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156)
어제의 적, 오늘의 적
결투가 끝난 뒤.
현은 라티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생각에 빠졌다.
이 녀석을 부하로 만들 수 있다면… 만약 ‘동화’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까지 얻어낼 수 있다면?
설령 거기까진 불가능하더라도, 라티스를 ‘사용할 수 있는 패’들 중 하나로 만들 수만 있어도 그 메리트는 어마어마하다.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그를 설득할 것인가.
“퀘스트를 하나 줄게.”
생각을 마친 현은 마침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그걸 무사히 완료하면 이번 작전에 참가할 수 있게 해 주지.”
“뭐…?”
갑작스런 발언에 라티스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
“결투에서 이겨야 하는 것 아니었나?”
“그랬지. 하지만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 거잖아?”
“….”
“그냥, 가능성을 봤다고만 말해 둘 게.”
그렇게 말하며 음흉한 웃음을 숨기는 현.
사실 현은 라티스가 부탁해온 순간부터 그를 함께 작전에 참가시킬 생각이었다.
조화의 신도로 제 발로 자신을 찾아온 상황이다.
다른 계획은 나중으로 미뤄도 되지만, 라티스에게 빚을 만들 기회는 지금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퀘스트 내용은 간단해. 내 시험을 통과하는 거야.”
“시험이라…?”
“네가 꽤 한다는 건 인정하지만, 증명해야할 건 그게 전부가 아니거든.”
현은 우선 한 가지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과 합을 맞추는 플레이를 할 수 있을까?
아스리안에서 400레벨도 안 된 유저 한 명의 강함은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라티스는 꾸준히 솔로 플레이만을 고집해 온 유저.
그가 남들과 얼마나 협력할 수 있는지를 검증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 전쟁터에는 언제나 싸움이 계속되지.”
현은 먼 곳, 성왕국의 깃발이 펄럭이는 진지를 가리키며 말을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치열한 곳은 정찰조. 밤낮 가릴 것 없이 양측 정찰병들은 쉬지않고 계속 신경전을 벌이고 있지.”
“….”
“정찰조에 들어가서 퀘스트를 진행해. 그게 시험의 내용이야. 참고로 정찰조는 2인 1조로 편성되니까, 혼자서 날뛴다고 해서 성과를 내긴 힘들 거야.”
현은 조화의 주신관이 지니는 직위를 사용해 정식으로 퀘스트를 부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라티스가 조를 이뤄 전쟁 퀘스트를 진행하는 모습을 보고 평가를 내릴 생각이었다.
아인의 다급한 귓속말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현, 잠깐만!」
「응?」
「이번에도 나한테 맡기려는 거 아니지…?」
「아직 생각은 안 해봤는데… 왜?」
「나는 안 해!」
현은 뒤늦게 아인의 표정을 깨달았다.
좀 전의 싸움이 무산된 이후에도 아인은 여전히 라티스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듯했다.
「저 녀석하고 합을 맞추라니… 절대 안 할 거야!」
아인의 반발에 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게 이겼다는 생각이 들기 전까지 아인은 계속 이런 상태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 외의 누군가에게 지는 것은 물론, 비기는 것도 못 참는 성격이니까.
「알겠어, 너한텐 안 시킬 게.」
아인에게는 그녀가 가장 잘 하는 일을 맡기는 걸로 충분할 것이다.
「협력은 못 해도, 싸우는 건 상관없지?」
「그건 바라는 바야!」
‘좋아, 이건 뭐, 살론에게 해 달라고 부탁하면 되겠지.’
현은 옆을 돌아보았다.
살론 또한 아직 라티스를 거북해하는 듯하지만, 그것은 별 상관없을 것이다.
살론에겐 자신의 부탁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없으니까.
‘자 그럼 랭킹 1위의 진짜 실력을 확인해 볼까?’
현은 시계를 확인해 보았다.
라티스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회귀자 길드를 무너뜨리기 위한 작전을 시작했을 시간.
하지만 이미 그 기회는 지나갔다.
다음 기회가 찾아오기까진 앞으로 며칠, 혹은 몇 주가 더 지나야 할 것이다.
‘기대만큼 됐으면 좋겠는데.’
오랜 수고를 무위로 돌리면서까지 변경한 계획이다.
현은 라티스에게 충분한 가치가 있기를 바랐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에게서 최소한의 이용가치만 뽑아낸 뒤 버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
살론의 도움 하에 시작된 라티스의 시험.
현은 살론의 방송화면을 통해 라티스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관찰하며 평가를 내리는 중이었다.
‘확실히 서투르군.’
허공의 스크린을 보며 현은 혀를 찼다.
정찰 임무를 수행하는 라티스의 모습은 그야말로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정찰조가 최소 두 명으로 이루어진 이유는 간단하다.
짧은 교전이 자주 벌어지는 가운데, 시야확보, 정보획득 등의 역할을 혼자서 수행할 수는 없기 때문.
하지만 라티스는 팀워크가 아닌 오로지 개인의 역량에 의지해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개인의 역량이 워낙 뛰어난 탓에 얼핏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은 두 개의 톱니바퀴가 어긋난 채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안 좋은 의미로, 두 명이 한 명처럼 보여.
이래서야 혼자 퀘스트를 진행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내가 너무 기대했던 걸까?’
현은 라티스를 포섭하겠다는 계획을 재고해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그리고 약 한 시간의 정찰임무가 끝난 뒤.
막사로 돌아온 라티스의 얼굴빛은 좋지 않았다.
방금 자신의 플레이가 엉망이었음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찰은 여태까지 라티스가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퀘스트였다.
눈앞에 솟은 산은 뛰어넘고, 가로막은 벽은 부술 뿐.
그동안 라티스는 아스리안에서 타인과 합을 맞춰야 하는 퀘스트를 할 필요가 없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군.”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라티스의 입이 열린 것은 한참 만이었다.
“내게 한 번만 기회를 더 줄 수 있겠나?”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해도, 고작 한 번만 보고 평가를 내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렇게 현의 수락을 얻어내는 순간 라티스의 눈빛이 번쩍였다.
마치 아인과 결투를 하던 그 때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살론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번엔 네가 명령해라.”
“응…?”
어설프게 되묻는 살론에게 라티스가 답했다.
“네 부하라고 생각하고, 날 마음대로 부리란 말이다.”
“크흠… 그러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면 바로 지적해도 좋아.”
라티스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 게임을 시작하던 아주 예전의 기억.
랭킹조차 신경 쓰지 않던 그 때엔 왕좌에 오르고 싶다는 욕망도 없었다.
그저 강해지는 것이 좋아서 성장하고 또 성장했었다.
이 세상엔 자신이 모르던 것들이 가득했고, 남들보다 빠르게 강해지기 위해선 그 모든 지식들을 최대한 빠르게 흡수해야만 했다.
스킬의 숙련도를 높이고 새로운 무빙을 익히는 것은 혼자서도 충분했다.
정보를 구입하고 그를 바탕으로 퀘스트를 해결하는 것도, 남의 도움이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켜온 랭킹 1위.
하지만 그것은 가장 강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같은 방법으로 더 높은 경지에 다다를 수 없다면, 지금까지 지속해 온 방식을 전부 바꿀 수밖에 없다.
그렇다, 라티스는 처음 아스리안을 플레이 할 때처럼 머릿속을 백지상태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시작된 두 번째 시험.
“…….”
어느 순간 현의 눈빛도 진중해졌다.
시간이 갈수록 라티스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라티스는 자신의 전부를 되돌리기로 마음먹었지만,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었다.
여태껏 익혀온 지식과 기술들이 밑바탕이 되어 새롭게 얻는 지식에 어우러졌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어.’
2회, 3회, 시험이 계속될수록 변화는 점점 가속되었다.
현은 그가 어떻게 랭킹 1위를 유지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왜 남들과 협력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살론을 보고 배우는 건가?’
그는 타인의 능력을 흡수하는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단순히 무빙 같은 것을 따라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스킬 활용이나 움직임은 물론, 언제 어떠한 판단을 내리고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하는지까지.
스스로 경험한 것들을 순식간에 자신의 옷으로 바꾸어 버린다.
조금만 노력해도 그 능력을 가질 수 있으니, 남들과 협력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거였군.’
현은 재차 계획을 수정했다.
‘이 정도면… 좀 더 시간을 내 봐도 괜찮을 것 같아.’
원래는 2~3일 정도 라티스에게 정찰 퀘스트를 시켜 보는 것으로 시험을 끝낼 생각이었지만, 약간의 시간을 더 투자해 보기로 했다.
전쟁 퀘스트 중엔 정찰 외에도 타인과 합을 맞춰야 하는 임무들이 가득했다.
아인이 협력을 거부했기 때문에, 현은 살론이 없으면 지니에게 부탁하거나, 혹은 자신이 직접 라티스와 퀘스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응?’
변화가 계속되어가는 와중, 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라티스를 볼 때마다 아인이 떠오르던 이유.
그의 무빙들은 아인의 것을 베이스로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조금 예전의 아인을.
“그렇게 지그재그로 시선 바꾸는 거, 왜 하는 거야?”
현은 라티스의 무빙에서 특정 부분을 지적했다.
“…별 의미는 없다.”
“그 횟수, 네 번에서 세 번으로 바꾸는 게 좀 더 나을 거야.”
“….”
“누구만큼 반응속도가 빠르지 않으면 의미 없는 짓이거든.”
“…참고해 두지.”
의도치 않게 몇 가지 가르침을 주기도 했다.
놀라운 것은 라티스가 모든 것을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그의 자존심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믿을 수 없는 반응이었을 것이다.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단 말이야.’
그렇게 현은 점점 라티스란 인물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인간이었다.
누군가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고, 한 번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이루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꼭 성별만 다른 예전의 누군가를 보는 것만 같아.
[현 님이 당신의 영혼을 지배하고자 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이게 뭐지?”
“좀 더 쉽게 알려주기 위한 거니까, 그냥 수락하면 돼.”
“그런가….”
어쩌면 타인과 어울리지 않으려는 성향이 그에게는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스리안을 시작하고 몇 번이나 사기를 당했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
‘PvP도 해 볼까.’
현은 퀘스트 외의 것도 시도해 보았다.
예를 들면 2대1 혹은 2대2 대련.
적당한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스킬 제한까지 걸어 둔, 그야말로 ‘친선 결투’였다.
아인은 어째서 정식 1대1 결투가 아니냐고 불평했지만, 그건 나중에 시간이 남으면 혼자 하라고 말해 두었다.
단, 서로 죽이는 PK는 금지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은 잊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데?’
그 이후, 라티스는 항상 정해진 시간에 접속해서 쉐이드 길드원들과 움직임을 함께했다.
대부분의 시간은 성왕국과 전쟁 퀘스트를 진행했고, 가끔은 대련이나 훈련 등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갔을 때.
현은 다시 한 번 변화를 관찰할 수 있었다.
‘의외로 분위기가 괜찮네.’
가장 많이 변한 것은 살론이었다.
라티스를 어려워하던 그의 얼굴에 점점 부담감이 사라져 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가끔 들리는 지니도 라티스를 어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 라티스는 말투가 조금 건조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소문처럼 난폭한 괴짜는 아니었다.
아인이 조금 못마땅해 하기는 했지만, 그것만 빼면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지니의 보고를 받은 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을 대강 예상할 수 있었기에.
「회귀자 길드가 다시 움직였어요. 이틀 뒤, 그 때의 작전을 재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아스리안의 길드를 무너뜨리는 방법이 무엇인가?
길드원에 속한 유저들을 죽이는 것?
아니, 그것은 큰 의미가 없는 행동이다.
유저의 사망 패널티는 48시간 접속 불가.
400레벨이 넘어가면 경험치가 하락하는 패널티까지 추가되지만, 아직은 누구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즉, 게임 초창기를 완전히 지난 지금 시점에 죽음은 유저에게 아주 큰 의미를 지니진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다.
길드도 마찬가지.
길드는 유저 개인보다 더욱 견고하다.
길드원들 몇몇이 사망해도 누군가 그 공백을 메꿀 테고, 시간이 지날수록 길드가 입은 피해는 서서히 복구될 것이다.
그러면 현은 어떻게 하나의 길드를 몰락시키겠다는 걸까?
그 해답은 ‘되돌릴 수 없는’ 종류의 기반을 없애버리는 것.
장소, 제도, 사상, 인물 무엇이든 말이다!
예를 들어, 쉐이드 길드는 경계의 도시, VIP제도, 조화, 혹은 루이즈나 파피같은 NPC들을 그러한 기반으로 두고 있었다.
그리고 회귀자 길드의 기반은….
그것은 아마도 ‘성왕국과의 관계’일 것이다.
현의 짐작대로라면 그들은 일루나 이벤트가 일어나기 이전부터 성왕국에 공적을 쌓고 있었다.
즉, 성왕국이 사라지면 회귀자 길드의 기반도 함께 무너진다!
그러면 성왕국을 멸망시키면 골칫거리가 전부 해결되는 거 아니야?
그동안 현은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있었고….
몇 달이 지난 뒤에야 한 가지 사실을 알 게 되었다.
성왕국을 멸망시킬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자신이 조화의 주신관으로서 활약해도, 혹은 제국의 힘이 지금보다 몇 배나 강해져도 성왕국이 몰락하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제국 황제도 성왕국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니까!
5년 전, 그는 성왕국을 벼랑까지 밀어붙이면 천인이 간섭해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국으로서 최선은 유리한 조건의 협정을 시작하는 것!
황제가 이 의미 없는 전쟁을 5년 넘게 계속해 온 이유도, 본인의 자존심, 그리고 제국의 이권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것은 대외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사실.
현도 루이즈가 귀띔해 준 덕분에 알게 되었다.
자신이 신녀의 능력으로 전쟁의 판도를 기울이려 할 때마다 황제가 간섭해 왔다고 했던가?
지금은 루이즈도 그러려니 하고 황제의 의도에 맞춰주는 중이라고 한다.
어차피 전쟁이 지속될수록 조화의 세력을 키우는 데는 유리하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병사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는데 윗선에서는 머리만 굴리고 있다니!
어쨌든 결론은, 성왕국이 멸망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테고, 그에 기반을 둔 회귀자 길드도 멀쩡할 거란 이야기다.
‘평범한 방법으론 안 되겠지.’
현은 다시 한 번 계획을 정리해 보았다.
이번 작전의 핵심은 성왕국과 회귀자 길드간의 ‘관계’를 끊어내는 것.
‘신뢰를 무너뜨려야 돼!’
다시 말하지만, 회귀자 길드는 아주 예전부터 성왕국에 기반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길드원 중엔 귀족이나 지휘관 급 직위를 지닌 유저까지 생겨났다.
하지만 그 신뢰와 충성은 살얼음판 위에 만들어진 거짓된 관계다.
성왕국은 다른 국가들과 달리 심연 유저들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으니까.
회귀자 길드원의 절반 가까이가 심연 소속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성왕국의 지도자들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물론 회귀자 길드는 천공 팀과 심연 팀을 분리하여 운영하기 때문에 그 사실은 웬만해서 밝혀지지 않겠지만.
하지만 가끔씩, 두 세력을 합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 오늘처럼 거대한 전쟁이나 퀘스트를 앞둔 날 말이다.
작전이 시작되는 날.
다섯 개의 그림자가 검은 태양이 내리쬐는 들판을 걸어가고 있었다.
붉은 공기가 가득한 이곳은 대칭세계.
그리고 다섯 인영의 정체는 현, 아인, 살론, 라티스, 루이즈!
지니는 보고 및 중간지휘를 담당하기 위해 잠시 빠진 상태였다.
현 혼자서는 여러 곳의 상황을 동시에 파악할 수 없으니, 지니에게 모두의 플레이 화면을 전송해 주며 부관의 역할을 맡기려는 것이다.
“현, 너무한 것 아니냐? 제국의 대신녀를 이토록 맘대로 다루는 사람은 그대밖에 없을 거다.”
걷는 도중, 루이즈는 현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불평하듯 말하는 그녀의 얼굴엔 웃음기 가득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오랜만에 신전을 빠져나올 수 있어서 사실은 루이즈도 즐거운 거겠지.
“대신녀? 그건 또 뭐야?”
“사람들이 이 몸을 그렇게 부르더구나. 성녀는 부담스럽고, 신녀는 조금 밋밋하다는 모양이다.”
“네 정체를 알면 까무러치겠네.”
“훗, 영원히 모를 것이다!”
잡담을 나누며, 현은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해 보았다.
이번 작전에서 루이즈의 도움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지금 루이즈가 대칭세계를 경유하는 길을 안내하는 것 또한 그 중 하나였다.
“얼마나 더 걸려?”
“앞으로 10분이면 도착한다.”
목적지는 성왕국의 제투레아 성.
공격 포인트가 전선으로부터 제법 떨어져 있기 때문에 제국의 군대는 이번 작전에 참가할 수 없다.
전투인원은 여기 있는 다섯 명이 전부.
현은 고작 다섯이서 성왕국의 성을 공격하려는 것이다.
“갑자기 예전 기억이 떠오르는구나.”
이동하던 도중, 문득 루이즈가 입을 열었다.
“전에도 비슷한 멤버로 공작의 성을 공격했던 적이 있지 않았느냐? 카이… 뭐였더라.”
“카이단 성?”
“맞아! 그땐 정말 재미있었었지!”
“마음에 여유가 생길 때라 그런 거겠지. 프라이빗 룸을 만들고, 귀환 스크롤까지 갖고 있었잖아.”
현의 대답에, 루이즈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고.
“꼭 그렇지만은 않아. 고통에 신음하거나 죽음의 위기에 처한 기억도 내겐 소중하긴 마찬가지다.”
다시 허공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기억이란 참으로 간사하다. 자객에게 쫓기던 때나 일루나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던 순간마저도 가끔은 그리워지니….”
“으음…?”
“그대와 함께 했던 모든 순간들은 여전히 기억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가끔은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하하….”
루이즈의 말에 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과거로 돌아간다니, 또다시 루이즈의 보모 노릇을 해야 하는 건 사양인데.
순식간에 5년이 지나서일까? 루이즈는 종종 예전에 없던 쓸데없는 감상을 내뱉곤 했다.
그리고 가끔씩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래서 가끔은 두렵다.”
“뭐가…?”
“진정한 어둠이 되면 자아가 더 강해지겠지?”
“아마 그렇겠지.”
“그게 두렵다는 것이다. 어둠의 기억이 이전의 내 기억을 삼켜버릴 것만 같아서…. 게다가 초월자는 인간과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예전처럼, 만나고 싶을 때 누군가를 만나는 일도 힘들어지겠지.”
“….”
잠깐의 정적.
곧바로 루이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뭐, 신경 쓰지 말거라. 어차피 먼 훗날의 이야기다.”
“먼 훗날….”
“지금은 생각하지 않아도 좋겠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는 가운데 10분이란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일행은 풀벌레 소리가 울리는 대칭세계의 들판 위에 가만히 섰다.
루이즈가 권능을 사용해 의식을 들춰내는 그 즉시, 모두는 성왕국의 ‘제투리아 성’ 바로 앞으로 이동될 것이다.
“다들 준비됐죠?”
현은 좌중을 둘러보며 마지막 점검을 마쳤다.
다시 한 번 모두에게 계획을 내용을 상기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 작전의 핵심 목표는 두 가지.
하나는 회귀자 길드를 해체 직전까지 몰아넣는 것이고, 또 하나는 라티스가 마지막 시험을 치루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루이즈. 부탁할게.”
“훗, 맡기거라!”
화악! 바닥으로부터 솟아오른 그림자가 일행을 덮쳤다.
그것은 루이즈의 기술. 태양이 비추지 않는 곳에서 기척을 숨기는 어둠의 권능이다.
잠시 후 꿈틀거리는 그림자가 사라지자, 대칭세계의 들판 위에 서있던 일행의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
‘곧 시작이군.’
회귀자 길드장, 멸살은 국경지대의 요새 꼭대기에 서 있었다.
주위는 평소보다 더 날카로운 공기에 휩싸여 있어 새가 지저귀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마치, 이곳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 것임을 암시하듯.
‘이대로는 안 돼.’
근 몇 달, 회귀자 길드는 연달아 뼈아픈 실패를 겪었다.
아스리안의 역사가 전작과 달라진 탓에 알고 있던 정보, 및 지식들이 전부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눈에 띄게 성장세가 꺾이자 퇴물이라는 멸칭으로 회귀자 길드를 부르는 자들도 많아졌다.
그럼 그렇지! 전작의 정보를 못 쓰니까 아무것도 못 하잖아?
그리고 그런 조롱어린 시선들과 반응은 멸살을 더욱 더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오늘 공적으로 손해를 복구한다. 반드시…!’
때문에 멸살은 성과에 목말라 있었다.
그 와중 발생한 대규모 전쟁 퀘스트.
이번 전투에서 공을 세운다면 그동안 입었던 피해를 복구함은 물론, 다시 반등할 수도 있었기에 멸살은 모든 길드원들을 끌어 모았다.
회귀자 길드가 조금이라도 더 공적을 차지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게 멸살이 앞으로 벌어질 전투를 기다리던 그 때,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긴급 소식입니다!」
「무슨 일이지?」
불안한 공기가 멸살의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가운데, 귓속말로 길드원의 보고가 이어졌다.
「제투리아 성이 적의 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제투리아 성…?’
멸살은 지도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보고로부터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경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 아닌가? 제국군이 그곳까지 도달할 수 있는 루트는 없을 텐데?」
워프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한 제국이 제투리아 성을 침공하긴 불가능하다.
아니, 마나 왜곡장이 존재하니 워프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없었다.
이어지는 설명으로 멸살은 사건의 정황을 좀 더 파악할 수 있었다.
“군대가 아니라 소수의 별동대인 것 같습니다.”
“흐음?”
“그런데 그 소수의 적 때문에 이렇게 소란이 일어난 걸 보면… 상당한 실력의 첩자들인 모양입니다.”
보고가 이어질수록 멸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 후 대화가 끝나고.
“뭐야, 무슨 일이야?”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간부진들이 물었고.
“제투리아 성에 소란이 일어난 모양이다.”
“뭐? 제투리아 성에…?!”
“그래, 아주 개 같은 상황이지.”
멸살은 이를 잘근거리며 답했다.
평소라면 제투리아 성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어도 이토록 과민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성 자체는 회귀자 길드와 별다른 접점이 없으니까.
하지만 오늘만큼은 상황이 다르다.
제투리아 성엔 회귀자 길드원들이 몇 달간 준비해 온 세력과 부하들이 주둔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심연 유저들까지 제투리아 성 곳곳에 몰래 숨어 있었으니, 소란이 더 커지기라도 하면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벌어지리라.
‘아니, 아직은 괜찮아.’
멸살은 시계를 확인했다.
성왕국 군대가 움직이기까진 한참이나 남았다.
‘아쉽지만 정찰을 생략할 수밖에 없겠군.’
최근 제국과 성왕국의 교전이 뜸해지고 있다.
휴전협정이 체결될 거란 소문까지 도는 마당에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몰라.
즉, 회귀자 길드의 입장에서 이번 전투를 포기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대략적인 계산을 마친 멸살은 모두를 돌아보며 지시했다.
“잠시 제투리아 성으로 돌아간다.”
텔레포트는 사용할 수 없다.
제국과 마찬가지로, 성왕국 또한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적지까지 약 40킬로미터.
“소란이 더 커지기 전에 돌아가 봐야 해.”
하지만 그들은 아직 중요한 것을 알지 못했다.
제투리아 성 근처에서 일어난 소란의 규모가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