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145)
공감의 흐름
기만은 언제나 한 수 앞을 내다보았다.
어둠의 땅에서 루이즈를 각성시킨 것도, 조화의 이름을 달고 천공을 분열시킨 것도, ‘예지’에 가까울 만큼 정확하게 미래를 예측해 낸 덕분이었다.
그것이 인외의 지능을 가진 2세대 인공지능의 능력!
하지만 아스리안에 2세대 인공지능은 그녀 하나뿐이 아니었다.
같은 2세대 인공지능끼리 겨룬다면 어느 쪽이 패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리고 오늘, 기만은 처음으로 빛에게 수를 읽혔다.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아인에게 신탁을 내리긴 했지만, 그 시점도 너무 늦었다.
수많은 승리의 와중 찾아온 딱 한 번의 패배.
허나, 도전자의 입장에서 맞이하는 패배는 너무도 뼈아팠다.
그리고 기만이 저지른 실수에 대한 대가는 현과 일행이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
***
“그대들을 단죄하겠다.”
우웅. 우우웅.
천인들이 손짓하자 허공엔 수많은 마법진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법진에서부터 생겨난 얼음의 화살, 뇌전의 구체가 일행을 겨누었다.
이렇게 많은 천인들의 집중공세를 받아 본 인간이 또 있었을까?
현의 머릿속엔 절망이란 단어가 떠오르고 있었다.
“다들 방어해-!”
콰직! 하늘에서 내리꽂힌 냉기의 화살이 바닥을 부수었다.
힘껏 몸을 뒤튼 현의 뺨으로 날카로운 한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무너진 자세를 되돌릴 틈도 없이.
카아앙-! 현은 곧이어 날아오는 얼음의 창을 한 번 더 막아내야만 했다.
“칫…!”
어둠의 검으로 얼음 창을 튕겨낸 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느새 라비우스를 잡고 얻은 효과도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 탓이었다.
방어에 치중하기도 바쁘다. 도저히 공격할 틈을 낼 수가 없어.
투사체의 진행방향을 바꾸는 파피의 마법이 아니었다면 일행은 10초도 채 버티지 못하고 전멸을 맞았으리라.
‘빌어먹을….’
찰나, 현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다시 떠올리기 싫은 감각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공기가 무거워졌고, 그 공기를 들이마시면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
라디에트가 죽은 날에도 이랬었지.
옆쪽을 힐끗 보니, 파피의 몸에선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영혼을 불태우는 빛.
언제나 죽음을 두려워하던 파피가 수명을 대가로 자아의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제가 스스로의 목숨을 바칠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파피는 일행의 발아래에 갖가지 마법진을 덧씌우며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실린 그의 의지는 라딕스 섬의 기운을 타고 현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게다가… 악마를 위해 이런 선택을 내리리라곤 더욱 상상조차 못 했지요.”
파피는 슬쩍 루이즈의 방향을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그 자신도 스스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파피, 넌….”
하지만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현이었다.
파피는 싸움을 극도로 싫어하는 겁쟁이였다.
특히, 지상에서 힘을 행사해 수명이 깎여나가는 것을 병적으로 두려워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지금 눈물을 흘리면서 미소 짓고 있는 걸까?
라딕스 섬의 기운에 중독되어 버린 걸까?
현은 이토록 생생한 표정을 짓는 파피는 본 적이 없었다.
“호오, 이게 누구신가?”
자아를 불태우는 파피의 모습은 유난히 눈에 띄었는지, 천인들 중에서도 그의 정체를 알아보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전에 마기를 사용하던 그 꼬맹이가 아닌가!”
“악마를 돕다니! 악마에게 홀렸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우우웅- 허공에 떠있는 마법진들이 일제히 파피를 겨누었고.
커헉! 중첩된 보호막이 하나씩 깨져나갈 때마다 파피는 고통스러운 듯 숨을 토했다.
마치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큭…! 현은 파피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답답한 기분에 숨만 거칠어져 애꿎은 공기만 들이마셨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봐도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떠오르지 않아…!
그렇게 현이 엄습하는 불안과 절망에 이를 악 물던 바로 그 때.
우우웅. 우우우우웅!
갑자기 천인들의 후방에서 번쩍이는 빛을 목격한 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이 붉게 물들고 있어.
아니, 붉게 물드는 듯한 착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마법의 이펙트로부터 현은 그 스킬의 정체가 무엇인지 단번에 파악했고.
“다들 피해-!”
생각할 것도 없이, 있는 힘껏 소리쳤다.
20미터 굵기의 레이저가 바닥을 긁으며 일행을 덮친 것은 그 직후였다.
잔재의 폭사. 주위에 흩어진 마나를 다시 모아 쏘아내는 스킬!
50레벨의 각성 퀘스트에서도 한 번 등장했던 그 마법은 어두워진 섬의 하늘을 잠시나마 다시 밝게 물들일 정도로 강력했다.
‘루이즈는…?!’
굉음에 귀가 멍멍한 와중에도 현은 루이즈의 안위를 살폈다.
천운이 따른 걸까?
파피의 왜곡 역장이 레이저의 방향을 변경하고 있는 덕분에 루이즈는 마법의 영향으로부터 무사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무사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지니!”
현은 바닥에 쓰러진 지니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거대한 레이저에 스친 것만으로 그녀의 하반신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래도 빗겨 맞았나?! 아직 죽지는 않았어!’
지니는 쓰러진 그대로 캐스팅을 이어가고 있어가는 중이었다.
아마도 궁극기인 역행을 사용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지닌 역행 Lv.2는 체력을 회복시킬 뿐 아니라 상태이상을 없애고 결손 된 신체를 회복시키는 효과 또한 존재했으니까.
“참 신기해요… 이런 상황에 처하면 항상 현의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는단 말이죠.”
하지만 지니는 갑자기 영문 모를 말을 하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으로 최후의 마법을 완성했다.
“절망 속에서도… 현이라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마음이 생겨요.”
현은 당연히 지니가 스스로에게 역행을 사용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녀의 지팡이는 뒤편에 있는 아인을 가리키고 있었다.
”부디 승리를…!”
우우웅. 아인의 몸에 빛이 솟아올랐다 사라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지니의 몸도 빛의 안개가 되어 바람에 흩어졌다.
현은 곧 그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몸이 다시 가벼워졌다.
아인의 감정이 10분 전, ‘라비우스를 잡은 직후의 상태’로 돌아갔기 때문이리라.
하아… 입가에서 뜨거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지니는 정말로 내가 이 싸움을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걸까?
그녀의 분석력은 프로게이머 시절에도 유난히 돋보였다.
스탯이 조금 높아진 정도로 상황을 반전시키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를 린 없을 텐데.
‘기적을 일으키라고….’
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루이즈가 잠든 지 채 3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
8명이었던 천인의 수는 어느새 11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점점 강한 적들이 나타날 테니, 이쪽은 앞으로도 계속 불리해지기만 할 것이다.
“형… 죄송해요….”
설상가상으로 일행은 하나둘씩 쓰러져 가고 있다.
타르타르가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중얼거렸다.
눈을 감기 직전까지 그는 마지막 희망을 담아 공작을 불러봤지만, 아무런 성과는 없었다.
당연하다. 기사의 목소리가 하늘에서 지하까지 전해질 리는 없으니까.
‘기적을….’
현은 빛으로 흩어지는 사라지는 타르타르의 모습을 애써 외면했다.
팟. 대신 어둠의 검을 만들어냈다.
무의미할 짓이란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 불합리한 싸움에 최선을 다했다.
지니의 말대로 기적이 일어난다면 자신은 어떻게든 그것을 붙잡아야만 했기에.
‘…방법이 없나?’
수십 가지의 생각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가 도로 지웠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 상황을 타파해 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1퍼센트… 아니 0.1퍼센트, 그 이하의 가능성이라도 좋아.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걸까? 정말로…?
생각을 이어가는 순간에도 적들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모두 물러서십시오. 제가 멸하겠습니다.”
어느 순간, 한 여인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머리칼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손끝엔 응축된 뇌전이 튀어 오르고 있었다.
“빛의 심판을!”
곧게 뻗은 여인의 손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고.
피치치치치치-!
거대한 뇌전의 줄기가 하늘과 땅을 이었다.
번개는 한 번 내리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몇 초 정도 지속되며 넓은 범위를 뒤덮었다.
그에 따라 구름 위의 어둠이 밀려났고, 광휘가 온 세상을 집어삼켰다.
그렇다, 이것이 천인의 마법.
천인은 레벨로 그 강함을 가늠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대규모 마법을 캐스팅할 여유를 준 순간, 이미 모두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다.
피할 곳은 없다.
현은 반사적으로 모든 방어스킬을 시전했지만 살아날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전기 내성을 지닌 아인은 좀 더 버틸지도 몰라.
하지만 이 정도 위력의 마법 앞에선 루이즈도, 파피도, 전부 죽고 말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빛으로, 새하얗게 물들어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가운데.
“후우…! 하아…!”
순간, 현은 숨이 가빠졌다.
이번엔 라딕스 섬의 기운에 중독된 탓이 아니었다.
아무 저항조차 못 하고 번개에 직격했을 루이즈를 떠올리자 갑자기 호흡이 곤란해진 것이다.
환각까지 보이는 듯했다.
백색으로 물든 세상 속 어딘가에서 악마의 실루엣이 꾸물거리는 것만 같아.
이것은 케이드리알이 강림해 주길 바라는 내 소망이 만들어낸 환상일까?
“…현!”
아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 목소리가 멀어져가던 현의 정신을 다시 붙잡았다.
“일어나 현!”
“…!”
그녀의 외침에 자신이 균형을 잃고 누워있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번개가 그치고 빛으로 가득하던 시야가 서서히 회복되었다.
귓가의 이명도 멈추었다.
‘악마…?’
일렁이는 광휘 속에 얼핏 보이는 실루엣. 현의 눈앞에 떠오른 악마를 꼭 닮은 그 존재는 환상이 아니었다.
‘세세리…!’
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검은 날개를 펄럭이는 금발의 소녀는 하늘에서 눈을 감은 채 손을 모으고 있었고.
“공격은 내가 전부 막았어!”
세세리의 머리 위엔 아인이 경계의 낫을 뾰족하게 세운 채 하늘을 향해 번쩍 치켜들고 있었다.
현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인은 그 찰나에 높은 곳으로 뛰어오른 거야.
무기를 피뢰침으로 삼아서 번개를 흡수했구나!
동시에, 현의 뇌리에도 번개가 쳤다.
‘…!’
공감의 수치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 하나의 방법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핫, 입가에서 절로 웃음이 터졌다.
신은 존재할지도 몰라.
아스리안의 천사나 악마가 아닌,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진짜 신 말이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기적이 찾아올 순간을 준비하고 있지 않았다면 이렇게 적절한 방법을 곧바로 떠올릴 수 없었겠지.
[시간 증폭 Lv.1]-선택한 대상의 체감 시간을 5.4배로 증폭시킵니다.
-2초 (10.8초)간 지속됩니다.
-유저에게는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마기 소모 : 8000)
(재사용 대기시간 : 60초)
공감의 크기는 체감 속도에 비례한다.
시간이 빠르게 흐를수록 그만큼 ‘감정의 밀도’도 진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은 조금 전, 이러한 헛된 소망을 품었다.
아인한테 시간 증폭을 걸어줄 수만 있다면… 그러면 한 번쯤은 기회가 생겨나지 않을까?
그 소망은 여전히 헛된 것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천천히 심호흡을 마친 현은 세세리을 향해 손을 뻗고 시간 증폭을 발동시켰다.
바로 그 순간.
300% 초반에 머무르던 스탯 증폭률은 단번에 치솟았고.
[육체가 공감을 버티지 못합니다!]다시 살짝 감소했다.
띠링!
[한계치 이상의 공감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합니다!] [330%의 증폭률이 ‘어둠의 검’을 강화하였습니다!]현은 눈앞에 흘러가는 문장들을 모두 무시했다.
지금 그런 걸 읽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지니의 말대로 기적이 찾아오지 않았는가!
‘이 힘이 사라지기 전에…!’
후우웅! 현은 망설이지 않고 천인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돌진해 어둠의 검을 후려갈겼다.
어째선지 손에 걸리는 감각이 없어.
잠깐 공격이 빗나간 걸까 생각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흐으윽…! 천인 한 명이 고통스런 비명을 외치며 주저앉았다.
버둥거리는 그의 한쪽 다리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신기한 점은 어디에도 그 잘린 다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곁에 있던 두 명의 천인들도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멀쩡히 서있던 자들이 갑자기 어디로 갔을까?
‘이게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둘의 행방을 깨달은 목격자들만이 경악어린 숨을 삼키며 헛구역질을 할 뿐이었다.
두 천인들이 새카만 검에 빨려 들어가는 광경은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후웅! 후우웅! 천인들을 둘이나 잡아먹고 나서도 어둠의 검은 허기를 호소하듯 탐욕스럽게 주위의 바람을 마구 빨아들이고 있었다.
뒤늦게 로그 창을 훑은 현은 그제야 방금 일어났던 현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스탯 대신 스킬이 강화됐다!’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아니. 어쩌면 이게 더 나을 수도 있어.
현의 사고(思考)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로웠다.
공감은 동화처럼 서로의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싸우고자 하는 세세리의 의지가 현의 머리를 차갑게 식혀주고 있었다.
시간증폭이 끝나자 스탯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둠의 검이 마구 떨리는 현상도 사라졌다.
하지만 시간증폭의 지속시간은 2초인 반면, 재사용 대기시간은 60초.
58초 동안 넋 놓고 있을 게 아니라면 세세리의 기도와 시간증폭에만 의지할 순 없겠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기적이 아닌 우연으로 끝나버릴 것이다.
“타르타르.”
현은 허공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라딕스 섬의 상태이상에 호되게 당한 것을 계기로, 길드원들은 방송을 통해 각자의 플레이 화면을 공유하고 있었다.
각자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있는지 검증하기 위해서였다.
“방송 켜.”
이미 사망한 타르타르와 지니는 현실에서 방송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의미가 확실히 전달되도록, 현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입장 제한 풀고.”
***
현과 일행이 라딕스 섬으로 향했던 당시.
유저들의 관심은 온통 전쟁에만 쏠려 있었다.
특히, 200레벨이 넘어간다 하는 유저들은 웬만하면 전쟁 퀘스트 하나쯤은 진행하고 있었다.
누가 새로운 랭커로 급부상할까?
어떤 랭커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될까?
혹은, 전쟁을 계기로 어떤 새로운 시대가 열릴까 하는 이야기들로 전 세계 아스리안 커뮤니티들은 하루 종일 시끄러웠다.
제국 대 성왕국.
그리고 마도국 대 성왕국!
2대 1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사람들은 모두 성왕국이 꼬리를 내릴 거라고 예상했지만….
놀랍게도, 전쟁은 모두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어떤 수를 쓴 건지, 성왕국은 인세에 관심이 없는 천인을 포섭했던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때.
성왕국의 군대가 우세의 흐름을 타고 제국과 마도국의 연합 전선을 밀어붙이던 순간이었다.
“저게 뭐지…?”
누군가가 하늘을 보며 물었다.
라딕스 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변은 지상에까지 그 모습을 비추었다.
루이즈의 각성이 진행되며 하늘 한쪽이 칠흑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다!”
드넓은 평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이들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마치 대칭세계가 그러하듯, 세상에 검은 태양이 떠올라 태양이 비춰야할 곳을 어둠으로 채우고 있었다.
‘저곳은, 설마…!’
몰래 성왕국의 뒤를 봐주던 천인들은 깜짝 놀랐다.
어두워진 하늘의 방향은 빛의 사원이 위치하고 있는 라딕스 섬이 아닌가!
빛을 섬기는 자들에게 빛의 사원은 성지(聖地)만큼 중요한 장소!
사원이 있어야만 빛께서 신탁을 내려주시고, 천인으로서의 힘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 된다!’
‘지금 성왕국과의 약속을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백색의 띠가 가로막고 있는 탓에 지상에서 하늘로의 순간이동은 불가능하다.
한시 빨리 하늘다리를 통과해야 했으니 천인들은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천인들이 그렇게 떠나버리자 전쟁의 구도는 또다시 변화하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상황이 급변할 때마다 유저들은 갈팡질팡했다.
“몰라,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갑자기 적들이 퇴각하잖아?!”
“저 현상이 전쟁의 구도에 영향을 미친 건가?”
성왕국의 퇴각으로 전쟁이 잠시 멈추자, 유저들의 관심은 하늘로 옮겨갔다.
난데없이 떠오른 저 검은 태양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성왕국은 왜 우세를 포기하면서까지 퇴각한 걸까?
모두가 하늘의 이변에 이목을 집중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속보!) 방금 정보 하나 밝혀짐! 전작 고인물 유저도 이런 건 처음 본다고 함!
-그게 왜 속보인데 ㅋㅋㅋ
-근데 그 말도 언플 아니냐? 나중에 또 지들끼리만 이득 보려고.
-ㄴㄴ이건 믿을만함. 케이지 방송에서 나온 말인데, 케이지는 뉴비들한테도 팩트만 알려주는 착한 고인물임.
-전쟁도 그렇고, 이번 사건도 그렇고… 아스리안의 역사가 점점 전작과 어긋나고 있는 모양이네요.
그리고 각종 뉴스 및, 게임 방송 기자들 사이에선 다급한 목소리가 오가고 있었다.
개인방송을 진행하는 평범한 유저들과 달리, 그들은 하늘의 이변을 알아낼 수단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특종이다!”
“빨리 하늘로 드론 보내! 우리가 가장 먼저 무슨 일인지 알아내야 한다고!”
***
혼란에 빠진 지상과 달리 팽팽한 긴장감에 잠긴 사원의 탑 꼭대기.
‘…….’
현은 신중하게 주위를 살폈다.
천인들은 이쪽을 경계하느라 먼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아마, B급, 혹은 A급 이상의 천인이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현은 심호흡하며 마음속의 초조함을 내려놓았다.
타르타르에게 방송을 내보내라고 시키자마자 스탯 증폭률이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지만, 이걸론 아직 부족하다.
좀 더 기다려야 해.
상대가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쪽에서도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아인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살론이랑 같이 루이즈를 봐 줘.」
「으응…!」
「그리고 세세리도.」
현은 옆을 곁눈질했다.
여전히 마기와 신성력에 휘감겨 있는 루이즈.
문득, 마법진에 올라서기 전 그녀의 미소가 눈앞에 스쳐갔다.
루이즈의 생사가 자신의 손에 달려있음을 상기할 때마다 현은 온몸이 오싹했다.
가끔은 그녀가 NPC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곤 한다.
만약 오늘 루이즈가 사라진다면… 앞으로의 아스리안은 지금까지 겪어온 것과 너무도 다를 것만 같았다.
‘반드시 지킨다.’
현은 기적적으로 손에 쥔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자고 다짐했다.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손끝을 스치는 바람의 결이 느껴질 만큼!
그리고 머리로는 끊임없이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강신은 절대로 사용하면 안 돼. 나도 루이즈처럼 잠들어 버릴지도 몰라.’
‘강한 적들을 상대로 너무 긴 검신은 오히려 방해가 되겠지. 어둠의 검은 최대치의 마기로 뽑지 않도록 주의해야 해.’
바로 그 때.
[‘아이게임’이 1인칭 시점을 요청했습니다!] [동기화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N]갑자기 떠오른 메시지에 현은 슬쩍 시선을 올렸다.
어둡게 변한 구름 사이로, 이쪽으로 고개를 향하고 있는 드론 한 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수락.’
방송을 켠 이유도 지상에 있을 유저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드론 카메라를 발견하는 동시, 평소라면 환희를 터뜨렸을지도 모르지만.
현은 스스로의 마음을 차갑게 다독였다.
흥분은 판단을 그르치게 만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천인들의 마법이 다시 날아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두 명의 죽음 때문이었을까?
그들의 공세는 이전과 차원이 달랐다.
십여 명의 천인들이 일제히 쏟아내는 마법은 가히 포격이라 부를 만 했다.
갖가지 마법들이 일행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날아들었지만.
[초월자가 그대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3초간 체력이 1이하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신체결손이 발동하지 않습니다!]그 모든 마법들은 허공에서 궤도를 바꿔 다시 현에게로 쏘아졌다.
현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사형집행자의 반지’가 모든 투사체를 한 점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좋아, 시간은 벌었다!’
[레트로 파크의 동기화를 수락했습니다!] [VRN(Virtual Resident News)의 동기화를 수락했습니다!] [한계치 이상의 공감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합니다!] [30%의 증폭률이 ‘마기 회복력’을 대폭 상승시켰습니다!] [50%의 증폭률이 ‘무력화의 파장’의 범위를 3배 증가시킵니다!]콰드득! 현은 어둠의 갑주로 전신을 감쌌다.
적당히 마기가 회복될 때마다 파티원들에게도 같은 스킬을 걸어 주었다.
500 퍼센트만큼 증폭된 공감력으로 사용한 갑주의 내구도는 자그마치 수백만!
그래도 이것은 무적의 갑옷이 아니라 천인들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지킬 최소한의 장치였다.
쏟아지는 메시지에도 현은 흥분하지 않았다.
아니 흥분할 수 없었다.
지금부턴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악마의 종자인가? 아니면 악마인가…?”
천인 중 한 명이 물었지만 현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입을 연 자를 슬쩍 바라봤을 뿐.
‘…!’
현의 눈빛을 마주한 천인은 순간 엄습한 오싹함에 몸을 떨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은 역설적이게도 너무나 광폭해 보였기 때문에.
“감히…!”
하지만 곧 정신을 되찾았다.
잠시나마 자신이 상대의 분위기에 압도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천인이, 가장 강력한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크아악!”
그의 심장이 뚫렸다.
강력한 마법들 중엔 캐스팅 도중 움직이지 못하는 것들이 존재했다.
그럴 모를 리가 없는 현이 천인의 양손에 마법진이 떠오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그림자 질주로 돌진했고, 다시 빠져나간 것이었다.
그 이후에도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양옆을 살피는 모습은 마치 사냥꾼을 마주한 맹수 같았다.
“아인, 부탁해.”
“어, 어…!”
현의 부름에 아인이 재빨리 달려왔다.
마기를 충전해 주는 아인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평소 결투를 좋아하는 아인 치곤 굉장히 얌전한 태도였다.
그녀도 이 싸움이 자신이 함부로 나설 때가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단해, 현…!’
아니, 사실은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언제나 곁에서 현을 지켜보고 있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야.
지금은 궁극기를 쓰고 있어서 번개마법엔 면역일 텐데… 왜 감전에 걸린 것 같지?
심지어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잖아…!
[더 게임즈의의 동기화를 수락했습니다!]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은 아인뿐이 아니었다.
방송으로 현을 지켜보는 세상 곳곳의 사람들 또한 같은 느낌으로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진짜 현의 모습인가?’
‘사도들하고 싸울 땐 여유로운 모습밖에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가까이 있으면 눈도 못 마주칠 것 같아.’
바로 그 때.
깜짝 놀란 얼굴의 세세리가 화면에 잡혔다.
기도는 공감의 수단. 기도하는 자는 자연히 상대의 기분을 느끼게 된다.
처절할 정도의 냉정함에 당황한 세세리는 기도 중에 눈을 뜨고 만 것이었다.
“…괜찮아.”
세세리의 변화를 깨달은 현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지금처럼, 날 계속 믿어.”
분명 의도는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세세리를 향한 현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방송을 지켜보던 몇몇 여성 유저들의 숨을 멎게 했다.
‘내가 아인이었으면….’
‘저 금발 여자애였으면!’
거기다 현이 싸우는 모습엔 남녀를 불문하고 눈을 땔 수 없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벤트 버프로 받은 듯한 엄청난 속도를 제어한다는 것 자체도 놀라운데, 그 속도로 칼 같은 무빙을 펼치는 모습은 말도 잃게 했다.
‘저렇게 싸워보고 싶다…!’
‘괜히 유명해진 건 아니었군.’
‘나도 연습하면 현처럼 될 수 있을까?’
TV나 휴대폰으로 현을 지켜보는 이들도 많았지만, 길드의 프라이빗 룸, 혹은 캡슐 팝업 창으로 방송을 보는 이들이 더 많았다.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가 사라지며, 유저들은 아스리안 안에서 보내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수백만, 수천만 유저들의 감정이 현의 영혼에 닿아 공감의 힘이 되어가고 있었다.
꼭대기엔 수많은 드론들이 탑을 선회하고 있었다.
현이 방송국들의 요청을 ‘자동 수락’으로 설정해 둔 덕분에 쉐이드 길드원들의 전투는 세계 곳곳에 중계되는 중이었다.
(※추가로 280%의 공감이 일시적 스킬을 강화에 사용되었습니다.)
전투는 요란하지도, 단조롭지도 않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가끔씩 화면이 요동칠 뿐이었다.
천인들의 마법이 세상을 휩쓸고 지나가면 현과 쉐이드 길드원들은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 그 마법을 막아냈고.
그리고 다시, 반격을 시도하는 광경에 유저들은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가장 백미인 것은 2분마다 한 번씩, 현이 세세리에게 시간증폭을 걸어주는 순간.
강화된 어둠의 검으로 천인들에게 돌진하는 현의 모습은 상대의 약점을 포착해 낸 검투사와 같았다.
한편. 한 번의 공격을 마친 현은 슬쩍 루이즈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녀를 휘감고 있던 흑백의 기운은 이제 완연한 칠흑에 가깝게 변했고, 그에 따라 사원의 하늘도 점점 어둠에 잠기는 중이었다.
힘의 정제가 거의 끝나가며, 루이즈의 각성도 마무리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대로 좀 더 버티면 메인 퀘스트도 성공하겠지.
그럼 그걸로 모든 게 무사히 끝나는 걸까?
‘아니야.’
현은 냉정하게 모든 변수를 고려해 봤다.
메인 퀘스트가 끝난 후의 상황까지 말이다.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잖아.’
과거, 어둠의 땅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각성이 끝난 루이즈는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을 겪어야 했지.
샤틴과 샤티나의 희생이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그대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 분명했다.
메인 퀘스트 직후 아스리안엔 5년의 시간이 가속되었고, 약 일주일간 유저들은 세계관의 핵심 NPC들과 아무런 상호작용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계관의 핵심 NPC를 판별하는 기준은 어디까지일까? 적어도 루이즈와 천인은 그에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루이즈와 파피는 둘이서 사원에 남아있는 천인들을 모두 상대해야 한다.
하지만 이곳은 빛의 사원. 이전처럼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기는 힘든 장소였다.
‘버티기만 하면 안 돼!’
남은 시간은 함정이다.
이것은 ‘버티는 시간’이 아닌 ‘제한 시간’!
각성 후의 루이즈가 얼마나 강할지 몰라도, 수십, 수백의 천인들로부터 무사히 빠져나갈 순 없으리라.
그러니 자신은 곧 깨어날 루이즈를 위해서 이곳의 천인들을 대부분 죽이거나, 전투불능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최대한 수를 줄일 수는 있을까?’
현은 전투를 이어나가면서도 생각을 계속했다
천인들은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한다.
그 증거로, 몇몇 천인이 어둠의 검에 목숨을 잃자, 경계심을 잔뜩 세운 그들은 적극적으로 싸우려들지 않았다.
몇몇은 아예 하늘 먼 곳으로 올라가 장거리 마법만 날리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 천인들의 수를 줄이는 게 가능한가?
「괜찮아.」
그렇게 현이 고민하던 때.
갑자기 아인의 귓속말이 들려왔다.
「현이라면 할 수 있어.」
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동화하고 있지 않은데도 아인에게 이토록 정확하게 생각을 읽힌 적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아인은 무슨 근거로 저런 말을 꺼내는 걸까?
딱딱하게 굳어 있던 현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근거가 뭐가 중요할까? 현은 확신 가득한 아인의 목소리를 들으면 절로 굳었던 마음이 풀어지곤 한다.
「현이니까.」
그리고 다음 순간.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누군가 등 뒤에서 자신을 껴안았기 때문에.
작은 팔, 작은 체구. 그 느낌만으로 누군지 알 수 있다.
아인! 이 녀석은 무슨 생각으로 지금 같은 상황에….
하지만.
“…!”
순간, 현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자신의 뒤편에서 끌어안고 있는 작은 손.
그 손가락 위에 끼워진 반지를 본 순간 한 가닥의 섬광이 뇌리를 꿰뚫었다.
[천상의 커플링]-같은 반지를 착용한 파트너와 접촉할 때 모든 스탯이 20% 증폭됩니다.
의도한 걸까? 그냥 우연일까?
현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하나의 가능성!
무언가를 예감한 동시 현은 아인에게 다시 한 번 귓속말을 전했고.
「그대로… 꽉 잡고 있어.」
세세리를 대상으로 시간증폭을 발동시키는 동시, 로그 창엔 수많은 메시지가 지나갔다.
[한계치 이상의 공감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합니다!] [520%의 증폭률로 ‘천사의 기초 검술’이 ‘대천사의 검술’로 강화되었습니다!]현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우우우웅. 어둠의 검이 미친 듯이 울음을 토해내고 있어.
그 울림만으로도 직감할 수 있다.
내 손에 들린 무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도…!
[대천사의 검술 Lv.4]-시야에 담긴 모든 적에게 800%의 피해를 가합니다.
-하늘에서 피해량이 3200%로 증가합니다.
-천계에서 피해량이 6400%로 증가합니다.
-이 효과는 24시간에 한 번만 발동됩니다.
이어서 현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한 손으론 자신을 껴안고 있는 아인의 팔을 꽉 붙잡고, 나머지 한 손으론 어둠의 검을 움켜쥔 채.
그렇게 있는 힘껏 도약한 현이 그림자 질주까지 사용해 멈춘 곳은 지면으로부터 백여 미터 떨어진 장소.
‘천리안.’
구름 가까이의 까마득한 높이에서, 현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천리안의 효과 덕에,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천인들의 면면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 모두에게 시선을 맞춘 현이,
후웅.
어둠의 검으로 허공을 베었다.
얼핏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행동.
하지만 그 사소한 손짓이 만들어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허공을 격해 적의 영혼을 가르는 대천사의 검술.
번쩍! 검의 궤도를 따라 세상이 갈라지는 착각이 일었고.
[레벨 업!] X2이윽고 곳곳에서 수많은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늘에서 천인이 행사하는 힘은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다지만, 대천사의 힘에 비할 바는 아니다.
대천사의 검 앞에 천인들이 맞이하는 운명은 두 종류가 전부였다.
그 자리에서 즉사하거나, 그리고 치명상을 입고 자아를 사용해 순간이동으로 도망치거나.
“…….”
이윽고 현이 다시 탑의 꼭대기에 착지했을 때, 하늘에선 빛의 알갱이로 이루어진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쿠르르! 쿠르르르!
지면이라고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대천사의 검술 스킬 설명에 적힌 ‘적’이란, 없애야 할 것, 혹은 부숴야 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빛의 사원 또한 대천사의 검술을 사용하는 현의 기준에선 ‘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치 신의 심판이 도래한 양, 흔들리는 빛의 사원엔 수백 미터 크기의 크레이터가 새겨졌다.
사원이 놓인 ‘꼭대기 섬’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이유도, 섬을 지탱하는 마법진이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현… 항상 너만 이런 멋진 장면을….”
어둠이 물씬 하늘을 가리는 가운데, 살론이 놀란 눈으로 현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중얼거리던 살론은 아직도 하늘을 맴도는 드론을 목격하고 세세리와 루이즈를 가리키며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크흠… 완벽한 콤비 플레이였군. 네 지시대로 이 녀석들은 내가 확실히 보호하고 있었지.”
“…그건 고마워요.”
문득 허리를 붙잡은 감각을 느낀 현은 뒤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아인은 천인을 모두 처리한 지금까지도 손을 놓지 않은 채였다.
“아인, 너도.”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루이즈의 각성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후우우웅! 하늘에 가득하던 마기가 루이즈의 몸속으로 빨려들고 있었고, 어두컴컴한 구름 사이로 태양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시간이 다 지났다.
루이즈는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사원 꼭대기에서 눈을 떴고. 근처에 있던 파피와 눈을 마주치곤 경악하며 재빨리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허나, 무언가 소리치려 했던 루이즈의 입은 열린 그대로 멈추었다. 잠시 후 두 NPC의 신형은 안개가 흩어지듯 서서히 사라져 갔다.
띠링! 현의 귓가에 메시지가 들려온 것은 바로 다음 순간.
[메인 퀘스트, ‘광휘 속의 칠흑’을 클리어하였습니다!] [클리어 결과 및 보상] –-새로운 퀘스트 획득 불가능.
-주요 NPC와의 상호작용 불가.
-업적 달성 불가.
-세력 및 성향 변화 불가.
-제한구역 접근 금지.
-그 외 세계관과 영향을 미치는 행위 –
[앞으로 60초 후 ‘경계의 도시’로 돌아갑니다.]‘역시, 이렇게 되나….’
현은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루이즈와 대화를 나눌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빛의 사원에 모여든 천인들은 대부분 처리했으니 루이즈가 경계의 도시로 돌아가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괜찮겠지?’
어쩌면 파피까지 무사할 수도 있었다.
마지막 루이즈의 행동을 보면 그녀는 급히 파피를 구하려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각성은 잃어버린 자아와 기억을 되찾아가는 과정이다.
루이즈의 기억 중엔 파피의 붕괴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 그럴 확률이 높겠지.
루이즈도 진짜 초월자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으니.
하아… 모든 게 무사히 끝났다는 생각에 현은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저절로 웃음까지 새어나왔다.
“현….”
갑작스런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현이 메인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살펴보기 위해 로그 창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나… 못 참겠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숨이 찬 아인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고 있었다.
아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가까이서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한 현 또한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이성이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아.
[루이즈와의 혼돈 계약이 종료되었습니다!]그 이유는 간단하다.
계약이 깨지며 밀려들어오는 감정을 해소해주던 공감 스킬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
현의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지금 뭘 하려고 했더라? 아니, 뭘 해야 하지?
감각이, 판단력이 또 맛이 가 버린 것 같아.
“아인….”
결국 현은 그냥 지금 마음이 가는대로 몸을 맡기기로 했다.
가만히 아인의 이름을 불렀다.
공감을 사용하지 않아도, 동화를 하지 않아도, 이 순간 둘은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다.
오늘은 아인이 성인이 되기까지 이틀 남은 시점.
좀 더 정확히는, 다음 날 자정이 되기까지 약 30시간.
순간, 아인이 살짝 발끝을 들어 올리며 자신의 팔을 잡아끌자, 현은 그게 뭘 뜻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현은 아인의 행동을 그대로 놔두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붙잡은 그녀의 팔을 조금 잡아당겼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두 입술은… 이내 겹쳐졌다.
“…….”
동화는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동시,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기술이다.
아스리안에서 아인과 만난 지 약 1년 반.
아스라에서의 시간까지 합친다면 더 길 것이다.
서로의 마음이 어떤지,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넘치도록 겪었다.
그토록 여러 번 서로의 영혼이 겹쳐졌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게 더 이상하겠지.
오늘은 아인이 그토록 바래온 날이기도 했지만, 현이 쭉 기다려온 날이기도 했다.
쿠르르르-.
사원이 붕괴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져갔다.
가장자리부터 거대한 충격이 가해지며, 빛의 정원에 가득하던 꽃잎들이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특정 뇌파가 한계치에 도달했습니다!] [안전을 위해 1시간 동안 강제로 휴식상태로 전환합니다!]수십 대의 드론이 하늘을 배회하는 가운데, 현과 아인은 섬의 가장 높은 곳에서 입을 맞추고 있었다.
60초의 시간이 다 지나 저절로 경계의 도시의 프라이빗 룸으로 돌아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