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109)
유령의 무덤
아인이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탓에, 현은 잠깐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밤중에 내 방엔 뭐 하러?」
「아무것도 안 할 거야! 그냥 들어가 보는 것도 안 돼?」
「그건….」
「왜, 혀, 현은 무슨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당황하는 걸까…?」
‘얘는 지금 동화 때문에 누가 동요하는 건지 헷갈리나?’
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우선 아인을 진정시키기로 했다.
「잠깐만 가만히 있어 봐.」
‘동화 해제.’
영혼이 분리되자 머리가 차분해져 갔다.
현은 이전에 아인과 했던 약속을 언급했다.
“학교를 그만뒀어도 기다리기로 했잖아.”
“내년까지…?”
“네 잘못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 유명세쯤 되면 괜한 구설수에 휘말릴지도 몰라.”
자신과 아인을 두고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으니 아직은 자중할 때였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면 현실에서 큰일이 일어지도 몰라.
아인에게도 매정하게만 대할 수는 없었다.
“대신. 게임 안에서라면 뭐든지 들어줄게. 내년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현은 약간만 경계를 늦추기로 했다.
어차피 아인은 아직 성인 필터도 해제하지 못할 테니.
“뭐든지…?”
“그래. 사람들이 없는 곳이라면.”
“진짜… 로…?”
갑자기 눈을 빛내며 다가오는 아인.
맹수를 앞둔 초식동물이 된 기분에 현은 식은땀을 흘렸다.
괜한 말을 했나? 생각하던 때.
“아니. 지금은 됐어.”
다가오던 아인의 걸음이 멎었다.
평상시의 여유로운 웃음을 되찾은 채로 말했다.
“현, 요즘엔 프라이빗 룸이 자주 비던가?”
“아마 그랬던 것 같아.”
현은 최근 프라이빗 룸의 상태를 떠올려 봤다.
빈 집.
루이즈도 잘 때만 잠깐 머무르고, 파피는 아예 도시에 자기 집을 따로 지었다.
나머지 길드원들은 각자의 일이 바빠서 회의 등의 이유로 부르지 않는다면 따로 프라이빗 룸에 올 일이 없었다.
“후후, 나중이 있으니까. 지금은 사냥이나 하자.”
어느새 해골들이 주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곳 마물들의 리젠시간은 동굴보다 훨씬 짧다.
조금만 미적거리면 이렇게 어디선가 새로운 마물들이 다시 등장하곤 했다.
“그래.”
현도 피식 웃고 다시 아인에게 동화했다.
원하지 않아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나중의 일은 나중을 기약하면 될 것이다.
***
던전에 입장하기 전부터 현과 아인은 ‘자동 탐사’기능을 해제해 두었다.
의도치 않게 정보가 기록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됐어, 이러면 괜찮겠지.’
던전 안에서 고레벨 네임드를 잡아버리기라도 한다면 자신과 아인의 존재가 드러날지도 모른다.
은밀함을 우선해야한다는 설명엔 아인도 납득해 주었다.
그렇게 준비를 모두 마친 뒤 현과 아인은 던전에 입장했다.
유령의 무덤.
으스스한 이름을 지닌 던전답게 내부의 풍경은 을씨년스러웠다.
마치 오래된 폐성당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섬뜩한 던전 내부엔 해골이나 유령 따위의 언데드 마물들이 가득했다.
‘지하에 지어진 고성 같아.’
던전은 여러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 층의 크기는 어마어마하게 넓지만, 던전의 구조가 단순한 덕분에 길을 헤맬 일은 없었다.
현이 지하 10층까지 도달하는데 걸린 건 약 1시간!
하지만 10층부터는 마물들의 수준이 300레벨을 넘어갔고, 던전의 구조도 복잡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전보다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만 했다.
‘좀 이상하네.’
현은 한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을 발견했다.
어둠의 가호를 사용할 때마다 마물들이 울부짖고 있다는 것.
뭐라고 소리치는 건지는 알 수 없다.
‘뱀파이어였다면 알아들을 수 있을 텐데. 스코타나토스에게 변신 물약을 얻어둘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을 하던 현에게, 머지않아 기회가 찾아왔다.
10층 이후부터는 높은 지성을 가진 마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어둠의 가호를 사용하는 그 순간, 마기에 뒤덮인 오우거가 광분한 듯 돌격해 왔다.
녀석의 분위기를 통해 현은 이전에 마물들의 울부짖던 의미를 조금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어둠의 기운을 내보인 게 문제였던 걸지도 모르겠네.’
오우거의 표정에 담긴 의미는 살의.
다른 마물들의 울부짖음도 이 녀석과 비슷한 의미였을까?
「현, 저 늑대가 우릴 싫어하는 것 같아.」
마침 아인도 똑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으르렁거리는 거대 늑대를 마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왜 싫어하는 걸까?」
「늑대의 표정도 알아?」
「그것도 약간은 있지만… 그보다 꼬리를 바짝 세우고 있잖아.」
아인의 말대로, 마기를 둘러싼 거대 늑대들은 어둠의 가호를 사용하는 순간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심연의 존재에게 ‘친근감’을 심는다는 어둠의 가호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정말 어떻게 된 건지.’
어둠의 기운을 지닌 존재에게 더 적대적인 마물이 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대부분 천공의 신도가 대천사를 거역하지 못하듯, 대악마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마물도 좀처럼 없을 텐데.
어둠에게 원한이라도 있는 게 아닌 이상.
‘설마… 배신자 세력의 던전은 아니겠지?’
순간 현은 루이즈의 말을 떠올렸다.
심연에도 천공의 간자가 득실거린다고.
기만이 천공의 세력들 사이에서 몸을 숨긴 것처럼, 심연인 척 위장하고 있는 천공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뭐, 끝까지 가보면 확실해지겠지.’
현은 당분간 어둠의 가호를 봉인하기로 했다.
사용해 봤자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고, 오히려 마물들을 사납게 만들 뿐이었으니까.
‘응? 여기는.’
막힘없이 던전을 내려가던 현이 걸음을 멈춘 것은 지하 13층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계단을 내려온 직후, 현은 알 수 없는 서늘함이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것도 안 보이네.’
13층은 암흑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깜깜했다.
군데군데 마력 등불이 걸려 있던 이전의 층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
동시에 곤란에 빠졌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성화를 사용했지만, 어째선지 아무런 마법도 발동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현, 불 안 켜?」
「…성화가 안 써졌어.」
「너무 어두운데?!」
「잠깐, 다시 해 볼게.」
현은 몇 번이고 성화를 다시 사용해 봤지만, 어두운 공간엔 단 한 줌의 빛도 생겨나지 않았다.
마치 주위의 어둠이 빛을 먹어버리는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긴 불가능했다.
「안 되면 내가 불 켤까?」
「마나는 괜찮아?」
「가면서 마물 좀 잡으면 회복되겠지. 정기흡수가 있으니까!」
화륵! 이프리트의 발톱이 켜지는 순간 어둠을 걷어냈다.
아인의 발톱은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는 거대한 횃불이었으니.
그리고 그 순간.
「꺄아아아악!」
“우와아앗!”
현과 아인은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바로 앞,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인이 눈을 치켜뜬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진정해 아인, 조각상이야!”
현이 먼저 그것의 정체를 깨닫고 외쳤다.
「조, 조각상…?」
「아니면 골렘일지도 모르지만. 조금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
현은 조각상을 몇 번이나 살펴보고, 그것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십자가를 거꾸로 든 기분 나쁜 여인.
섬뜩하게 표현된 표정에선 악의마저 느껴졌다.
「뭐야 이게!」
파삭!
아인이 발톱을 후려치자 그 괴상망측하게 생긴 조각상은 산산이 부서져 바닥에 흩어지고 말았다.
「누가 이런 걸 만들어 둔 거래? 깜짝 놀랐잖아…!」
이번만큼은 현도 그 말에 격하게 동의하는 바였다.
아마 아스리안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놀라지 않았을까?
「아인, 여기선 잠깐 동화를 해제하는 편이 좋겠어.」
이어서 현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갑자기 왜…?」
「주변에 마물이 한 마리도 안 보여.」
「정말… 이네.」
「네 마나가 모자랄지도 몰라.」
정기흡수로 마나를 회복하지 못하면 아인의 마나는 금방 고갈되고 만다.
언제까지 어둠이 계속될지 모르니 최대한 마나를 아낄 필요가 있는데…. 그런데 마나 소모량은 화염의 손톱이 초당 10, 이프리트의 발톱이 초당 15.
마나 관리의 측면에선 전자가 더 유용했다.
마나가 다 떨어지면 다시 스탯 보너스를 위해 동화해야겠지만.
「그럼 지금 동화 풀 거야…?」
「응.」
「동화 풀어도 내 몸에서 손 떼면 안 되는데…?」
「말 안 해도 계속 붙잡고 있을 거야.」
자신과 아인이 착용한 천상의 커플링엔 다음의 효과가 존재한다.
-파트너와 접촉하고 있을 때 모든 스탯이 20% 증가합니다.
유저의 최대 마나량은 [마력]X10.
물론, 갑자기 마력이 상승해도 최대치가 늘어날 뿐 마나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마나의 ‘자연 회복량’이 최대치에 비례하기 때문에 마력 수치를 높게 유지하려는 것이다.
화륵.
어두운 공간에 은은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조금 옅은 불꽃은 주위의 분위기를 더욱 으스스하게 만들었다.
“현, 그냥 이프리트의 발톱 쓰는 건….”
“안 돼. 이 정도로도 충분하잖아.”
“그치만 너무 어두운 걸….”
“근처 시야만 확보하면 되니까.”
현은 아인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앞으로 나아갔다.
13층은 조금 특이했다.
맵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복도의 폭은 고작 3미터… 이전 층들의 1/10밖에 되지 않는 넓이다.
조금 협소하게 느껴지는 복도를 지나 메인 홀로 향하는 문을 열자.
끼이이이익-.
낡은 마찰음이 공간에 가득 울렸다.
잔뜩 긴장한 채 삐걱거리는 문을 지나는 현과 아인.
현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재빨리 주변을 확인해 봤다.
이 방에서도 마물은 한 마리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뭐야, 설마 여기가 끝인가…?’
자세히 둘러보니 홀은 막혀 있었다.
다른 장소로 이어지는 문이나 통로가 없었고, 다음 층으로 내려가든 계단도 존재하지 않았다.
‘분명 외길이었는데?’
고작 5분정도. 심지어, 아주 천천히 걸어왔을 뿐이다.
어둠속에 숨어있을 지도 모르는 위협을 경계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온 거리로 따지면 500미터 정도?
안 그래도 좁은 던전이 이걸로 끝이라면, 이전의 광대한 층들과 비교해 너무나 맥이 빠지는 결과였다.
쿠웅!
뒤편에서 거대한 울림이 들려온 것은 현이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갑작스런 소리에 깜짝 놀란 아인의 어깨가 크게 튀어 올랐다.
“무, 무슨 소리였어…?!”
“뒤쪽 문이 저절로 닫혔어!”
이어지는 정적 속에서.
찰칵. 조그만 쇳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방금… 문 잠긴 거 아니겠지?”
“글쎄….”
현은 아인의 목소리가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동화하고 있었다면, 분명 자신의 심장도 요동치고 있었을 것이다.
“잠깐만 뒤쪽을 비춰 줘.”
현은 아인에게 그렇게 부탁한 뒤, 닫힌 문을 향해 순식간에 돌진했다.
몹쓸 장난을 친 녀석이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인간이라면 대화를 시도할 수 있고, 마물이라면 아인의 마나를 채울 수 있을 테니.
콰직!
목재로 제작된 문은 힘이 낮은 현의 발차기에도 쉽게 부서졌다.
“아무도 없어…!”
하지만 지나온 곳을 곧장 살펴보았을 때.
뒤편에서 문을 닫은 녀석 따위는 발견할 수 없었다.
“여, 역시, 귀신… 이 있었어!”
아인이 패닉에 빠진 와중에도 현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문이 혼자 닫힌 이유가 뭐지?
보이지 않는 마물. 혹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힘.
어느 쪽이든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아인, 일단은 돌아가자.”
“역시 이제 끝이겠지…?”
“아니, 바로 전 층에서 마나를 꽉 채우고 다시 올 거야.”
팟! 현은 아인에게 동화한 뒤 이프리트의 발톱을 사용했다.
거대한 불꽃이 피어오르자 어둠은 한층 환해졌다.
돌아갈 땐 주위를 경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처음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13층이 시작되었던 그 위치로.
「현….」
그대로 계단을 오르려던 순간, 아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조각상 아까 부서졌는데…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어.」
「뭐?」
현은 아인이 말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섬뜩한 표정의 조각상은 이쪽을 향해 이를 드러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잠깐…. 현의 기억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아까도 웃는 표정이었나?
「아인, 저거 얼굴 바뀐 것 같지 않아?」
「얼굴…? 아까도 자세히 안 봐서 모르겠는데.」
「분명 울고 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웃고 있단 말이지.」
녹화 본을 돌려보지 않아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조각상의 여인은 분명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뭐, 뭐야, 갑자기 그러니까 더 무섭잖아!」
동화 덕분에 현은 아인이 소름이 돋는 기분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빨리 도망가!」
「그래 일단 마나부터 채우고 오자.」
현은 그대로 1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뒤편에서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웃…!」
‘역시 뭔가가 더 있어!’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계단의 통로를 가득 메웠다.
이쪽이 도망가는 걸 비웃는 듯한 목소리는 분명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 마물일까?’
현은 ‘기록 창’에서 보았던 정체모를 마물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형체가 없는 무언가가 인간을 통째로 삼켜버렸던 동영상.
게임이란 걸 알고 있어도 오싹해지는 광경이었다.
그동안 그와 비슷한 마물도 만나지 못했지.
어쩌면 그 녀석이 13층의 주인일지도 모른다.
그래. 여기가 정말로 던전의 끝이라면 이렇게 간단하게 끝날 리가 없으리라.
***
-중앙동굴 내에 던전, ‘유령의 무덤’이 발견되었습니다.
-유령의 무덤 내 마물의 정보 일부가 기록되었습니다.
유령의 무덤의 정보가 기록된 것은 현과 아인이 한창 던전을 진행하던 무렵이었다.
‘마기와 관련된 정보인가?’
‘누군가 선수를 쳤다!’
마기는 유피아 섬 탐사의 핵심 임무와도 연관되어 있었다.
당연히, 수많은 길드, 및 탐사 팀들이 유령의 무덤으로 몰려들었다.
‘뭐야, 엄청나게 넓잖아…!’
몇몇 유저들은 마찰이 일어날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자신들보다 앞선 누군가가 틀림없이 정보를 싹쓸이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걱정은 ‘유령의 무덤’ 내부를 보는 동시에 사라지게 되었다.
‘다행이다, 이러면 동선이 겹치지 않겠어.’
던전은 ‘동굴’의 형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거대한 규모의 박물관에 가까웠다.
미로처럼 복잡한 구조도 아니었고, 각 층의 기물도 많기 때문에 늦게 도착한 자들도 ‘새로운 정보’를 기록할 수 있었다.
‘이런.’
유저들이 문제를 파악한 것은 잠시 후.
초반의 마물들이 고작 100레벨 근처였기 때문에, 던전의 난이도가 쉽다고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지하 1층, 2층, 3층… 계단을 내려갈수록 그 생각은 점점 바뀌어 갔다.
웬만한 유저들은 200레벨의 마물들이 출현하는 5층 아래로 내려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물들이 등장하는 주기가 엄청나게 짧았기 때문이었다.
던전 내엔 안전구역이란 것이 없었다.
언제 어디서 마물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이렇게 되니 가장 수준 높은 탐사대도 7층, 250레벨의 마물이 출현하는 구역까지 전진하는 것이 한계였다.
‘여기 온 이후 포인트 수급량이 10배 이상 늘었어.’
‘슬슬 위층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도 사라지는 것 같고.’
던전에 입장한 유저들은 곧 어떠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깊은 층에서 기록한 정보의 가치가 더 높다!
또한, 층이 낮아질수록 경쟁자들의 수도 줄어든다!
전력이 되는 한 깊이 내려가는 게 유리하다는 뜻이었다.
‘더 나아갈 수는 없나?’
‘조금만 무리하면 다음 구역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모두 그런 사실을 깨닫자, 전력이 높은 파티나 길드끼리 동맹을 맺기 시작했다.
같은 레벨의 유저도 인원수를 늘리면 1층 정도는 더 내려갈 수 있었으니까.
그 와중, 가장 손해를 본 것은 ‘인원수’로 밀어붙이려던 탐사대들.
그들은 동굴에서도 몬스터를 피해 다니며 정보만을 기록했으니, 안전지대가 없는 던전을 깊이 들어갈 수 없었다.
몇몇은 돈을 주고 다른 탐사 팀에 동행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포인트를 목적으로 유피아 섬에 온 유저들이 굳이 돈을 선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남은 선택은 다시 바깥의 동굴을 탐사하거나, 혹은 던전 안에서 남들이 흘린 것들을 주워 먹는 것뿐.
1~4층을 왕복하는 대부분의 유저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
‘어떻게 된 거야.’
현은 당황스러웠다.
딱 봐도 수상한 마기를 풀풀 풍기는 던전.
끝까지 가면 당연히 수상한 점이 밝혀질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아무것도 없나…?’
현은 12층과 13층을 수도 없이 왕복하며 13층을 샅샅이 뒤졌다.
더 이상 내려가는 계단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여기가 마지막 층이란 건 확실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마물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끔씩 으스스한 괴현상이 일어나는 게 전부였다.
‘무슨 공포게임도 아니고.’
가장 수상한 것은 역시, 입구에 우뚝 서있는 여인의 조각상.
조각상의 표정은 자꾸만 변했다.
처음엔 울고 있었고, 다음엔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의 앞에서 ‘어둠의 가호’를 사용해 봤을 땐 정말 소름이 돋았다.
조각상이 현실에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갑자기 아인이 피로도가 꽉 찼다며 캡슐을 빠져나간 탓에 현은 휴식상태인 아인에 동화하여 탐사를 이어가야만 했다.
다행인 것은 아인이 주기적으로 접속을 갱신해 주었다는 것.
어째선지 피로도는 꽉 찼는데 잠은 오지 않는다는 게 아인의 주장이었다.
‘12층에 다른 계단이 있을지도 몰라.’
아무리 해도 성과가 없어 현은 이전 층으로도 돌아가 봤다.
그래도 새로운 통로 따위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곳저곳 뒤져본 덕분에 경험치는 상당히 올랐다.
마물들의 리젠시간이 엄청나게 짧은 덕분에 12층에서 쉴 새 없이 전투를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경험치나 벌고 있을 때가 아니지… 여기보다 효율 좋은 사냥터는 많은데.’
현은 다시 상황을 파악해 봤다.
아마도 13층이 던전의 끝.
동시에 13층은 기현상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였다.
‘뭔가 있는 건 확실한데 뭔지를 모르겠네.’
결국 떠오른 것은 어제와 같은 방법이었다.
13층에 마학자를 데리고 가서 탐지를 시켜보면 뭔가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마물이 괴현상을 벌이는 거라면 분명 신력탐지에도 반응할 테니까.
‘이런, 연락할 방법이 없잖아…!’
현은 뒤늦게 깨달았다.
어제 만났던 미나와 친구등록을 해 두지 않았다.
그땐 이런 사태가 벌어지리라곤 생각지 못했으니.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때부터 현은 내려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인’님이 휴식상태가 해제됩니다!]아인이 돌아온 것은 13층이 멀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드디어 끝난 거야?」
「아직… 진전된 건 없어. 의도치 않게 사냥만 잔뜩 했지.」
「뭐야, 진짜로 경험치는 꽤 올랐네!」
다시 접속한 아인은 피로를 말끔히 회복한 듯했다.
제법 늦은 시간인데도 졸린 기색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어제 그 여자를 다시 만나러.」
「뭐…? 지금 내가 옆에서 보고 있는데…?!」
「꼭 그 여자가 아니더라도, 신력탐지 스킬 보유자라면 누구든 상관없어.」
현은 빠르게 던전을 올라갔다.
도중에 탐사중인 유저 무리들을 볼 수 있었다.
일부는 250레벨 마물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다른 일부는 던전 곳곳의 기물들을 조사하는 중이었다.
“혹시 이중에 마학자 직업 가진 분 계신가요?”
현은 유저들 사이로 들어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순간 집중된 이목.
잠시 후 누군가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여긴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다들 열심히 탐사 부탁드려요.”
‘누구야…?’
몇몇은 두건을 쓴 남자를 수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하 7층. 이곳에 안전하게 도달하려면 최소 200레벨로 구성된 풀 파티를 이뤄야 하는데 그는 혼자서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대형 길드들의 뒤를 몰래 쫓던 유저인가?’
‘설마… 우리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건 아니겠지…?’
대부분 유저들의 그렇게 결론지었다.
남자가 방금 8층의 계단에서 올라온 모습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으니 그것이 합당한 생각일 것이다.
‘마학자가 한 명도 없다니.’
현은 올라가는 도중 마주치는 유저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유저들은 수상한 눈빛으로, 몇몇은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답할 뿐.
그중엔 무례한 녀석도 존재했기 때문에 현은 이런 생각도 들었다.
확 내 정체를 밝혀 버려?
포인트를 몰수해 버린다고 말하면 참 재미있을 텐데.
너무 바보 같은 생각이라 곧 그만두었지만 말이다.
괜히 이미지를 깎아먹으면서 위기를 자초할 필요는 없겠지.
‘벌써 2층인가?’
어느새 던전의 입구 근처까지 도착한 현.
현은 무의식적으로 미나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어제도 이때쯤 만났던 것 같은데.’
문득 어제의 기억이 스쳐갔다.
동굴의 모퉁이를 돌자마자 혼자서 지팡이를 내려치고 있는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양복을 입은 채로 벌이는 기행이 재미있어 보여서 꽤 오랫동안 지켜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 저 사람처럼…. 응?’
현이 미나를 발견한 것은 막 1층에 올라선 순간이었다.
손에 든 지팡이로 힘껏 땅을 패던 와중, 계단을 올라온 이쪽과 눈을 마주치고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아… 어제 대형 길드장님…?”
자신의 치부를 들킨 미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흐음, 이 여자구나?」
어젠 접속을 종료했던 아인이었지만, 오늘은 충분히 휴식한 덕분에 이 시간까지도 쌩쌩했다.
아인의 중얼거림과 동시, 현은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왠지 그 목소리에 살의가 담겨 있다는 착각이 들었기 때문에.
「야, 너 이상한 짓 하지 마!」
「이상하다니 뭐가?」
「방금 PK하려던 거 아녔어…?」
「아니야. 현이 보고 있는 앞에서 그럴 리 없잖아?」
‘그럼… 내가 안 보는 데선?’
현은 순간 떠오른 뒷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왠지 좋은 대답이 돌아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아인이 더 말이 없다는 건 그녀와 함께 해도 괜찮다는 뜻이겠지?
다시 그녀의 도움을 받는다면 13층의 비밀을 풀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미나를 만난 직후, 현은 먼저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포인트가 모자라나 봐요?”
그녀처럼 기업에 속한 경우 아스리안의 플레이는 평범한 노동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든 강제가 되면 흥미를 가지던 분야도 관심이 시들해지는 법이니.
“아뇨. 이번엔 그런 건 아니지만….”
현이 적당히 운을 띄워주자 미나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틀째 야근이라며 불평했다.
목소리는 조금 울먹이는 것 같기도 했다.
현은 잠깐 동안 미나의 신세한탄을 들어 주었다.
“제가 어제 길드장님 덕분에 포인트를 제법 얻었잖아요.”
“그랬죠.”
“그러니까 다시 길드장님을 만나서 이번엔 협업 제의를 시도해 보라고 시키는 거 있죠?”
“누가요?”
“제 상사가요!”
미나는 이번에도 혼자만 야근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큰 성과를 내서 은연중에 포상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일거리만 늘어났다고.
앞으로는 적당히 눈에 띄지 않을 만큼만 일할 거라 열변을 토했다.
“아니, 어느 회사가 그래요?”
“그게 제 회사죠. 그래도 길드장님이 신경 쓰실 건 없어요. 오늘은 포인트 하나도 안 벌어다 줄 거니까…!”
“그래도 돼요…?”
“상관없어요. 어차피 제 성과로 입력 안 되거든요.”
미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현은 그녀에 대해 몇 가지를 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직업은 주얼리 디자이너. 다른 말로는 보석 세공사.
포인트를 모으는 이유는 쉐이드 상점에서 판매하는 다양한 종류의 마석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또한, 상사와의 갈등에 상당한 고초를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짜로 성과를 다 뺏긴다고요? 상사한테? 왜 그걸 눈 뜨고 보고만 있어요?”
“제가 정치력이 좀 딸리거든요. 잘리기 싫으면 적당히 소리 안 들을 정도로만 일해야죠.”
“….”
“난 순수하게 디자인 쪽을 하고 싶었는데! 맨날 혼자서 세공 기술까지 열심히 공부했는데…!”
정말일까?
현은 회사는커녕 특정 집단에도 어울려 본 적이 없었으니 미나의 심경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만 들어봤을 땐 그 회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맞아, 저를 탐사대로 끌어들인 것도 그 자식이었어요!”
“그 사람 밑에서 일해요…?”
“네, 제 직속 상사인데 조금만 실수하면 얼마나 까칠해지는데요! 가만있어 봐요. 그 상사 얼굴이나 보여 드릴게요.”
미나는 조금 폭주하는 듯했다.
팟! 허공에 스크린이 나타나고, 양복 입은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응…?’
순간, 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놀랍게도 낯이 익은 남자였다.
「현, 이거 그 녀석 아니야?!」
아인도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눈을 빛냈다.
「맞네! 그 사람!」
유피아 섬에 도착한 직후 마을에서 정보 도둑이냐며 시비를 걸어왔던 한 유저.
심지어 같은 양복을 입고 있으니, 동일인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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