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161)
어딘지 모를 세상
식사 후에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대부분 권대호 회장이 이야기를 하고 현이 맞장구치는 식이었다.
432년 뒤에 찾아올 재앙에 관한 이야기.
자칫 허황된 예언으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는 그 이야기를 세상에 발표하지 못한 이유는 사안이 사안인 만큼,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발표에 준비할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432년 뒤라면 내가 죽고 나서도 한참 나중이잖아.’
권대호 회장은 서현에게 사명감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까지 잘 해왔고,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해 줄 것을 부탁한다고 말할 뿐.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먼 미래의 일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지금도 실감이 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오히려, 서현의 관심은 다른 쪽에 있었다.
바로 루이즈를 현실로 불러오는 것!
권대호 회장은 지금의 기술로 인간의 형태의 로봇을 만들 수 없음을 미리 밝혔다.
“당연한 말이지만, 로봇엔 인간의 생리현상이 포함되지 않을 거네. 로봇이기에 음식의 맛을 느낄 수 없고, 잠을 잘 필요도 없겠지.”
아스리안에서와 달리, 루이즈의 몸을 구성하는 물질 대부분은 세포가 아니라 기계장치일 것이다.
“현대 기술로는 그 이상의 것은 만들어낼 수 없어. 미래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렇군요.”
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바이기는 했다.
신이 아닌 이상 인간과 완전히 똑같은 존재를 만들어내기란 불가능한 것이 당연하다.
그래도 서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루이즈와 동화할 때마다 느껴지는 감정은 평범한 인간과 다르지 않다.
그 녀석이 얼마나 현실세계를 동경하고 있는지는 잘 알고 있어.
루이즈의 마음을 결코 외면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서현은 권대호의 말에 답하는 동시, 스스로를 다그쳤다.
권대호 회장은 아무 조건 없이 일을 해주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일종의 거래.
루이즈를 현실에 불러오고 싶다면 그 전에 아스리안을 안정화시키라는 것이다.
서현에게는 아스리안의 왕이 되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순간이었다.
***
“현. 우리 아기 만들래?”
집으로 돌아온 뒤.
서현은 아인의 폭탄 발언에 마시던 물을 뿜을 뻔 했다.
후우, 겨우 진정한 뒤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인이 저런 말을 내뱉는 이유를 알 것 같아.
루이즈를 현실로 데려올 방법이 있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아인의 눈빛은 조금씩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루이즈 때문에 그래?”
“으응?”
“걱정 마. 네가 상상하는 일은 안 일어나니까.”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는 그냥…!”
정곡을 찔렸는지, 당황한 아인이 큰 목소리로 반박했다.
“아까 그 말 들었잖아! 현의 퀘스트를 깨려면 우리가 얼른 아이를 만들어야 한다니깐?!”
“뭐? 그건 농담이었잖아.”
“하지만 농담이 아니었다면 어쩌게?!”
서현은 잠깐 무어라 대답할지 고민했다.
아인의 화법은 이제 잘 안다.
그녀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말할 때마다 되지도 않는 핑계를 대곤 하는 것이다.
농담인가, 농담이 아니었나는 사실 중요한 게 아닐 터.
“순서가 틀렸잖아.”
“순서?”
갑자기 이쪽을 휙 돌아보는 아인.
실룩거리던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여, 역시 결혼이 먼저인가…?”
“음…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는데.”
서현은 잠깐 생각해 봤다.
아인이 이제 갓 성인이 되었다곤 하나, 그녀의 외모는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인다.
아니, 애초에 결혼을 상상하기에 자신들은 이른 나이다.
그런 생각으로 중얼거린 것이었지만, 현의 말이 끝난 순간 아인은 불쑥 큰 소리를 냈다.
“그럴 생각이 없다니…! 역시 루이즈 때문이야?!”
“아니, 넌 뭔 소리 하는 거야!”
다시 또 엉뚱한 소리를 내뱉는 아인 때문에 서현은 변명 아닌 변명을 내뱉어야만 했다.
그렇게 아인을 달래준 뒤에야 아스리안에 접속할 수 있게 된 서현이었다.
[아스리안에 접속합니다!]다시 프라이빗 룸.
현은 권대호 회장과의 만남을 다시 되새겨봤다.
그는 마지막 혼돈 퀘스트의 조건을 알고 있다.
정보를 알려주지 않은 것은 관리자로서 게임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룰을 지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정말로 농담이 아니었을 리는… 없겠지?’
방금 아인과 말싸움을 해서 그런지, 현의 머릿속엔 쓸데없는 생각이 떠돌고 있었다.
첫 번째는 황천.
두 번째는 영생계.
그리고 마지막인 세 번째 세계의 장소는….
‘후, 좀만 더 생각해 보자.’
고개를 휙휙 저은 현은 재차 퀘스트 창의 문장들을 살폈다.
-다음 세상을 찾아가세요.
-두 번째 시종, 네비아는 마지막 조각이 당신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스리안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장소들을 떠올려 보았다.
지상, 지하, 천계, 마계, 황천, 영생계….
지상을 제외한 그 모든 장소들은 아주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아니면 아예 다른 종류인가?’
고민을 이어가던 현은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아스리안에 존재하는 세상은 방금 떠올린 것들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결투장, 대회장은 아스리안의 세계관과 동떨어진, 완전히 독립된 공간이었다.
‘권대호 회장이 아인을 괜히 언급한 게 아닐 거야.’
그는 분명 ‘힌트’를 주겠다고 말했다.
결국 농담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현은 아주 잠깐 동안 그가 자신과 아인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힌트는 자신, 그리고 아인.
그와 연관되어 있는 세상은 어디인가?
‘혹시…?’
경우의 수를 줄여나가던 현은 결국 하나의 가능성에 도달했다.
각성의 방.
50레벨, 각성 퀘스트를 치룬 장소.
자신과 아인이 동시에 엮인 장소는 거기밖에 없다.
‘…….’
하지만 그 곳은 원한다고 해서 다시 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한 번 50레벨을 넘긴 유저가 재차 각성의 방에 입장하려면 각성 스킬 포인트 하나를 지불해야만 한다.
현은 상태 창을 살펴보았다.
300레벨 달성 보상으로 얻은 여분의 포인트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래, 쓸 일도 없는 포인트였는데, 한 번쯤 시도해 봐서 나쁠 건 없겠지.
[‘아인’님이 아스리안에 접속하였습니다.」잠시 후 메시지가 떠오르자마자, 현은 커플링으로 아인을 자신의 앞에 소환했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도 없는 상황.
현은 방금 떠오른 생각을 당장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
몇 분 뒤.
현과 아인은 각성 퀘스트를 향한 장소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동화’를 얻은 이후엔 다시 올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어두운 복도를 밝히는 촛불들이 시선을 어지럽혔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언제나 묘한 기분이 든다.
아인과 함께 각성 퀘스트를 진행했던 것은 무수한 기억들 중에서도 더욱 각별한 것이었다.
“현, 여기 오랜만이네. 그리운 느낌도 들고.”
아인도 마침 같은 생각을 떠올린 듯하다.
“다행인 것 같아.”
“뭐가?”
“현이 궁극기로 동화를 얻은 거. 동화는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잖아? 그게 참 다행이었던 것 같아.”
아인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입을 닫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주변을 둘러보며 그 당시의 기억들을 되짚고 있는 모양이었다.
동화가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는 게 왜 다행이라는 걸까?
자신의 마음을 들킨다는 건 자칫 불쾌할 수도 있는 일일 텐데.
지금은 동화하고 있지 않아서 아인이 말한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었지만….
잠시 후. 적당한 때에 아인이 그 이유를 말해 주었다.
“덕분에 나도 현의 생각을 알 수 있었거든.”
“으음?”
“현이 날 그토록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 말이지.”
씨익. 아인의 입가가 올라가는 순간.
이번만큼은 현도 상당히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당연한 거잖아! 갑자기 성별이 바뀐 몸으로 들어갔는데 의식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어?”
적당히 둘러대며 변명하려 했지만.
“흐흥, 그때의 난 성인도 아니었는데?”
아인이 날린 카운터에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여기서 더 변명했다간 괜히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질 것만 같아서였다.
결국 아인이 웃으며 중얼거리는 농담들을 잠자코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난 오히려 좋았으니까. 현이 생각을 직접 행동으로 옮겼더라도 저항 안 했을 거야.”
“…….”
“하지만 조금 아깝네. 동화의 통제 우선권을 바꿀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현과 아인은 각성의 방으로 향하는 입구 포탈에 도달했다.
입구의 관리자는 예전의 그 NPC가 아니었다.
당연하다. 이곳은 제국이었고, 50레벨 당시의 활동지역은 마도국이었으니까.
헌데도 NPC는 현과 아인을 처음 만났을 텐데도 둘의 얼굴을 보자마자 놀란 듯한 기색을 보였고, 이어서 고개를 숙였다.
제국 NPC들은 현의 옷에 새겨진 주신관의 문양을 볼 때마다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아주 드문 일이군요.”
“뭐가?”
“어찌 된 일인지, 두 분의 운명이 하나로 엮여 있습니다.”
“아아, 그거.”
NPC의 말에 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저의 성장과 관계없이, 각성 퀘스트는 언제나 같은 내용으로 진행된다.
레벨이 높아도, 더 좋은 장비를 맞춰도, 예전과 똑같은 그 스펙으로 같은 시험을 치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전에 둘이서 함께 했으니, 이번에도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뜻.
“사정이 좀 있어서 말이지.”
“잘 모르겠지만… 행운을 빌겠습니다.”
“고마워.”
현은 NPC에게 인사의 답례를 했고.
“가자 아인.”
“…응!”
아인과 함께 천천히 포탈의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왜곡된 공간에 빨려드는 느낌이 드는 찰나.
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아주 예전에 보았던 것과 같은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 명의 동반자를 발견했습니다!] [준비하세요, 곧 두 존재의 각성 퀘스트가 동시에 진행됩니다!]현은 따뜻한 바다 깊숙한 곳으로 끝없이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은근한 부유감과 함께 몰려오는 잠에 빠지는 듯한 감각.
이전에는 몰랐지만 현은 이와 비슷한 것을 알고 있다.
기도할 때와 같은 감각이다.
‘모든 장소는 대칭되어 있다.’
기도를 배울 당시 루티아에게 들은 조언.
그 말을 곱씹으며 아스리안 내의 여러 장소들을 떠올려 봤다.
지상의 반대편은 지하. 천계의 반대편은 마계.
또한 지상, 지하, 천계, 마계는 모두 ‘이승’으로 묶여 다시 한 번 황천과 대칭된다.
그리고 인간이 아닌 초월자에겐, 이승과 황천이 합쳐진 ‘순환계’와 대칭되는 ‘영생계’라는 곳이 존재한다.
‘아스리안 세계관의 모든 장소엔 맞은편이 있다는 거야.’
결투장이나, 대회장같은 인위적인 장소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 장소들은 아스리안의 세계관 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외부의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장소니까.
그런 장소들을 제외한 아스리안 세계관 내에선 모든 장소들이 대칭되어 있어야만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각성의 방은 대체 어디이며, 그곳과 대칭되는 장소는 어디일까?
‘곧 알게 되겠지.’
팟! 현은 아인에게 동화했다.
앞으로의 계획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각성 퀘스트는 예전과 같은 조건으로 진행된다.
여기서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과거와 동일하게 모든 스펙이 초기화되어 버릴 터.
모든 스킬이 사라져 버릴 테고, 그러면 10레벨의 기도를 사용할 수도 없겠지.
그런 상황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다음 메시지가 떠오르기 전에 새로운 세상에 진입해야만 한다.
‘후, 그럼.’
현은 서서히 생각을 비워나갔다.
기도로 세계를 건너뛰기 위해선 의식을 한계까지 낮춰야만 했기에.
‘…으응?’
하지만 아인은 굳이 의식을 낮출 필요가 없었다.
눈을 감고 있어서 아무것도 볼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몸 상태를 느끼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떠오르고 있어?’
갑자기 감각이 변화했다.
가라앉고 있던 느낌 대신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느껴졌다.
현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설명해 주지 못한 탓에, 아인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점점 빨라지는 것 같은데…?!’
아인의 느낌은 착각이 아니었다.
은은한 따뜻함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몸이 빠르게 가속되고 있었다.
위쪽을 향해서!
「현, 몸이 이상해!」
‘…….’
「잠깐, 멈춰 보라니깐?!」
‘…!’
아인의 외침에 현은 눈을 뜬 현.
후우우웅! 귓가에 울리는 바람소리가 현을 마주했다.
검은 색 세상은 온통 새하얀 백색으로 변해 있었다.
「원래 이런 거야?」
「나도 몰라…. 아직은.」
문득 위를 올려다 본 현은 숨을 삼켰다.
시야를 가득 뒤덮은 나선의 계단의 끝이 보이지 않아.
자신의 몸은 미친 듯한 속도로 그 중심축을 따라 상승하는 중이었다.
‘아직도 더 빨라지고 있어!’
몸이 상승하는 속도는 시간이 갈수록 증가했다.
속도가 한계에 가까워지니 나선의 계단이 무수한 빛의 고리처럼 보였다.
줄지은 빛의 고리들이 길게 늘어져 가는 찰나.
띠링!
[최후 각성 퀘스트 : 초월(超越)이 갱신되었습니다!]오랫동안 들려오지 않던 알람음이 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이 세상의 꼭대기에 도달하세요.
-그곳에서 누군가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현은 바로 퀘스트 창을 확인해 봤다.
퀘스트 목표가 바뀌어 있는 걸 보니 이 정체모를 장소가 세 번째 세상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드디어…!’
상승은 아직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주위의 풍경이 고속으로 지나가는 와중에도 새로운 메시지들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중.
현은 거친 바람소리를 무시하며 눈앞의 메시지들에 집중했다.
[영혼의 초월이란 육체의 제약을 벗어던지는 것입니다.] [그대는 잠시 시간축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 진입합니다!]‘시간… 축?’
얼마 지나지 않아 상승 속도는 점점 줄어들었고, 덕분에 현은 약간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여긴 또 어디야….’
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계의 하늘처럼 새하얀 장소.
거대하고 반투명한 원통형의 통로 수백 개가 하늘과 지상을 잇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무수한 통로들 중 한 곳을 따라 끊임없이 상승하는 중이었다.
‘천리안.’
먼 곳을 살펴본 현은 통로마다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원통 하나에 한 명씩.
몇 명인지 모를 사람들은 자신처럼 하늘을 향해 끊임없이 솟구치는 중이었다.
그 사람들의 정체는 뭘까?
저들도 꼭대기에 오르는 게 목적이라면 협력할 수 있나? 아니면 저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현의 눈앞에 메시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잠시 의문에 빠진 현은 곧 깨달았다.
지금 이 장소에서 보이는 것들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일이 아니야.
무수한 시간 선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사건들이 한데 모여 이루어진 광경이다!
‘응…? 저 사람은….’
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기억에 존재하는 얼굴 하나가 천리안의 시야에 잡혔기 때문에.
얼핏 인자해 보이면서도 꿍꿍이를 숨긴 듯한 기색의 노인.
그 정체는 다름이 아니라 현에게 아스리안 첫 히든 퀘스트를 주었던 노인이었다.
천인이 되고자 나흘간의 의식을 치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방해받아 뜻을 이루지 못했던 NPC이기도 했다.
저 노인이 왜 여기 있지?
그런 의문을 떠올릴 새도 없이, 현은 충격적인 광경을 보게 되었다.
‘아…?’
현은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어째선지 노인의 통로는 도중에 끊겨 있었는데, 그 경계를 넘어가는 순간. 노인의 몸뚱이가 그대로 녹아내렸기 때문이었다.
마치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는 안개처럼….
인간의 몸이 액체가 되어 흩어져 내리는 광경은 피가 튀지 않아도 꽤 잔인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현은 곧 이 세상의 규칙 하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원통형 통로들의 반투명한 외벽은 일종의 안전장치.
통로를 벗어난 인간의 몸뚱이는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하지만 모든 통로들은 하늘까지 이어지지 못한 채 도중에 끊겨 있었으니 그 안에 담긴 인간들의 몸 또한 여지없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여기도 위험한가…?’
현은 위를 올려다봤다.
자신의 통로 또한 끊겨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경계면을 넘어가면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녹아버리는 걸까?
현의 마음속에 불안이 싹트던 그 때, 다시 메시지가 이어졌다.
촤라라락!
메시지가 끝남과 동시에 통로의 단면에서 새로운 통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기존의 통로와 새로운 통로가 이어졌고, 결정적인 순간 현과 아인은 원통으로부터 이탈하지 않고 계속해서 위를 향해 상승할 수 있었다.
‘살았어.’
현은 무사함을 확인하는 한편 재차 상황을 파악했다.
하늘로 향하는 무수한 통로들은 전부 끊겨 이제는 자신의 것밖에 남지 않았다.
어느새 주위는 다시 어두워지고 있었다.
현은 이 어두운 공간이 하늘 위, 우주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우주라고 말하기엔 어색한 장소다.
이곳엔 태양도, 별도, 은하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간간히 허공에 빛나는 뿌연 안개만이 이곳이 무(無)의 공간이 아니란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드디어… 끝났다.’
수직으로 이루어진 통로에도 종착점은 존재했다.
상승이 완전히 멈춘 뒤.
현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발판위에 조심스레 발을 올렸다.
통로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우려했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여긴 또 어디야…?」
검은 바탕 위 조그마한 별들이 빛나는 공간.
처음 보는 장소에 아인이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우주일까?」
「아니.」
현은 천천히 발을 옮겼다.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허공발판’들로 이루어진 계단이었다.
신기하게도 발판은 힘껏 밟아도 아래로 추락하지 않았다.
마치 특정 좌표에 단단히 고정된 ‘바람 장벽’처럼.
「중력이 느껴져. 우리가 아는 우주는 아닐 거야.」
「그러면?」
「현실의 어딘가와 비교할 수 없는 장소겠지.」
재차 퀘스트 창을 살펴 본 현은 확신하듯 말을 이었다.
「아마도… 혼돈의 마지막 파편이 묻혀 있는 세상.」
그렇다, 황천, 영생계, 그 다음의 세 번째 세상이 아마도 이곳.
마지막 세상은 현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특이한 장소였다.
「일단 움직여 보자.」
「어디로?」
「어디로든.」
그렇게 현은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들의 구조는 상당히 복잡한 편이었다.
올라가다보면 머지않아 갈림길로 이루어진 계단이 등장했고, 그 갈림길은 다시 또 다른 갈림길로 나뉘었다.
이곳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계단으로 이루어진 부유성.’
위로만 올라가면 되니까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게 계단을 오른 지 5분쯤 지났을까?
「현, 이거 뭔가 이상해.」
아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뭐가?」
「시계 확인해 봐.」
「지금? 8시 23분인데 왜?」
「아니, 현실 말고. 게임 속 시간 말이야!」
아스리안은 국가마다, 도시마다 시간과 날짜가 조금씩 달라진다.
게임 속이어도 엄연히 시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스리안은 유저의 편의를 위해 본인 위치의 시각을 알려주는 인터페이스 시계를 제공하고 있었다.
「으음…?」
아인의 말대로 시계를 살핀 순간.
현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어째선지 디지털 숫자가 표시되던 칸들 속 숫자가 마구 변하고 있었다.
「뭐야, 내 시계 고장 났는데.」
「그치? 현도 이상한 거 맞지?」
「뭐? 나만 이런 거 아니야?」
「나도 똑같아! 봐봐!」
곧이어 전송된 아인의 스크린 샷.
그것을 확인한 현은 즉시 경각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아스리안은 여태껏 한 번도 버그를 내지 않기로 유명했다.
한 명도 아니고, 두 개의 인터페이스 시계가 동시에 고장 났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는 것.
‘시스템이 오작동한 것 같진 않은데.’
현은 다른 가능성에 주목했다.
조금 전 스쳐갔던 메시지에 따르면 이곳은 시간축이 어긋난 세계.
과거와 현재의 사건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장소였다.
실제로 방금 전, 자신은 수많은 인간들이 소멸하던 과거의 광경을 보지 않았나?
초월을 갈망하여 끔찍한 최후를 맞는 인간이 초당 수백 명씩 나오진 않을 테니, 아까의 광경은 서로 다른 시간에 일어난 사건들을 모아두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재밌네.’
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세계라.
생각해 보면 혼돈의 능력 중에도 시간을 다루는 게 있었지.
이 세상이 혼돈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한 층 높아진 듯했다.
***
우주와 닮았지만, 전혀 다른 세상.
현과 아인은 한참 동안이나 계단의 성을 헤맸다.
제법 빠른 속도로 이동했음에도 계단의 끝이 등장할 기색은 보이지 않아.
제대로 가고 있기는 한 건가?
위로만 가면 되니까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길을 잃어버린 건 아니겠지…?
그렇게 마음속에 의구심이 떠오르던 때, 목적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인, 잠깐 멈춰 봐.」
「응…?」
「잠깐,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마침내 보이기 시작한 계단의 꼭대기.
꼭대기로 향하는 길 양쪽에는 조각상들이 가득했다.
「무슨 준비…?」
「싸워야 할지도 몰라.」
「으응…?」
「이 조각상들, 평범한 물건들이 아닌 것 같거든.」
현은 천천히 꼭대기를 향해 올라갔다.
좌우로 도열한 조각상들의 눈동자가 움직이고 있는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마지막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이런….’
꼭대기 한가운데 놓인 조각상을 보는 순간 현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곳에 놓인 것은 다시 보기도 싫은 귀신 조각상.
유피아 섬에서, 그리고 어둠의 유적지에서 익히 보았던 그 녀석이 이쪽을 향해 소름끼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인이 천천히 그 조각상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엔 보는 것만으로도 비명을 질렀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지금의 아인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래,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아니, 정말로 귀신에 홀린 건가…?!
인간의 감각을 변화시키는 아스리안의 기술력이라면 그런 것이 가능할지도 몰라.
「아인!」
현은 아인의 정신을 되돌리기 위해 재빨리 소리쳤지만, 돌아온 것은 전혀 의외의 대답이었다.
「소리 안 질러도 돼. 나 멀쩡하니까」
「뭐? 그럼 왜…?」
「모르겠어. 그냥… 예전하고 느낌이 달라.」
어느새 아인은 귀신 조각상 바로 앞까지 다가가 있었다.
갑자기 녀석의 눈가에선 붉은 피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왠지 무섭지 않아. 그보단….」
아인은 가만히 손을 뻗어 그런 조각상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조금 불쌍한 것 같아. 뭔가 그리운 것 같기도 하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현은 너무 황당한 나머지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아인이 벌이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크륵. 크르륵.
아인을 마주본 귀신 조각상의 입가가 실룩거리자 현은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을 느꼈다.
녀석의 잔뜩 갈라진 목소리는 너무도 끔찍한 느낌으로 고막에 박혔기 때문이었다.
“…티에.”
“…….”
“크산… 에.”
현은 귀신 조각상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알아듣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녀석의 소름끼치는 미소를 마주보고 있는 것만 해도 상당한 고역이었으니.
‘아인은 어떻게 이런 녀석이 불쌍하다는 거지? 엇…?!’
하지만 다음 순간.
현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헛것을 보는 게 아닌지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눈앞에 있던 귀신 조각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인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한 명의 소녀.
“오랜만이군. 크산티에. 시간축을 맞추느라 조금 시간이 걸렸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걸린 소녀의 손에는 흑백으로 이루어진 반월의 낫이 들려 있었다.
“아니. 오랜만이라는 표현은 틀렸겠네. 우리 사이에 시간이란 개념은 없을테니.”
‘……크산티에?’
한편, 현은 아인에게 동화한 채 소녀의 말을 엿듣고 있었다.
방금 아인을 크산티에라고 부른 건가?
크산티에. 아스라 때는 물론이고, 당장 인터루프에 검색해 봐도 찾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렇게 현이 갑자기 나타난 소녀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던 순간.
“아, 주군도 있었구나? 왔으면 진작 말하지.”
소녀는 이쪽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현은 그녀가 아인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일단 정식으로 예부터 갖춰야겠지?”
잠시 후. 한쪽 무릎을 꿇은 소녀의 입에선 전과 다른 진중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당신의 부하가 주군을 뵙습니다.”
그것은 솔리터리 로드의 부하가 하나에서 둘로 늘어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