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107)
유피아 섬
인간의 육신을 벗지 못한 지금, 진정한 악마로 각성하지 못한다면 언젠간 늙어서 죽어버릴 것이다.
루이즈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행복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라면.
“그 생각은 별로 좋지 않군요.”
“어째서?”
“…언젠가 후회하게 될 겁니다.”
루이즈는 한참 침묵하다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역시 그렇겠지….”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현실에 안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 도시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지만, 완벽한 안전지대는 아니다.
로열 이상 등급의 강력한 초월자가 강림하면 백색의 띠에 숨는 방법도 무용지물이 될 테니.
언젠가 천공의 NPC들이 도시 위아래의 입구를 차단할지도 몰랐다. 안전하다고 해도, 백색의 띠에 고립된 채로는 하나도 즐겁지 않을 것이다.
“잠깐 너무 달콤한 꿈에 빠졌구나.”
루이즈는 순간의 행복에 취한 자신의 안일함을 반성했다.
현이 수송선을 타고 하늘로 향한 것도 나를 위해서였지.
자신도 현을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는가?
이쪽도 미래를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애초에 악마가 가벼운 것도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너무 악마의 격이 없습니다.”
“그런가? 그 말을 너에게 들으니 이상하긴 하다만.”
루이즈는 딱 한 시간만 더 놀고 수련장으로 향하리라 결심했다. 레벨은 오르지 않더라도 실력은 노력에 보답할 테니까.
***
하늘다리에서 탈취한 수송선은 본래 물자를 옮기는 용도로 사용되던 것이지만, 현은 그것을 탑승용으로 바꾸었다.
현이 직접 손댄 것은 하나도 없고, 파피와 전문가들의 지휘 하에 개조되었다.
그 결과 3층으로 나뉜 수송선에 약 500개의 좌석이 만들어졌다.
갑판까지 입석으로 활용하고 있으니 수용인원은 그보다 많을 것이다.
수송선의 자리는 언제나 만석.
탐사 퀘스트가 아니더라도 하늘로 이동하고 싶은 유저들은 많기 때문이었다.
물론, 티켓을 구매할 필요도, 한참 전부터 자리를 예약할 필요 없는 현은 혼자서 여유롭게 특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현, 나 지금 접속할게!!!”
그때 갑자기 들려온 아인의 외침.
현은 이 목소리가 귓속말도 아니고, 계정으로 말을 건 것도 아니란 사실을 바로 눈치 챘다.
‘얜 뭐하는 거야?’
아인은 캡슐에 누워있을 현실의 몸뚱이에게 소리치고 있는 것이었다.
감각동조 중엔 현실의 감각이 흐릿해지지만, 지금 아인의 목소리처럼 바깥의 큰 소리는 게임 중에도 들렸다.
“접속할 건데 잠깐만 커플링 쓰지 말아 줘!! 잠깐 준비할 게 있으니까-!!!”
잠시 후.
「휴 됐다.」
소환되자마자 아인은 슬쩍 미소 지었다.
“퀘스트를 받아놓는 걸 깜빡했거든.”
“뭔 퀘스트? 설마, 쉐이드 포인트 얻는 그거 말하는 거야?”
“맞아. 현에게도 공유해 줄까?”
띠링!
-섬에서 유용한 정보를 얻을 때마다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탐사 데이터베이스에 정보를 삽입하면 그 즉시 정보의 가치가 평가될 것입니다.
(현재까지 기록된 내용 : 52 종류) –
-유피아 섬에서 마기의 흔적이 보고되었습니다!
-마기와 관련된 새로운 정보를 보고할 때마다 200p를 획득합니다!
-평가된 정보의 가치가 높은 경우 추가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마기의 원인을 완벽하게 규명하면 10000p를 획득합니다!
(※주의 : 동일 퀘스트를 받은 파티원이 존재하는 경우 포인트가 균등 분배됩니다)
배시시 웃는 아인을 보며 현은 어이가 없었다.
바로 소환하지 말라던 이유가 이 퀘스트를 받기 위해서였나?
“이걸 우리가 왜 해? 상점에서 원하는 거 아무거나 가져가면 되는데.”
“그냥. 재밌잖아.”
[‘아인’님이 퀘스트를 공유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현도 일단 수락해 봤다.
갑자기 퀘스트의 원리가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지니의 설명에 따르면 ‘모험 데이터베이스’는 아스리안에서 제공하는 기본 인공지능을 응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현이 퀘스트의 ‘보고 란’에 입력하고 잠시 기다리자 답변 메시지가 떠올랐다.
[새로운 정보입니다! (가치 : 0.1p)] [해당 정보의 진위를 밝혀내야 포인트가 지급됩니다!]0.1포인트.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하지만 노력대비 효율이 나오지 않았다.
쓸데없는 정보로 포인트를 버는 건 불가능한 듯했다.
현은 이번엔 아무 말이나 지껄여 봤다.
잠시 후.
[마기에 관련된 새로운 정보입니다! (가치 : 8011p+200p)] [증거 및 연관성을 (사진/영상)으로 캡처하세요!] [10분간 자료 평가 후 보상 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짧은 시간 내에 동일 보고가 접수될 시 가치가 하락할 수 있습니다!]“이건 좀 신기하네.”
“봐, 내가 재미있다고 말했잖아.”
“그러게.”
아스라 온라인에는 존재하지 않던 기능이었다.
유저가 만들 수 있는 퀘스트의 종류도 별로 없었다.
특정 재료를 가져오거나, 몬스터를 몇 마리 처치하는 등의 단순한 것들뿐이었다.
‘탐사’라는 퀘스트가 가능한 것은 아스리안의 인공지능이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 그럼 준비하자.”
현은 다음 일을 시작했다.
수송선의 항해가 끝나기 전까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외모를 바꾸는 것!
하늘다리에서 자신과, 아인, 루이즈의 얼굴은 몇몇 NPC들에게 노출되었다.
물론, 1세대 인공지능들은 유저의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1.5세대쯤 되어야, ‘친분이 있는 상대’를 간신히 알아볼 정도였다.
하지만 현은 만에 하나 자신의 행적이 유저의 입을 거쳐 NPC에게 넘어갈 가능성을 고려해야만 했다.
“나랑 네가 유피아 섬에 있단 사실이 드러나면 안 돼.”
그러니 하늘에선 항상 변장하는 편이 안전했다.
수송선의 특실에 여러 종류의 옷과 변장 도구들을 마련해 둔 것도 이럴 때를 위해서였다.
“이 정도면 완벽하겠지?”
대충 꾸민 뒤 현은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검은 두건으로 머리를 감싸자 원래의 ‘현’이 지니던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최근 현실에서 변장하고 다녔던 게 나름 참고가 되었다.
“현, 나 봐봐. 어때?”
아인이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마침 그녀도 변장을 마친 모양이었다.
“잠깐, 그게 뭐야…?”
하지만 옆을 돌아보는 현은 순간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아인의 복장은 교복.
분명 교복인데, 벨트에 프릴까지 뭔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캐시 샵의 물건인가? 누가 디자인한 건지 상당히 궁금해지는 옷이네.
“별로야? 현이 좋아할 것 같았는데.”
“좋아하고 말고를 떠나서, 그 옷은 오히려 네 정체가 드러나잖아!”
“그래? 이제 학교 안 다니니까 이것도 나름 변장인데?”
아인이 자꾸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는 탓에 현은 자신이 직접 적당한 옷을 골라 주었다.
후드가 달린 마법사 옷. 모자가 달린 편이 정체를 숨기는 데 유리했다.
“음… 이건 살짝 어린애처럼 보이지 않으려나?”
아인은 헐렁한 소매를 흔들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 중얼거렸다.
“아니면 현의 취향이 이런 건가?”
“뭔 소리야. 마법사 계열은 원래 다 그렇게 입는다고.”
“후후, 그 말. 지금 나한테 동화하고 다시 말해보는 거 어때?”
“…쓸데없는 소리 말고, 출발하자.”
부우우우- 커다란 경적이 울리고 있었다.
수송선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
하늘 섬
판타지에 자주 등장하는 하늘 섬은 춥고, 고독한 이미지가 떠오르기 십상이지만 아스리안의 하늘 섬은 그렇지 않다.
섬마다 특유의 결계 마법진이 간섭하여 내부환경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날씨는 물론 공간밀도까지 변하기에 가끔은 비현실적인 특징을 지닌 섬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조막만한 섬에 광활한 평원이 펼쳐져 있다거나.
‘하늘 섬’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강이 흐르고, 파도가 철썩인다거나.
“휴, 도착했다.”
수송선은 유피아 섬의 가장자리에 정박했다.
유피아 섬은 바다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열대기후의 식물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었다.
섬의 안쪽엔 울창한 나무들이 정글을 이루고 있었다.
한 마디로 여름철 휴양지 같은 땅.
수송선이 유피아 섬에 도착하자 한가하던 해변은 수많은 유저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마기의 흔적이 있다고?’
인파에 섞여 이동하는 도중, 현은 앞으로의 할 일을 상기해 봤다.
쉐이드 퀘스트 창을 활용하면 유저들이 기록한 유피아 섬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중요도 순서 정렬.’
퀘스트 인터페이스에 기록된 정보 목록들이 이리저리 뒤섞이다가 이내 멈추었다.
다시, ‘자세히 보기’기능으로 해당 기록의 상세 내용을 확인했다.
: 203레벨의 마학자가 섬의 동굴 근처에서 ‘신력 탐지’의 반응을 확인함. (참고자료 : 2건)
: 평균 195레벨의 4인 파티가 섬에서 마물로 추정되는 몬스터와 조우함. 뚜렷한 형체가 없는 유령과 닮은 것으로 추정됨. 파티의 2명은 해당 몬스터에게 사망했고, 나머지 2명은 그 자리에서 달아남. (참고영상 : 1건)
……
의 동영상을 클릭하자 그 때의 상황이 재현되었다.
마물과 조우한 생존자들의 녹화 본.
‘다시 봐도 정체를 모르겠단 말이지.’
기록된 영상을 지켜보던 현은 눈을 찌푸렸다.
웬만한 몬스터, 마물들은 알고 있다 자부하던 자신도 그 거무스레한 형태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치 형체가 없는 귀신.
마물인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마기로 이루어진 슬라임이 존재한다면 저것과 비슷하리라.
두 명의 유저들은 통째로 그 ‘마기 슬라임’에게 잡아먹히는 광경으로 영상은 마무리되었다.
‘마물이 있을 법한 곳은 아닌데.’
현은 다시 유피아 섬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하늘 섬들 중에서도 평화로운 곳이었다.
해변가의 꽃게를 비롯한 갑각류와 해양 몬스터들은 강력하지만, 그것들은 먼저 건드리지 않는 한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
섬을 다스리는 천인도 마을주민들에게 간섭하지 않았다. 어둠의 섬보다도 좁은 이곳은 특별히 관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정말 마물이 숨어있는 거라면, 어둠을 섬기는 녀석이 좋겠네.’
현이 유피아 섬에 찾아온 것은 마기가 ‘어둠’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아서였다.
5년 전의 전쟁에서, 어둠의 부하들은 루이즈를 지키다 소멸하거나, 혹은 천공에 붙잡혀 봉인되었다.
그렇게 마물들은 하늘 섬 곳곳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마기를 신성력으로 바꾸는 괴짜 천인들의 연구를 위해서.
또는, 천공의 승리를 증명하는 박물관의 구경거리로.
하지만 흩어진 녀석들 중 우연히 깨어나거나 도망친 녀석이 존재한다면?
루이즈에게 새로운 부하를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고, 어쩌면 쉐이드 길드의 전력으로도 활용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현이 유피아 섬을 찾아온 이유였다.
‘뭐, 조사해 보면 알게 되겠지.’
“아인, 일단 가까운 마을로 가자.”
수송선에서 내린 유저들은 각자의 용건을 위해 여러 장소로 흩어지고 있었다.
현은 가장 가까운 마을을 거점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동화는 안 해?”
해변을 따라 걷던 도중 아인이 물었다.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은 채로.
현은 고개를 저으며 구체적인 이유를 밝혔다.
“그건, 아직 할 필요 없어.”
“흐응~ 어째서?”
“여기서 동화하는 모습이 들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의심할거야.”
동화 스킬은 이제 모두에게 알려졌다.
멀쩡히 길을 가던 유저 둘 중 한 명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현’이라는 의심을 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현과 아인’이 유피아 섬에 있단 소식이 1.5세대 이상 NPC들의 귀에 들어갈 가능성도 있었다.
변장을 한다 해도 천인은 언재나 부담되는 존재다.
지금처럼, 적절한 타이밍에 괜히 일을 키울 필요가 없겠지.
“괜히 부끄러워서 그러는 거라면 괜찮아.”
“뭐?”
“사실, 현 취향은 다 알고 있는 걸? 나한텐 좀 더 드러내도 상관없어.”
“하…. 알겠어. 지금 동화해서 네가 생각하는 이유가 아니란 걸 증명해주면 되는 거지?”
팟!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찰나의 순간, 현의 모습이 잠깐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아니, 너무 짧았잖아!”
“좀 기다려, 이따가 질리도록 해 줄 테니까.”
약간의 말싸움을 하다 보니 현과 아인은 조금 늦게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다.
***
마을엔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유저로 보이는 사람은 100명 정도. 수송선에 500명 이상이 탑승했던 것 치곤 적은 숫자였다.
나머지 유저들은 다른 마을로 향했거나, 마을을 들리지 않고 곧바로 각자의 용건을 보러 갔을 것이다.
100명 남짓한 유저들은 다시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그저 사냥이 목적인 무리들.
그리고 정보를 기록하려는 무리들.
각자의 용건에 따라 정비 후 사냥터로 이동하거나, 마을에서 탐사를 위한 계획을 짜고 있었다.
“사냥만 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나? 하긴, 여기 사냥터가 효율이 좋은 편이긴 하지.”
“우린 뭐 할 거야?”
“글쎄, 사냥, 탐사 중에 뭐부터 하고 싶어?”
“그야, 동화부터!”
“좋아. 마을 구경부터 하자.”
현은 해변가 마을을 잠깐 돌아다녔다.
장비 내구도를 수리하고, 근처에서 받을 수 있는 퀘스트를 전부 받아 두었다.
그리고 나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유저들의 행동을 구경해 봤다.
이 마을에 모인 사람들은 거의 다 ‘쉐이드 퀘스트’를 진행 중인 유저들일 테니까.
‘관리 창.’
눈앞의 인터페이스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유피아 섬 탐사 퀘스트는 계속해서 갱신되는 중.
지금도 유저들은 어디선가 정보를 기록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부분은 별 가치 없는 기록들이었지만, 현은 사람들이 자신의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뿌듯했다.
주인이 노예를… 아니, 고용주가 일꾼들을 지켜보는 마음이 이러할까?
“당신, 뭐 하는 겁니까?”
누군가 현에게 말을 걸어온 것은 그 때였다.
“네?”
“뭐 하시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냥 앉아 있는데요…?”
현은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말을 걸어오기에 NPC인줄 알았건만, 눈앞의 남자는 캐시 샵의 양복을 입고 있는 유저였다.
“저희 팀을 탐색하고 있던 거 다 목격했습니다만?”
“팀이요?”
“탐사 팀 말입니다. 몰래 따라다니려던 것 아니었냐고요.”
이 사람 일반적인 유저가 아닌가?
양복을 입은 데다 팀 운운하는 걸 보면 전문적인 단체 혹은 회사에 속한 사람일 거라 추측되었다.
최근 회사들 사이에 ‘아스리안 부서’가 생겨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으니.
“아뇨. 그냥 보고 있었을 뿐인데….”
“보고만 있었다고요?”
“뭐, 그렇죠.”
왜 가만히 있던 자신에게 와서 시비를 거는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현.
후, 남자는 한숨을 내쉬더니.
“정말로 모를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모른다니 설명해 드리죠.”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남자의 불만은 이러했다.
가치가 높은 정보를 발견하기 위해선 수많은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단다.
섬 중앙에 위치한 동굴의 입구를 찾기 위해선 정글을 배회하는 무시무시한 몬스터들의 구간을 지나쳐야만 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신히 얻은 정보를 기록하려던 때, 몰래 쫓아오던 다른 유저가 같은 정보를 따라서 기록한다면?
짧은 시간 내에 동일 정보가 보고되는 경우 시스템은 해당 정보의 가치를 균등 분배한다.
즉, 정보를 먼저 찾은 선발대는 생고생만 하고 남 좋은 일만 하게 되는 것.
남자의 목소리가 못마땅했던 이유는 힐끔힐끔 자신들을 흘겨보는 현을 ‘정보 도둑’이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남의 정보를 훔칠 이유가 없는 현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아니, 마지막에 숟가락을 얻는다니, 그런 방법이 있는 것도 몰랐는데요!”
“몰랐다고요?”
“네, 전 쉐이드 퀘스트도 오늘이 처음이라고요!”
“그 말이 정말이라면 이 자리에서 증명해 주셔야겠습니다.”
“어떻게요?”
“포인트 정보를 보여주시면 됩니다.”
“그야, 어렵지 않죠.”
현의 포인트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자기 물건을 돈 주고 사는 주인이 상식적으로 존재할 리 없으니.
“자, 됐지요?”
“아뇨, 포인트 사용 내역도 보여주셔야지요. 보유 포인트만 보여주면 오늘 아침 쉐이드 상점에서 소진했을지 어떻게 압니까?”
“아니, 참….”
현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누군가에게 거하게 사기라도 당했나?
이런 문제가 계속된다면 시스템 개편도 한번 생각해 봐야겠네.
그 메시지까지 확인시켜 주니 남자도 현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무언가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이번은 넘어가겠습니다만, 앞으로 탐사를 진행하는 사람을 수상한 눈초리로 지켜보면 그쪽이 곤란해질 겁니다.”
양복의 남자가 사라지고 잠시 후, 멀리서 지켜보던 아인이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이래?”
“아니, 그냥 좀 쳐다봤다고 날 의심하잖아. 정보 도둑이라면서.”
현은 아인을 데리고 떨어지며 뒤편의 남자를 힐긋 보았다.
그의 동료로 추측되는 수는 약 8명.
다들 양복 비슷한 복장인 걸 보면 같은 소속일 것이다.
“뭐야, 그럼 걔를 그냥 놔뒀어?”
“안 놔두면?”
“현에게 시비를 걸었으면 당연히 죽여야지!”
“죽여…? 아니, 그래도 내 퀘스트를 대신 해주는 사람들인데 죽이는 것까진 그렇잖아. 괜한 소란을 일으킬 필요도 없고. 이젠 이미지 관리도 해야 한단 말이야.”
그리고 방금 전, 중요한 사실 하나가 검증되었다.
방금 그 남자는 쉐이드 퀘스트를 한다고 말하면서도 ‘현’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지금의 변장은 웬만해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다는 뜻.
유저에게 들키지 않았다면 NPC에게 걸릴 가능성은 더욱 없다고 봐야 했다.
“몰랐으니까 봐 주자고.”
“으음… 마침 내가 옆에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왜?”
“난 VIP 3단계거든.”
아인은 자신의 쉐이드 포인트 창을 보여주며 씨익 웃었다.
“뭐? 6천이나 언제 모은 거야!”
“시간 날 때마다 도시에 숨어있는 스파이들을 잡았지! 살론은 놓치는 게 많으니까.”
“몇 명이나 잡았는데…?”
“몰라! 일단 백 명은 넘을 텐데….”
현은 아인이 다짜고짜 남자를 죽이려 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요즘 자주 사람을 죽이고 다니다 보니 PK를 저지르는 감각이 둔해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남자는 조금 까칠할 뿐인 사람이었다.
마음에 안 든다고 자신의 백성을 죽이는 왕은 그냥 폭군이 아닌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지.’
이미지는 중요하다.
유명인이 될수록 별 것도 아닌 걸로 꼬투리가 잡히기도 했다.
가만히 놔두면 언젠가 사고를 칠지도 몰라. 괜히 아인의 미소가 불안해 보이는 현이었다.
***
유피아 섬의 해변은 200레벨대의 유저들에게 딱 적당한 사냥터다.
반대로, 200레벨대면서 사실상 그 수준을 넘어선 현과 아인에게는 조금 시시한 사냥터였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사냥, 탐사. 둘 중 뭘 선택하든 행선지는 정해져 있었다.
현은 아인에게 반전해 동화한 채로 천천히 섬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거기도 사냥터야?」
「그렇긴 하지만, 해변가랑 달리 300레벨이 넘는 몬스터도 많아. 이 시점엔 ‘탐사’하는 유저들밖에 없겠지.」
목적지는 유피아 섬의 ‘중앙동굴’.
네임드와 비교할 순 없겠지만, 그곳에도 정예 타이틀을 지닌 몬스터들이 있었다.
아인은 다른 근접 직업들보다 체력이 훨씬 낮으니, 자칫 긴장을 늦추다간 한 방에 골로 갈 수도 있다.
「무기도 미리 소환해 두자.」
「알겠어!」
철컹! 현의 손에 경계의 낫이 생겨났다.
엔젤릭 리퍼와 쉐도우 슈터의 직업스킬들을 동시에 활성화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
‘확실히 좀 더 편해졌네.’
근 두 달간 경계의 낫은 여러 번 개조되었다.
지금에 와선 날의 각도를 변경하는 기능까지 생겨났다.
휘어진 무기는 불편하다는 아인의 의견을 반영시킨 것이다.
‘이 형태는 창에 더 가까워 보이네.’
날의 각도를 최대한 눕히자 경계의 낫은 ‘언월도’와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
물론 언제든 기역자의 형태로 되돌릴 수 있다.
지금의 경계의 낫은 ‘창’과 ‘낫’ 양쪽의 형태를 지니는 무기였다.
‘루이즈의 몸에 자주 동화했던 게 도움이 되겠어.’
현에게도 창은 낫보다 익숙한 무기다.
긴급한 경우나 아인이 휴식상태로 자러 갔을 때는 자신이 싸워야 할 테니 미리 변형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가자.」
현은 빠르게 섬의 중앙을 향해 달려갔다.
도중에 조우하는 몬스터들은 대부분 무시했다.
가끔씩 먼저 공격해 오는 녀석들은 아인의 손짓 한 번에 반으로 갈라져 죽었다.
200레벨 근처의 일반 몬스터는 동화한 현과 아인의 상대조차 될 수 없었다.
10분쯤 달려 도착한 곳은 거대한 동굴의 입구.
마기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유피아 섬의 중앙동굴.
이 거대한 동굴에는 수십 개의 출입구가 존재했고, 현은 유저들이 작성해 둔 지도와 인터루프의 정보를 비교해 ‘아직 발견되지 않은’ 동굴 입구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방금 전처럼 괜히 거추장스러운 마찰이 생겨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좋아, 여기쯤이네. 입구에서 바로 싸워야 할지도 모르니까 조심해.」
「내가 싸워?!」
「공격은 네 담당이잖아.」
지도를 확인하며 현은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끝없이 낙하하던 어느 순간….
탁-! 바람장벽을 밟으며 힘껏 방향을 꺾었다.
절벽의 틈새에 이런 동굴의 입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안쪽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닌 이상.
「현, 뭔가 많은데, 어두워서 안 보여!」
동굴에 들어서자마자 아인이 다급히 소리쳤다.
수백 개의 눈빛이 현과 아인을 반겼다.
어둠 속에서 붉은 빛깔의 눈동자만이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성화!’
현이 재빨리 빛을 밝혔다.
조그만 태양이 떠오르자 동굴은 빛으로 채워졌다.
동시에 드러난 붉은 눈빛들의 정체.
대략 30미터 정도의 높은 천장에 사람 크기만 한 박쥐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저거 마물이야?!」
「아니. 그냥 몬스터야!」
마물과 몬스터의 차이는 마기의 유무, 혹은 악마를 섬기는지 아닌지로 갈린다.
현의 지식대로라면 저 박쥐들은 300레벨 중반대의 일반 몬스터.
비행이 가능한데다 단단한 특성 때문에 유저 입장에선 특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가고일이다!」
띠링!
[유피아 섬의 동굴에 ‘루비 가고일’이 서식하고 있음을 목격했습니다!] [정보의 가치 : 42p] [10분간 중복된 보고가 없으면 평가된 가치의 포인트를 획득합니다!]‘이건 또 뭐야…?’
현은 갑자기 떠오른 메시지에 놀랐다.
몬스터 이름, 네임드, 특수 스팟, 이변들을 발견하는 즉시 기록하는 탐사 시스템.
현이 쉐이드 길드장이 아니었더라면 쾌재를 불렀을 상황이지만 애초에 쓸모없는 포인트.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355레벨 일반 몬스터야. 아인, 맡겨도 되지?」
「그 정도라면 뭐.」
카르르륵! 반월이 허공을 가르자 돌이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가고일류 몬스터들의 특징.
녀석들의 몸체는 단단한 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날붙이 공격의 피해량은 대폭 감소한다.
「혼자서도 충분하지!」
다시, 아까의 것보다 훨씬 거대한 반월이 허공을 갈랐다.
거인 가르기.
순간적으로 800의 힘이 증가하자 공격에 ‘둔기’의 특성이 추가되었다.
콰직! 콰지직!
돌진해 오던 가고일들은 ‘프로시아의 얼음칼’에 그대로 으깨져 버렸다.
띠링!
[루비 가고일의 체력과 방어력에 관한 정보가 기록되었습니다!] [정보의 가치 : 32p] [10분간 중복된 보고가 없으면 평가된 가치의 포인트를 획득합니다!]“아인, 뒤쪽에도 온다.”
「알고 있어.」
“응. 으응…?”
팟! 현은 반사적으로 두 개의 스킬을 발동시켰다.
그림자 방패, 어둠의 갑주. 두 종류의 마법진이 전신을 감쌌다.
콰지직!
단단한 발톱이 어깨를 움켜진 것은 그 직후. 조금만 스킬 사용이 늦었다면 정말 억울하게 죽었을 것이다.
“잠깐, 알고 있다면서!”
띠링!
[루비 가고일의 공격력과 패턴에 관한 정보가 기록되었습니다!] [정보의 가치 : 53p] [10분간 중복된 보고가 없으면 평가된 가치의 포인트를 획득합니다!]“왜 가만히 있는데?!”
현의 외침에, 아인은 말을 흐리며 대답했다.
「어차피 현이 막아줄 거였으니까.」
“이 정도 공격은 피해야지!”
「하지만 봐, 현이 막아줬잖아?」
현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아인이 이 공격을 못 피하다니. 상태가 안 좋은 건가?
“너 지금 졸린 거 아니지?”
「아냐, 피로도 10밖에 안 되는 걸? 그보다 현도 떴어?」
“뭐가?”
「퀘스트 창 봐봐! 방금 내가 현 포인트 벌어줬다고!」
“아니, 진짜 뭐하는 거야…!”
뒤늦게 알아챘다.
아인은 지금 사냥보다 다른 곳에 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 쓸모도 없는 쉐이드 포인트를 대체 왜 모으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