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129)
혼돈의 힘
네비아의 설명은 조금 더 이어졌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내용들은 하나같이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모든 초월자는 각자의 영생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세상엔 초월자와 동일한 수만큼의 영생계가 존재하는 것이죠.”
“으음….”
“다만, 육신을 지닌 상태로는 초월자도 영생계에 들어갈 수 없어요. 황천과 마찬가지로, 영생계 또한 영혼에게만 입장이 허락된 세계니까요.”
“잠깐, 영혼밖에 못 오는 세계라고?”
순간, 현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물었다.
“영혼이 몸을 빠져나오면… 죽는 거 아니야?”
“맞아요.”
“그럼 나는 어떻게 된 거야…?”
“…?”
네비아는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인님께선 이미 육신도 없는 상태면서, 그걸 왜 물어보시죠?”
“내가… 이미 죽었다고?”
현은 허겁지겁 상태 창을 열었다.
현 (Lv. 253)
직업 : 쉐도우 슈터 (히든)
체력 : 25806/25806
마나 : 1610/1610
…….
“안 죽었는데…?”
하지만 특별한 변화가 없는 걸 보고 되물었다.
사망한 상태에선 체력이 마이너스로 표기되는데, 지금은 너무나도 멀쩡한 상황이었다.
그런 현에게 네비아는 한쪽 눈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주인님은 죽은 게 맞아요. 아직 죽음 직전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은 탓에 혼란스러운 거겠죠.”
딱! 네비아의 조그만 손가락이 허공을 튕겼다.
그 순간.
“앗…?!”
“으응, 뭐야?!”
현과 아인은 동시에 황당한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동화가 풀려버렸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재차 자신의 상태 창을 확인해 본 현은 동화가 해제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현 (Lv. 1)
체력 : 50/50
마나 : 100/100
직업 : 서포터 (히든)
[힘 2] [민첩 2] [생명력 5] [마력 10] [공감력 27]스킬목록 –
‘상태 창이 초기화됐다!’
레벨과 스탯이 게임을 시작하던 때로 돌아가 버렸다.
직업마저도 서포터. 전직 이후 배운 수많은 스킬들도 함께 사라졌다.
아인과의 동화가 해제된 것은 ‘동화’라는 스킬마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인 것 같았다.
당황을 감추지 못하는 현에게 네비아은 나지막이 설명을 시작했다.
“잠시 세상을 흔들어 봤어요. 방금 가장 처음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나요?”
“기억…? 상태 창이 초기화되긴 했는데.”
“이곳은 주인님의 기억으로 이뤄진 세상. 보이는 모든 것은 기억의 파편들이에요. 어찌 보면 환영과도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죠. 기억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의 나열이니까요.”
“…….”
현은 옆을 바라보았다.
아인도 자신과 비슷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면 이게 영문인지 모르는 기색이었다.
어쨌든 진짜 1레벨로 돌아간 건 아닌 모양이었기에 한편으론 안심했다.
갑자기 동화가 해제된 상황.
현은 괜히 네비아를 속인 것 같아 멋쩍은 듯 중얼거렸다.
“미안, 숨길 의도는 없었어.”
“뭘 말입니까?”
“갑자기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어난 거.”
“…?”
네비아는 의미를 알 수 없다는 듯 물음표만 띄웠다.
“원래 두 명이었습니다만?”
“뭐…?”
“단발머리의 여자애를 말하는 거라면, 그녀는 처음부터 주인님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
그 말을 이해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네비아는 동화를 볼 수 있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야.
현은 하나의 가정을 떠올려 봤다.
동화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신의 ‘기억’으로 인한 착각이라면?
실제로 이곳에서 동화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네비아가 이러한 의문을 떠올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구나.’
현은 이제야 영생계가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기억의 파편들로 층층이 쌓여 만들어진 세상.
환상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네비아의 말도 이해하게 되었다.
난생 처음 보는 것을 마주한 현은 깊은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
‘잠깐, 루이즈는 어떻게 된 거지?’
현의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떠오른 것은 네비아의 설명이 한차례 끝났을 때였다.
‘루이즈는 각성할 때마다 과거의 기억을 하나씩 찾아가고 있다고 말했잖아.’
네비아의 말대로라면, 인간의 육신을 지닌 루이즈는 영생계에 들어올 수 없다.
그러면 기억을 되찾는 것도 불가능한 것 아닌가?
현의 의문에 네비아는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그 영혼은 이미 영생계를 지나왔을 거예요.”
“하지만 기억 못 하던데?”
“기억은 무의식 안에 봉인해 둔 거겠죠.”
“누가?”
“본인 스스로요.”
막 황천을 거쳐 온 순수한 영혼에게 억겁의 세월에 걸친 기억을 한꺼번에 쏟아 부으면, 그릇은 깨져버리고 만다.
하지만 무의식 안에 숨겨진 기억을 조금씩 꺼내면 영혼의 그릇은 점점 단단해지고, 결국엔 모든 기억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네비아의 설명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주인님의 지인이라는 그 사람이 대천사, 혹은 대악마 중 한 명인가 봐요?”
“그건 노코멘트 할게.”
“시종인 제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을 텐데요.”
“으음…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벌써 알고 있는 거 아니야?”
“맞아요, 그렇긴 하지만요.”
현은 한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즈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던 꼬맹이 시절부터 어둠의 기억을 지니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각성할 때마다 나이를 먹는 이유도, 영혼의 그릇이 단단해질 시간을 벌기 위해서인 듯했다.
여태까지 한 번의 각성마다 5년이 필요했으니까… 400레벨의 루이즈는 대충 25살. 500레벨의 루이즈는 30살쯤 되는 걸까?
스물다섯까진 괜찮지만, 서른 살이면 지금처럼 말을 놓기도 좀 애매해지는데….
현이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네비아는 뻥 뚫린 오른쪽 눈동자의 보랏빛 전등을 깜빡거렸다.
“자, 이제 질문은 다 끝났나요?”
“응, 고마워.”
“다행이네요. 첫 번째 시종의 실수를 제가 만회할 수 있어서.”
그렇게 영생계의 설명을 끝낸 뒤.
“그럼 이제 두 번째 시종으로서의 일을 시작해도 되겠죠?”
네비아는 다른 화제를 꺼내기 시작했다.
“제 역할은 주인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무슨 시험?”
“혼돈의 힘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
“…!”
현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네비아의 입에서 혼돈이란 단어가 처음으로 튀어나온 순간이었다.
그래, 유적지의 13번째 구역에 혼돈의 단서가 있으리라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아참,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현은 네비아에게 쭉 의문을 가지던 질문을 던졌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만 했다.
“내가 혼돈이야?”
“….”
현의 질문에 네비아는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대략 5초정도 보랏빛 안광을 번쩍이던 그녀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주인님이 가장 혼돈에 가깝지요.”
“지금은 가깝다…?”
“혼돈은 하나로 정해지지 않는 존재니까요.”
그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없어서, 다시 한 번 물었다.
어느새 현의 가슴은 점점 거세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난 유저잖아…?”
“그렇죠.”
“유저인데도 대악마가 될 수 있는 거야?”
“대천사와 대악마는 태초부터 존재해온 영혼들이에요. 주인님이 그들과 동등한 존재가 되는 건 황천을 수천 만 번 가로질러도 불가능하겠죠.”
은근히 기대하던 어떤 가능성을 정면으로 부정당한 현.
역시 그렇겠지, 라는 생각에 요동치던 심장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허나….”
하지만 네비아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긴장된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조그만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혼돈의 힘을 다루게 된다면… 일순간 그들과 같은 수준의 힘을 행사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겁니다.”
띠링!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 현의 퀘스트 창이 갱신되었다.
[최후 각성 퀘스트 : 초월(超越)]-네비아의 시험을 통과하여 인정을 받으세요.
-두 번째 혼돈의 파편은 그녀가 가지고 있습니다.
***
퀘스트의 보상이 클수록 그 난이도도 높아진다.
그러니 퀘스트를 고르는 유저는 너무 큰 탐욕을 부리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아스라 때부터 진리처럼 전해져 내려오던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현은 지금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혼돈의 힘, 대악마와 같은 수준의 힘이라니!
물론 그것은 모든 혼돈의 파편을 다 모았을 때의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파편으로 ‘시간’ 속성의 스킬트리가 개방된 것처럼, 두 번째 파편도 어마어마한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 네비아의 시험은 대체 얼마나 난이도가 높은 거야?
메인 퀘스트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려우면 그걸 깰 수는 있을까?
그러한 생각에 마음이 복잡하던 현이었기에, 지금 네비아의 말을 좀처럼 믿기 힘들었다.
“시험이라고 말했지만, 별거 없습니다.”
“뭐…?”
“지금부터 시작되는 제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만 하면 그걸로 합격이니까요.”
“정말이야?!”
경악에 가까운 현의 물음에, 네비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 당장 두 번째 파편을 드려도 상관은 없지만….”
“…!”
“그러지 않는 이유는, 혼돈의 힘이 아주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다루다간 오히려 주인님이 파멸로 향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촤르륵, 촤르르륵!
회랑의 톱니바퀴가 거친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와중에도 네비아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혼돈이란 단어는 무언가를 뒤죽박죽으로 만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요. 그리고 주인님, 혹시 ‘시간’이 혼돈의 영역이란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알고 있어.”
“다행이네요.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어요.”
잠시 쉬고.
“시간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것. 그게 바로 혼돈에 담긴 힘의 본질입니다.”
“…?”
“즉, 인과를 뒤트는 힘이에요.”
“…좀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어?”
“두 번이나 말했는데도 역시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딱, 네비아가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시.
현의 눈앞으로 어떤 장면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이건….”
왠지 익숙한 풍경.
은은한 촛불이 피어오르는 궁전 같은 이 장소가 ‘직업 선택의 방’이란 사실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잠시 후 천사 하나가 나타났고, 웃음소리와 함께 그녀는 악마로 변했다.
그 정체는 기만의 대악마, 케이드리알.
‘예전의 기억이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현은 무수한 기물들을 가로질러 휘황찬란한 대검을 손에 쥐었다.
그 순간.
“아하하하, 그 직업도 의외로 괜찮을지 모르니까 열심히 노력해 보라고!”
자지러지듯 웃는 케이드리알의 모습이 흐릿해지는 가운데.
촤라라락, 어디선가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기억이야!’
한순간에 시야가 반전했다.
다음 장소는 어두컴컴한 어느 공간.
화르르륵!
불꽃으로 이루어진 시계침이 미친 듯이 회전하는 발판 위에서, 자신과 아인은 새까만 그림자들과 생사의 결전을 벌이고 있었다.
「현, 나도 이거 기억하고 있어!」
마침, 아인이 귓속말로 소리쳤다.
「우리 각성 퀘스트 때잖아!」
콰직, 콰지지직!
나중엔 발판마저 완전히 파괴되었고, 부서진 부분에선 새카만 기운이 솟아올랐다.
그 기운을 사용해서 5단계를 클리어하고, 자신과 아인이 각자의 궁극기를 받는 모습도 보였다.
“주인님은 인과율이란 단어를 들어보셨나요?”
빠르게 지나가는 기억 속에서, 네비아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인과율이란, 특정 사건이 발생하면 그 뒤의 결과도 함께 정해진다는 법칙입니다.”
조그만 은발의 소녀가 이를 악문 채 까마득한 나무 위를 질주한다.
복면을 입은 자들이 섬뜩함 칼날을 손에 쥐고 그 소녀를 쫓아간다.
그렇게, 흐릿해졌던 기억들이 하나하나씩 현의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인과율의 맞은편에는 혼돈이론(Chaos Theory)이 있어요. 나비효과란 단어 정도는 알고 계시겠죠.”
아주 미세한 자극이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법칙이다.
“주인님이 기억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인과율, 혼돈이론, 둘 중 어느 쪽의 법칙을 따르고 있을까요?”
***
현의 시야가 어지럽게 번쩍였다.
영생계의 기억.
아스리안을 시작하고 난 뒤부터 지금까지 쌓인 기억들이 차례로 눈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일단, 인과율로 엮인 두 사건을 보여드리죠.”
딱! 네비아는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현의 시야는 다시 한 번 반전했다.
일루나 왕복선에 난데없이 케이드리알이 나타났던 때의 기억이 현의 눈앞에 재현되었다.
그래, 지금처럼 대악마의 손이 번쩍이는 동시, 왕복선은 절반으로 갈라져 대기권에서 추락했었다.
현이 과거의 사건을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복선이 추락하지 않았다면 주인님은 아마 동쪽 도시로 먼저 가지 않았을까요?”
네비아는 영생계에 쌓인 현의 기억을 읽음으로서 그 때의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분석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기권에서 태풍에 휩쓸려 버린 탓에 동쪽 도시는 너무 멀어져 버렸어요. 어쩔 수 없이 서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마침 근처의 도시에 머무르던 ‘그녀’를 만날 수 있었죠.”
바로 이어서, 현의 눈앞에 조금 자란 루이즈가 나타났다.
아인에게 동화하고 있는 자신도 함께였다.
마차의 선두에는 두 신관이 용마를 이끌며 눈 덮인 일루나의 평원을 질주하고 있었다.
“자, 여기서 인과율을 따져보죠.”
“……”
“왕복선이 파괴된 순간 ‘그녀’와 재회는 거의 확정되었어요. 어떻게든 살아남은 주인님은 반드시 서쪽 도시로 간다는 선택을 내렸을 테니까요. 이처럼 특정 사건이 그 뒤의 사건을 확정시킬 때, 두 사건은 인과율로 엮여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촤르륵, 촤르르륵-.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계속해서 우주의 회랑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끝없이 펼쳐져 있던 일루나의 눈 풍경은 완전히 사라졌다.
‘아, 이 장면은….’
현은 눈앞의 광경이 자신이 잠깐 화장실을 다녀올 때의 상황임을 단숨에 깨달았다.
휴식상태로 전환했을 때에도 캐릭터의 ‘기억’은 계속해서 쌓여가는 모양이다.
이번에 등장한 것은 아인의 모습.
자신의 의식이 빠져나간 그 틈에, 아인은 무언가 수상한 짓을 벌이려 하고 있었다.
「자, 잠깐, 이게 왜 나오는 거야?!」
「뭔데 그래…?」
「아무것도 아니니까…! 계, 계속 보고 있을 필요 없어…! 아니, 보지 마!」
자신의 치부가 훤히 드러나는 모습에 아인은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질러댔다.
반면 해설을 이어가는 네비아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잠잠했다.
“조금 버릇이 나쁜 시종이네요. 주인님이 자리를 비운 틈에 저런 일을 벌이다니요.”
“음….”
“하지만 시간이나 장소가 조금만 바뀌어도 그녀는 일을 저지를지 말지를 다시 결정해야 하겠죠. 이처럼, 아주 미세한 변화가 결과 값에 지대한 영향을 줄 때, 사건은 혼돈계(Chaotic Dynamic System)에 속해 있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카이단 성, 어둠의 땅, 사도와의 결투, 하늘다리, 카린타 섬의 장면들이 줄줄이 지나갔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기억들 중엔 선명한 것도, 언제인지 모를 만큼 흐릿한 것도 존재했다.
“‘불꽃에 닿으면 뜨겁다’라는 당연한 사실도, 인과율이 뒤틀리면 웃지 못 할 상황이 일어나죠. 불꽃에 닿는 방법에 따라 뜨거울 수도, 차가울 수도, 심지어 따갑거나 찌릿할 수도 있어요.”
“이렇게, 인과율을 따르는 단순계나 연속계의 사건을 혼돈계로 바꿔버리는 것이 바로 혼돈의 힘입니다. 이제 주인님도 이 힘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아시겠지요?”
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비아의 말을 온전히 다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혼돈의 힘이란 것이 여타 스킬들처럼 단순한 원리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이해했다.
“잘못하면 내가 화를 입을 수도 있다는 거지?”
“네, 주기적 궤도를 지니는 것 또한 혼돈계가 지닌 특징이거든요.”
그리고 마침내, 기억의 흐름이 끝났다.
눈앞에서 변하는 광경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현은 이따금 톱니바퀴가 꿈틀거리는 회랑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금속의 잡동사니들로 이루어진 우주 한 가운데서, 네비아는 처음으로 입가에 옅은 미소를 떠올렸다.
“그럼, 제 역할은 여기까지군요.”
“…?”
“시험은 합격이에요, 약속한 것도 전해 드리죠.”
찰나, 네비아와 현의 손바닥이 서로 겹쳐졌다 떨어졌고, 현의 손바닥 위엔 조그마한 보라색 조각만이 남았다.
시스템 메시지들이 쏟아진 것은 그 조각이 현의 몸에 스며든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혼돈의 파편을 획득했습니다! (2/3)] [새로운 스킬이 생겨났습니다!] [최후 각성 퀘스트 : 초월(超越)의 임무목표가 갱신되었습니다!]-마지막 세상을 찾아가세요.
세상에 보랏빛 안개가 휘몰아치며 모든 것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금속으로 이루어진 우주 위의 회랑도, 그 안에 있던 자신과 네비아라는 이름을 지닌 조그만 소녀도.
현은 반사적으로 네비아를 향해 손을 뻗어 봤지만 큰 의미는 없는 행동이었다.
자신의 팔 또한 타버린 재처럼 흩어져 가고 있었으니까.
“아, 한 가지를 잊을 뻔 했군요.”
미세한 기계 부품들을 드러내는 와중에, 네비아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안개로 모든 것이 뒤덮인 와중에도 금속성의 목소리는 현의 귓가에 똑똑히 들려왔다.
“마지막 파편은 주인님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네비아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현과 아인에겐 같은 메시지가 동시에 떠올랐다.
[사망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자의 사제복의 효과가 사망 패널티를 반감시켰습니다!] [24시간 동안 접속할 수 없습니다!](패널티 해제까지 : 21시간 12분)
***
카린타 섬의 전쟁이 끝난 지도 한참이 지났다.
현과 아인이 두 번의 죽음을 반복하는 사이, 루이즈는 자신의 할 일을 모두 끝냈다.
[메인 퀘스트를 클리어했습니다!] [모든 스탯이 15 상승했습니다!] [22의 스킬 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클리어 메시지가 떠오르자마자 현은 목걸이 형태의 마도구를 작동시켜 루이즈의 소식을 물었다.
“방금 다 끝난 거야?”
“그래. 하지만 당장 내 부하들을 전부 데려가진 못할 것 같구나.”
“왜?”
“이 몸의 자아가 미약한 탓이다.”
유적지에 잠들어 있던 마물들을 다 합하면 약 일만 마리!
그 중 루이즈가 품을 수 있는 수는 고작 1할뿐이었다고 한다.
“나머지는 어디서 뭐하고 있는데?”
“지금은 카린타 섬의 재건에 도움을 보태주고 있는 중이지만, 계속 이곳에 머무르게 놔둘 수는 없겠지.”
“그럼?”
“현, 그대의 도시에 내 부하들을 받아줄 수 없겠느냐…?”
“크흠… 뭐, 안될 거야 없지.”
이어지는 루이즈의 말에 현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경계의 도시가 끊임없이 커져가는 탓에 안 그래도 일손이 모자란 상황.
일만에 가까운 노동력을 무상으로 부려먹을 생각에 벌써부터 들뜬 것이었다.
결정을 내리자마자 현은 누군가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타르타르, 지금 바쁘냐?」
「길드 홈페이지 관리로 조금 바쁘긴 해요… 무슨 일인데요?」
「역시 너라면 한가할 줄 알았지!」
「…?」
「외주로 맡길 수 없는 일이 생겼거든. 부탁 하나만 하자.」
그렇게 나머지 9할의 부하들은 수송선을 사용해 조금씩 경계의 도시로 데려오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모두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수송선 안에서, 루이즈는 계속 들뜬 분위기를 보여 주었다.
자랑스러운 듯 허리를 펴며 영혼에 담아둔 부하들을 차례차례 꺼내는 모습은 그야말로 몸만 커다란 어린아이 같았다.
“음… 그래, 너는 이제부터 3군단장이다.”
“그리 과분한 자리를 내려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370레벨 엘리트 듀라한이 루이즈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우연히 그 광경을 지켜본 현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지휘체계까지 만드는 거야?”
“역시 아직은 이른가? 그래 내 부하들 중에 뛰어난 인재가 숨어있을지도 몰라…! 나중에 모두 함께 모여 대회를 연 뒤에 결정하는 편이 더 좋겠구나!”
그동안 루이즈는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무언가를 상실하는 것의 연속인 삶을 살아왔다.
그런 루이즈에게 카린타 섬에서 거둔 성과는 일생 최대의 업적과도 같아, 이렇게 기분이 들뜨는 것은 당연했다.
‘좋아, 이 정도면 카린타 섬의 일은 대충 끝난 것 같고.’
프라이빗 룸으로 돌아온 뒤, 현은 가만히 상태 창을 살펴보았다.
영생계라 불리는 곳에서 네비아라는 소녀를 만났던 일은 아직도 꿈처럼 느껴졌다.
상태 창에 이러한 변화가 생겨나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 기억은 꿈이라고 생각되었을지도 몰랐다.
[혼돈 계약 Lv.Max]-두 대상이 보유한 스킬 1개를 맞바꿉니다.
(※ 가장 최근에 사용한 스킬끼리 교환됩니다!)
-한쪽이 원치 않는 경우 계약은 저절로 파기됩니다.
-계약은 동시에 한 개만 유지할 수 있으며, 최대 [공감력]X10초 동안 지속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 0초)
(마기/신성력 소모 : 10000/10000)
두 번째 혼돈의 파편을 얻은 직후, 현의 스킬 창엔 새로운 기술 하나가 생겨났다.
그것은 정말로 터무니없는 효과를 지닌 기술이었다.
두 사람이 보유한 스킬 하나를 맞바꾼다?
방패전사가 광역마법을 쏟아 내거나, 대신관이 시체폭발 스킬을 사용하는 광경을 볼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닌가!
물론 대마법사의 마법과, 네크로멘서의 시체 폭발이 훨씬 강력하겠지만, 불가능한 일들이 가능해진다는 것 자체에 큰 의미가 있었다.
특정 직업의 고질적인 약점을 없애주거나, 본래의 스킬 셋으론 불가능한 시너지를 내는 등의 활용 또한 가능할 테니까.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스킬이 아니야.’
충격적인 것은 스킬의 효과뿐이 아니었다.
혼돈 계약은 마기와 신성력을 한꺼번에 잡아먹었다.
아스리안에 마기와 신성력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존재가 몇이나 될까?
현이 알기론 케이드리알과 동화를 사용한 자신. 이렇게 두 명이 전부였다.
혼돈 계약을 사용할 수 있는 유저는 온 세상을 뒤져도 자신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나만 쓸 수 있는 스킬…. 나만 쓸 수 있는 개사기 스킬!
어느새 현은 절로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붙잡고 있었다.
‘이걸 어떤 식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이제부터 서포터를 접고 자신이 딜러 노릇을 할 수도 있다.
혹은, 아인에게 루이즈의 ‘검은 바람’을 쥐어주어 기동력을 높여줄 수도 있었다.
‘아니,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군.’
현은 곧바로 1포인트를 투자해 전 직업 공통 스킬 중 하나인 ‘숨쉬기’를 배웠다.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숨이 쉬어지는 스킬.
가상현실 게임의 초심자의 감각 적응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실제로 배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궁극의 쓰레기 스킬이었다.
‘좋아, 일단 계약용 스킬은 배웠고.’
다음으로 현은 계약을 맺을 상대를 하나씩 떠올려 봤다.
마침 자신의 근처엔 순순히 계약에 동의해 줄 사람들이 가득했다.
일단 콤보 계열 직업인 살론은 제외한다 치고… 타르타르의 ‘블랙홀’을 뺐을까? 아니면 지니의 ‘역행’을 가져갈까?
「현, 잠깐 시간 괜찮을까요?」
지니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렇게 나쁜 상상을 이어가던 도중이었다.
「크흠, 아, 지니. 무슨 일인데요?」
현은 괜히 깜짝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귓속말에 답했다.
「다크니스로부터 비밀리에 메일을 보냈습니다.」
「다크니스요?」
이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걔네가 나한테 연락할 일이 있었나?’
자신과 다크니스의 교류는 가끔씩 메이데이와 정보를 교환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 외의 용건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비밀’ 연락이라니?
「무슨 내용인데요?」
「귓속말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 우선 간단히만 설명 드릴게요.」
다음으로 지니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현의 눈동자를 동그랗게 만들었다.
「임시동맹을 맺는 게 어떠냐고 묻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