까요. 그런데 일반인을 데리고 들어와 도 되겠습니까?”
“위험해서? 승주한테 심계복 우 선 몇 벌 빼 달라고 해. 그 녀석 이해가 완전히 끝났어. 게오르그 방호 기능만 넣는 건 금방 할 거 야.”
“아니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심계는 헌터들의 영역이지 않습 니까.”
유성의 시선이 태식에게 고정된 다.
태식은 그 말이 자신에게 하는 것임을 느꼈다.
“내가 그랬다는 거야?”
“그……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진 않았지만, 이곳은 밖의 세계와는 다른 야생이라고……
“그건 짐승 같은 놈들만 뛰어다 닐 때 이야기지. 이미 상황이 바 뀌었잖아. 제대로 된 행정력이 투입되어야 할 정도로 인구가 늘 어날 거고……
태식의 시선이 큰 창밖의 너른 풍경을 향한다.
태식에겐 별것 없는 풍경이지만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겐 젖과 꿀 이 흐르는 상상의 땅처럼 여겨질 것이다.
“앞으로 더 바뀔 거다. 소화도 못 하는 거 손에 쥐고만 있으려 고 하니까 도둑놈 걱정에 강도질 걱정에. 어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식은 이번 중국과의 협상 내 용과 레드 캐슬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이어 줬다.
유성은 태식의 말을 끊지 않고 경청했지만 멍해진 눈동자를 보 니 이해가 따라가지 못하는 눈치 였다.
“너 지금 내가 하는 말 이해하 고 있냐?”
“예, 예. 이해는 다 했습니다. 중국 자본을 끌어들여서 그걸로 내수를 살리겠다는……
“그래, 그리고 거기에 미국까지 엮어서 대응시킬 거거든.”
“그렇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저는 뭘 할까요?”
“이젠 그냥 생각하길 포기하고 시키는 것만 하려고?”
“이미 제가 뭐라 참견할 범위가 아닌 것 같아서요.”
사고 현장에 달려가 문제를 중 재하는 것은 할 만했는데, 갖은 정부 부처와 행정장들 사이에서 정치적인 줄다리기를 하는 게 정 말 적성이 아니구나 여겼던 유성 이었다.
그런데 거대한 국가 두 개를 판 위에 놓고 장기 말 다루듯 한다 고 하니 맥이 쭉 빠지는 느낌이 다.
“그래도 알아야지. 네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데.”
“말씀 주십시오. 준비할 건 열 심히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일단 듣기라도 해라. 중 국에서 한 약속은 실상 돈이 들 어오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잖아.”
“아, 예. 맞습니다. 저도 그게 될까 싶었습니다. 억 단위도 아 니고 조 단위 돈을 과연 먼저 내 놓을까 싶었거든요.”
“그렇지. 그래서 나는 심계에 대한 출입권을 내 줄 생각이야.”
“중국 놈들에게요?”
“그래.”
“사, 사장님……
“아닌 거 같아?”
“예. 심계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지켜 온 우리의 땅이지 않습니 까.”
“그런데 구멍 숭숭 뚫려 있었잖 아. 시료도 언더 마켓으로 다 빼 가고 헌터 영입도 신나게 하고. 안 그래? 그러느니 눈에 보이는 곳으로 끌어와서 제대로 관리를 하는 게 맞아.”
“그런 의미라면…… 그럼에도 못마땅한 눈치다. 방 우라면 무작정 알겠습니다 할 텐 데 말이다.
그래서 이 임무에는 유성이 어 울린다.
“그리고 미국한테도 출입권을 열어 줄 생각이거든.”
“미국에도요? 그럼 심계가…… 난장판이 되지 않을까요?”
“왜? 중심 잡을 자신 없어?”
태식은 웃음기를 거두고 맥을 찌르는 질문을 던졌다.
약간 멍했던 유성의 눈빛이 단 번에 또렷이 제 색을 찾았다.
“아닙니다. 이미 판을 다 깔아 주셨는데요. 충분히 지킬 수 있 습니다.”
“그래. 바깥일하고 같이하려니 힘에 부칠 거 알아. 많이 힘들면 무리할 것 없이 심계의 불문율만 확실히 유지해. 그렇게만 해도 자기들끼리 알아서 박 터지게 싸 울 테니까.”
“어부지리를 노리라는 말씀이신 거죠?”
“이제 좀 이해하네.”
“알겠습니다. 사혁이랑 다시 한 번 상의해서 계획해 보겠습니다. 조직 운영에 대한 건 사혁이가 저보다 낫거든요.”
“너무 부담스러워 할 것 없고. 안 되면 다 거들어 줄 테니까.”
“예, 사장님. 그런데 이번 임무 는 교도소 쪽과는 따로 가는 것 입니까?”
“따로 가야지. 범죄자한테 왜 치안 유지를 맡겨. 걔는 그림자 밖을 나오면 안 되는 놈이야.”
“아, 예.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 쪽은 상정하지 않고 계획을 짜겠 습니다.”
“그리고 장 팀장 조만간 복귀할 거야, 같이 움직여. 연기도 잘하 고 중국어도 잘해. 도움될 거다.”
“예, 알겠습니다.”
태식은 유성의 어깨를 툭 쳐 주 곤 홀리 랜드로 이동했다.
사신의 형상이 있는 사령탑보다 도 선명한 붉은색이 눈길을 확 사로잡는다.
너른 바다 위에 붉은 꽃잎을 뿌 려 놓은 것 같은 형상이다.
그 꽃잎을 가상의 선으로 연결 하면 숫자 8자가 나온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기획서만 그럴듯하게 꾸민 게 아니다.
이쯤이면 시공이 들어갔다고 봐 도 좋을 정도의 초석이다.
그러니 투자자들에게 투자금을 받아 내야 하지 않겠나.
“허풍인지 아닌지 한번 보자 고.”
태식은 장수영을 불러냈다.
물 수밖에 없는 미끼 (1)
“강 형?”
불려나온 장수영의 표정에 당황 스러움과 불안함, 불쾌함이 뒤섞 여 있다.
태식은 장수영의 그 초조한 표 정이 마음에 들어 웃음이 나왔 다.
“왜? 동생이 빨리 보고 싶어 좀 불렀는데, 그게 그렇게 기분 상 하나?”
태식은 의식으로 대화를 전달했 다.
장수영은 목덜미의 식은땀을 홈 쳐 내더니 이내 호탕함을 끌어 냈다.
“아하하. 아니오, 대형이 보자고 하면 동생은 네 발로 뛰어와야지 요!”
“봐 봐, 어때? 동생을 위해 나 름 신경을 좀 써 봤는데.”
태식은 하늘 다리처럼 너울거리 는 붉은 꽃의 길을 가리켰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300조가 어디 쉬운 돈인가. 500조가 뉘 집 개 이름이고. 아 무리 형이라도 성의는 보여야 지.”
태식은 파하하하 웃으며 장수영 의 어깨를 끌어 왔다.
“동생이 그리 믿어 주니 내가 어떻게 안 기쁘겠어.”
태식은 어둠을 뿌리며 연계 마 법진을 발동시켰다.
홀리 랜드를 중심으로 붉은 꽃 길을 연결하는 섬들이 큰 파도를 일으키며 치솟아 올랐다.
장수영은 그 광경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이게…… 이것이 인간이 가능 한 일인가……
“당연히 불가능한 경지지.”
태식은 피식 웃었다.
지금 보여 주는 것과 일전에 홀 리 랜드를 솟아올리며 보인 것이 다르지 않다.
장수영도 그것을 봤을 것인데 그럼에도 같은 것에 이리 놀라는 것은 일전의 모습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어떠한 트릭이라 여기며 과소평 가했을 것임이 뻔히 보인다.
“내가 인간인 줄 알고 있었나 봐. 편히 대해 줘서 그런가?”
“이, 인간이 아니란……
태식은 장수영을 어둠으로 휘감 아 심연 깊이 밀어 넣었다.
딱히 위해를 가하려는 것은 아 니다.
좋은 앞잡이이자 미끼가 될 존 재인데 박하게 대할 수야 없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데, 한번 보긴 봐야지.”
태식은 장수영의 기억을 열었 다. 기억을 헤집을 필요는 없다. 가장 최근의 것, 그러니까 자신 을 만나고 돌아간 다음의 기억만 보면 된다.
화려한 실내에 여럿의 인사가 모여 있다.
그들은 담배와 차를 옆에 두고 대담을 늘어놨다.
‘직접 대면하니 어떻습니까?’
‘거창한 대의를 가진 인물은 아 닌 것 같았습니다. 액수만 다를 뿐 돈에 혹하는 건 똑같더군요.’
‘하하하,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 고 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쉽게 보아서도 안 될 겁니다. 상대는 초인입니다.’
‘능력이 초인이라 한들 배포가 소인인데 어찌 초인 같은 일을 할까. 내가 그만한 힘을 가졌으 면 나는 패왕이 되어 중화를 만 방에 떨쳤을 것이오.’
‘하기야, 그만한 능력이면 돈에 묶일 게 무엇인가. 거둬들이면 되는 거지. 여하튼, 우리 입장에 서는 손쉽게 되었군요.’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한국 정부에 상당한 불만이 있는 인물 같아 보였습니다. 모쪼록 한국을 길들이는 조련사로 잘 대우하고, 가능하다면 미국을 물어뜯을 사 냥개로 키워도 좋다고 봅니다.’
‘냉철하게 봐서 그자가 미국과 척을 지며 싸울 것까진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와도 거래를 하는 데, 구태여 미국과 싸울까. 미국 과도 거래를 하려 하지 싶은데 요.’
‘그건 그럴 수도 있겠군. 이간질 을 해 싸움을 붙이면 어떻겠습니 까?’
‘그건 차차 봅시다. 친구의 적은 나에게도 적이니, 깊은 우호를 다지면 자연스레 함께 싸워 주지 않겠습니까.’
‘좋습니다. 그러면 우호를 다지 는 겸해서, 그놈을 잡아들이는 건 어떻습니까?’
‘어떤 놈요?’
‘대호와 손을 잡고 서해에서 장 난질을 하는 놈 있지 않습니까.’
‘정찰 드론을 훔쳐 간 그놈 말 이죠?’
‘예, 그놈 말입니다. 거기에 대 호까지 함께 묶어서 공작을 하자 고 하면 좋아하지 않겠어요? 우 리는 기술을 가지고 그자는 알맹 이를 가져간다고 하면 거절하지 않을 거라 봅니다.’
‘그쯤이면 좋군요. 첫 거래로 우 호를 다지기에 모자람이 없습니 다. 그러면 나도 월병을 좀 준비 해 놔야겠습니다.’ 태식은 기억 읽기를 끝냈다.
역시나 동상이몽이다.
“내가 괜한 염려를 했네. 혹시 라도 의협 같은 게 있으면 어쩌 나 했는데 말이지.”
태식이 손가락을 튕겼다.
마몬이 휘리릭 날아 그 손 위에 착지했다.
“부르셨나이까, 령주시여.”
“이놈 좀 먹어라.”
“잘 영근 이즘입니다. 이런 호 사를 누리게 해 주시어 감사합니 다.”
배가 고픈 마몬은 냉큼 장수영 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때?”
“아주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합일이 잘 맞냐니까 딴소리 야.”
태식이 장수영의 귀를 잡아 당 겼다.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아앗 하 는 신음이 마몬의 것이다.
“예, 잘 맞습니다.”
“기억도 다 읽혀지고?”
“예.”
“그럼 당분간 그 안에서 좀 놀 고 있어라.”
“제가 숙주로 삼아 전부 흡수하 여도 되는 것입니까? 그게 아니 라면 일정 순간 이후엔 연을 잘 라 내야 합니다.”
그때 가서 연결을 끊어 내면 어 차피 빈껍데기만 남는 몸이 된 다.
효용가치가 사라짐은 마찬가지 다.
“그 안에서 전부 흡수해도 된 다. 단, 시간은 좀 들여라. 할 거 많으니까.”
“알겠습니다. 령주께서 주신 소 중한 하사품이니 아끼고 또 아껴 먹겠습니다.”
“일에 대한 보수이니 감사는 됐 다. 넘어가자.”
태식은 마몬의 기억을 타고 장 수영의 관저로 이동했다.
그야말로 휘황찬란하다.
창문 하나부터도 장인의 예술혼 이 들어간 작품이다.
따로 마감을 하지 않은 원목의 느낌이 전혀 투박하거나 촌스럽 지 않고 고풍스럽기 그지없다.
꽃 한 송이 없는 실내임에도 국 화꽃 만개한 들판에 있는 느낌이 랄까.
“돼지 목에 진주라고 해야 되 나. 좋긴 좋네. 하기야, 머릿수가 그리 많은데 장인이라고 그 수가 적을까.”
그 장인도 이렇게 꾸며 놓고 살 까 싶다. 태식은 이 방을 꾸민 이름 모를 장인의 노고와 실력에 심심한 찬사를 보냈다.
“강 형, 제가 준비한 작은 선물 입니다.”
마몬이 말했다. 따로 말하지 않 아도 역할에 제대로 몰입 중이 다.
“그래, 동생이 무슨 선물을 준 비했나 보자고.”
태식은 그가 내민 쇼핑백을 열 어 봤다.
붉은 색상의 월병 박스가 나온 다.
어째 일반적으로 알던 것보다 심하게 두툼하다.
“앙꼬가 아주 실하구만.”
그 속에 단단히 뭉쳐 말아 둔 달러 뭉치가 나왔다.
“이런 거 받아 보니까 기분 좀 나는구만.”
태식은 파하하하 웃었다.
“어이, 동생. 그럼 간다. 니 친 구들하고도 밥 한번 먹어야겠으 니까 자리 좀 마련해 봐.”
“좋습니다, 좋지요. 그럼 살펴 가십시오. 멀리는 안 나갑니다.”
태식은 양손 무겁게 쇼핑백을 들고 가게로 돌아왔다.
빈 가게는 손님이 다녀간 흔적 이 없었다.
“이제 겨우 점심이네.”
태식은 챙겨 온 쇼핑백은 대충 던져두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승주는 아침에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고개를 수그린 채 몰입 중이었다.
태식은 내색하지 않고 거리로 나갔다.
아침에는 가게 주인들 빼곤 사 람 한 명 없더니, 그래도 점심이 라고 몇 명 돌아다니긴 한다. 그 런데 그래 봐야 다른 상가 건물 의 직원들이다.
태식은 주머니에 손 푹 꽂아 넣 고 할매국밥집으로 갔다.
“할매, 나 왔어요!”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얼 굴 까먹겠네.”
“일이 바빠서一.”
태식은 히죽 웃는 낯으로 너스 레를 떨었다.
통닭집의 젊은 사장들의 얼굴에 그늘이 진 것에 비하면 할머니의 표정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 다.
“몸은 좀 어때요? 몸에서 열나 고 그런 거 없어요?”
“열? 열이야 항상 있지.”
태식은 혹시나 하여 할머니의 몸 상태를 살폈다. 아직 특이 사 항은 없어 보였다.
“많이 피곤하고 열난다 싶으면 바로 병원 가 봐요. 요즘에 게오 르그 파동이 심해져서 난리잖아 요.”
“이 나이에 병원은 무슨. 살 명 이면 사는 거고 죽을 명이면 가 는 게지. 자, 어여 묵어.”
할머니는 언제나 그렇듯 고기가 수북이 쌓인 국밥을 내줬다.
“장사는 좀 괜찮아요? 사람들 잘 안 돌아다니는데.”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게지. 나 야 죽을 날 보고 산다지만 총각 은 어뗘? 괜찮어? 요즘은 같이 오던 총각들도 안 보이고. 직원 들도 줄인 게지?”
“걔들은 더 잘되는 곳으로 보냈 어요.”
“이런 난리 통에 어디가 장사가 잘된다고 그려?”
“다 자기 적성 찾아가는 거죠. 일할 곳이 어디 여기뿐인가요.”
태식은 별 대수롭지 않게 둘러 친 것인데 듣는 할머니의 입장에 선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으이그-. 신경 쓰지 말아. 세 상 사는 게 원래 그런 게야. 혼 자 와서 혼자 가는 게 세상이여. 가는 놈이 있으면 오는 놈도 있 는 게지.”
태식은 파하하하 웃었다.
괜한 말을 해 놔서 방우든 유성 이든 나중에 오면 국밥을 못 먹 지 싶을까 해서 말이다.
“잘 먹었어요.”
태식은 돈통에 5만 원권을 넣었 다.
점심을 먹는 내내 옆자리에 아 무도 앉지 않은 게 영 신경 쓰인 탓이다.
“잘 먹었어요. 간만에 먹으니까 더 맛있네.”
“이거 가져가.” 점주 할머니가 주름살 많은 손 으로 바카스 병을 건넸다.
“할머니 드시지.”
“기운 차리라고 주는 거여. 그 래야 일 잘해서 직원도 많이 쓰 고 많이 팔아 줄 거 아냐.”
“아하하. 알았어요, 기운 차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