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110)
스스로 빛나는 것
죽음으로 가는 길
다른 세상의 이야기
혼돈의 단서
갑작스런 계약
루이즈 키우기
마물의 유적지
메이데이의 사정
흔들리는 영혼 (1)
스스로 빛나는 것
‘이건 우연이 아닌가?’
현은 가만히 생각해 봤다.
유피아 섬에 온 수백 명의 유저들 중 회사단위로 이루어진 탐사 팀은 많지 않다.
그 중 우연히 마주친 두 사람이 아는 사이라도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양복 코스튬을 맞춘 두 사람이라면.
미나는 상사에게 쌓인 것이 많은 듯했다.
말이 터지기 시작하자 그녀의 입에선 끊임없이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몇 주간 정시퇴근을 해 본적이 없단 것, 참여 명단을 조작하거나 업무 외의 일을 시킨다는 것까지….
분명 그건 외부인에게 말할 내용들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그녀의 불만이 폭발할 만큼 쌓여 있었다는 반증일지도 몰랐다.
미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동정심이 일지만 내가 끼어들 순 없겠지.
한쪽 말만 듣고 판단할 수도 없을뿐더러, 이것은 그녀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으니 말이다.
‘의외로 복잡한 사정이네.’
정말일까?
미나의 말 중 절반만 사실이라도 절대 그 회사에 다니고 싶지 않았다.
현은 길드 내에 비슷한 일이 없는지 생각해 보았다.
생각해 보면 길드원들을 무급으로 너무 부려먹고 있는 건지도 몰라.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쌓인 불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곪을지도 모른다.
살론과 타르타르에게도 좀 더 신임을 받아야 할 테고. 그리고 역시 지니는 지금보다 대우해 주는 게 맞겠지?
물론 아인은 굳이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오늘도 야근인데…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그러니까, 길드장님도 괜히 신경 써주실 필요 없어요! 전 대충 시간만 때우다가 갈 거니까요.”
한바탕 불만을 쏟아낸 미나는 개운해진 웃음을 지었다.
“길드장님이랑 만난 것도 녹화 본만 지워둔다면 안 들키니까요!”
미나는 일하려는 의지 자체가 사라진 듯했다.
하지만 현은 아직 신학자로서 그녀의 능력이 필요한 상황이었으니 이쪽에서 용건을 꺼내들기로 했다.
“일은 안 해도 시간 때우는 건 상관없는 거죠?”
“네? 그렇긴 한데….”
“그럼 저 좀 도와주실래요?”
“길드장님을요?”
미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상대 쪽에서 먼저 제안을 할 줄 몰랐다는 듯.
“저만 잘 따라다니면 오늘도 포인트를…”
말을 꺼내던 도중, 현은 잠시 멈칫했다.
오늘은 포인트를 벌어다 주지 않겠다던 미나의 사소한 반항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포인트를 언급하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많은 포인트라도 그녀에게는 무의미한 소리처럼 들릴 것이 분명했다.
“음… 그보단 다른 게 낫겠네. 어쨌든 절 따라오시면 후회할 일은 없을 거예요.”
“그쪽을요…? 하지만….”
현이 걸어가는 방향을 보며 미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내려가는 건가요…?”
“네. 그게 왜요?”
“잘못해서 죽으면 큰일 나거든요! 아래층엔 위험한 몬스터들이 엄청 많다던데….”
“몬스터가 아니라 마물이에요.”
“그러니까, 마물이 몬스터보다 더 위험하잖아요!”
‘꼭 그렇지는 않은데….’
마물과 몬스터의 차이는 마기의 유무. 어느 쪽이 더 위험하다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내려갈수록 위험한 마물이 출현하는 것 또한 사실이기는 했다.
“이번에 죽으면 세 번째라서, 시말서 써야 한단 말이에요…!”
“괜찮아요. 그 정도는 지켜줄 테니까.”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잖아요, 만약… 죽으면요?”
“그럼 책임질게요.”
“책임… 이요? 저를요?!”
“네. 웬만해선 안 죽겠지만.”
「현, 뭐야 그 발언?!」
그 순간, 들려온 아인의 목소리.
아인이 함께하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현은 특별히 말을 주의하고 있었다.
「뭐가?」
「쓸데없이 너무 친절하잖아!」
아인의 말에 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미나는 쉐이드 퀘스트를 진행 중인 유저다.
덕분에 도시가 유지되고 길드가 존속할 수 있는 것이니, 그녀와 같은 사람들을 매정하게 대한다면 그 행동은 언젠가 자신의 손해로 돌아오리라.
「특별한 의미는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동화가 있으니까.」
「그래도….」
「이 정돈 괜찮지 않아? 결과적으로 우릴 위한 일이잖아. 우리 미래를 위해서 말이야.」
「우, 우리 미래?」
순간 현은 양 뺨이 살짝 달아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동화로부터 전해져 온 감각이었다.
「그렇다면야….」
사람들은 자신이 존중받기를 원한다.
미나가 저기압이었던 이유도 회사에서 노예와 같은 생활을 강요받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저… 죄송해요. 아까 한 말은 다 잊어주세요. 제가 못할 말을 한 것 같아서….”
미나는 뒤늦게 후회했다.
한차례 울분을 토하고 나니 머리가 차가워진 걸까?
아무리 화가 나도 자신이 속한 회사를 비난하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 그리 좋은 모양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현은 미나의 심정을 이해했다.
무엇이든 강제적인 일이 되면 흥미를 잃는다.
어쩌면 그녀는 다른 유저들처럼 아스리안을 즐길 기회도 없었을지도 몰라.
‘조금은 재미를 느끼면 좋을 텐데.’
게임은 본래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닌가.
현은 미나가 아스리안을 노동이라 여기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도와주시는 거죠?”
“네, 죽지만 않는다면…!”
“그건 걱정할 필요 없을 거예요.”
유저들을 지나치며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현은 아인과, 그리고 가끔씩은 미나와도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여긴 어디에요…?”
“10층이요. 여기부턴 던전 구조가 조금 달라지더라고요.”
“10층이라고요?! 하지만 퀘스트에 기록된 정보는 8층까지밖에 없던데….”
미나는 현의 말을 쉽게 믿지 못했다.
이동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동안 마주치는 몬스터도 거의 한 방에 죽어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런 정보는 아직 기록된 게 하나도 기록되지 않았는데요?!”
또, 퀘스트의 기록 창을 보면서도 재차 물었다.
현은 미나의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탐사 퀘스트의 ‘자동 보고’ 기능을 해제해 뒀어요.”
“해제…? 어째서….”
“음. 굳이 다른 사람들 몫을 뺏을 필요가 없으니까?”
“…?”
미나의 의문이 더해졌다.
대형 길드장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설마 랭커인 걸까?
미나는 직접 랭커를 만나본 적은 없다.
다만, 랭커 한 명은 웬만한 상위권 유저들의 능력과 비교 불가능하다고 들었다.
랭커라면 포인트 같은 건 필요 없는지도 모른다. 10층에 도달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마침 그는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주는 상황. 그 호의를 이용한다면. 어쩌면….
“그쪽이 기록하고 싶으면 제 눈치 안 봐도 되요.”
“…아뇨.”
미나는 고개를 저으며 순간 떠오른 유혹을 떨쳐버렸다.
회사 일에 너무 시달렸나? 이런 쓸데없는 생각이 떠오르다니 말이야.
“괜찮아요. 오늘은 저도 일할 생각이 없거든요.”
[‘자동 보고’ 기능을 해제합니다!]미나는 현을 따라 기록 설정을 바꾸며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대량의 포인트를 얻게 되면 오늘의 녹화본을 증거 자료로 제출해야 하겠지?
그러면 길드장님과의 접촉을 강요받을 게 뻔하고. 그럴 바엔 안 하는 게 나아.
미나는 보잘 것 없는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준 유일한 사람을 더 이상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전 자체 퇴근이에요!”
“자체 퇴근…?”
“접속 종료는 못 하니까. 땡땡이라는 거죠!”
미나도 한때는 아스리안을 즐겼다.
회사에 입사하기 전. 80레벨 계정을 가지고 있던 것이 그 증거.
같이 할 친구가 없어서 혼자 인터넷 공략을 찾아보며 단순한 사냥을 하는 정도였지만, NPC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런 아스리안이 일의 일부가 되면서부터는 지루한 일터로 변해버리고 말았지.
오랜만에 예전의 기분을 되살려보니 괜스레 신이 난 그녀였다.
그렇게 한참 던전을 내려가던 중.
현이 손을 들어 미나를 멈춰 세웠다.
“잠깐만.”
“네…?”
“여기서 기다려요. 앞쪽에 위험한 게 있어서.”
11층의 끝.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날카로운 이빨이 현을 덮쳐왔다.
현이 공격을 슬쩍 피하고 고개를 들자 이전에 보았던 녀석이 그곳에 있었다.
신화 속 동물. 켈베로스를 본떠 만들어진 머리가 세 개 달린 마물.
일반 마물이지만, 유저들이 11층에 도착하자마자 기습해오기 때문에 평범한 유저들은 영문도 모르고 이 녀석에게 죽을 수 있었다.
물론, 예상하고 있다면 손쉬운 사냥감일 뿐이지만.
푸욱!
현이 프로시아의 얼음 칼을 심장에 박아 넣자 힘없이 축 늘어진 녀석은 곧 빛으로 흩어졌다.
사냥이 끝나기까지는 고작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와….”
뒤에서 지켜보던 미나의 입이 벌어졌다.
“그거 죽은 거예요?”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이렇게 깔끔하게 움직이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방금 잡은 몬스터가 몇 레벨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강해 보였는데. 정말로 랭커인가 봐.
어쩌면 말로만 듣던 최상위 랭커들 중 한 명일까?
혼자 여러 가지를 추측해보는 미나였지만 아스리안에 관한 지식이 부족해서 그런지 현이라는 이름을 떠올릴 수는 없었다.
‘마석이네.’
그리고 마침. 바닥을 살피던 현은 눈을 반짝였다.
몬스터가 사라진 자리엔 푸른 광택의 보석이 남아 있었다.
네임드도, 정예도 아닌 마물로부터 마석이 드롭 될 확률은 아주 낮다.
“앗, 저건…!”
곧이어 미나 또한 숨을 삼켰다.
애초에 마석에 관심이 많던 미나는 한눈에 드롭 된 아이템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형태로 보아 12등급 마석이 틀림없었다.
‘마석이 드롭된 건가?’
유저들의 수준이 향상되며 마석의 가치는 서서히 떨어지고 있지만 고등급 마석은 아직도 수요가 공급을 압도한 탓에 여전히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현이 심드렁하게 인벤토리에 마석을 넣었기 때문에 미나는 순간 자신이 착각한 줄로만 알았다.
왜 반응이 저렇지?
그냥 잡템이었는데 내가 잘못 본 거야?
“방금… 마석 아니었나요?”
“맞아요. 미궁도 아닌데 운이 좋았네요.”
“그거… 색깔로 봐서 12등급이었던 것 같은데….”
말을 이어가던 미나는 곧 입을 닫았다.
남의 물건에 괜한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일까 해서.
“와, 보는 것만으로 등급을 알아요?”
하지만 현은 어색함은커녕 흥미롭다는 듯 미나의 말에 오히려 감탄한 기색을 보였다.
“신기하네, 10등급이 넘어가면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구분하기 힘들 텐데.”
“그, 그쵸? 맞죠? 마석은 하도 많이 봐서 좀 알고 있거든요!”
“아참, 보석 세공사라고 했죠?”
“맞아요…! 주얼리 디자이너에요!”
익숙한 분야의 화제가 시작되자 미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마석에 관해서는 웬만한 지식들은 알고 있다 자부하는 미나였다.
고등급 마석들을 다뤄보진 못했지만 나중을 위해 관련 정보쯤은 공부해 두고 있었다.
“…그러면 마석 가공도 할 줄 알겠네요?”
현이 살짝 말문을 열어주자 미나는 자신이 아는 지식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맞아요! 현실의 보석 세공법과 상당히 비슷하면서도 다르거든요! 가공방식에 따라 색채를 변화시킬 수도 있고… 또, 자체 발광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 대단하죠?”
“음….”
“그 뿐만이 아니에요. 제인 카슈마르라는 분은 세공만으로 장신구의 ‘옵션’을 부가한다고 해요!”
긴 이야기 중엔 현이 관심을 가질 만한 화제도 있었다.
제인 어쩌고 하는 사람의 정체는 최초로 아스리안에 현실의 지식을 접목시킨 주얼리 디자이너라고 한다.
“아이템에… 옵션을요?”
“네. 전 아직 거기까진 안 되고 발광현상을 일이키는 정도지만… 언젠간 저도 비슷한 수준에 오르는 걸 목표하고 있어요!”
‘세공사’직업을 갖지 않았음에도 옵션이 붙은 장신구를 제작하는 유저가 존재한다는 것은 현에게도 새로운 정보였다.
그래도 아스리안의 ‘진짜 보석 세공사’들보다 뛰어난 옵션을 뽑아낼 순 없다는 모양이지만.
애초에 디자이너라는 이름이 붙은 사람들이 아이템의 옵션에 목을 매진 않으리라.
그들이 만드는 보석은 보석 자체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유저들이 타겟일 테니까.
이처럼 아스리안에 다양한 직업군이 생겨나는 이유는 누군가의 수요가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미나의 이야기는 아이템 옵션 외에 관심이 없던 현에겐 조금 생소한 이야기였다.
‘보석이라.’
현은 한동안 미나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최근 그녀는 ‘발광 세공법’이란 것을 익혔다고 말했다.
마석을 스스로 빛나게 만드는 기술.
현실의 주얼리 디자이너들도 아스리안의 마나가 지닌 특성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미나의 목소리엔 은근한 자부심이 섞여 있었다.
해당 기술을 익히기 위해선 많은 걸 공부해야 하는 동시, 손재주가 굉장히 뛰어나야 한다는 모양이었다.
‘신기하네.’
현은 그쪽 분야에 관해선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는 척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인터루프에서 찾아낸 보석에 관한 이야기를 미나에게 들려주었다.
“마석의 ‘발광 현상’은 내부에 상반된 종류의 마나가 마찰할 때 발생한다.”
“네…?”
현이 갑자기 중얼거린 순간 미나의 말이 뚝 멎었다.
“…라고 라피세이가 말했다네요.”
“그게… 누군데요?”
“500년 전 보석 세공사요. 지금 세공법의 대부분은 이 사람이 정립했거든요. 기록에 따르면 비대칭적인 형태를 만들면 마찰을 유도하기가 수월하다는데…”
현은 인벤토리에서 방금 얻은 마석을 꺼냈다.
인터루프에 적힌 방법과 미나가 방금 말해준 내용을 되짚어 보면서. 주머니칼로 마석을 강하게 다듬는 순간.
쩌저적!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마석은 금이 가서 허무하게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응집된 마나의 결정체가 허공에 흩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 아…!”
방금 12등급짜리 아니었나?!
미나는 자신의 것도 아닌 마석이 부서지는 광경에 마구 탄식을 터뜨렸다.
자신의 연봉 몇 배에 달하는 물건이 허무하게 날아갔기에.
세공은 조각이 아닌데… 저런 식으로 보석을 깎아내면 당장 부서져 버리는 게 당연한데…!
“역시 안 되나.”
‘…?’
“비대칭의 결정을 만들면 된다는데, 어떻게 하는 건지는 모르겠네.”
하지만 마석을 부숴먹은 주인은 정작 태연했기에 미나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과민반응하고 있는 건가?
제약된 환경에서 구박만 받다 보니 실수에 너무 민감해진 건지도 몰라.
“아, 생각해 보니 12층에 있는 보석도 발광하던 건가?”
현이 기억을 떠올린 것은 미나와 이야기하던 어느 순간이었다.
아스리안의 밀폐된 공간이 어둡지 않은 까닭은 어디에나 있는 마력등불이 어둠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던전의 12층과 13층엔 마력등불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13층은 암흑처럼 깜깜했던 것도 그 때문.
반면 12층은 전혀 어두운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벽 곳곳에 장식된 기물들이 찬란히 발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 잘 됐네. 보석 좋아하시죠?”
미나의 입이 벌어진 것은 일행이 12층에 도착한 때였다.
“여기는….”
“신기하죠? 이제야 알겠어. 이곳의 환경은 마석의 발광 현상을 이용해서 만들어졌을 거예요.”
12층의 풍경은 이전에 지나온 층과 너무 달랐다.
옛날이야기 속의 궁전처럼 형형색색의 보석들로 장식된 복도와 기둥들.
갖가지 보석들은 어둠속에서 스스로 빛을 내뿜고 있었다.
현도, 아인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한참 동안 감상에만 빠져 있었다.
주얼리 디자이너인 미나라면 이 장소가 좀 더 특별하게 느껴질질 것은 당연했다.
“좀 아쉽겠지만 벽에 붙은 걸 떼어갈 순 없어요. 떨어진 순간 바로 부서져 버려서.”
“판타지….”
“네? 하하, 그쵸? 완전 판타지같죠?”
현은 우뚝 멈춰선 미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자신이 일방적으로 부탁하는 상황이기도 하고, 미나가 아스리안을 일이 아닌 게임으로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 모습이 꽤 뿌듯하기도 했으니까.
보석의 빛에 압도당한 미나는 마물이 몰려드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하는 기색이었기에 현은 주위의 적들을 조용히 처리해 주었다.
미나가 정신을 차린 것은 한참 만이었다.
그 타이밍에 맞춰, 현이 슬쩍 말을 걸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요?”
“네…? 네! 엄청… 예뻐요. 멋있기도 하고! 그런데….”
갑자기 미나의 가슴이 간질거렸다.
눈앞의 남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름도 모르는 유저.
먼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나는 의도적으로 개인정보에 관한 질문을 피하고 있었다.
“나중에 레벨이 높아지면 얼음가시 던전이란 곳도 찾아가 보세요.”
“얼음… 던전?”
“얼음가시 던전이요. 꽤 유명한 곳이라 인터넷에 치면 바로 나와요. 여기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대신 웅장하죠. 거기 있는 수정들도 아마 발광 세공되어 있을 거에요.”
은은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남자.
문득, 그의 모습이 너무나 자유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미나는 불쏙 솟아나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저. 데려가 주실 수 있나요?”
그렇게 말하고 3초 뒤에 당황했다.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이 듣는 방향에 따라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의 반응은 덤덤했다.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앗, 아니 제 말은…!”
“그쪽 전문분야가 저희 길드가 추구하는 방향성이랑 너무 달라서, 아쉽지만 길드가입은 힘들 것 같아요.”
미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데려가 달라는 의미를, 그는 이상하게 해석하지는 않은 듯 했다.
이걸로 민망한 상황은 넘길 수 있겠지.
“아, 아뇨… 나도 모르게 엉뚱한 말이 나왔네! 방금은 아무 의미도 아니에요! 하하…!”
혼자서 멋쩍은 웃음을 짓는 미나.
아인은 그런 미나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좋지 않은 예감이 느껴졌기 때문에.
현이 그녀를 길드원으로 받겠다고 말하면 어쩌나 덜컥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듯했다.
「흐응, 다행이네.」
‘…?’
그리고 현은 갑자기 들어오는 서늘한 기분에 깜짝 놀랐다.
「조금은 맘에 안 들지만… 이번엔 봐 줄게.」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도중 아인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이런 걸로 고민할 필요가 없겠지?
이미 동화로 알고 있잖아.
현이 특별한 감정을 품는 사람은 자신 외에 없을 테니까.
뭣보다 조금 전, 게임 속에서라면 뭐든 들어 주겠다는 허락을 받아낸 참이다.
현실과 달라. 여기선 힘도 내가 더 세니까… 정말로 뭐든 할 수 있는 거겠지…?!
「뭘 봐준다는 거야.」
「…글쎄.」
무언가를 감지한 현의 물음에 아인은 수상한 웃음으로 답했다.
「그냥. 나중에 뭘 할지 생각 중이었거든.」
「…?」
상대방의 기분을 알 수 있는 동화도 세세한 생각까지 읽어낼 순 없었다.
현은 아인의 웃음에 괜한 불길함을 느꼈다.
그렇게 잡담을 하면서도 일행은 계속해서 던전을 내려갔다.
12층을 지나 13층으로.
13층은 이전의 계층들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로 협소한 장소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또한 12층의 화려한 분위기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가장 큰 장애물은 칠흑 같은 어둠.
이곳에선 성화(聖火) 스킬이 발동되지 않기 때문에 아인의 불꽃에 의지하여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1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는 중, 현은 미나에게 물었다.
“라이트(Lignt)마법 쓸 줄 아세요?”
마법사, 사제 계열은 누구나 익힐 수 있는 마법이지만 미나는 해당 스킬을 보유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없지만, 비슷한 효과는 낼 수 있어요!”
“어떻게요?”
“아까 그 발광 세공이요! 재료로 사용할 마석만 있다면… 아!”
말을 이어가던 도중 탄식을 터뜨렸다.
가장 중요한 재료인 마석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게 라이트 마법만큼이나 밝은 거였어요?”
그 순간 들려온 현의 목소리.
당황한 미나는 허둥지둥 설명했다.
“가공법에 따라 광도를 조절할 수 있거든요! 최대한 밝게 만들어도 라이트만큼은 안 되겠지만요….”
“촛불 정도 밝기만 되도 상관없어요.”
라이트는 물론 빛을 밝히는 마도구도 없는 상황이다.
오로지 아인의 마법에만 의지해야 하는 지금, 전등을 대신할 물건이 있다면 뭐든 환영이었다.
“사실은… 그… 촛불보다도 좀 어두운데.”
“그래요?”
“네 그냥 살짝 빛나는 정도라서요….”
“음.”
현은 고민에 빠졌다.
아인의 마나소모를 억제할 수 있는 것은 아주 큰 메리트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발광’의 의미가 없었다.
밝기가 얼마나 되는지는 미리 시도해 보는 편이 좋겠지?
“발광세공에 특별한 문제는 없나요? 예를 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거나.”
“시간은 몇 분이면 충분하지만 재료로 사용할 마석이….”
“일단 해 보죠.”
미나는 현이 불쑥 내민 푸른 결정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마석. 그것도 10등급짜리.
마석의 공급량이 많아지며 시세가 폭락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처음의 가격이 워낙 높았던 10등급 마석은 지금도 일반 회사원들의 월급과 비슷한 가격에 거래되는 중이었다.
“우웃…!”
미나는 얼떨결에 마석을 받아들었다.
물건을 건네준 상대의 의도를 짐작하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실패할지도 몰라요….”
발광 세공법의 성공률은 절반 이하.
그것도 값싼 저등급 마석으로 연습하던 때의 결과다.
10등급 마석에도 동일한 성공률이 적용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라면서요. 실패하면 다시 하면 되죠.”
느긋한 현의 말에 미나는 슬쩍 눈치를 보았다.
정말일까?
미나도 유혹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10등급 이상의 마석을 다뤄볼 기회는 좀처럼 없기 때문이었다.
‘정말 깨먹어도 별일 없겠지…? 내가 물어내야 하는 것 만 아니라면.’
혼자 끙끙거리던 미나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한참 만이었다.
***
미나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창백해지고 있었다.
마석의 등급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지는 특징들을 고려하지 못했어.
10등급 마석의 세공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았다.
연속으로 세 번이나 현의 마석을 깨먹었을 땐 목소리마저 울먹임으로 떨리고 있었다.
“저, 죄, 죄송합니다!”
“음, 이번에도 실패인가…?”
“마무리 단계에서 살짝 계산이 어긋나 버려서…! 죄송해요!”
“아니, 상관없다니까 왜 그래요. 애초에 제가 필요한 물건을 쓰려고 만들어달라는 건데.”
현이 등을 떠밀어주지 않았다면 미나는 포기를 선언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점점 실수가 줄어들고 있잖아요. 이제 곧 성공하겠네.”
“하, 하지만….”
“재료 걱정은 하지 마요.”
현은 인벤토리에 같은 물건이 이천 개쯤 남았다고 말해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뒤에 보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인간은 집중력이 떨어지는 법이니까.
그 의도가 어느 정도 먹힌 걸까?
미나는 더 이상 실수하지 않겠다는 듯 서슬 퍼런 눈빛으로 마석에 시선을 맞추었다.
“…….”
발광 세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지식.
모든 마법은 발현되기 직전 속성이 변화한다.
예를 들어 화염의 마법엔 불의 마나가, 얼음의 마법엔 냉기의 마나가 필요하다.
무(無)속성의 마나에 속성을 불어넣기 위해선 마석의 코어와 외곽을 구분하는 눈썰미와 각 부분들이 가진 다양한 특징들을 알고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필요한 것이 손재주다.
정확한 타이밍에 미세한 부분에 속성을 불어넣는 일은 아주 고난이도 작업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발광 세공’은 여러 종류 속성의 마나가 사용되기 때문에 웬만큼 숙련된 사람이 아니라면 흉내 내기조차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됐다…!”
그러니 처음 다뤄보는 10등급 마석을 몇 번 만에 발광세공해낸 미나는 아주 놀라운 일을 해낸 것이었다.
매일같이 인터넷 영상을 보며 연습하고, 또 혼자 연구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불가능한 업적이었다.
“됐어요! 빛나고 있다고요!”
미나는 뛸 뜻이 기뻐했다.
찬란히 빛나는 투명한 결정은 사방으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틀림없는 발광 현상.
은은한 푸른빛을 내뿜는 보석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형태의 물건이다.
미나는 처음으로 직접 만든 보석이 넋이 나갈 듯 아름답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많이 어두운데….”
하지만 현의 감상은 미적지근했다.
“좀 더 밝게는 안 돼요?”
“네…? 저, 이렇게 밝은 걸 만든 게 처음인데….”
미나는 자신이 세공한 마석을 바라보았다.
여태껏 수백, 어쩌면 수천 번이나 세공 연습을 해 봤지만 그 어느 것도 이만한 광도를 지니는 것은 없었다.
재료가 된 마석의 등급이 밝기에 영향을 끼쳤는도 모른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단 많이 어두워서요.”
여전히 촛불의 밝기에도 미치지 못했기에 현은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성화보다 못한 아인의 불꽃도 촛불에 비할 수 없이 밝았어.
이 정도 밝기의 마석을 손전등으로도 쓰긴 애매하겠지.
“몇 번 더 해 보죠. 좀 더 부탁드려도 되죠?”
“네? 네! 물론이죠!”
미나로서도 현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10등급 마석을 잠깐 세공해 본 것만으로도 여태껏 알지 못하던 문제점들을 깨달았다.
고등급 마석은 코어와 외곽의 구분선도 희미했고, 구역별 결정도도 더욱 세분화되어 있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이렇게 값비싼 재료들로 연습해 볼 기회가 있을까?
“고마워요. 그럼.”
그때부터 현은 만족스런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미나에게 재료를 넘겨주었다.
안 쓰는 마석은 인벤토리에 넘치도록 쌓여 있었다.
10등급. 11등급 12등급… 등급이 올라갈수록 발광현상을 일으키는 마석의 광도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였다.
“…….”
값비싼 재료에 부담스러워하던 미나도 어느새 진지한 얼굴로 변했다.
은은한 미소가 걸린 표정으로.
보석을 다루는 것은 미나가 가장 자신있어하고, 또 좋아하는 일이었다.
그런 일에 몰입한 사람은 다른 것을 신경 쓰지 못하게 되는 법.
언젠가부터 미나에게선 전문가의 분위기가 물씬 피어나고 있었다.
현에게 말을 건넬 때에도 위축된 기색이 완전히 사라졌다.
“비대칭을 만든다는 거.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요.”
이전에 현이 혼자 중얼거렸던 말이 미나의 입에서 다시 튀어나왔다.
인터루프에 적혀 있던 정보.
정작 찾아낸 현 본인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던 문장이었지만 미나는 어떠한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경계선 구역에 반대속성의 마나를 섞으면 발광현상이 강해지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요?”
“네. 처음엔 실수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실수가 아니었네요!”
현은 미나의 작업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보석 디자인이란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복잡한 일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주얼리 디자이너는 다들 이 정도는 하는 건가?’
자신은 당연히 이쪽 분야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 그저 느낌만으로 추측해 봤다.
‘아닐 것 같은데.’
일에 몰두한 그녀의 모습이 왠지 지니의 모습과 겹쳐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 미나는 지니처럼 자신의 일을 좋아하고 또 끊임없이 노력하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슬쩍 한 마디 해준 충고를 바로 이해해서 적용하는 걸 보면 재능도 없진 않을 것이다.
정작 회사에선 마석 세공 일을 시작하지도 못했다지만.
“봐요! 저, 이번엔 대성공이에요!”
어느 순간 미나가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수십 번에 걸친 마석 세공이 끝난 순간이었다.
“광도를 최대한 높여 봤어요! 이정도 밝기면 더 이상 보석이라고 부르긴 힘들겠지만… 아…!”
그리고 뒤늦게 자신이 세공한 마석이 14등급짜리였음을 깨달았다.
방금 내가 만진 게… 사진으로밖에 본 적이 없던 그 물건인가?
“…….”
그리고 현은 집중에 빠져있던 미나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세공된 마석을 살펴보았다.
발광현상만 일으키면 충분하다 했는데도 보석은 티 하나 없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주얼리 디자이너는 무엇보다 아름다움을 가장 우선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그 보석은 문외한이 봐도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건… 굉장한 작품이네.’
현은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기에 회사란 것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상사의 덕목은 부하직원을 그 능력에 맞게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
의욕이 가득하고 재능도 충만해 보이는 미나가 여태껏 잡일만 해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째서 그녀는 여태껏 한 번도 실무를 경험해 보지 못했을까?
말단 직원이라서? 아니면 줄을 잘못 섰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길드장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살짝 화가 나는 결과였다.
무슨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회사기에 이러한 상황이 연출되는지. 미나 정도의 재능이 왜 그런 곳에 얽매여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던 현은 입을 열었다.
“회사는 왜 계속 다니는 거예요?”
“네…?”
미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하… 그게 뭐에요!”
“제가 보기엔 그냥 그만둬도 될 것 같은데.”
도시를 통째로 계획하고 쉐이드 길드의 기틀을 잡아가면서, 현은 다양한 것들을 경험했다.
느낀 것도 많았다.
지금의 아스리안은 기회의 땅. 자고 일어날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는 시기.
개인이든 단체든 상관없이, 누구든 원하는 것을 시도해 볼 수 있는 때였다.
물론 회사 같은 단체들이 개인보단 좀 더 체계적이겠지만, 개인이라 해서 그들을 따라잡지 못하란 법은 없다.
“회사에선 아직 세공도 못 하게 한다면서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렇게 말하는 건 무책임한 말일까?
물론 자신이 미나라는 사람을 온전히 파악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꿈에 대한 열정과 재능은 엿볼 수 있었다.
“아니면, 당장 그만두면 굶어 죽는 거에요?”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요즘 시대에….”
“열정도, 재능도 충분한데, 그럼 그냥 혼자 다 해먹는 게 훨씬 낫지 않아요?”
현실에선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아스리안. 상식을 벗어난 일들이 가능한 세상이고, 또 실제로 그런 일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나고 있다.
현은 아스리안에서 가장 많은 ‘최초’의 업적을 지닌 유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다.
만약 미나가 독립한다면. 과정이 힘들지 몰라도 그녀가 마지막까지 실패하는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저 회사 그만두면 길드장님이 받아주시는 건가요?”
“네? 그건 아니고….”
“후후, 저도 농담이었어요!
“으음….”
“그야 저도 퇴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인생이란 게 어쩔 수 없는 거죠, 뭐. 그래도 위로해 주시니 조금 힘이 나네요. 저 누구한테 그런 칭찬 들은 건 처음이거든요!”
미나는 미소로 답했다.
현의 말을 농담이라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군요.”
현은 같은 화제를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생판 남인 자신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어느 쪽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미래는 아무도 볼 수 없다. 누구의 판단이 맞는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다만 조금 아쉽기는 했다.
미나가 파고든 분야가 보석이 아닌 다른 것이었다면… 자신은 그녀를 쉐이드 길드원으로 받으려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마침내 도착한 13층.
발광하는 마석이 어둠을 밝히자 주위의 풍경이 환히 드러났다.
언제든 귀신이 튀어나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장소.
당장 입구의 조각상부터 살기가 느껴지는 눈동자를 부릅뜨고 있었다.
으스스한 분위기를 감지한 미나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위험하진… 않을까요?”
“여기 분위기가 좀 그렇긴 하죠?”
현도 처음엔 저 귀신들린 조각상에 깜짝 놀랐다.
미나가 무섭다고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다행히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저, 더 이상 죽으면 안 되는데….”
미나는 그저 강력한 몬스터가 튀어나오면 어쩌나 우려할 뿐이지, 공포에 질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귀신보다 상사의 질책이 더 무섭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점은 걱정 안 해도 돼요. 여기엔 마물이 한 마리도 없는 것 같으니까.”
“아, 그럼 죽을 일은 없겠네요!”
“다른 문제는 없죠? 무섭다거나 그런 건….”
“괜찮아요, 저 공포영화는 잘 보거든요!”
“아 그건 다행이네요. 누구랑 달라서.”
현은 슬쩍 아인을 떠올리며 웃었다.
아인은 괴현상이 몇 번 일어나자 곧바로 휴식상태로 전환했었지.
지금은 아직 도망치지 않고 있지만.
「현, 그 누구란 게 설마 나야?」
「어, 어…?」
그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현은 순간 당황했다.
아인이 은근히 무서운 걸 싫어하는 주제에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단 사실을 잠깐 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흐응. 여태껏 그런 생각이었다니 좀 괘씸하네. 좋아, 오늘은 현에게도 무서운 게…」
아인은 말을 흐렸지만, 현은 왠지 뒷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너에게도 무서운 게 뭔지 알려줘 볼까? 라고 말하려던 거겠지?
게다가 민망함과 묘한 기대감이 동시에 동화로 전해져 오고 있으니 그 의미를 추측할 수 있었다.
「아스리안에선 뭐든 해도 상관없다고 했지? 좋아. 내가 힘을 세배쯤 더 올리면 현은 완전히….」
「야, 잠깐만, 넌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건데!」
「아, 안 들리니까 상관없잖아!」
아인은 가끔씩 이렇게 생각 없이 폭주할 때가 있어.
가만히 놔두면 큰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현은 재빨리 아인의 입을 가로막았다.
다른 건 상관없지만, 쓸데없는 이유로 트롤링을 벌이려는 것만은 막아야만 했기에.
그나마 다행인 건 옥신각신하느라 아인이 13층의 으스스한 분위기에도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제가 뭘 하면 되죠?”
미나는 복도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괴기스런 기물들을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걸 보면 공포에 면역이 있다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현은 아인에게 진땀을 빼던 걸 멈추고 미나의 질문에 답했다.
“신력 탐지를 사용해 주세요. 13층 전체를 훑어볼 거예요.”
“여길 전부요…?”
“걱정하지 않아도 되요. 맵이 넓지 않으니까.”
13층의 구조는 로비, 복도, 그리고 방 하나가 전부였다.
샅샅이 뒤져도 20분이면 충분히 모든 장소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오싹하네.’
현은 발광하는 마석의 불빛에 의지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탐사를 시작한 뒤부터 목소리가 멎었다.
미나는 마법에 집중하느라, 아인은 긴장한 탓에 대화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또각, 또각, 발소리만 복도에 메아리치던 어느 순간.
‘응?!’
갑작스런 인기척을 느낀 현은 고개를 홱 돌렸다.
깜짝 놀란 아인이 말을 더듬었다.
「무, 무, 무슨 일이야…!」
「방금 발소리가.」
마석을 등불 삼아 지나온 길을 비추어 봤다.
뒤쪽에서 발소리가 겹쳐 들리는 기분이었는데?
그러나 현이 뒤편을 돌아보았을 때, 그곳엔 사람은커녕 마물이나 몬스터 한 마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착각이었나?’
정적 속에서 현은 생각에 빠졌다.
전에 왔을 때도 13층엔 이런 괴현상이 일어났었지.
아스리안이 아무리 판타지라 해도 일어날 수 있는 일과 불가능한 일은 구분되어 있다.
형체 없이 소리만 내는 몬스터. 볼 때마다 표정이 변하는 조각상. 그런 이상한 것들은 기억에도 없고, 인터루프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 마치… 현실도, 아스리안도 아닌 다른 세계에 들어선 것만 같아.
“신력탐지에 별다른 반응은 없어요?”
현은 13층의 모든 장소를 한 바퀴 돌고서 물었다.
미나는 살짝 눈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음… 반응이 있는 곳은 두 군데에요.”
“어디죠?”
“첫 번째는 아까 입구의 조각상이었어요.”
‘역시.’
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각상이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귀신들린 것처럼 수시로 표정이 바뀌고, 결국 아인의 손에 부서졌는데도 결국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원상태로 복구되어 있었으니까.
다시 입구 쪽으로 돌아가 볼까? 뭔가 놓친 게 있을지도 몰라.
현이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미나가 말을 덧붙였다.
“그치만 조각상보다 훨씬 반응이 강한 물건이 있어요. 바로 저거에요.”
기나긴 복도 끝의 방.
미나는 한쪽 구석에 놓인 물건을 가리켰다.
일행의 모습이 통째로 담길 만큼 거대한 전신 거울.
“거울이요…?”
“네.”
현은 의구심을 가지며 서서히 거울로 다가갔다.
아무런 장식도, 특별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거울이었다.
“수상한 부분은 없는데….”
아까도 방에 존재하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펴봤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유심히 거울을 쓰다듬는 도중, 아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부숴 볼까?」
다짜고짜 거울을 깨뜨리자 말하는 아인의 사고에 현은 잠깐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래. 그게 좋겠어.」
쓰다듬어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현은 이번엔 아인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카앙!
곧이어 현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프로시아의 얼음 칼로 힘껏 후려쳤음에도 거울은 흠집하나 없이 멀쩡했기 때문에.
당연히 산산조각날 거라 여겨 어깨를 움츠렸던 미나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안 깨졌어요?!”
「확실히 특별한 물건인 것 같네.」
괴현상이 발생한 것은 그 순간.
‘응?’
현은 눈을 깜빡였다.
거울에 비친 자신과 미나의 형체가 서서히 뒤틀리고 있었다.
꾸드드드득. 기분 나쁜 소리가 방안을 잠식하는 동시. 현과 미나는 거울 속 자신의 등을 보게 되었다.
허리가 180도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