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105)
거대한 계획
다크니스 길드의 관리 하에 놓인 데모니아 협곡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와 같았다.
고작 몇 개월 만에 길드의 규모가 두 배로 커진 것이 그 증거.
하지만 길드장 엑스라지는 여태까지 거둔 수확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이 땅을 현에게 빼앗기지 않은 건 천운이었어.’
아스리안의 세계에선 어디서든 NPC들이 간섭해 온다.
겨우겨우 NPC가 없는 장소를 찾아내면, 그곳엔 강력한 몬스터들이 시도 때도 없이 출현했다.
유저가 마음 놓고 차지할 수 있는 땅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데모니아 협곡은 그 모든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땅.
현실의 기업들이 터전을 갖출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이제부터 시작이겠군.’
엑스라지는 페스티벌 날부터 아스리안의 변화를 예측하고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날이 갈수록 현실과 아스리안의 경계는 희미해졌고 이젠 두 세계가 뒤섞이기 직전의 상황에 도달했다.
전 세계의 관심이 아스리안에 집중되는 순간!
엑스라지는 곧 산업혁명에 버금가는 무언가가 아스리안에서 벌어질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 때가 되면 이 땅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상승하리라.
어쩌면 이 세상의 왕으로 군림하는 것마저 가능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말이다.
비서의 보고가 올라온 것은 그렇게 엑스라지가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때였다.
“저… 길드장님.”
“뭔가요?”
“네글에서 미팅을 취소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아직 공식적인 답변은 받지 못했지만, 네글이 재계약에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엑스라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글은 몇 달 전부터 계약을 연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나? 왜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꾼단 말인가?
하지만 비서의 보고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에스타는, 직접 계약해지 통보를 보내왔습니다.”
“에스타도…?”
“예. 데모니아 협곡에 주기적으로 내려앉는 안개 때문에 실험 샘플이 자꾸만 변형된다는군요.”
비서의 보고에 엑스라지는 신음을 흘렸다.
“그 이유는 납득할 수 없군요. 에스타가 부지를 원하는 건 연구가 목적이 아닐 텐데요.”
“제 생각도 똑같습니다. 아마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닐지….”
두 군데 기업이 계약을 포기했다.
여러 곳을 경쟁시킬수록 유리해지는 다크니스로서는 탐탁지 않은 상황.
‘아냐, 다시 생각해도 말이 안 돼. 이 상황에 계약해지를 한다는 건….’
무엇보다 기업들의 판단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들은 행동은 뜸을 다 들인 밥을 먹기 직전 숟가락을 놓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치킨이 배달 온 게 아닌 이상 그럴 순 없는데.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엑스라지의 뇌리에 불안감이 스쳤다.
동생이 몰래 치킨을 주문했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처럼, 기업들의 사정이 한순간에 변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렇다면 한시라고 빨리 원인을 찾아내야만 했다.
“길드장님 보고입니다.”
비서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엑스라지의 상념을 끊었다.
그의 불안이 한층 커졌다.
설마 계약을 해지한 곳이 더 있는 건가?
“또 무슨 일이죠?”
“지금 수상한 자가 데모니아 협곡에 들어오겠다며 난리를 피우고 있습니다.”
휴, 엑스라지는 안도했다.
다행히 계약해지 소식은 아니군.
침입자 따위는 별 문제도 아니다.
데모니아 협곡을 빼앗으려는 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 누구도 다크니스의 굳건한 방어를 뚫진 못했다.
기업들간의 계약 조건을 유리하게 잡을 수 있던 것도 다크니스 길드가 압도적인 전력을 지니고 있는 덕분이었다.
“몇 명이죠?”
“한 명입니다.”
“잠깐, 한 명이라면? 설마….”
하지만 다시, 엑스라지의 눈이 다급해졌다.
혼자 요새에 침입해 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발상.
하지만 그 황당한 일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저가 존재했다.
“일단 현은 아닙니다. 모르는 여자였습니다.”
엑스라지의 걱정을 눈치 챈 비서가 말했다.
“여자요…? 아인은 아니겠죠?”
“네.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걸 보면 상위 랭커에 속한 것 같지도 않아요. 허가증도 없으면서 협곡에 들어오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상황이라….”
비서는 사건이 일어난 장소의 영상을 띄웠다.
그곳엔 사제 복장의 여자 한 명이 다크니스 경비 유저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고, 주위의 분위기는 점점 흉흉해지고 있었다.
‘응…?’
엑스라지의 동공이 점점 확장되었다.
왠지 그녀의 얼굴이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했기에.
그의 숨이 멎은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잠깐, 지금 저 사람 멈춰요!”
“네…?”
“그냥 들여보내요, 당장!”
여자의 정체는 지니.
현, 아인을 제외하고 밝혀진 유일한 쉐이드 길드원!
엑스라지가 지니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던 이유는 그가 ‘국제 대회’에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저건 백퍼센트 현이다…! 지니는 저런 성격이 아니야!”
아마도 저게 동화라는 스킬…!
과거 다크니스 길드원들이 학살당했던 기억들이 엑스라지의 뇌리를 스쳤다.
전력을 다한다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데, 지금 데모니아 협곡에 남아있는 최정예 유저는 베어실드 뿐.
아니, 싸움을 패배하는 것보다 큰 문제는, 메이데이가 기껏 회복해 둔 현과의 관계가 다시 악화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절대 싸우면 안 됩니다!”
“하지만 이미 저희 쪽이 공격받았는데요? 이 사건을 허술하게 대응하면 계약자들과의 신뢰가….”
“아뇨, 그건 상관없으니까! 지금부터 조금이라도 제 지시를 어기는 유저는 길드에서 추방하는 것까지 고려하겠습니다!”
엑스라지는 우선 그 불청객을 최대한 정중이 대하라 지시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럴 게 아니라 나도 서둘러 가봐야겠군!’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현이 데모니아 협곡에 온 용건부터 파악해야만 했다.
한편 요새의 입구.
「아쉽군요.」
지니는 입맛을 다셨다.
놀랍게도, 난동을 피운 것은 현이 아닌 지니!
의도적으로 시비를 건 이유는 경쟁자의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였다.
만약 싸움이 일어난다면 그대로 아인까지 소환해서 데모니아 협곡을 초토화시킬 예정이었지만, 상대가 먼저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명분이 사라져 버렸다.
이 상황은 분명 녹화되고 있을 테니, 무저항으로 일관하는 상대를 공격한다면 훗날 큰 문제가 되겠지.
특히, 쉐이드 길드의 얼굴이 걸려있다면.
「누군가 제 얼굴을 알아본 것 같군요. 제법 변장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게요….」
현은 지니의 전략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게 바로 책사라는 건가?
유용한 기술을 배웠다.
명분이란 걸 잘만 이용하면 아스라 시절에 벌였던 짓을 ‘정당하게’ 다시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이 방법,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라해 봐야겠군.’
엑스라지가 전체 공지로 현의 존재를 모두에게 알린 후.
다크니스 길드원들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현과 지니는 극진하다시피 한 대접을 받으며 데모니아 협곡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현이군요! 갑자기 방문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마침 엑스라지가 발 빠르게 달려왔다.
“지난번 쉐이드 길드에서 양보해 주신 것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다크니스에겐 불청객일 텐데도 그는 활짝 웃는 얼굴로 현을 맞이했다.
“저라는 걸 용케 아셨네요?”
“물론 알죠! 쉐이드 길드원 지니. 최근에 이름을 날린 유저잖아요?”
“의외네요.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하하, 제가 대회에서 스카웃을 자주 하다 보니 전 프로게이머들에게도 관심이 많아서요.”
첫 문장은 현이, 두 번째 문장은 지니가 말한 것.
현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지니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덫을 쳤다.
아직 공식적으로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쉐이드 길드원을 알아본다?
그러면 이쪽의 정보를 캐고 있는 것 아니냐는 구실로 다시 한 번 압박해 볼 수 있었겠지만, 엑스라지는 대회를 언급하는 것으로 재차 지니의 덫을 빠져나갔다.
「다크니스의 길드장. 생긴 것과 다르게 상당히 영악한 남자입니다.」
「그래요?」
「네, 눈치가 아주 빠르군요.」
지니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엑스라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직도 자신들이 방문한 이유를 묻지 않고 있었다.
괜한 구실을 잡히기 싫다는 거겠지. 이쪽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지니는 첫 번째 계획을 포기하기로 했다.
시비를 걸어 싸움을 일으키는 것 외에도, 데모니아 협곡을 찾아온 이유는 더 있었다.
“그냥. 요즘 어떻게 지내나 보러 왔죠.”
비록 도시 규모는 아닐지라도, 데모니아 협곡은 최초로 기업이 관심을 가졌던 땅이었다.
비슷한 장소를 살펴보는 것은 어둠의 섬을 도시화할 때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이 근처를 한 바퀴 둘러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네…? 그야 물론이죠.”
그 때부터 현과 지니는 생소한 시설이 보일 때마다 엑스라지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웃음을 지으며 친절하게 질문에 답해주는 엑스라지.
하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현의 의도를 추측하는 중이었다.
‘현도 뒤늦게 이 땅의 가치를 파악한 건가.’
‘선심 쓰듯 넘겼던 일을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건지도 몰라.’
‘땅을 다시 뺏거나, 지분을 요구하기 위해서 시비를 걸었던 거겠지?’
물론 그런 생각들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부대를 방문한 사단장을 대하듯, 엑스라지는 현의 경로를 길드원들에게 미리 알려주며 실수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저 여자는 누구지?’
가끔씩 다크니스 길드원이 아닌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지니를 바라보았다.
현실 연구단체에 속한 자들은 대부분 현의 얼굴도 잘 몰랐으니 지니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새로운 계약자가 장소를 둘러보기 위해 찾아왔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대체 누구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조심스럽게 대하나?’
‘어디 대기업 총수일까? 상당히 젊어 보이는데.’
현과 지니의 정찰이 끝난 것은 두 시간 만이었다.
「대충 다 본 것 같군요. 오늘 본 건 전부 영상으로 기록해 뒀습니다.」
「어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네. 제법.」
「잘 됐네요.」
그렇게 둘은 다크니스의 본거지에서 용건을 마쳤다.
“오늘 안내 고마웠어요.”
팟! 현은 동화를 해제하며 인사를 건넸다.
…! 현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엑스라지는 깜짝 놀랐지만, 적대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고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
“하하, 안내 정도라면 언제든 가능하지요. 이제 돌아가시려는 건가요?”
“네. 지니만 협곡 밖으로 배웅해 주세요.”
“그럼 쉐이드 길드장님은…?”
“전 알아서 돌아갈 테니까.”
지니의 용건은 끝나지만 현의 할 일은 아직 한 가지 남아 있었다.
이어서 데모니아 협곡의 한가운데로 이동한 뒤, 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여기서 하면 되겠지.’
데모니아 협곡은 지하의 땅 전체가 지상으로 이동하며 생겨난 흔적이다.
그 말은, 이곳에서 대칭세계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다는 뜻.
현은 협곡의 정 중앙에서 기도를 시작했다.
최근에 자주 기도한 덕분에 순식간에 의식을 낮출 수 있었다.
잠시 후, 현의 신형은 제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우왓…!”
‘투명화’가 발동했다고 착각한 엑스라지가 황급히 몸을 빼려다 넘어졌다는 사실은 모른 채.
***
어둠의 땅.
아니, 과거 어둠의 땅이었던 장소에서 현은 해골 공작을 만났다.
‘어둠의 가호’ 스킬을 사용하니 상대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을 섬기는 자 스코타나토스.
그는 5년 전 돌연히 사라진 어둠의 소식을 몹시 궁금해 하고 있었다.
현은 우선 예를 갖추어 자신이 어둠의 사도와 비슷한 존재임을 밝혔고.
“어둠께서 공작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스코타나토스에게 루이즈의 근황을 전해주었다.
그녀가 몹시 곤란해 하고 있다는 이야기.
프라이빗 룸에만 처박힌 지도 며칠째. 루이즈가 심심해서 죽기 직전인 것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스코타나토스는 루이즈의 소식을 듣고 반색했다. 해골의 몸뚱이를 지닌 그는 하늘은 물론 지상에도 쉽게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둠께서 곤란하다고…! 그래, 무엇을 도우면 되는가…?”
“뭐냐면 말이죠.”
그렇게 현은 스코타나토스에게 2천 마리의 해골을 받아냈다.
한 번에 옮길 수 없어서, 지금 수송선으로 여러 번 해골들을 운송하는 중이었다.
하늘 근처에서 오랫동안 써먹어야 한다는 말에 스코타나토스는 튼튼한 녀석들을 엄선해 주었다.
이 해골들은 당분간은 노동자로, 도시 계획이 끝난 뒤엔 치안대 및 행정을 담당하는 일꾼들로 활용될 것이다.
지니와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짤 때부터 현이 생각해 두고 있던 수단이었다.
“완벽… 합니다!”
지니는 섬에 도열한 해골들을 바라보며 감격스러워졌다.
2천의 일꾼들이 자신의 지시대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현이 언데드 일꾼을 구해준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 수가 이렇게 많을 줄은 그녀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정도면 노동력은 넘쳐나겠군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복층으로 만들어 볼까요?”
갑자기 지니의 의욕에 불이 붙었다.
“복층이라뇨…?”
“섬의 지하까지 개발하는 거죠! 최종 목표를 50층 정도로 두고, 일단 10층까지만 파 보는 게….”
“아니, 잠깐만요…!”
현은 지니의 폭주를 멈추었다.
그녀의 사업가적인 수완이 뛰어난 건 인정하지만, 방금 그 계획은 충동적으로 내린 것이 틀림없었다.
“노동력은 충분하다 치고, 이미 체결된 계약은 어떻게 하려고요?!”
“새로운 기업을 더 받으면 되죠! 저, 시간은 충분해요!”
“아니, 제 시간이 부족하다니까요?”
쉐이드 길드장으로서 현은 모든 업무를 총괄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 중엔 절대 남에게 맡길 수 없는 일도 수두룩했다.
“진짜 자신 있으면 우선 지하 1층부터 만들고, 나머지는 나중에 다시 논의하죠.”
“알겠습니다. 샘플이 필요한 거군요.”
계획이 조금 변경되었다.
땅 위에는 접근성이 높고 대중적인 시설을 두기로 했다.
상점, 공연장, 결투장, 연무장 등등, 유저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들만 간추려서.
그리고 공장이나 연구소 따위의 전문시설들은 전부 지하로 몰아넣기로 결정했다.
아스리안을 시작한 이후, 현은 처음으로 노동을 하는 기분을 느꼈다.
일주일 동안 캐릭터의 성장이 멈춘 적은 난생 처음이었다.
다행히 아인이 평소보다 많은 시간을 사냥에 투자해 주고 있었다. 훗날 자신이 손해 본 경험치를 복구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갔다.
“후… 드디어 끝났네.”
“이제부터 시작인데요?”
“아니, 내가 할 일이 대충 끝났다는 거죠.”
그동안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SHA컴퍼니가 설립되었다.
쉐이드(Shade)의 앞부분을 따온 동시, 서현(SeoHyun)과 아인(Ain)의 이니셜을 상징하는 의미다.
아인이 아니었다면 절대 지금의 자리까지 오지 못했겠지. 현은 그녀의 이름도 자신과 함께 넣기로 했다.
자신을 제외한 모두는 아직까지도 쉐이드의 약자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파피 덕분에 일이 쉬워진 것 같네.’
근 며칠간 현은 파피를 다시 보게 되었다.
빚을 갚겠다며 쉐이드 길드에 들어온 파피.
그는 다방면에서 NPC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은근히 파피의 인공지능의 수준이 낮다고 여기던 현에겐 달가운 충격이었다.
그가 2천 마리에 달하는 해골들을 능력별로 분류해 지휘체계를 만들자 작업 속도가 몇 배는 빨라졌다.
또한, 각 기업들을 경쟁시키는 것으로 효율을 극대화하는 아이디어는 도저히 NPC의 발상이라 믿기 힘들었다.
가장 위험한 작업.
섬을 순환하는 안개를 따라 수로를 만들어야 할 때도, 천인의 기감은 치명적일 수도 있는 사고들을 미연에 방지해 주었다.
오히려 그의 미적 감각이 더해지자, 어둠의 섬은 흑색의 분수가 솟구치는 거대한 예술품처럼 변모했다.
‘필요한 시설들도 전부 갖춰졌고.’
가장 큰 난관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만드는 일이었지만 그 작업도 파피 덕분에 쉽게 끝났다.
마법진 제작은 그의 특기였으니까.
땅의 고도를 조금만 올리면 섬은 하늘, 천인이 마음껏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구역에 도달한다.
거기서 마법진을 그린 뒤, 다시 섬의 고도를 낮추는 것으로 순식간에 게이트 하나를 완성할 수 있었다.
물론 바로 가동시키진 않았다.
현은 ‘유저’들만의 도시를 만들 생각이었으니 텔레포트 게이트에 다음과 같은 제약을 걸어 두었다.
-영혼이 담긴 물체는 이동 불가능.
휴식 상태라는 꼼수가 있는 유저들은 별 무리 없이 게이트를 이용할 수 있을 테지만, NPC는 절대로 게이트를 통해 이곳으로 넘어오지 못하리라.
이렇게, 파피가 대부분의 일을 맡아준 덕분에 나머지 길드원들은 행정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형, 시킨 거 다 끝마쳤어요! 한번 봐주실래요?」
마침 현에게 도착한 타르타르의 귓속말.
「아, 보내 봐.」
타르타르의 특기는 대중의 요구를 파악하는 것이다.
지니가 행정 업무를 처리하고, 파피가 잡일을 담당하는 동안, 현은 그에게 도시의 핵심 컨텐츠를 만들어 보라고 지시해 두었다.
유저들이 지속적으로 도시에 머무르게 만들 방법이 뭐가 있을까?
타르타르가 제시한 해답은 VIP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쉐이드 포인트]-쉐이드 길드에서 발행되는 교환 불가능한 재화입니다.
-어둠의 섬 퀘스트 클리어, 길드 공적 달성 등으로 획득할 수 있습니다.
-보유한 쉐이드 포인트에 따라 VIP등급이 상승합니다.
300p – VIP1
-보급형 총 대여가능 (수량 한정)
1500p – VIP2
-일반 상점 이용
6000p – VIP3
-레어 상점 이용
-매일 골드지급
30000p – VIP4
-유니크 상점 이용
-매일 많은 골드 지급
-쉐이드 길드에 지원서 제출가능
300000p – VIP5
-레전더리 상점 이용
-공적 확인 후 포상금 지급
(※주의 : 매일 자정, 보유한 포인트의 0.1%가 자동 소멸됩니다!)
핵심은 길드 차원에서 운영하는 포인트 상점.
일반~레전더리라는 단어가 그대로 아이템 등급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높은 등급의 상점에서 더 좋은 물건들을 구매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상점엔 총 이외의 아이템들까지 등록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유니크 상점에서 희귀 마법재료 등을 포인트로 판매하는 식이었다.
‘응? 이건 뭐지?’
타르타르가 설정해 둔 목록을 살펴보던 도중, 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전더리 상점의 판매목록에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만남 티켓]-현실에서 현과 한 끼의 식사를 함께할 수 있다.
(가격 : 10000p)
(재고 수량 : 하루에 1개)
나랑 밥 한 끼 먹자고 저딴 물건을 살 유저가 있을까?
심지어 가격도 10000포인트로 굉장히 비싼 편인데.
타르타르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물건을 등록해 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 그거 제가 올린 거 아니에요.」
「그럼?」
「아인 누나가 목록에 추가하라고 해서 넣었어요.」
‘아인이…?’
현은 뚫어져라 설명을 바라보다가.
‘훗, 그렇게 나랑 밥 먹고 싶으면 아무 때나 말하면 되는데.’
피식 웃으며 정보 창을 닫았다.
어차피 1년 내에 VIP 5단계까지 갈 수 있는 유저는 없겠지.
타르타르가 고안한 이 시스템엔 아주 악랄한 점이 존재했다.
주기적으로 0.1%의 포인트가 감소한다는 것!
10만 포인트를 가진 유저는 아무것도 안 해도 하루에 100포인트가 날아간다.
VIP 5단계 조건인 30만 포인트를 모으기 위해서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가 없었다.
타르타르도, 레전더리 상점에 아무것도 없으면 허전하니까 아무거나 넣어둔 걸지도 모른다.
‘뭐, 이 정도면 준비는 끝난 것 같고.’
현은 관리 창을 열어보았다.
‘이제 슬슬 게이트를 개방해도 되겠지.’
도시에 꼭 필요한 시설들은 이미 갖춰진 상태였다.
마법 덕분에 아스리안의 건축 속도는 비정상적으로 빠르기 때문이다.
유저들이 드나드는 가운데도 개발은 계속될 것이고, 몇 달 뒤면 이곳은 온전한 대도시로 탈바꿈할 것이다.
「이쪽도 끝났다. 앞으로 한 시간 뒤에 그 영상이 공개될 거야.」
살론도 길드 채팅으로 보고했다.
「루이즈의 모습은 완벽히 편집된 거죠?」
「물론이지. 물론 주인공은 현 너지만, 내 모습도 제법 만족스럽게 찍힌 것 같아.」
오늘은 스티븐이 제작한 ‘플레잉 다큐멘터리’가 공개되는 날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아스리안 메인 홈페이지에 걸린다 하니 그 파급효과가 어떨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원래는 더 일찍 공개될 예정이었지만, 현이 부탁해서 날짜를 조금 미뤘다.
도시 개방과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서!
「로버트, 그때 말해주신 거 정말이겠죠?」
마지막으로 현은 이전에 받았던 연락처를 통해 개발진, 로버트 커너에게 연락했다.
메인 퀘스트가 끝난 바로 직후, 현은 그에게 한 가지 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역사 퀘스트 신규 에피소드 말이죠? 아마 다큐멘터리 공개와 동시에 추가될 겁니다!」
「역사의 조각상은요?」
「제가 손대지 않아도 새로운 도시가 생겨나면 저절로 만들어지겠죠. 그건 그런 ‘시스템’이니까요.」
「아하, 답변 감사합니다.」
그렇게 모든 준비는 끝났고.
현은 터질 듯한 심장을 가라앉히며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렸다.
이 순간 모든 쉐이드 길드원들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은 진짜 역사에 새겨지는 날이 될 지도 모르겠다고.
***
스티븐 영.
액션영화를 논할 때 언제나 빠지지 않는 이름이었다.
“스티븐의 영화는 작품성이 모자라다.”
“그는 대중의 평가에 잡아먹혔다. 영화에 철학적 의미를 담아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식으로 스티븐을 비판하는 평론가들도 있었지만, 그의 실력을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화계의 마이더스의 손.
스티븐이 만든 영화는 무조건 초대박이 났다.
역대 영화 수익 순위를 나열해 보면 10위 내에 그의 작품이 절반이었다.
원작만한 속편 없다는 속설이 깨진 것도 스티븐 영 혼자 이루어낸 업적이었다.
그가 언제나 대박을 터뜨릴 수 있는 이유는 압도적인 연출력.
연출이 워낙 뛰어난 탓에 개연성이 어긋나도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한동안 잠잠했던 탓에 휴식기를 보내는 줄만 알았던 그의 소식이 들려온 것은 지금으로부터 열흘 전이었다.
뉴스, 신문, TV 등의 매체에 그 문구가 나왔으면 아주 큰 임팩트는 없었을 것이다.
스티븐이 혁명을 보여주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아스리안 공식 홈페이지에 같은 문구가 떠올랐다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권대호의 중대 발표 이후 약 6개월.
수많은 연구단체들이 첫 타자로 아스리안에 뛰어들었지만 ‘대중’들은 아직 아스리안의 특별한 점을 체감하지 못했다.
그들은 게임을 활용해 물리현상을 규명하는 일이 뭐가 대단한지 모른다.
게임 속에서 총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 정도는 다른 게임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거 아니야?” 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영화라면?
-스티븐 영? ‘어센던트’ 찍었던 그 스티븐 말하는 건가?
-영화계에 다른 스티븐이 없잖아.
공식 홈페이지에 그 의미심장한 문구가 올라온 뒤부터 각 커뮤니티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스티븐 영이란 이름은 게임에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들까지 솔깃하게 만들 파급력을 지니고 있었다.
마침내 찾아온 D-Day.
소문, 광고, 뉴스를 통해 소식을 알게 된 세계의 사람들은 아스리안 공식 홈페이지를 열어 두고 있었다.
약속된 시간이 되는 순간 페이지의 배경이 검게 바뀌며 동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시작됐다.”
현의 눈이 반짝였다.
그를 포함한 쉐이드 길드원들도 프라이빗 룸에서 다함께 스크린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파피는 뭔가를 점검해야 한다고 말하며 밖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루이즈는 다른 길드원들과 함께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거의 스크린으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약 30분 길이의 플레잉 다큐멘터리.
짧은 러닝타임에 빠르게 스토리를 펼치기 위함인지, 영상은 나레이션 기법으로 진행되었다.
“이게 영화라는 것이구나….”
“엄밀히 따지면 영화는 아니지만. 뭐, 비슷한 영화도 곧 나오겠지.”
“다들 저곳에 있는데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이냐?”
“저 수인 여자애가 아마 너일 거야.”
자신의 부탁대로 영상 속 루이즈의 모습은 CG처리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스토리도 조금 각색된 듯했다.
공작의 성을 되찾는다는 기존의 내용 대신, 적군의 수뇌부를 암살하기 위해서 성에 잠입하는 직관적인 스토리로.
‘저게 나인가?’
현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영상 속 자신의 모습이 왠지 잘생긴 것 같았다.
아니, 길드원 모두의 외모가 조금씩 미화되어 있는 것 같은데…?
특히 살론은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대사도 다시 녹음했는지, 살론의 중2병스러운 느낌도 멋지게 포장되어 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와 긴박한 화면이 극적인 대비를 일으키자, 현은 순간 ‘살론은 따로 대역을 쓴 건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런 사소한 차이들을 제외하면 영상은 과거에 겪었던 것과 동일하게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