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142)
정원에서 있던 비극
잠깐의 휴식을 마친 뒤.
일행은 다시 섬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한다…?’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현은 마음 한구석의 답답함을 떨쳐내지 못했다.
결국 사원까지 데려다 달라는 세세리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되는 데까지 올라가기나 해 보자고”라는 식의 애매한 답변이 전부였다.
스탯은 이미 두 배를 넘어선지 오래.
그에 따라 숨이 가빠지는 증상도 다시 찾아왔다.
위로 올라갈수록 섬의 기운이 강해지는데다, 이제는 세세리까지 자신에게 공감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겠지.
‘과연 코르케스족이란 건가.’
현은 도중에 다시 한 번 길드원들을 차례로 로그아웃시켜 보았다.
세세리가 전해주고 있는 공감의 지분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는 26퍼센트!
같은 시간 53퍼센트였던 아인의 기여도와 비교해 봐도 놀라운 수치였다.
현과 세세리는 어제 처음 만난 사이인 데다, 공감 지분을 측정할 때의 세세리는 기도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인의 절반에 해당하는 ‘공감 지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현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거나, 현에게 기도할 시에 더 큰 공감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일행은 위기 없이 강력한 몬스터 무리들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 뒤.
“드디어 끝이 보이는군요.”
파피의 중얼거림에 일행들은 위를 올려다봤다.
모두의 눈앞에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섬 꼭대기의 머리맡에 둥둥 떠 있는 또 하나의 작은 섬.
거대한 식물줄기들이 두 섬을 휘감은 수직으로 연결시킨 가운데, 빛의 사원은 그 작은 섬에서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하늘 섬 위의 하늘 섬이로군.”
“와, 엄청 크다….”
“사원이 아니라 성채 같네요.”
사원의 압도적인 위용에 일행은 각자 한 마디씩 감상을 내뱉었다.
그리고 세세리가 날갯짓을 멈춘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제가 알고 있는 루트는 이게 다에요. 여기서부턴 저도 처음 가보는 길이죠!”
세세리의 목소리는 굉장히 들떠 있었다.
꼭대기 근처. 높은 농도의 기운이 기분을 잔뜩 고조시키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너무 신기해요…. 지난번 여기까지 왔을 땐 제대로 호흡도 곤란하고, 제대로 서있기조차 힘들었는데….”
세세리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양 손을 쥐었다 폈다.
“지금은 몸에 떨림도 전혀 없어요. 이 정도면 꼭대기까지 가도 완전 멀쩡하겠어!”
그녀는 일단 되는 데까지 올라가 보자는 현의 애매한 대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일행은 빛의 신도라고 알고 있다면 사원까지의 동행을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지 않는 건 당연했다.
이대로라면 일행은 세세리와 함께 빛의 사원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현… 저 녀석 이대로 우릴 따라오게 놔둘 것이냐?”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길을 걸어가던 중, 루이즈가 세세리를 가리키며 작게 속삭였다.
“우리에게 방해가 될 게 분명한데 말이다.”
“어떤 식으로?”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냐…? 저 새 종족이 어마어마한 기도의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 건 현 그대 아니었나…!”
그렇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세세리의 기도.
천사를 강림시키는 건 당연히 무리겠지만, 신탁 하나쯤은 더 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곳은 빛에게 가장 목소리가 잘 전해진다는 빛의 사원과 아주 가까운 장소.
메인 퀘스트를 시작하기도 전에 침입이 발각된다면 그동안 짜온 모든 계획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럼, 죽이기라도 하게?”
“무슨, 그런 짓을 벌이자는 말은 아니다! 난 그냥… 쫓아내자는 말이었지!”
루이즈가 깜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예상대로의 반응에, 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루이즈의 성격에 그런 선택을 내릴 순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파피를 속였던 죄책감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했으니까.
“현, 그대는 설마… 죽일 생각이었나?”
“아니.”
그리고 이번엔 현도 루이즈와 같은 생각이었다.
선의로 도움을 준 녀석을 배신하고 싶진 않아.
그런 짓을 벌이지 않아도 이 일을 해결할 방안은 존재했다.
곧이어 현은 은신처를 떠난 이후부터 준비해 오던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다 방법이 있으니까?”
“어떻게…?”
“조금 전에 타르타르에게 지시해 뒀어. 우리가 사원에서 볼일이 끝날 때까지 세세리를 안에 못 들어오게 하라고.”
현은 좀 전에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봤다.
빛의 사원에서 천인들에 맞서 싸우는 타르타르.
그리고 어딘가에서 세세리가 보내주는 공감의 힘.
둘 중 어느 쪽이 더 도움이 되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후자였다.
언제 죽어버릴지 모르는 타르타르와 달리, 세세리는 시종일관 자신에게 공감을 불어넣어 줄 수 있으니까!
그래, 모든 계획이 끝날 때까지 세세리의 눈과 귀만 막을 수 있다면 그녀는 적이 아닌 든든한 아군이 되어줄 것이다.
따라서 현은 사원에 진입하기 직전,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타르타르와 세세리를 단둘이 놔둘 생각이었던 것이다.
“뭐, 미리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현은 싱글싱글 웃고 있는 세세리의 얼굴을 보며 목소리를 삼켰다.
괜한 말로 그녀의 들뜬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 이유는 없었으니까.
“고마워요!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전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했을 걸요?”
“뭐 이런 걸 가지고.”
“앗!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
‘…?!’
아까 전? 혹시 마기의 단서를 잡아내기라도 한 건가?
현이 잠시 숨죽인 가운데 세세리의 말이 이어졌다.
“마을에 인사를 못 하고 왔네요! 하지만 뭐, 괜찮아요! 빛의 시종으로 간택 받은 다음에도 마을 사람들을 잊지 않고 찾아가면 되겠지요!”
“…그렇겠네.”
세세리는 들떴는지 부쩍 말이 늘어있었다.표정은 기대감에 가득 차 어쩔 줄 모르는 소녀 같았고, 날갯짓에도 힘이 가득했다.
저렇게 기쁜 걸까?
현은 그녀의 오빠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지만, 이런 반응을 보니 굉장히 소중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미안하지만, 조금만 더 참아 줘야겠어.
몇 시간정도는 참을 수 있겠지?
현은 앞으로의 계획을 떠올리며 슬쩍 미소 지었다.
***
그 후 일행은 거대한 넝쿨을 타고, 세세리는 힘차게 날아서 이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고비.
수직으로 난 넝쿨절벽을 마저 오르는 동시 현은 엄청난 성취감을 느꼈다.
발아래 까마득한 풍경을 보고 있지만 며칠간의 노력이 보상받는 것 같아.
에베레스트도 아마 이것보단 높이가 낮지 않을까?
그런 조촐한 감상을 뒤로하고, 현은 주위부터 살폈다.
‘좋아, 여기에도 파수꾼은 없다!’
이곳은 ‘빛의 정원’이라 불리는 곳.
사원으로부터 겨우 500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장소이기에 ‘맹독 구름’처럼 위험한 기운은 없었다.
당연히 몬스터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본격적인 계획을 앞두고 현은 다시 한 번 퀘스트 설명을 읽어 보았다.
-루이즈와 함께 빛의 사원으로 향하세요. 그곳에 어둠의 힘이 잠들어 있나니.
-누군가의 정보에 따르면, 지금 빛의 사원엔 상당수의 자리가 비어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금세 그 공백은 매워지겠죠. 당부컨대 그대들은 때를 놓치지 마시길.
설명에 따르면 이번 퀘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다.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부턴 잠시도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리라.
그러니 여기서 모두 함께 휴식을 취하고, 또 타르타르에게도 세세리를 붙들어 두는 임무를 맡겨둬야겠지.
“어…?”
세세리의 입에서 의문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온 것은 그렇게 현이 앞으로의 계획을 준비하던 순간이었다.
“이상해요…. 여기까지 도착했는데 왜 아무도 절 기다리고 있지 않은 거죠?”
세세리의 의문에 현은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
“여긴 아직 정원이잖아. 빛의 사원은 저기 있는 거대한 건물이라고.”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 설명으로도 세세리의 의문은 해소되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설명했다.
“섬의 꼭대기에 오른 코르케스족은 빛의 시종으로 간택 받아야 해요. 그리고 여기가 바로 섬의 꼭대기죠.”
“뭐…?”
“전승대로라면 시종을 맞이하는 천인께서 절 마중하러 나오셔야 하는데… 분명 그렇다고 들었는데….”
순간, 현의 심장이 철렁했다.
꼭대기는 빛의 사원을 말하는 게 아니었나?
그렇다면 세세리를 사원에 들어가지 못하게 붙들고 있겠다는 계획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바로 그 때.
“…!”
♬ ♪ ♬ ~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현의 머리 위엔 물음표가 떠올랐다.
‘뭐야….’
“오르간 소리일까요…?”
세세리를 포함한 모두는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일행의 귓가로 파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선율은 찬송가입니다.”
“찬송가…?”
“빛에게 바치는 노래인데… 지금은 노래 없이 음정만 들려오는 것 같군요.”
현은 뒤늦게 알아챘다.
세세리는 선율에 홀린 듯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 순간, 현의 머릿속에 붉은 경고등이 켜졌다.
이 음악소리는 세세리를 위한 것일까?
섬의 꼭대기에 오른 코르케스족을 빛의 시종으로 맞이하기 위한 이벤트라면…!
그렇다면 지금 그녀를 막아야 해! 그리고 최악의 경우엔…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마자 현은 세세리를 뒤쫓아 갔다.
음악소리는 일행이 있던 장소와 고작 몇 십 미터 떨어진 조그만 오두막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눈치채지 못한 것은 그 오두막이 정원에 가득한 나무덤불에 가려져 있던 탓이다.
“세세리!”
누가 세세리를 불러냈을까! 어쩌면 지금 바로 전투에 돌입해야 할지도 몰라!
덜컹! 삐꺽거리는 문을 그대로 열어젖힌 그 순간.
“어…?”
눈앞의 광경을 목도한 현은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건물 안엔 세세리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새어나오는 찬송가.
그 선율은 벽에 설치된 악기 형태의 마도구로부터 연주되던 것이었다.
“여긴… 예배당인가?”
수정으로 만들어진 천사의 조각상이 현의 시야에 잡혔다.
빛의 천사.
‘뭐야, 이건…!’
이윽고 옆을 돌아본 현은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그곳엔 천사를 형상화한 십여 구의 인형들이 무릎을 꿇은 채 양손을 모으고 있었다.
‘인형…이 아닌가?’
뒤늦게 깨달았다.
그들의 어깻죽지에 달린 날개의 형태는 그 어떤 계급의 천사의 것도 아니었다.
아스리안에 저러한 날개를 가진 천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아, 하아…!”
갑자기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린 현은 인형 한 구를 향해 다가가는 세세리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깨가, 아니, 온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다.
덜컹! 그때쯤 다시 문이 열리며 나머지 일행들도 예배당 안으로 들어왔다.
“뭔가요? 이 천사 조각상은….”
“오싹하게 생긴 인형들이로군.”
일행들이 건물 곳곳을 둘러보는 가운데, 파피는 현의 근처로 다가왔다.
바로 옆에 놓인 인형을 살펴보는 그의 얼굴은 여태껏 보아온 것 중 가장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것들은 조각상도, 인형도 아닙니다.”
“그러면…?”
“신녀님의 부하들이 봉인되어 있던 모습은 기억하시나요?”
끄덕.
“이들 역시 유사한 마법으로 봉인된 자들입니다.”
♬ ♬ ~
이어지는 파피의 설명.
현은 음악소리 때문에 자신의 귀가 이상해진 것이라 착각했다.
“박제, 라고 표현하면 간단하겠군요. 누군가가 살아있던 이들을 기도하는 채로 박제시켜 둔 겁니다.”
예배당 한가운데 위치한 빛의 천사.
그리고 천사를 향해 영원의 기도를 올리고 있는 코르케스들.
처음에 현이 코르케스족을 천사로 오인한 까닭은 그들의 날개가 전부 같은 형태로 망가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부러뜨린 것처럼 말이다.
현은 인터루프에서 보았던 정보를 떠올려 보았다.
그곳에 적혀 있던 대로라면 코르케스들이 느끼는 감정은 인간의 수백 배에 달한다고 한다.
또한, 코르케스들 중에도 아주 일부의 개체들은 라딕스 섬 북쪽에서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감정의 그릇을 지니고 있다.
세세리나, 그녀의 오빠처럼 말이다.
비슷한 이들은 과거에도 무수히 존재했겠지.
“이건… 상당히 악랄하군요.”
감정이 클수록, 기도로 전하는 공감도 커진다.
그러니 감정이 풍부한 코르케스족은 인간에 비할 수 없는 공감을 전할 수 있으리라.
“이런 식으로 영혼을 봉인시킨다는 상상을 하는 자들이 있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파피는 박제된 코르케스족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빛의 세력들에게 ‘기도할 수 있는 코르케스족’은 공감을 만들어내는 귀중한 자원일 터.
하지만 모두를 박제할 수는 없으니 빛의 세력들은 코르케스족들 중에서도 특별한 몇몇을 선발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코르케스족의 마을에 퍼져 있다는 전설도 빛의 세력들이 퍼뜨린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
움직이지 않는 코르케스들이 현의 시야에 들어왔다.
눈을 뜬 채 양손을 모은 그들의 모습은 마치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껍질 같았다.
충격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파피는 이내 정신을 다잡고 음악이 연주되던 마도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위에 새겨진 마법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마법진을 분석하는 것은 그의 여러 특기 중 하나였다.
“이 또한 평범한 물건이 아니군요.”
“어떤 건데…?”
“같은 꿈을 반복하게 만드는 마법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계속 기도하는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겠죠.”
파피가 서슬 퍼런 안광을 내뿜으며 대답했다.
이런 짓은 한때 천공을 섬겼던 천인의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것이겠지.
현 또한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빛은 이런 식으로 공감을 수급하고 있었던가?
“깨울 수는 없는 것이냐…?”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루이즈의 물음에 파피는 고개를 흔들었다.
“깨우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어째서?”
“의식을 되찾는 반동으로 미쳐 버릴 게 분명하니까요. 아니, 미치기만 하면 그나마 다행이겠군요.”
“그나마 다행이라니… 무슨 뜻이냐?”
“꼭 말해 드려야겠습니까?”
자신을 바라보는 파피의 시선에 루이즈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서운 말이 나올 것 같아, 묻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후, 파피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확실한 건 깨어난다 해도 이전의 모습으론 절대 돌아올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
음악이 뚝 멎었다.
고요에 휩싸인 예배당 속에서 간간히 누군가 오열하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세세리 쪽에서 나는 소리다.
그녀의 앞에 놓인 금발 소년의 모습은 세세리보다 훨씬 앳되어 보였다.
한쪽에서 6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있을 때, 다른 한쪽의 시간은 멈춰 있던 것이었다.
현은 무의식적으로 세세리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도중에 루이즈가 현을 붙잡았다.
루이즈는 고개를 저으며 작게 속삭였다.
“지금은 가만히 놔두는 게 좋을 것 같구나….”
“….”
“아마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할 게다.”
라딕스 섬의 기운은 감정을 증폭시킨다고 한다.
작게 흐느끼는 세세리와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일행의 감정도 평소보다 심하게 떨리고 있으리라.
“그래… 그게… 낫겠네.”
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선 잠시 호흡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세세리가 자리에서 일어선 것은 아주 한참이 지난 뒤였다.
그녀는 파피와 짧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충 들어보면 루이즈가 물었던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그리고 나서.
“부탁이 있어요.”
세세리는 붉게 충혈 된 눈으로 현을 마주보며 말했다.
아직 눈물이 멈추지 않음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또렷했다.
“오라버니를 죽여주세요.”
“….”
현은 짧게 숨을 삼켰다.
아주 놀라진 않았다.
세세리가 그런 결정을 내릴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으니까.
다만, 자신에게 결정을 대신해 달란 부탁을 할 거라곤 예상치 못했지만 말이다.
“알겠어.”
현의 고민 끝에 대답했다.
세세리가 할 줄 아는 것은 기도 뿐.
몬스터는커녕 동물을 잡을 힘조차 없으니 오빠를 안식으로 인도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겠지.
“조금 물러서 있어.”
화악, 손아귀에 마기가 모여들었다.
새까만 기운은 기다란 형태를 이루어 거대한 대검으로 변모했다.
‘어둠의 검.’
빛은 언제나 어둠을 위협해 왔지만, 반대로 빛을 박살낼 수 있는 것 또한 어둠의 힘이다.
현은 이 일격이 빛이 남긴 악몽과, 과거의 기억까지 지워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후웅!
마기가 빛의 세상을 가른 순간.
빛의 조각상도, 찬송가를 연주하는 마도구도, 기도에 붙잡힌 코르케스족들까지, 모두가 함께 어둠의 검에 잘려나갔다.
무너진 예배당엔 고요만이 가득해졌다.
***
케이드리알의 말이 맞았다.
빛의 사원은 정말로 텅텅 비어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예배당을 통째로 날려 버리는 소란을 벌였을 때 정원이 이토록 조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머리를 좀 식히고 오죠.”
안 그래도 섬의 기운 때문에 예민해져 있는 상황인데 불온한 사건까지 겹쳐졌다.
현은 일행이 도저히 퀘스트를 할 수 없을 거란 판단 하에 다시 한 번 휴식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렇게 본인도 잠깐 휴식상태로 돌렸다 온 뒤.
현은 마침 근처에 있던 세세리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깃털 하나를 꼭 쥐고 있었다.
나중에 장례를 치를 유품을 준비하는 걸까?
“…….”
“…!”
그리고 그 때.
우연히 현과 세세리의 눈이 마주쳤다.
마주친 둘의 시선은 한참 동안 허공에 얽혀있었다.
잠시 후, 세세리는 현에게로 천천히 다가와 물었다.
“당신의 정체를 알려주세요.”
“….”
역시, 어둠의 검 때문에 정체를 들킨 모양이었다.
마기가 폭발하는 듯한 그 이펙트는 결코 천공의 것이라 생각할 수 없겠지.
그래, 이미 보여준 거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없어.
현은 세리에게 모든 걸 밝히자고 결정했다.
“네가 알던 빛의 신도는 아니야.”
“…그렇군요.”
잠시 쉬고. 세세리는 다시 물었다.
조금 전 현이 사용한 기술이 마기를 기반으로 한 스킬임은 그녀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럼, 빛의 사원을 무너뜨리려는 사람인가요?”
그 찰나.
현은 이글거리는 세세리의 눈빛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슬픔을 분노로 바꾸었다는 사실도.
이처럼 1세대 인공지능의 생각은 너무나도 쉽게 겉으로 드러났다.
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수긍했다.
좀 더 정확히는 어둠의 각성이 목적이지만, 최종 목적은 빛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의미는 같을 것이다.
자신의 정체를 밝혔음에도 세세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눈빛이 날카로워진 듯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나요?”
“뭘? 빛의 사원을 무너뜨리는 거?”
“네.”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현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냥… 여기서 날 믿고 기다려.”
“다른 일은요?”
“필요 없어. 그 정도면 충분해. 아참 하나 더.”
“…….”
“위험할 것 같으면 곧바로 마을로 돌아가. 난 다시 널 만나러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거든.”
세세리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뚝. 뚝. 그녀가 딛고 선 땅이 방울방울 떨어진 눈물에 젖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방울씩 흐르던 눈물은 순식간에 폭포처럼 흘러나왔다.
“흐윽…! 흐으으아아!”
세세리는 목 놓아 울었다.
그동안 참고 있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버린 듯했다.
연신 오라버니를 부르며 울부짖는 흐느낌은 평범한 소녀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사일런스.’
파피의 손짓에 허공이 일렁였다.
세세리의 가슴 속에 담긴 슬픔을 마음껏 끄집어낼 수 있도록 소리를 죽인 것이다.
그렇게, 고요 속에서 세세리는 마음속의 모든 것을 쏟아냈다.
울음으로 목이 쉬어버릴 때까지.
***
“조금 감성적이 되는구나.”
퀘스트를 앞두고 루이즈가 현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타인의 이별을 가까이서 보고 나니 갑자기 나도 두려워졌다.”
“뭐가…?”
“오늘의 일이 잘못되면 그대와 영영 만날 수 없겠지. 일이 뜻대로 이루어진다 한들 그대와 만나려면 또 몇 년이나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구나.”
현은 바로 그 말뜻을 알아챘다.
어둠이 각성할 때마다 현실과 아스리안의 시간에 어긋남이 생겨난다는 것은 아스라 시절부터 쭉 이어져온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몇 년이더냐?”
“5년쯤 걸리겠지.”
“확실히 말해줄 수는 없는 것인가?”
“그건 나도 몰라. 지난번에도 3년이라 했는데, 실상은 5년이었잖아.”
“하긴, 그런가….”
루이즈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뭐, 상관없다. 아무도 없는 도시를 돌아다니는 것도 색다른 기분이겠지.”
“경계의 도시에 계속 있으려고?”
“물론, 그곳이 나의 보금자리니까! 그대가 없는 동안 나의 부하들을 이용해 도시를 새 단장 해 주도록 하겠다!”
“쓸데없는 짓 하다 부수지나 말고….”
루이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약속한 시간이 다가왔다.
접속한 길드원들은 잠깐 세세리의 안부를 묻었지만, 잘 타일러서 마을로 돌려보냈다는 현의 거짓말에 곧 수긍했다.
그리고 마침내 코앞까지 다가온 메인 퀘스트.
“후, 결국 이 때가 왔군.”
“…….”
“최대한 잘 해 볼게요!”
살론은 정신통일을 하듯 심호흡을 했고, 지니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지, 아까부터 눈을 감고 있었다.
원래 퀘스트에 참가하지 않을 예정이었던 타르타르도 새로운 역할을 배정받고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인은 남들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기며 가만히 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각자 역할 기억하죠?”
그렇게 모두가 준비를 마친 가운데, 현은 일행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긴 여정의 마지막을 장식할 목적지. 빛의 사원을 향해서!
현은 상태 창을 확인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이곳은 섬 꼭대기.
감정이 가장 크게 증폭되는 장소에서 아인과 세세리가 보내주는 공감의 크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200~300레벨 구간엔 1업당 3개, 300~400레벨 구간엔 1업당 4개의 포인트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고려해도 400레벨이 넘는 유저급의 스탯을 지니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걸론 부족해.’
하지만 현은 여기서 스탯을 더 증폭시킬 생각이었다.
스탯만 400레벨 수준을 넘어섰을 뿐, 스킬의 종류나 수준은 아직 4차 승급을 마친 유저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고작 이 수준으로 천인들과 하늘에서 전투를 벌이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
안전하게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 스탯을 뻥튀기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 더 강해질 수 있어.’
현은 메인 퀘스를 총 세 단계의 계획으로 분류했다.
첫 번째 계획은 사원 뒤뜰을 지키는 무지갯빛의 유니콘, 라비우스를 퇴치하는 것.
라비우스는 아스라 시절부터 참 이상한 점이 많던 네임드였다.
공식 설정이 420레벨 네임드인 주제에 300레벨 일반 몬스터만큼 약한 성수(聖獸)였으니까,
특수스킬도 없고, 맷집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 주제에 확률적으로 최상급 마석과 신석을 드랍하는 바람에, 라비우스는 리젠 타이밍마다 유저들에게 사냥당하는 비운의 네임드가 되었다.
이렇게 보너스 몹이나 다름없는 녀석인데, NPC들은 라비우스를 두려워하며 근처에도 가려 하지 않았지.
그 이유가 뭘까?
과거엔 버그나 설정 값 오류라는 말이 많았지만…. 현은 지금에서야 진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인…. 자꾸 너한테만 힘든 일을 맡기는 것 같네.」
팟! 현은 아인에 동화하여 미리 사과했다.
그에 아인은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괜찮아. 난 현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미안, 그럼 조금만 더 참아 줘.」
콰드득! 경계의 낫 끝에 서리가 맺혔다.
이를 악문 채, 현은 양팔을 힘껏 휘둘렀다.
앞으로 다가올 충격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서걱!
거인의 일격이 라비우스를 양단했고.
“큭…!”
눈앞이 번쩍거리는 감각에 현은 신음을 흘렸다.
볼링공에 머리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것만 같은 아찔함 때문에…!
지이잉. 지이잉.
앞이 안 보이는데다, 귀에선 이명까지 들려오고 있어.
일순간 모든 감각기관이 마비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
시야가 백색으로 뒤덮인 가운데 희미하게 일렁이는 상태 창을 보며 현은 씨익 웃었다.
사윈 뒤뜰. 북쪽의 길을 지키는 최후의 문지기. 라비우스의 비밀을 밝혀 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