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124)
사도의 강림
‘이건 뭐야…?’
마물들의 등장에 가장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메이데이였다.
현은 골렘이나 언데드의 왕이라는 리치, 거기다 해골 메이지 같은 녀석들을 부하로 거느리고 있었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데, 이번엔 수십 마리 마물들을 한꺼번에 불러내다니!
‘이건 일개 유저의 능력이 아니잖아!’
이쯤 되니 메이데이도 알 수 있었다.
그 어떤 직업이라도 이토록 강력한 고위 마물들을 수십 마리나 거느리는 것은 불가능.
이런 능력을 지닌 것은 NPC밖에 없다.
‘설마….’
메이데이는 자신을 안고 달리는 은발의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런 위화감이 없어서 여태껏 유저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유저가 아닌 건가?
누구지?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아…!
‘아니야, 나중에 생각하자!’
잠시 혼란스런 머릿속을 진정시켰다.
지금도 길드원들은 자신의 방송을 지켜보고 있을 터.
중요한 순간에 얼빠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메이데이는 다시 현이 자신에게 준 역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됐어, 그만.」
한편, 현은 루이즈의 소환을 멈추었다.
「전부는 소환하지 않는가…?」
「그래. 시간만 끌어주면 되니까.」
어차피 전황은 바뀌지 않는다.
한꺼번에 모든 부하들을 불러냈다간 오히려 마시안느의 일검에 몰살당하겠지.
그들의 역할은 버리는 패.
루이즈가 유적지를 빠져나갈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용도면 충분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군.”
멀리서 마물들이 일어나는 광경에 마시안느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고.
“어둠의 씨앗이여!”
이어서 좀 더 속도를 높였다.
뒤편에 합류하는 성기사들이 하나 둘씩 늘고 있어, 만약의 경우에도 자신이 위험해질 일은 없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날 위해 그대들의 목숨을 바쳐 다오!”
루이즈가 소리쳤다.
“어둠의 종자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라!”
그리고 마시안느도 명령했다.
어느새 서너 명의 성기사들이 그녀를 뒤따르고 있었다.
두 세력이 얽힌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키에에에!
거대 뱀들이 마시안느의 대검에 갈라져 나가며 비명을 질렀다.
애초에 200레벨도 되지 않는 마물들이었다. 루이즈의 명령을 받은 순간부터 그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십여 마물들이 전멸한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
심지어 그들은 마시안느와 성기사들의 진격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결코 의미 없는 죽음은 아니었다.
“이 틈에 달려들어.”
이번엔 현의 명령.
강신이 유지되는 지금은 현의 목소리에도 어둠의 의지가 담긴다.
푸른 늑대, 청랑들이 울부짖으며 돌진한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녀석들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적들의 다리를, 검을, 이빨로 붙들고 늘어졌다.
“흥, 이 까짓 건.”
부웅- 부웅-!
마시안느의 대검이 허공을 갈랐고, 필사적으로 그녀를 저지하려던 청랑들의 몸통은 전부 으깨졌다.
10개의 영혼의 희생으로 얻어낸 시간은 고작 2~3초.
하지만 그렇게 목숨을 던진 청랑들 덕에, 작은 틈이 생겼다.
“하찮은 마물들이!”
마시안느가 짜증스런 고함을 내뱉었다.
콰콰콰광! 청랑들의 시체 위로 언데드 마법사들의 포격이 작렬한 순간.
거친 폭발의 충격 탓에 마시안느는 잠시 루이즈의 기척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나의… 목숨으로…”
“부디 뜻을….”
마법사들은 고작 한 발의 마법을 발사한 직후 마시안느의 검에 잘렸지만, 그 누구도 루이즈를 원망하는 이는 없었다.
이것이 어둠의 뜻이고, 어둠을 위한 길이니.
「괜찮아?」
도중에 현은 물었다.
마물이 죽을 때마다 루이즈의 심장이 펄떡이는 것을 느꼈기에.
어둠에게 부하의 죽음이란 제 살을 도려내는 감각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힘들면 말해. 강신이 유지되는 동안은 내가 해줄 수도 있으니까.」
「아니야.」
루이즈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악마가 어떻게 싸우는지 알려준 것은 그대 아니었느냐?」
「….」
「이것은 내가 짊어져야 하는 일이겠지.」
루이즈의 대답에 현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5년간 몸만 자랐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은 다른 것도 성장한 것 같아.
이제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일 텐데도 그녀가 기특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
만약 루이즈가 메인 퀘스트와 상반된 부탁을 요구할지라도, 현은 한 번쯤은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알려줬는지 생각이 안 나는데.」
「상관없다.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
그때부터 루이즈는 영혼에 담긴 부하들을 조금씩 소환하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힘을 지닌 상대와 거리를 벌리기 위해서는 끈질기게 발을 붙잡는 것이 중요했다.
하니씩, 하나씩… 영혼이 사라져갈 때마다 루이즈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거의 다 왔다.’
마력등불이 마구 깜빡거렸다.
푸른색에서 주황색… 그리고 다시 푸른색으로.
유적지 구역들의 통로를 지날 때마다 자연스레 일어나는 현상이다.
현은 루이즈에게 유적지를 빠져나가는 방향을 알려주었다.
가끔씩 ‘지름길’이 아닌 루트를 경유해야만 하는 때도 있었다.
마시안느의 추격을 뿌리치는 데는 협소한 복도를 지나는 편이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나갈 수 있어!’
현은 출구까지 남은 거리를 계산해 보았다.
루이즈의 부하들을 거의 다 소모한다면 아슬아슬하게 유적지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루이즈에게 새겨지는 상처의 개수만큼, 새로운 희망 또한 싹트고 있는 것이다.
‘됐다!’
그리고 마침내.
멀리서 비춰오는 바깥의 빛줄기를 본 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바깥으로 나가면 미스티아를 찾아가 보거나, 정 안되면 곧바로 수송선을 타고 섬을 떠날 수도 있을 거야!
어찌됐든 지긋지긋한 유적지 안보다는 나을 것이 확실했다.
“조심해요!”
메이데이의 고함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현에게 안겨있던 덕분에 메이데이는 누구보다 먼저 뒤편의 위험을 감지할 수 있었다.
‘바람소리…?’
후웅, 후웅.
무언가의 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찰나, 현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그보다 메이데이가 자신의 몸을 밀치는 것이 더 빨랐다.
[반발역장]-신체에 밀어내는 힘을 부여합니다.
같은 극의 자석처럼, 서로의 몸이 분리됨과 동시.
후우우웅. 거대한 바람이 둘 사이의 공간을 휩쓸었다.
“허억…!”
메이데이가 숨을 들이켰다.
있는 힘껏 현을 밀쳤던 그녀의 팔이 완전히 잘려나갔다.
‘뭐가 지나간 거지?’
그때야 현은 방금 지나간 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뒤편에 서있는 것은 팔을 앞으로 쭉 뻗고 있는 마시안느.
그녀는 루이즈를 겨누고 그 거대한 대검을 통째로 집어던진 것이었다.
‘아차!’
유적지 입구 근처의 복도는 3~4명도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협소했다.
그런 장소를 마시안느의 대검이 휩쓸고 지나가자 일행은 막다른 길에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여기까지다.”
마시안느의 손짓에 잔해 속에 박혀있던 대검은 그녀의 손으로 빨려들었다.
“바깥에 뭔가 하찮은 수를 숨겨둔 모양이다만….”
오도 가도 못하는 일행을 향해 다시 그 검을 겨누었다.
“하찮은 벼룩의 힘이라도 결코 무시하지 말아야겠지.”
미스티아를 만나는 것.
수송선을 타고 도망치는 것.
마시안느의 발언은 그러한 현의 모든 계획을 무위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부하들 넷 이상이 근처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린 뒤에야 움직였다.
우우웅.
새하얀 빛에 감싸인 마시안느의 대검이 요동치쳤다.
그것은 루이즈를 죽이기 위한 검이 아니다.
어둠의 씨앗을 없애도 두 번째, 세 번째의 어둠이 새로이 등장할 뿐이니.
마시안느의 손에 들린 대검은 어둠을 영원히 봉인하기 위한 검이었다.
“씨앗이여, 영원히 잠들어라.”
번쩍!
창백하게 질린 일행의 가운데로 섬광이 내리친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
한편, 유적지 바깥.
어둠이 있는 곳엔 빛이 비추는 법이니, 루이즈가 공감을 해방한 순간부터 빛의 신탁이 내릴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늘의 모든 신전들에 빛줄기가 떨어졌다.
그것은 천인도, 인간도 하던 일을 잠시 멈출 만큼 장엄한 광경이었다.
“신탁이다!”
“빛의 신탁이야!”
신관들은 허겁지겁 제단으로 달려갔고, 그들은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정화…라고?”
‘정화’란 모든 존재를 불태워 제거하는 행위.
더 이상 심연이 퍼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최후의 조치였다.
그 소식은 순식간에 빛의 신전이 존재하지 않는 카린타 섬까지 흘러들어갔다.
“우리 섬을 정화한다니 무슨 말이야?”
“누군가 신탁을 잘못 해석한 것 아닙니까?”
섬의 주민들은 황당해했다.
정화라는 극단적인 방법이 시행된 것은 역사상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카린타 섬은 조화의 은혜를 받은 성지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 장소를 어째서 정화한단 말인가?
다만 다른 섬의 주민들, 특히 빛을 섬기는 자들 중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많았다.
“하긴, 조화의 세력들은 정도를 넘어섰지.”
“이번엔 도시 중앙에 심연을 미화하는 박물관을 세웠다면서?”
“악마를 부활시키려 한다는 말까지 있어.”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그들은 갑자기 등장한 ‘조화의 천사’를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하늘다리사건 이후, 빛 혹은 조화를 섬기는 자들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점점 심화되어 온 까닭이다.
“신탁은 절대적이다.”
“카린타 섬의 정화는 빛의 의지!”
“당장 섬을 떠나지 않는 자는 빛에게 거역하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빛을 섬기는 소수의 천인들이 주축이 되어 천공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자 자신의 세력들을 이끌고 카린타 섬을 침공한 것이다.
그들에게 이번 신탁은 ‘조화’라는 눈엣가시를 없애기 위한 좋은 구실이기도 했다.
“오오… 이럴 수가.”
섬의 주민들은 하늘을 가득 메운 군함들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빠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평생을 이 섬에서 태어나 살아왔는데 어디로 떠나라는 거야?!”
“천사들께선 정녕 우리를 버리셨단 말인가?”
미스티아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섬의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빛의 세력들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녀는 우선 자신의 군대를 배치시켜 빛의 세력들이 카린타 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저지했다.
그리고 나선, 도시 광장. 수만 명의 주민들 앞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사람들은 몰랐지만 미스티아의 그러한 행동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었다.
한참 전부터 몇 번이나 연습하고 준비해 온 연설이었다.
“신탁을 해석하는 존재는 천사가 아닙니다. 천인과 그를 지지하는 신관들입니다!”
“일전에 조화께선 초월자 아래 모든 피조물은 평등하다고 말씀하셨지요. 천인, 인간, 미물, 심지어 마물까지도…! 모두의 영혼을 가까이서 살펴보면 한 치도 다르지 않아요!”
“…어째서 그대들은 한낱 피조물들이 내린 해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입니까? 신탁이 아닌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겁니까?!”
미스티아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광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본인 또한 천인임에도 천인의 지위를 특별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녀의 말에 믿음이 더해졌다.
어느새 군중들의 눈동자는 그녀에게로 빨려들고 있었다.
“그들은 카린타 섬을 정화하려는 이유는 이 ‘유적지’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조화의 사상이 담긴 모든 흔적들을 지워버리려는 것이지요!”
“그를 위해 우리가 악마를 부활시키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허무맹랑한 말까지 지어냈고요!”
“저희가 섬기는 천사를 부정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신탁을 이용하는 파렴치한 자들입니다!”
우우- 군중들의 두려움은 누군가를 향한 야유로 변하고 있었다.
카린타 섬 대부분의 주민들은 조화를 섬긴다.
조화의 사도인 미스티아의 발언이 그들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은 당연했다.
미스티아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섬을 정화하라는 신탁이 내렸지만, 그 원문을 직접 본 사람이 이곳에 있습니까?”
“조화를 음해하려는 자들이 벌인 짓이라면, 실제론 ‘정화’라는 단어가 적혀있지 않을지도 모르죠!”
신탁의 부정!
결국 미스티아는 빛의 세력이 지닌 권위를 통째로 무시했다.
그녀가 천인 혹은 천사의 사도라도 쉽게 용서받을 수 없는 발언이었다.
더 이상 가만히 놔둘 수 없어, 군함에서 광장을 지켜보던 이들의 눈에 불꽃이 타오르려던 때.
“어…?”
“저게 뭐야?”
이변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광장에 모여 있던 군중들의 웅성거림이 커져갔다.
화아아악!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온 빛줄기가 미스티아의 몸을 감쌌다.
모두는 그것이 어떤 현상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신탁인가…?!”
“조화께서 우리의 부름에 답하신 거야!”
“아니, 신탁이 아니다….”
무엇인지는 알지만, 몇 번이나 들어보기는 했지만, 한 번도 직접 목격하지는 못한 광경.
기록으로만 전해 내려오는 천계의 문이 열리는 모습은 너무도 신성했다.
“강림이다!”
광장의 소리가 멎었다.
모두는 숨을 죽이고 강림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지상과 천계를 잇는 빛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것은 신성이 날개를 지닌 존재. 천사.
사람들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잠시 후였다.
‘저 분이 조화인가…? 신전에 있는 동상하고는 뭔가 얼굴이 다른데…?’
‘키도 훨씬 작아 보여.’
‘그런데 저 낫처럼 생긴 지팡이는 뭐지?’
하지만 모두는 자신의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어쨌든 저 조그만 천사의 양 어깻죽지에 달린 신성의 날개는 조화를 상징하는 형태였기에.
조화 본인은 아니더라도, 조화의 뜻을 전하기 위해 강림한 천사인 것은 분명했다.
마침내 강림을 마친 천사는 어색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신탁이 뭐냐면, 아…!”
하늘 가득한 군함들.
천사는 빛의 세력들을 발견하곤 그것들을 가리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쟤네 신탁은 다 거짓말이란 거야.”
그렇게 말하는 아인의 목소리는 어색함으로 가득 차 있어서 ‘기만자’ 칭호가 없었더라면 누구도 그 말을 믿지 못했으리라.
어딘지 모를 공간에서 아인과 케이드리알은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인의 생김새는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얼굴도, 복장도.
단발의 스타일을 고수하던 머리칼마저 허리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매일같이 집에서 아인을 보는 현 정도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 소녀가 아인이란 사실을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분명 오늘이 마지막 날이랬지?”
“흐응, 그래, 약속은 약속이니까. 오늘이 지나면 돌려보내 주지.”
아인의 물음에 케이드리알이 아쉽다는 듯 말을 흐렸다.
“대신 실수하지 말 것.”
“뭐를?”
“내가 알려준 세 가지 지시 말이야. 전부 기억하지?”
“으음….”
아인은 잠깐 생각하다가 되물었다.
“첫 번째가 신탁을 전하는 거였던가?”
“맞아.”
“그런데 도중에 내 정체를 들키면 어떻게 해?”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하는 거잖아.”
케이드리알은 아인을 빤히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당부했고.
“칭호 덕분에 웬만하면 들키지 않겠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하라고.”
이어서 아인의 머리를 가만히 짚었다.
그러자 아인의 양 어깨에 신성을 품은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틀림없는 천사의 날개였다.
“이쪽은 너에게 모든 걸 걸었거든.”
우우웅.
케이드리알이 손짓하자 아인의 발밑에 그려진 마법진이 서서히 빛을 발했다.
잠시 후 마법진 위에 서있던 아인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카린타 섬의 도시 광장.
아인의 목소리는 너무도 또렷하게 수만의 군중들의 귀에 박혔다.
케이드리알이 걸어준 마법이 그녀의 목소리를 한껏 증폭시키고 있는 덕분이었다.
“쟤네 신탁은 다 거짓말이야.”
너무도 황당무계한 사건.
천사가 다른 천사의 신탁을 부정하는 일은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인의 등에 있는 신성의 날개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천사의 증표가, 그리고 기만자의 칭호가 상황을 완전히 반전시켰다.
조금은 근엄하지 못한 아인의 말투조차 순진무구한 천사의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 정도였다.
“섬을 정화라든가, 악마의 부활이라든가… 그런 말은 다 자기 세력을 키우기 위한 핑계에 불과한 걸? 애매모호한 신탁을 자기네들이 유리하게 해석하는 거지!”
케이드리알이 자신을 대신하여 아인을 내세운 이유는 간단하다.
아인은 천사도 악마도 아닌 유저.
날개를 달아주고, 전송과 동시 천계의 문을 열었을 뿐, 평범한 유저에겐 힘의 행사나 발언에 초월자와 같은 제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잘못은 없다고, 천사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역시, 미스티아님이 옳았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인의 발언을 일개 유저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토록 신성한 존재의 말이 어찌 거짓일 수 있을까.
카린타 섬의 주민들은 홀린 듯한 눈동자로 작은 천사를 바라보았다.
심지어 빛의 세력들 중에도 아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자들도 있었다.
“간언(間言)이다!”
하늘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빛을 섬기는 천인 중 한 명이었다.
“신탁의 해석은 틀리지 않았어!”
새로운 목소리가 아인에게로 넘어가려던 분위기를 다시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그 천인 역시 ‘빛의 사도’중 한 명이었기에 누구도 그의 발언을 무시하지 못했다.
“신탁의 원문에는 ‘정화’라는 단어가 분명히 포함되었습니다! 그런 신탁의 의심한다는 것은 빛의 뜻을 부정하는 것…!”
사도 천인은 다시 아인을 가리키며 물었다.
“조화의 뜻이 정녕 그러하다면, 우리는 당신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신탁과 신탁의 충돌.
아니, 천사와 천사의 충돌!
이 또한 역사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던 사건이었다.
아니, 사실 평행세계의 역사에선 딱 한번 비슷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바로 아스라 온라인에서!
물론, 그 때는 천공이 분열되기 전에 현이 케이드리알의 불씨를 꺼버렸지만 말이다.
‘흐응, 정말로 이렇게 되네.’
훗, 누군가 자신의 말에 반박했음에도 아인은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기만이 말해준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카린타 섬은 상반되는 신탁 아래에 두 개의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일단 첫 단계는 제대로 성공했고.’
다음 단계가 뭐더라?
아인은 조금 전의 케이드리알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였어!
…….
“분열된 세력의 갈등은 불신으로 더욱 증폭되지.”
“불신…? 증폭…?”
“모든 거짓말은 원인과 결과를 연결하는 것으로 완성되니까. 인과가 명확하기만 하면 어떤 거짓말이라도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거야.”
“미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쳇, 이건 다른 녀석에게 시켜야겠군. 어쨌든 네가 할 일은 딱 하나야.”
아인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기에, 케이드리알은 귀찮은 듯 중얼거렸다.
“두 번째로 할 일은 바로 네 주인님을 만나러 가는 것.”
“언제?”
“내가 알려줄 때.”
…….
“…방금 조화께서 사도인 제게도 목소리를 들려주셨습니다.”
아인이 기억을 되짚는 동안 미스티아는 다시 한 번 군중들에게 연설을 펼치고 있었다.
“이번 사건을 벌인 것은 하늘을 분열시키려는 지상의 세력들이라고요!”
“지상의 세력…?”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증거가 드러날 거라 말하셨습니다.
“……?”
그게 무슨 말일까?
군중들이 의문에 빠진 어느 순간.
「지금이다!」
아인의 뇌리에 케이드리알의 목소리가 꽂혔다.
‘지금…!’
어디로 가야하는 지는 기억하고 있었다.
현이 위기에 처해있을 테니 내가 구해줘야 한다고 했지?
위기의 순간 딱 나타나면 날 끌어안기라도 하는 거 아니야?!
“무슨 일이야?”
“천사께서 갑자기 어디론가….”
광장에 모인 군중들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아인의 돌발행동을 바라보았다.
신탁을 내리고 나서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또 어디로 달려가는 것인가?
그렇게 잠깐 만에 유적지의 입구에 도착한 아인.
‘처형의 저격!’
하나의 스킬을 사용해 복도를 가로막는 바위의 잔해들을 통째로 치워버렸다.
후웅, 거대한 낫이 위에서 아래로 그어지자, 시퍼런 반월은 처음에는 느리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콰지지지직! 은빛의 반월이 일자로 이어지는 복도를 가로지르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안에 누군가 있어!’
복도의 끝에서 아인은 거대한 대검을 든 누군가를 마주했다.
우우웅. 한눈에 봐도 어마어마한 힘이 깃들어 있는 공격!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아인은 경계의 낫을 뽑아들었다.
지금 자신의 할 일이 무엇인지는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거인 가르기!’
카아아앙!
대검과 낫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크읏…! 고막을 찢는 듯한 쇳소리에 현을 포함한 일행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현은 가늘게 눈을 뜨고 갑자기 등장한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누구…?’
난데없이 벽을 뚫고나온 정체모를 소녀.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현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씨익, 그 익숙한 눈웃음을 보는 순간, 뇌리에 번개가 내리쳤다.
‘아니, 설마… 아인?!’
현은 순간적으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서 갑자기 왜 아인이 나오는 거야?
등 뒤에 날개는 또 뭐고!
물어보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귓속말로 짧은 대화를 나누는 정도가 다였다.
「후후, 적당할 때 왔지?」
「아인? 진짜 아인이야?!」
「길게 말할 시간 없어. 현, 먼저 빠져나가.」
「너는?」
「그야, 난 현을 지켜줘야지!」
「뭐? 저 녀석은 그리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야! 성왕국의 5대 기사인… 응…?」
현은 뒤늦게 어떠한 사실을 깨달았다.
방금 아인은 마시안느의 대검을 받아냈음에도 그리 밀려나지 않았다.
힘 대결에서 지지 않은 건가?
「너 어떻게….」
거인 가르기는 일시적으로 힘을 800만큼 증가시켜 주는 스킬이지만, 그것만으로 마시안느와 맞서기엔 한참이나 부족했다.
「어때.」
아인은 신성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파닥거렸다.
그 힘이 바로 케이드리알의 안배. 아인이 마시안느의 일격을 받아낼 수 있던 힘의 원천이다.
「후후, 지금 나한테 동화하고 싶다고 생각했지?」
이어서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묻는 아인.
현은 하마터면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
“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건가요?!”
메이데이의 물음에 현은 쉽사리 답해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자신도 알 수가 없었으니까.
일단 돌아가는 상황부터 파악해 보기로 했다.
유적지 밖으로 빠져나온 지금, 마시안느는 여전히 루이즈를 붙잡으려 하고 아인은 그런 마시안느를 저지하는 중.
“미스티아!”
광장 근처까지 달려온 현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천인이자 조화의 사도인 미스티아.
그녀라면 루이즈의 안전을 어느 정도 보장해 줄 수 있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미스티아는 루이즈를 뒤쫓는 마시안느를 보고 눈을 빛냈다.
지금이 기회라는 듯, 모두에게 큰 목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보십시오, 저들은 성왕국의 기사단입니다!”
그 말에 군중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정말로 성왕국이라고…?”
“지상의 세력들이 꾸민 음모가 맞았어!”
지상에서 하늘을 분열시키기 위해 조화를 부정하려 한다!
그러한 미스티아의 주장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지상의 군대가 아무런 언질도 없이 섬에 들어와 있던 것이지요!”
사실, 그들의 존재와 신탁의 잘못된 해석 사이엔 연결고리가 부족했지만 그 허술한 인과를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신앙의 힘!
어느새 섬의 주민들은 그들이 이번 사건을 일으킨 원흉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또한, 빛의 세력들을 ‘지상의 농간에 넘어간 어리석은 자들’이라 여기게 되었다.
조화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카린타 섬을 없애기 위해서, 신탁을 왜곡시켰다는 것이다.
“간언에 넘어가지 마라!”
“이들은 악마를 부활시키려는 것이다!”
한편, 빛의 세력들 중 몇몇도 루이즈가 어마어마한 마기를 지녔음을 알아채고 소리쳤다.
“저 여자를 봐라, 그녀가 바로 악마의 씨앗이 아닌가? 조화의 세력들은 지금 악마를 감싸고 있어!”
“마기를 지닌 인간은 지상에선 흔하오! 그들까지 포용해서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바로 조화의 뜻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흠을 찾아 헐뜯는다.
점점 과격해지는 언쟁은 자연스레 다음 단계로 흘러갔다.
“빛의 신탁을 따라 카린타 섬을 정화하라!”
“맞서 싸우세요! 조화를 음해하려는 자들에게 놀아나서는 안 됩니다!”
순식간에 싸움이 커졌다.
곳곳에선 마법이 폭발하는 소리, 양측에서 일어나는 함성소리에 개인의 목소리는 갈 곳을 잃었다.
더 이상 신탁 등의 명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빛과 조화, 둘 중 어느 세력에 속하느냐에 따라 피아를 나누는 기나긴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평화롭던 도시는 전란에 휩싸였다.
두 세력들 사이의 전쟁은 시가전에 가까운 형태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골목 여기저기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음이 울려 퍼졌고. 여차하면 그 소리는 더 큰 마법의 굉음에 삼켜지기도 했다.
“제 뒤로 물러나세요.”
미스티아가 손짓하자 세상 곳곳에 뿌연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 아름다운 기운은 마치 독구름처럼 닿는 적들의 몸을 녹여 없었다.
구름이 이는 곳엔 여지없이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 바로 이런 걸 원했어!”
메이데이 또한 자신의 마법을 마음껏 뽐냈다.
누가 회복해 준 건지, 그녀의 잘렸던 팔은 원상태로 복구되어 있었다.
파티클 스톰 (Particle Storm)!
마침 재사용 대기시간이 돌아온 그녀의 궁극기가 다시 발동되었다.
근처의 모든 적들을 분쇄시키는 메이데이의 위용은 대마법사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현, 지금 나 보고 있어?」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게 눈에 띄는 것은 아인!
놀랍게도 아인은 마시안느와 거의 호각으로 결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힘, 속도, 그 어느 것에서도 밀리지 않아 귓속말을 할 여유까지 있는 듯했다.
「그래, 어떻게 된 거야?!」
「그동안 일부러 숨기고 있었는데, 나도 한 달 동안 많이 준비했지!」
씨익 웃음 짓는 아인.
그녀의 상태 창엔 다음과 같은 광경이 보이고 있었다.
아인 (Lv. 283)
체력 : 1510253/1511294
마나 : 8336/10180
신성력 : 28012/30000
[힘 42(+500)] [민첩 482(+500)] [생명력 158(+5000)] [마력 503(+515)](※?????의 가호를 받고 있습니다)
(※스탯 및 스킬이 일시적으로 강화되었습니다!)
-[거인 가르기 Lv.3] : 힘 증가량 800 → 2000
-[천사의 기초 검술 Lv.4] : 데미지 증폭 190% → 5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