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132)
거상의 길
현은 실소를 흘렸다.
갑자기 자신과 아인에게 퀘스트를 준 것이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기만의 퀘스트.
문장은 다르지만, 아마 맥락은 같은 곳을 향해 있으리라.
‘예전이라면 무조건 의심부터 했겠지만….’
지금은 현도 어느 정도 의심을 거두었다.
기만은 몇 번이나 루이즈를 구하고, 또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었다.
아인을 사도로 만들고, 한 달 만에 라티스의 레벨을 뛰어넘을 정도로 키워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경계의 도시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쯤 되면 나중에 뒤통수를 맞더라도 한번쯤은 웃으면서 대줄 수 있지 않을까?
‘나쁠 것도 없는 제안이야.’
현은 다시 퀘스트 목표를 읽어보았다.
조화의 이름을 알리고, 그 사상을 전파하라!
‘어차피 언젠가 해야 할 일이었지.’
퀘스트가 없더라도 자신은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기만(조화)의 사도인 아인, 어둠의 대악마인 루이즈, 혼돈의 힘을 갖춰가고 있는 자신까지.
쉐이드 길드는 이미 심연의 본거지나 마찬가지였다.
훗날 자신이 아스리안의 왕좌에 오르기 위해선 가능한 한 천공을 분열시키고, 또 심연으로 물들여 놔야만 했다.
그 첫 번째 단추가 바로, 지상에 조화의 사상을 전파하는 것.
‘마침 딱 적절한 타이밍이기도 해.’
아스리안의 유저들은 분명 이전과 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회귀자들은 벌써 빛의 세력과 결탁했고, 다크니스 길드도 핵심 NPC의 포섭을 꾀하고 있었다.
유저의 세력이 기존 아스리안의 세계관에 융합되는 시기.
레벨은 좀 천천히 올려도 된다.
나중에 아인에게 쩔을 받거나, 케이드리알에게 자신도 마계 수련법을 부탁해 볼 수도 있으니까.
‘대악마’라는 패를 두 개나 쥐고 있는 자신에겐 쉐이드 길드의 입지를 확고히 할 절호의 기회였다.
‘지금은 길드의 기반을 다지는 게 우선이다!’
역사적으로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세력의 힘이었다.
초월자와 맞먹는 힘을 지니던 예전의 자신도, 마계의 입구를 뚫어내기 위해선 부하 NPC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게다가.
(보상 : 내 힘이 허락하는 한 뭐든 들어주지)
‘뭐든’ 들어준다는 케이드리알의 약속.
허구한 날 거짓말을 하는 기만도 ‘퀘스트 메시지’에는 거짓을 담을 수 없다.
대악마의 힘을 빌린다면 자신은 아스라 시절보다 훨씬 빠르게 정점에 오를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현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지상에 조화의 이름을 어떻게 알릴 것인가?
그를 이루기 위한 무수한 조각들이 머릿속에서 맞춰지고 흩어졌다.
씨익. 한참 뒤 현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을 때, 그 머릿속의 퍼즐은 하나로 완성되어 있었다.
불쏙 아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현이 모든 생각을 마친 순간이었다.
“좀 아깝네.”
“뭐가?”
“그동안 랭킹에 이름을 안 올리고 있던 거.”
아인의 말뜻은 이러했다.
자신들이 초창기부터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등록하고 있었다면 지금쯤 상당한 명성이 쌓이지 않았겠냐는 것.
그 의미를 이해한 현은 기겁하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안 올리는 게 정답이었어. 악명을 쌓지 않으려면.”
“음… 그런가?”
아인은 볼멘소리를 냈다.
메인 퀘스트같은 것을 또 해내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득해지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듯한 표정의 아인에게, 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이번엔 비교적 쉽게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거야.”
“어떻게?”
“꼭 영웅이나 용사가 되어야만 명성을 얻는 게 아니거든.”
“…?”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인을 보며 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 떠올린 딱 적절한 방법.
명성을 얻는 동시에, 지상에 조화의 사상을 물들일 수 있는 방법이다.
***
경계의 도시 지하 연구소.
현은 지니와 함께 복도를 가로지르며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긴 올 때마다 바뀌는 것 같군.’
도시의 주인임에도, 현은 도시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다 알지 못한다.
점점 세분화되고 복잡해지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에 와선 SHA컴퍼니에 어떠어떠한 부서가 있고, 각 부서에 몇 명의 사원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지니가 가씀씩 보고서를 보내 주기는 한다.
하지만 수많은 서류들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이 너무나 귀찮았기 때문에, 현의 메시지 함엔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한가득 쌓여 있는 상태였다.
언제까지나 놔둘 순 없으니, 시간이 날 때 몰아서 읽어야겠지만.
‘지니도 바쁘겠네.’
현은 다시 한 번 지니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개인의 성장을 전혀 도모하지 않을 만큼 길드 관리에만 빠져 있었다.
옆에서 보고 있자면, 게임이 아니라 사업을 하는 걸로 느껴질 정도였다.
가끔씩 자신과 아인이 쩔을 해 주지 않았더라면 지니의 레벨은 한참 동안 정체되어 있었을 게 분명했다.
현은 좀 더 길드원들을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살론은 알아서 잘 하니 상관없겠지만, 지니는 일 때문에, 타르타르는 학교에 다니는 동시 여러 일을 병행하느라 남들보다 성장할 기회가 적기 때문이었다.
“출입증 확인 도와드리겠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목적지에 도달한 현을 향해 유저 안내원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말했다.
쉐이드 길드 최고 보안 연구소.
길드장인 현조차도 출입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이곳에 들어올 수 없었다.
현이 까다로운 절차를 도입할 수밖에 없는 이유.
외모 변경이 가능한 아스리안에선 특정 유저를 사칭하기가 너무 쉽기 때문이다.
‘뭔가… 굉장하게 바뀌었네.’
보안을 지나친 현은 주위를 둘러보며 혀를 내둘렀다.
내부에는 아스리안이 판타지 게임이 아닌 SF 배경의 게임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온갖 장치들로 가득했다.
지니의 설명에 따르면, 총의 제작은 현실의 반도체 공정과 유사하다고 한다.
기존의 틀에서 마나를 제거하고, 미세부품들을 하나하나 쌓아올리며, 마지막으로 ‘마나 고정’의 마법진을 코팅하는 것까지.
현대의 첨단기술과 새로운 원리가 정교하게 맞아떨어져야만 구시대의 총 하나를 겨우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총과 같은 ‘화기’ 뿐만 아니라 증기기관, 전자제품 등의 물건들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마나라는 변수 하나만으로 기존의 물리법칙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탓이었다.
‘이 연구실을 만드는 데 얼마가 들었을지 상상도 안 가는군.’
타 기업들은 쉐이드의 연구 속도를 따라가기보단 다른 분야를 파고들기로 결정했으니, 아스리안의 총기 생산 및 판매는 쉐이드 길드가 독점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선두라 해서 안일할 수는 없는 법.
쉐이드 연구 팀은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 기존의 총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다.
“지니, 부탁드린 건 완성됐나요?”
“네. 이것입니다.”
지니는 갓 만든 총 하나를 현에게 건네주었다.
총신에는 천사의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날개를 활짝 펼친 그 문양의 정체는 바로 조화의 천사!
현은 아인의 상태 창에 그려진 사도의 문양을 지니에게 전달해 주었고, 지니는 대량생산의 공정에 그 인장이 새겨지도록 조치한 것이었다.
“의뢰대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인장을 새겨뒀지요.”
“오오….”
현은 감탄했다.
굉장한 고퀄리티의 디자인. 그 아래엔 ‘Harmony’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확실히, 이 정도면 상당히 눈에 띄겠네요.”
이것이 바로 지상에 조화의 이름을 퍼뜨리기 위한 첫 번째 방법.
다짜고짜 이름도 모르는 천사를 섬기라 말하면 당연히 반감부터 일어날 것이다.
현은 NPC들의 일상에 자연스레 조화가 섞여들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준비한 건 이것뿐만이 아니에요.”
“네?”
“한 가지 기능을 더 숨겨놨거든요.”
그렇게 중얼거린 지니는 갑자기 자신의 궁극기인 역행을 사용했다.
신체를 몇 분 전으로 되돌리는 마법.
마법이 발동한 순간 지니의 체력은 매우 낮은 수치까지 줄어들었다.
그와 동시.
우우우웅.
그녀의 손에 들린 권총이 성스러운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총신에 새겨진 조화의 문양으로부터 새어나오는 빛이었다.
“최근에 개발한 신기술이죠.”
“신기술…?”
“제작 스킬 없이 장비에 옵션을 부여하는 기술이에요. 현의 계획대로라면 필수적으로 대량생산을 해야 할 텐데, 일일이 장비에 마법부여를 걸 순 없잖아요?”
[옵션 1]-사용자의 체력이 10%이하로 떨어질 시 발동합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스탯이 10 상승하며, 상태이상 ‘공포’를 해제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30일)
옵션의 성능 자체는 보잘 것 없으면서도, 재사용 대기시간은 말도 안 되게 길었다.
실제로, 쉐이드가 생산 가능한 장비의 등급은 기껏해야 ‘매직’에 불과했고, 부여할 수 있는 옵션도 이 정도가 한계였다.
인간은 아직도 ‘마나’의 작동원리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대장장이나 마법부여사의 스킬로 만들어내는 장비들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초라한 수준의 옵션들밖에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이건….”
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법부여 없이 만든 물건이라고요?”
“네.”
“그러면… 이 옵션의 총을 대량생산 할 수 있겠군요!”
“맞아요. 실제로 그럴 계획이지요.”
옵션의 성능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지니의 의도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절망적인 상황에 구원을 바라는 법이다.
그 순간 무기에 새겨진 천사의 문양이 빛난다면, 살아남은 NPC는 자신이 조화의 천사에게 구원받았다 여길 것이다.
설명을 마친 지니는 현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괜한 짓을 한 건 아니겠죠?”
“아뇨, 훌륭해요.”
현은 마구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완벽할 정도로!”
지상 곳곳에 총을 보급하여 조화의 이름을 알린다는 계획
지니가 훌륭히 첫 단추를 맞춰 주었으니 이 다음은 자신의 차례였다.
***
제국, 성왕국, 마도국.
아스리안엔 그 외에도 수십 개의 소국들이 있지만, 세계관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위의 세 국가들이다.
아스리안의 모든 문화적 형명은 세 나라 중 한 곳에서 시작된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현의 다음 계획은 3강이라 불리는 한 국가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는 것이었다.
‘어느 국가에서?’
다음 문제는 셋 중 어디를 골라야 하는가?
우선 성왕국은 기각이다.
그들은 카린타 섬에서 일어났던 일을 모두 알고 있는데다, 조화를 적대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성왕국은 광신도들이 모여 이룩한 국가였으니 거래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제국은….
제국은 그 명성에 걸맞은 권위주위로 이루어진 국가였다.
귀족들은 유저들에게 퀘스트를 내어주지만, 결코 그들과 친구가 되려 하진 않는다.
제국의 귀족들과 거래를 하기 위해선, 그들과 동등한 지위를 갖춰야만 했다.
즉, 아무런 작위도 없는 자신으로선 정상적인 거래가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역시, 마도국이겠지!’
현의 눈이 빛났다.
계획을 세울 때부터 선택지는 단 하나 뿐이었다.
3강에 속하는 국가들 중 가장 자유로운 나라.
모든 것은 자본주의의 원리에 따라 결정된다.
금화가 법 위에 존재하는 경우도 수두룩했다.
바꿔 말해, 부유한 자가 귀족이 되는 나라!
NPC들도 돈을 위해선 천공과 심연을 가리지 않았기에 마도국은 대부분의 심연 유저들의 활동 무대이기도 했다.
“가자 아인.”
“나도?”
“응, 네 도움도 필요할 것 같거든.”
결심을 굳히자마자 현은 아인을 데리고 마도국으로 향했다.
‘예전에도 한번 와보긴 했는데, 다시 봐도 대단하네.’
현은 아인과 함께 마도국의 수도, 루프라를 걷고 있었다.
최근 경계의 도시가 급속도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지만, 아직 마도국의 화려함에는 비할 수 없었다.
3강에 속하는 나라의 위명대로, 수도의 중심지엔 갖가지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밤이 되면 거리의 마법진들은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환상적인 루프라의 야경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밤에 와 보는 것도 괜찮을지 모르겠어.」
현이 중얼거린 혼잣말에, 아인이 답했다.
「밤까지… 같이 있으면 되잖아…?」
「그런가? 하긴, 곧 저녁이긴 하네.」
현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고 걷는 속도를 높였다.
아스리안의 각 도시들 사이엔 시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처럼 장거리 텔레포트를 할 때마다 시간을 확인해 줄 필요가 있었다.
‘여기로군’
머지않아 ‘마도국 중앙 상회’의 본부에 들어섰다.
마감시간이 가까워졌기 때문인지, 상회 내부는 굉장히 한가했고, 덕분에 현은 기다림 없이 원하던 NPC를 마주할 수 있었다.
‘유저인가…?’
창구에 있는 NPC는 현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유저가 상회 본부의 3층을 찾아오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은 상인 계열의 상위 전직을 위해서.
‘상인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상인이라고 봐 주기 어려운 복장이었다.
창구를 잘못 찾아온 건가? 그런 거라면 바로 1층으로 쫓아낼 생각으로 신청서류를 검토하던 중.
“으음?”
청년의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이름이 현?’
한 명의 상인으로서 그는 새로운 소문과 정보들에 민감했다.
그런 일과 중엔 명예의 전당에 등장하는 새로운 유저의 이름을 확인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서류에 적힌 프로필은 254레벨, 현.
청년이 알기로 그런 유저는 단 한 명뿐이었다.
“…무슨 용건으로 방문하셨는지요?”
갑자기 미소를 떠올리는 남자의 말투가 공손해졌다.
이것이 바로 명성의 효과!
돈의 흐름에 민감한 상인 NPC들은 특히 거물급 유저들에게 굽신거리는 경향이 있었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라 있다는 것만으로 NPC들의 태도가 달라지고, 호감도를 올리거나 퀘스트를 받아내는 것도 남들보다 더 수월해지는 것이다.
“여기 주인을 좀 만나고 싶은데요.”
“아, 본부장님이요? 메트리님과 만나기로 약속하셨는지요?”
NPC의 물음에 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럼 일단 용건이 뭔지부터 제게 말씀해 주시면….”
“아니, 그쪽이 처리할 만한 일이 아니라니깐?”
짤그랑.
현은 귀찮은 말을 이어가기보다 품에서 금화 주머니를 꺼냈다.
현실 세계의 경우로 비교하면 공무원에게 뇌물을 먹이려는 것이다.
놀랍게도 마도국에선 그것이 금지된 행위가 아니라, 음식점에서 팁을 주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군요…! 잠시 기다려 주시면 곧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묵직한 무게의 주머니를 보는 청년의 눈동자가 찰나 커졌다.
재빨리 금화 주머니를 품에 넣은 그는 통신 마법진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현은 NPC의 안내에 따라 상회 4층에 있는 어느 방으로 들어가 상회 본부장, 메트리와 마주할 수 있었다.
“날 만나고 싶다고?”
메트리의 표정은 못마땅해 보였다.
마도국의 경제를 이끌어가는 12명의 정부상인(政府商人)이라 불리는 자들 중 한 명이 바로 그였다.
예기치 않은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어중이떠중이가 약속도 잡지 않고 자신을 만나겠다니.
상대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자가 아니었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꺼지라고 말했을 것이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한편 현은 바짝 긴장했다.
원래는 상인 계열 직업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지 않는 한 메트리를 만나기란 불가능하다.
편법으로 만들어낸 단 한 번뿐인 기회!
현은 상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준비해 온 대사를 시작했다.
“조화의 천사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길… 그렇습니다. 제가 무례를 무릅쓰고 메트리님을 뵙기를 청했습니다.”
나름대로 신관의 말투를 따라한 현의 연기는 어설프고 서툴렀다.
동화하고 있던 아인은 괜히 자신이 부끄러워져 연신 헛기침을 할 정도였지만, 메트리에겐 충분한 효과가 있었다.
‘기도하는 자의 사제복’의 고풍스러운 디자인. 거기에 ‘기만자’의 칭호가 더해지면 NPC는 속을 수밖에 없으니.
“조화의 천사…?”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닐세. 그래, 신전의 사정엔 관심이 없었는데. 새로운 천사가 등장했을 수도 있겠어. 그나저나, 진심으로 천사를 섬기는 유저는 난생 처음 보는군.”
그렇게 현의 첫 번째 작전은 성공했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던 메트리의 표정엔 약간의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날 만나고 싶다는 이유가 뭔가?”
“다름이 아니고… 한 가지 물건을 보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조화의 은혜가 담긴 무기지요.”
“무기?”
현은 인벤토리에서 준비해 온 권총을 꺼냈다.
메트리의 안광이 번쩍인 것은 바로 그 순간.
“오호, 뭔가 했더니 그거였군.”
“알고 계십니까?”
“알다마다. 이것과 같은 것 아닌가.”
이어서 자신도 품속에서 권총 한 자루를 꺼내는 메트리.
동시에 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NPC가 총을 가지고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길드에서 만든 총이다…!’
현은 한눈에 그것이 쉐이드 길드의 물건임을 알아보았다.
유저 중 한 명이 쉐이드 상점에서 구입한 총이 어찌어찌해서 다시 NPC에게 넘어간 모양이었다.
바히미르의 서열식에서도 알 수 있었듯, NPC가 유저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좋아, 협상이 좀 더 쉬워지겠군.’
현은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메트리가 권총을 가지고 다니던 이유는 필시 그 가치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리라.
곧바로 다양한 종류의 총기들을 차례로 꺼내기 시작했다.
권총, 샷건, 기관총, 저격총까지.
하나같이 총신에 조화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 물건들을 대량으로 팔고 싶습니다. 현재 물량은 약 10만 자루지만, 계속해서 추가로 생산해 나갈 생각입니다.”
‘뭐? 10만 자루…?!’
순간, 헛기침을 하는 메트리.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 상인의 기본 소양이다.
메트리의 최대한 침착함을 가장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왠 어중이떠중이가 자신을 만나러 왔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왔어!
그도 유저들이 만들어낸 총이라는 무기의 소문을 듣고 그것을 똑같이 만들려고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결론은 제작 불가.
마도국 최고의 대장장이라 불리는 자들도 총을 만들진 못했다.
총의 제작엔 마법과 담금질 기술만으론 불가능한 무언가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미련을 접으려던 때, 호구처럼 보이는 유저 하나가 총을 들고 자신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침착함을 가장한 채 현이 꺼낸 총기들을 마법으로 감정하기 시작했다.
“전부 매직 등급이로군.”
“그렇습니다.”
“흐음… 매직 등급 장비들은 높은 가치를 쳐 주기가 힘든데.”
그 순간 현은 상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동시에 헛웃음이 나왔다.
가치가 없다고? 그러면 자신은 가치 없는 물건을 가지고 다녔다는 건가?
그럴 리 없겠지.
상대는 지금 멋모르는 애송이를 벗겨먹을 생각을 하고 있다.
최근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데다, 사제복을 입고 중앙 상회에 찾아온 유저.
상인의 입장에선 그만한 먹잇감이 따로 없을 테니까.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현은 상대방의 꿍꿍이를 알면서도 그대로 받아주었다.
이어서 시작된 가격 책정.
보다 못한 아인이 나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어어, 현, 완전 미쳤어!」
아인은 현의 행동을 믿을 수 없었다.
가지고 있는 물건들의 상세정보랑, 지닌 수량이랑, 가진 패는 다 알려주고서, 상대가 가격을 후려치는데 웃음이 나온다고?!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아인의 눈에도 지금 현의 모습은 호구 그 자체였다.
「뭐가?」
「몰라서 물어? 나가! 여기서 당장 나가야 돼! 현, 지금 쟤한테 사기당하고 있는 거야!」
아인은 경계의 도시 계획에 참여하지 않았다.
즉, 그녀가 기억하는 ‘사업가로서의 현’은 타르타르와 유튜브 논쟁을 벌이던 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래, 파피랑 같이 일하더니 호구 기질이 옮아버린 거야! 지금은 나라도 나서서 현을…!」
「정신없으니까 조용히 좀 해봐!」
「사기, 사기야! 이거 사기라니깐?!」
「아니, 나도 알고 있다니깐!」
현은 아인에게 미리 설명해 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우리가 돈이 목적이 아니잖아! 돈이라면 경계의 도시 수익이 수만 배는 되는데 뭐하러 내가 장사를 하고 있어!」
「그러면…?」
「다 생각이 있으니까 얌전히 보고 있으라고!」
후… 현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 번 계획을 떠올렸다.
일명 호구 코스프레!
상인 계열 NPC에게 가장 빠르게 호감도를 얻는 방법이다.
처음부터 자신의 패를 다 공개한 것도, 가격을 후려쳐도 웃기만 하는 것도 전부 연기에 불과했다.
그 결과 지금 정부상인이라 불리는 메트리의 얼굴은 인상 좋은 중년 아저씨로 변해 있지 않은가?
“개당 30골드요…? 그럼 원가도 안 나오는데….”
“어허, 첫 거래는 다 그런 법이야. 어? 내가 직접 나서서 유통망까지 확보해 주겠다는데. 그 정도 손해는 감수할 수밖에 없지 않나.”
“음… 그런가요? 원래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죠.”
“잘 생각했네. 아참, 자네 혹시 여기 오기 전에 다른 사람과 비슷한 이야기 주고받은 적 있나?”
“뭔 이야기요?”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허허허.”
‘…….’
마력계수도 붙어있지 않아 어차피 유저에겐 팔 수 없는 구형 모델들.
현은 거래를 하는 척 모든 이권을 내주고 있었다.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현의 연기에 아인만 괜히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할 뿐.
동화 후 ‘반전’을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면 아인은 당장 무슨 일이라도 벌였을지 몰랐다.
어쨌거나 현과 메트리의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거래는 막바지에 다다라 가고 있었다.
“이 조건은 자네에게도 전혀 나쁠 게 없다네. 그리고 앞으로도, 자네와의 거래를 최우선순위로 처리할 것을 이 정부상인 메트리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앞으로도 자주 등쳐먹을 수 있도록 다른 사람을 찾아가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현은 그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제가 모두 양보하겠습니다. 그 대신.”
“…!”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현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구매자에게 반드시 이 책을 함께 건네줘야 한다는 조건을 계약에 추가해 주셨으면 합니다.”
“응? 무슨 책?”
메트리는 현이 건네준 종이뭉치를 받아들었다.
“이게 뭔가?”
“총의 사용법을 적어둔 설명서입니다.”
“설명서…?”
이어서 그 내용을 메트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슬쩍 살펴본 가장 뒷장엔 알 수 없는 문장들이 적혀 있었기에.
-조화께선 천인, 인간, 미물, 심지어 마물에게도 평등하시니, 이 무기를 든 자는 누구든 똑같은 힘을 얻을지어다.
그것은 현이 성서의 내용을 흉내내서 적어둔 문장들.
성왕국에선 큰 소란이 될 지도 모르지만, 마도국에선 특별한 의미도 없는 내용이었다.
“어려울 건 없지만, 책 때문에 더 가격을 올릴 순 없는 건 알고 있겠지?”
“물론이지요.”
“좋아, 그럼 거래는 성립되었군. 잠시 기다리게나. 계약서를 작성해 줄 테니.”
아스리안의 계약서는 현실의 것보다 훨씬 간명하다. 마법의 존재가 함부로 계약을 어기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띠링!
메트리가 건네준 종이에 손가락을 올린 순간 현에게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도국 정부상인 ‘메트리’와의 계약이 성사되었습니다!](※주의 : 계약을 어길 시 계약서에 적힌 패널티가 강제로 부여됩니다!)
“그럼 정해진 기한까지 납품을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조화의 이름을 알리는 동시에, 쉐이드 길드의 영향력을 세상 곳곳으로 넓히기 위한 계획.
마도국에서의 첫 번째 거래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