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168)
천계 침공
예로부터 인류는 전쟁을 앞두고 특별한 의식을 치르곤 했다.
신에게 기도하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도 인간이 초월적인 존재의 힘을 갈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은 그런 미신에 기대지 않았다. 아니, 기댈 수 없었다.
자신의 적은 하늘의 꼭대기. 빛의 대천사!
신에게 맞설 때 믿어야 하는 건 오직 자기 자신뿐이기에!
‘전쟁이라고….’
현은 행운조차 기대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냉철한 판단과 차가운 마음뿐.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것은 전력의 계산과 병력 운용의 차이다.
그렇기에 현은, 1년 전 미스티아의 보고를 들었을 때 근심에 빠졌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지상이 하늘의 군대에 맞서기란 불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상에 천사들이 강림할 거예요.”
“천사까지…! 그 수는 얼마나 되는데?”
“여태까지 파악된 바론 로열이 둘, 비숍이 다섯. 제가 파악하지 못한 천사들과 하위 천사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날 테지요.”
천인들이 이끄는 가디언, 골리앗은 막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수의 발키리가 합세하더라도 어찌어찌 대응할 방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사의 개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초월자란 혼자만으로 전쟁의 판도를 기울일 수 있는 존재.
유일한 수를 떠올려 보자면 악마를 불러내서 대응하는 정도겠지만…
‘그건 아니야.’
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초월자들의 전쟁터가 되어 버린 지상은 멸망의 땅이 되어버릴 게 분명하다.
인류의 대다수가 증발할 테고,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지상을 ‘소각’하겠다는 하늘의 의도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게다가 악마를 불러도 이긴다는 확신조차 없다.
천사에겐 천인이라는 든든한 지원이 존재하는 반면, 악마와 인간은 상성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들은 악마의 존재만으로 디버프를 먹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도 못할 테니까.
인식은 개선되었지만, 지상엔 아직도 마기를 불편해하는 NPC들이 많았다.
기적적으로 악마와 인간의 연합이 형성된다 해도, 신성의 힘으로 뭉친 하늘의 군대엔 맞서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 평범한 방식으론 만 번을 싸워도 단 한 번의 승리조차 따내지 못하리라.
허면 지상이 승리하기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계책은 무엇인가?
‘…….’
잠시 상념에 빠졌던 현은 현실로 되돌아왔다.
유일한 답은 지상이 아닌 곳을 전장으로 만드는 것.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은 수백 번이나 돌려 보았고, 이 이상의 방법이 떠오를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 더 고민할 필요 없겠지.
지금이야말로 가지고 있는 모든 패를 쏟아내야 하는 순간이다.
「북극에서 교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아, 방금 남극도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던 중, 귓속말로 지니의 보고가 들려왔다.
현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북극, 남극, 지상 곳곳, 그리고 하늘 위까지. 전쟁은 세상 전부에서 벌어지고 있어.
아무리 뛰어난 지휘관도 모든 곳을 신경 쓸 수는 없는 법.
다시 한 번 중간지휘를 맡아주는 지니가 고마웠다.
여러 군데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요약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녀 외에 또 없겠지.
‘이쪽도 슬슬 시작해야겠군.’
현은 다시 한 번 계획을 떠올렸다.
이 거대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첫 번째 단추는 바로 타이밍!
천인들이 지상으로 넘어왔지만 천사는 아직 강림하진 않은 바로 그 때, 자신이 천계를 침공해야만 그나마 승리할 가능성이 있었다.
계획을 실행하기에 앞서, 현은 마지막으로 주위를 돌아보자 다양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인, 루이즈, 살론, 타르타르, 파피와 라티스, 거기에 세세리까지.
그렇게 모든 일행을 한 번씩 훑어본 현은 고개를 들었다.
“…지금 천계로 이동할 겁니다.”
“후아, 천계라니.”
타르타르는 어색함을 달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레벨은 403. 가까스로 1000위 안에 들어 명함만 지닌 랭커.
400레벨을 넘기지 못했다면 아마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들 준비됐지요?”
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표정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으니까.
경계의 도시.
현과 일행은 곧 검은 안개가 콸콸 흘러넘치는 중앙 사원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그 혼잡하던 경계의 도시는 지금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도시로 변해 있었다.
떠들썩하던 거리에 소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현이 사전에 유저들에게 위험을 공지했기 때문.
가만히 도시에 있다간 괜히 휩쓸려 사망할 가능성이 높으니 아예 도시를 비워 버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당부를 따르지 않고 도시 어딘가 숨어있는 유저들도 있겠지만, 굳이 그런 유저들의 목숨까지 신경 써 줄 필요는 없으리라.
“루이즈 시작하자.”
“내가…?”
“문을 여는 건 네 역할이잖아.”
“그, 그렇지….”
재빨리 수긍한 루이즈는 이어서 중얼거렸다.
“상승하라.”
루이즈의 말이 끝남과 동시.
쿠구구궁-!
도시가 삐그덕거리며 떠오르기 시작하자 밤하늘을 비추는 일루나가 한순간 일렁거렸다.
도시의 고도가 백색의 띠를 넘어서며 하늘의 문이 개방되었다는 증거였다.
도시에 전체에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수송선이 간신히 지나다닐 만큼 위쪽 통로가 완전히 열린 뒤에도 땅의 흔들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통로가 다시 닫힌 순간.
경계의 도시는 몇 년 만에 백색의 띠라는 경계선을 넘어섰다.
그렇게 섬을 타고 하늘 위를 부유하던 어느 순간, 현은 라티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라티스, 준비는?”
“아까 끝났다.”
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라티스가 검을 뽑았다.
화아악! 검에서 뿜어지는 새하얀 빛이 별빛이 내리쬐는 구름을 가로지르며 하나의 길을 만들어냈다.
한때 빛의 사도였던 자로서, 라티스는 천계로 향하는 길을 밝힌 것이다.
“파피, 방향을 맞춰 줘.”
“알겠습니다.”
곧바로 파피의 캐스팅이 시작되었다.
하늘 위에서 자아를 불태우는 천인은 잠시나마 천사의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비록 급이 낫은 천사일지라도,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난 일들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촤라라락!
라티스가 만들어낸 빛의 방향을 따라, 기하학적인 문양을 지닌 마법진이 덧씌워지는 동시.
무작정 위로만 떠오르던 도시 전체는 서서히 새로운 길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예쁘다….”
갑자기 들려온 아인의 목소리.
현은 아인의 눈동자에 담긴 새하얀 빛의 구체를 발견하고, 그녀를 따라 위를 올려다봤다.
어두운 하늘엔 글루나와 일루나가 겹쳐 있었다.
노란색과 청색이 섞이면 검정이 되지만, 노란빛과 청빛이 섞이면 백색이 된다.
그래서일까? 밤하늘엔 두 개의 위성이 아니라 새하얗게 타오르는 백색의 고리 하나가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월식(月蝕)?
아니,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월식은 지구가 달에 쏘아지는 태양빛을 가리며 일어나지만, 이것은 두 개의 달이 겹치며 더욱 환한 빛을 쏘아내는 현상이니.
그렇다, 이 현상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폭월(暴月)!
“밤하늘이 폭발할 듯 타오르면 인세와 천계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파피가 과거 천공의 성서에 적혀 있던 문구를 중얼거렸다.
파피의 말대로 오늘은 천사가 강림하기 가장 좋은 날.
반대로 말하면, 일행이 천계에 진입하기 가장 수월한 날이었다.
끝없이 상승하던 경계의 도시와 하늘에 걸린 백색의 고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가까워졌고….
“조심해! 입구로 들어간다!”
고리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현은 모두에게 경고했다.
천사의 허락 없이 천계의 문을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천공의 입장에서 자신들은 비공식 루트로 천계에 침입하려는 불청객.
정문이 아닌 샛길로 우회하려던 자들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현은 아스라 온라인의 경험 덕분에 잘 알고 있었다.
「루이즈, 지금!」
현은 루이즈에게 동화하며 소리쳤고.
“알겠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 전부터 루이즈는 다음의 할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우웅. 그녀의 손에 들린 어둠의 검.
백색의 광휘를 받아 더욱 우아하게 빛나는 칠흑의 검신을 제단 꼭대기에 꽂아 넣었다.
그 순간.
어둠의 땅을 잠에서 깨웠던 날처럼,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쿠아아- 콰아아아!
이윽고 검은 안개가 끓어올랐다.
수로를 따라 흐르던 안개는 격류가 되고, 다시 폭포가 되어 도시 전체에 기하학적인 형태의 거미줄을 그었다.
‘잘 된 건가…?’
옅은 지진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현은 상황을 살폈다.
천계의 입구로 들어선 지금, 도시는 새하얀 안개의 흐름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기운의 정체는 정제되지 않은 신성력.
백색의 띠와 검은 안개와 같은 종류의 힘이다.
모든 영혼을 소멸시킨다는 그 혼탁한 빛의 파도 한 가운데를 지나면서도 일행은 멀쩡했다.
도시 중앙의 사원으로부터 뿜어 나오는 검은 안개가 일행에게 들이닥친 빛을 중화시키고 있었기에.
「이제 됐어 루이즈…!」
도중에 루이즈에게 말했다.
그녀는 어둠의 검이 사라진 이후에도 검은 안개의 격류에 버티며 힘겨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흐윽…!”
중앙 제단의 격렬한 흐름에서 빠져나온 루이즈는 거친 숨소리를 냈다.
다행히, 어둠의 검이 사라진 이후에도 도시 정체를 둘러싸고 있는 마법진은 사라지지 않았다.
‘좋아, 지날 수 있어!’
다시 동화를 해제하고 나서.
상황을 파악해 본 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동안 계획했던 것들이 생각대로 먹히고 있어.
원래대로라면 천사의 허락 없이 천계에 진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느새 일행을 위협하던 빛의 안개는 사라졌으니 이대로라면 일행은 문제없이 입구를 통과하겠지.
자신은 벌써 첫 번째 기적을 이루어낸 것이다.
[주의! 도시를 지탱하던 정체모를 힘이 사라졌습니다!] [잠시 후 도시는 원래 궤도로 복귀할 것입니다!]“후우…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마침내 출구에 가까워졌을 때, 파피가 힘겨운 듯 중얼거렸다.
그의 안색은 창백했고, 온몸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힘든 것이 당연하다.
섬 하나를 통째로 이동시키는 것은 천인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테니.
“고마워.”
“….”
“이 정도면 충분해.”
현의 대답과 동시에 파피는 쓰러지듯 잠들었다.
곁에 있던 루이즈가 그를 잡아 근처의 의자에 기대주었다.
“다들 저기까진 날아갈 수 있어요?”
현은 위쪽을 보며 모두에게 물었다.
수직으로 고개를 꺾은 장소. 100미터 근처에 빛나는 새하얀 포탈이 바로 천계로 향하는 문.
“플라이 마법이 필요하면 얘가 걸어줄 거예요.”
“혹시 플라이, 필요하신 분…?”
세세리의 물음에 손을 든 것은 단 한 명.
왠지 벌써부터 자신만 뒤떨어지고 있는 것 같아 타르타르는 조금 부끄러운 듯한 얼굴이었다.
“남들 눈치 보지 마.”
현이 타르타르의 생각을 알아채고 미리 말했다.
가만히 놔두면 또 죄송하다는 말을 꺼낼 것 같아서.
“너 이동기 짧은 거 알고 있으니까.”
타르타르가 다른 멤버들에 비해 실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알고 있다.
실제로 기여도 계산기를 돌려봐도 타르타르의 활약이 가장 보잘 것 없었다.
그럼에도 타르타르를 데려온 이유는 간단하다.
가끔씩 그는 자신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주곤 했다.
카이단 성에서는 바히미르를 불러들였고, 라딕스 섬에선 일행들에게 일어난 이상현상을 가장 먼저 깨닫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공감이 필요했던 그 순간.
타르타르가 아니었다면 1분도 안 되어 방송을 세팅하고 적절한 화면을 잡아 송출해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땅이 완전히 멈춘 직후 모두는 힘껏 위로 뛰어올랐고.
[‘경계의 도시’가 기존의 궤도로 복귀하고 있습니다!]시야를 가득 메우는 새하얀 광휘가 일행을 맞이했다.
처음으로 심연의 유저가 천계에 발을 들인 순간이다.
***
이번 전쟁은 아스리안 역사상 가장 큰 이벤트임이 틀림없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유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곧 전쟁이 벌어진다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다.
모든 계획은 사람들의 눈 밖에서 그려지고 있었으니까.
천인들 중에서도 계획의 윤곽을 파악하고 있던 건 최상층 몇몇에 불과했으니 유저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요즘 분위기 좀 이상하지 않아요?
-저도 느낌. 갑자기 몇몇 퀘스트들이 사라진 것도 그렇고.
허나, 아무런 징조도 없던 것은 아니었다.
지상과 하늘이 통째로 치고받는 대규모 전쟁이 하루아침에 일어날 리는 없으니 말이다.
아스리안이 오픈한 지도 어느덧 3년.
유저들은 이유 없는 징조는 없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최근 아스리안에서 벌어지는 수상한 사건들에 대해 커뮤니티 유저들의 관심이 부쩍 높아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속보! 제국 10개 기사단 잠적.
-다섯 개나? 성왕국 압박할 때 이후도 그것보단 적지 않았나?
-마도국하고 성왕국도 심상치 않음. 서로 견제하는 건가?
-또 3국간에 전쟁이라도 일어나려는 걸지도. 지난번 텔레포트 금지 먹으니까 엄청 불편하던데.
강대국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취하고.
-뭐야, 하늘섬 가려고 하늘다리 왔는데 당분간 통과 안 시켜준다네.
-ㄴ거길 뭐 하러 갔음? 혹시 NPC세요?
-경계의 도시 통하면 하늘섬 아무데나 다 갈 수 있는데 ㅋㅋㅋ
-ㄴ도시 수송선 당분간 운행 중지한다고 함.
-ㄴ아 진짜? 언제까지?
-ㄴ일단 일주일이고, 사정에 따라 늘어날 수도 있다고 하던데.
하늘로 향하는 통로들이 전부 막혔다.
-아니, 갑자기 공작 대회는 왜 연기되는데???
-대회도? 난 겨우 서열식 출전 명단 올랐는데 취소됨 ㅋㅋㅋ
-야, 너도? 나도 ㅋㅋ
게다가 심연 쪽 움직임마저 이상했다.
특히 공작과 연관된 이벤트와 퀘스트들이 난데없이 취소되었다고 불평하는 유저들이 줄을 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사건들이 하나 둘 겹쳐지자 유저들도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데. 심상치가 않아.’
‘각 나라들, 천인하고 공작들까지 이상한 행동을 취할 만한 이유가 있나?’
‘이러다 세계대전 같은 거라도 일어나는 건….’
눈썰미가 좋은 몇몇 유저들은 한 길드에 집중했다.
대부분의 유저들이 방황하는 동안 착실하게 무언가를 준비하는 길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크니스 랭커 유저들이 한꺼번에 소집됐다. 어째서?
-최근 발생한 사건들이랑 관계가 있는 거라면….
-다크니스 길드만 알고 있는 무언가가 있나? 역사가 바뀌었으니까 전작의 정보는 아닐 텐데.
최상위권 유저들은 나름대로의 추측을 해 봤지만 확실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점점 아스리안 세상에 ‘이변’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만 느낄 수 있을 뿐.
그렇게 시간이 지나던 어느 날.
“이봐, 하늘을 봐!”
아스리안 유저들의 절반 정도가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을 선회하는 글루나와 일루나가 하나로 겹쳐진 순간이다.
“달이 타오르고 있어.”
“멍청아, 달이 아니잖아!”
“아, 그렇지… 어쨌든, 우연히 겹쳐진 건가…?
행성 하나와 위성 두 개가 겹쳐지는 일은 얼핏 우연처럼 보인다.
과거의 인간들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일식과 월식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허나, 같은 현상이 아스리안에서 일어났다면 그것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아스라 절반의 인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두 위성의 중첩은 눈이 멀 정도로 새하얀 고리를 만들었고.
쿵. 쿵. 그 고리를 보는 사람들은 자신의 심장이 거세게 뛰어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영혼이 빨려드는 것 같은 느낌.
“아아… 아아아…!”
몇몇 신관들은 밤하늘을 보고 울부짖었다.
그 모습에 유저들은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곧 심상치 않은 이벤트가 일어나리라고.
아니, 어쩌면 자신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게임 사이트들도 연이어 속보들을 쏟아냈다.
유저들도 허겁지겁 NPC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신전을 찾아다니며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서 유저들은 터질 듯이 빛나는 밤하늘의 고리를 바라보았다.
***
[천계에 입장하셨습니다!] [빛의 관리구역 : 라이트 캐슬(Light Castle)에 입장하셨습니다!] [위험! 보유한 마기가 주변의 기운에 반발하고 있습니다!] [보유한 마기에 비례하여 패널티가 생성됩니다!] [모든 스탯 -12%] [초당 마기 유출 -133] [지속적 정신 붕괴]‘큭…!’
천계에 입장한 순간 현은 옅은 신음을 흘렸다.
난데없이 덮쳐온 현기증 탓이었다.
재빨리 눈앞의 메시지를 읽어 내리고선 혀를 찼다.
‘또 쓸데없는 감각동조인가. 응? 잠깐…!’
문득 다른 사람들에게 생각이 미친 현은 고개를 휙 돌렸다.
일행들 중 마기를 보유한 유저는 자신, 타르타르 그리고 루이즈.
다행이 타르타르는 보유한 마기가 적은 덕분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지만.
“루이즈!”
루이즈는 그렇지 않았다.
“루이즈 괜찮아?!”
현은 바닥을 짚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루이즈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악마는 본래 천계에 머무를 수 없다.
신성으로 가득한 이 장소에선 무한에 가까운 마기는 오히려 독이나 다름없다.
루이즈는 아직 악마가 아니니 괜찮을거라 생각했던 건 혼자만의 착각일까?
‘만약 못 버틴다면…!’
어둠은 흑을 백으로 탈바꿈시키는 기만과 같은 권능을 지니고 있지 않다.
예전에 루이즈가 천계에 방문했을 땐 마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겠지.
하지만 상태창으로 본 바에 의하면, 400레벨의 루이즈가 보유한 마기는 약 5천만!
보유한 마기에 비례한 고통은 얼마나 되는 걸까…?
그렇게 현이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때.
“후욱, 후우우….”
루이즈는 심호흡을 하며 겨우 일어섰다.
소매로 입을 닦는 루이즈의 눈가엔 살짝 눈물이 고여 있었다.
“갑자기 닥쳐와서 놀랐을 뿐이다…. 지금은 괜찮아.”
“걸을 수 있겠어?”
“그 정도는…. 문제없다. 뛰는 것까지도 어떻게 될 것 같지만… 그 이상으로 격하게 움직일 순 없을 것 같구나.”
후욱. 다시 한 번 숨을 내쉰 루이즈는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천계에서 루이즈가 이렇게 될 거란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런 상태론 전투는커녕 팀의 약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현은 루이즈를 천계에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그녀일 테니.
“미안해. 잠깐만 참아.”
현은 아인에게 루이즈의 부축을 맡기며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풍경이 어딘가 익숙한 이유는 아스라 시절에 와보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콰아아아! 멀리 보이는 신단으로부터 뿜어 나오는 새하얀 안개.
쿠르르르! 그리고 다시 그 안개가 대지를 거미줄처럼 질주하는 광경은 ‘어둠의 땅’에 검은 안개가 흐르던 모습을 꼭 닮았다.
색깔이 반전되었다는 점 한 가지만을 제외한다면.
‘잘 찾아온 모양이네.’
이 장소의 이름은 라이트 캐슬(Light Castle).
천계의 여러 장소 중에서도 빛의 세력에 가장 가까운 구역이다.
위를 올려다본 현은 하늘에도 백색의 거미줄이 쳐져 있는 광경을 발견했다.
그 자체가 하나의 대규모 마법진임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 이것은 대규모 강림 마법이다.
‘예상대로야, 아직 강림은 시작되지 않았어.’
콰아아! 콰아아아!
땅 곳곳을 질주하는 백색의 안개.
인터루프의 자료로 오랫동안 세계관을 공부해온 현은 이제 그 기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새하얀 안개는 빛의 피, 그리고 그 안개가 흐르는 길은 빛의 혈관과 같다.
피가 순환하지 않으면 인간의 대사활동이 멈추듯, 안개가 순환하지 않으면 빛도 멈춘다.
대규모 강림이 취소되는 것은 물론이고, 이 공간에 가득한 이 신성의 기운마저 흩어져 버린다.
바꿔 말해, 천사의 파병을 막는 동시 루이즈의 상태를 원래대로 되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곧 괜찮게 해줄게.”
현은 천리안을 사용하여 먼 곳의 신단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힌트는 충분히 얻었다.
중앙 신단의 역할은 어둠의 땅의 피라미드 사원과 동일하겠지.
빛과 어둠은 상극. 신단에 어둠의 검을 꽂아 넣으면 안개의 흐름이 이상이 생겨날 것은 분명했다.
그렇게 잠시나마 빛의 힘을 빼앗는 동시, 천계에 가득한 신성의 기운을 거둬낼 수 있다면.
아니, 빛을 조금이나마 약화시키고 그 수하 천사들을 천계에 붙잡아 둘 수만 있다면…!
이 전쟁에서 지상이 승리할 가능성은 더 이상 0퍼센트가 아니게 될 것이다.
“그럼 이동하자.”
다음 목적지는 저 멀리 떨어진 중앙신단.
무언가가 일행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은 현이 모두에게 지시를 내리려던 때였다.
“잠깐만….”
현은 손을 들어 올려 일행을 멈추었다.
갑자기 나타난 것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팟!
만약을 위해 바로 아인과 동화한 현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형체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발키리…?’
후훗. 그들의 정체를 파악한 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경계했던 것은 발키리가 아니라 천사였으니까.
플레인급만 마주쳐도 상당히 곤란해졌겠지.
싸워서 이길 수 있느냐를 떠나, 천사와의 교전은 상당한 시간을 지체시킬 것 분명했으니.
‘좋아, 발키리면 해볼 만 해.’
현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이 걸렸다.
자신의 계획이 잘 들어맞고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천계의 침입자를 찾아온 존재가 서번트도 아닌 고작 발키리인 이유는 왜일까?
‘이곳에 남은 천사는 별로 없다!’
아마 대부분 천사들은 강림을 준비하느라 바쁘기 때문이겠지!
이런 거대한 마법의 캐스팅에 어마어마한 시간이 소모될 것은 분명하다.
1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준비해 온 대규모 강림.
그런 술식을 도중에 취소시킨다는 것은 빛의 입장에서 너무도 손해가 막심했다.
미리 그것을 대비해 두지 못한 것은 감히 천계를 침공하려는 심연의 존재가 있을 거라곤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발키리가 등장했다는 건 라이트 캐슬에 남아있는 실질적인 전력은 그리 크지 않다는 뜻.
하지만 완전히 빈 집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 천계에서 싸울 수 있는 천사는 얼마나 남아 있을까?
아무리 못해도 서번트 급 천사는 몇 명 남았을 테고.
플레인 급은? 아니면 비숍 급은…?
적어도 ‘로열’급이 없을 것임은 확실했다!
미스티아의 보고에 따르면, 빛의 세력에 속하는 모든 로열 급 천사들은 지상에 강림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까닭이다.
‘이보다 상황이 더 좋을 순 없겠지!’
현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200의 신성력을 소모했습니다!] [반신화의 효과로 모든 스탯이 20퍼센트 증폭됩니다!]카르릉!
경계의 낫이 쇳소리를 울리며 발키리의 몸체를 난도질했다.
과거엔 손댈 수도 없던 적이었지만 자신과 아인 모두 419레벨을 달성한 이후엔 체력 많은 잡몹과 크게 다르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굳이 초월력으로 일회용 스킬을 강화하기보단 아인의 스탯을 증폭시켜 주었다.
철컥!
체력을 계산하던 아인이 낫의 방향을 바꾸어 녀석들의 목을 가른 순간.
화아악!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던 세 마리의 발키리들은 강렬한 빛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후… 이동하죠.”
현은 굳이 동화를 풀지 않고, 아인의 목소리로 말하며 모두를 돌아보았다.
“가능한 한 빨리 움직여야 되요. 강림이 완성되기 전에 사원에 도착해야 하니까!”
***
라이트 캐슬은 무척 아름답다.
천사들의 정원, 광휘의 다리, 영원의 길, 은하의 수로 등등.
직경 20킬로미터의 모든 구역을 뒤덮는 온갖 건물과 기관들이 한껏 천공의 양식을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웅장한 것은 창세의 기둥.
세 개의 기둥이 구역 전체를 뒤덮는 마법진의 꼭짓점마다 우뚝 솟아 있었다.
그 꼭대기에는 각각 로열의 천사 둘과 빛의 대천사가 기거하고 있다고 한다.
끝이 어딘지도 보이지 않을 기둥들의 자태를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인간은 자신의 보잘 것 없음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린다고 전해지지만.
‘신중해야 하며.’
기둥을 향해 달리는 살론과 라티스에겐 주위의 풍경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옅은 감상에 빠지기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동시에 서둘러야 한다.’
둘은 현의 지시를 받고 조금 전 일행으로부터 떨어진 상태였다.
모든 것은 오직 하나의 계획을 위해서.
라티스는 다시 한 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현은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앞에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우린 천계의 대동맥을 따라 이동할 겁니다.”
“대동맥…?”
“안개의 흐름이 가장 빠르고 격렬한 구역을 누가 그런 이름으로 부르더라고요.”
그 누군가란 루티아였다.
현은 어둠의 땅 에피소드를 진행하던 당시 루티아가 자신을 ‘심장’으로 안내해 줬던 일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안개.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요. 영혼을 녹여버릴 만큼 치명적이죠.”
“그럼 대동맥이란 곳은 가장 위험한 장소일 텐데… 왜 굳이 그런 곳으로.”
씨익.
누군가의 물음에 현은 웃음기를 흘리며 설명을 덧붙였다.
“적들에게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니까요.”
“…!”
“로열보다 낮은 급의 천사는 안개를 버티지 못해요. 우리에겐 활용 가능한 지형지물이 하나 늘어나는 셈이죠.”
“으음, 그렇군.”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은 천사와의 힘의 격차를 상당수 극복할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요.”
“어떤 문제 말이죠…?”
“라이트 케슬엔 평상시에 대동맥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
“응?”
모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기가 제안한 방법에 다시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면 대체 어쩌란 말인가?
“별동대가 필요해요. 본대가 나아갈 동안 빛의 땅에 대동맥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
일행을 쭉 훑어보던 현의 시선이 라티스의 앞에서 멈추었다.
“한 명 있죠.”
***
“…….”
“뭐 이상한 거라도 있나?”
갑자기 들려오는 살론의 목소리가 라티스의 상념을 끊었다.
“그냥. 잠깐 계획을 점검해 봤다.”
“오우, 꼼꼼하네. 난 퀘스트 도중엔 다른 짓은 못 하겠던데. 멀티태스킹이 안 되서 말이지.”
현이 말한 별동대가 바로 살론과 라티스였다.
둘의 목적지는 중앙신단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곽의 한 장소.
구역의 가장자리엔 적들의 경계가 허술한 탓인지, 둘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진 성채들의 회랑을 가로지던 도중.
“궁금한 게 있다.”
“음?”
살론은 놀라움을 감추며 라티스를 돌아보았다.
항상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은 자신. 라티스가 말을 걸어온 적은 거의 없던 까닭이다.
“네가 보기에 지금의 난 그날에 비해 얼마나 발전했지?”
“…?”
“물론 레벨 따위를 제외하고.”
살론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날이 뭘 의미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쉐이드 길드와 자신이 접점이 생겼던 날을 라티스는 종종 그렇게 부르곤 했으니.
무슨 대답을 기대하는 걸까?
살론은 일단 한 번 대답을 회피했다.
“잘 모르겠어. 나중에 현에게 물어보는 건 어때?”
“…현에게?”
“보는 눈은 현이 누구보다 확실하잖아. 네 의문에도 쉽게 대답해 줄 수 있겠지.”
“보는 눈 또한… 그렇군.”
잠시 허공을 바라보는 라티스.
그 뒤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에 살론은 어깨를 으쓱였다.
가끔씩 라티스는 혼자 영문을 알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곤 했으니 별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이 목적지는 가까워져 있었다.
“휴, 도착이다.”
살론이 고개를 들어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기둥을 올려다봤다.
창세의 기둥.
현의 설명대로라면 라티스의 스킬로 이것을 활성화해 중앙신단으로 향하는 대동맥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살론과 라티스는 기둥의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부엔 정체모를 마법진처럼 보이는 새하얀 실금들이 가득 그어져 있었다.
“저거로군.”
라티스는 마법진의 가장 밝은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곳엔 3미터 정도 되는 제단 하나가 빛의 분수를 쏟아내고 있었다.
라티스는 가만히 검을 뽑아들었다.
백열로 타오르는 듯한 그의 검신엔 사실 근처의 마법진과 동일한 형태의 실금이 무수히 그어져 있다.
이어서 라티스가 제단의 홈에 검을 박아 넣으려는 그 순간!
카앙!
거대한 쇳소리가 메아리치는 것과 동시 라티스의 검이 크게 튕겨나갔다.
“무슨…!”
살론이 쌍검을 뽑았다.
내가 인식할 수 없는 공격이 있다고? 400레벨 이후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발키리는 아니야. 설마 천사인가…?’
입이 바싹 말랐다.
현과 몇몇 메인퀘스트를 함께하다 보니 살론도 천사라는 존재가 얼마나 강력한지 모르지 않았다.
천사라는 자신이 이길 수 없는 존재.
현 또한 천사를 만나게 되면 절대로 싸우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가능하면 도망치거나, 정 안되겠으면 귓속말로 동화해 달라는 요청을 보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별동대가 맡은 임무는 외곽이라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천사가 이곳에 찾아온 걸까?
“핫, 너희였나?”
라티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허공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곳을 보며 혼자서 실소를 짓는 이유?
그는 평범한 유저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뒤틀린 눈 Lv.1]-허공의 빛을 회절 시켜 보이지 않는 곳의 시야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허공의 빛을 굴절시켜 먼 곳을 볼 수 있습니다.
(초당 신성력 소모 : 30)
“…!”
문득 라티스를 돌아본 살론은 숨을 삼켰다.
그의 눈동자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영이 비춰 보이고 있었다.
잠시 후.
또각또각.
벽 뒤에서 걸어 나온 남자는 살론도 잘 아는 이었다.
“반가운 얼굴들이군.”
둘의 앞에 선 남자가 웃었다.
살론과 마찬가지로 쌍검을 든 그의 이름은 베라드!
“가장 반가운 얼굴이 없다는 점이 좀 안타까운데… 그래도 별 상관은 없겠지.”
베라드의 손에 들린 단검으로부턴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빛의 정체는 분명 마기가 아닌 신성력!
회귀자 길드에서도 심연의 대표주자였던 베라드가 대체 어떻게 천계에 있단 말인가?
베라드의 다음 말은 눈을 껌뻑거리는 살론의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회귀자는 현에게 원한을 지닌 녀석들이 모여 만들어졌어. 그래서인지 길드가 사라진 뒤에도 몇 명은 남더군.”
“…….”
“공통된 목표는 어떻게든 한 번 너희를 엿먹여보는 거였지. 덕분에 난 세력까지 바꿨다고?”
“사도였군.”
무언가를 눈치챈 라티스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한순간에 자신들의 앞에 찾아올 수 있었는가?
그 이유를 밝혀낸 것이다.
“아아, 그런 거였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살론도 여유를 되찾았다.
적은 천사가 아니다.
심지어 천인도 발키리도 아닌 유저!
더군다나 그의 직업은 암살자가 아닌가?
“흐흐, 무슨 베짱인지 나타났는지 모르겠군.”
자신이 암살자 미러전에서 지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그렇게 판단한 살론이 서서히 베라드에게 다가가던 때.
「움직이지 마라.」
라티스가 귓속말로 경고했다.
그의 눈동자엔 여전히 살론에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비치고 있었다.
「적은 한 명이 아니다.」
“뭐…?”
「다섯 명. 그중에서도 위험해 보이는 궁수가 우릴 겨누고 있어.」
라티스의 말에 살론은 긴장을 끌어올렸다.
회귀자 길드였던 유저들 중 유명한 궁수는 한 명밖에 없었다.
「나머지도… 만만한 녀석들은 아닐 것 같군.」
또한 지금 천계에 있다는 것은 다섯 명 전부 사도라는 뜻이다.
전이되기 전에 버프까지 두르고 왔을 것이 분명한 상황이었다.
고민하던 살론이 슬쩍 물었고.
「위험하면 현을 부르는 편이 좋을까…?」
「아니.」
라티스는 즉답했다.
친구목록에 현의 이름이 붉은색으로 표시되고 있다.
그 의미는 긴급 상태. 당장 급한 일이 있으니 도움을 요청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저들이 강하다 해서 우리가 진다는 뜻은 아니지.」
화아악! 라티스의 검신을 타고 백열이 퍼져나갔다.
베라드를 마주보는 그의 얼굴엔 오랜만에 즐거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신단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난했다.
중앙으로 향할수록 발키리들은 박쥐 떼처럼 기다렸다는 듯 몰려들었다.
“타르타르! 루이즈를 봐 줘!”
“넵…!”
예상대로, 뛸 수 있다는 루이즈의 말은 허세에 불과했다.
속도가 조금만 빨라져도 그녀는 쓰러질 듯 휘청거렸으니까.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현은 루이즈를 타르타르에게 맡겼다.
아인은 싸움을, 세세리는 기도를 해야 하고, 루이즈의 부하들은 당장 꺼낼 수 없으니 그녀를 보살펴 줄 수 있는 사람은 타르타르밖에 남지 않았다.
‘위험…!’
전방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빛줄기에 현의 눈동자가 커졌다.
발키리들의 투창은 광범위 폭격과 다르지 않았다.
“타르타르!”
“네, 넷…!”
[혼돈계약으로 ‘숨쉬기’와 ‘포식의 방패’를 뒤바꿉니다!]현은 재빨리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최대치의 마기를 쏟아 부어도 포식의 방패가 버틸 수 있는 데미지는 35만.
하지만 발키리들의 투창 하나하나엔 그 이상의 위력이 담겨 있었다.
‘비스듬히…!’
빙글-!
날의 각도가 조정된 경계의 낫이 한 바퀴 회전했고.
그것만으로 일행은 검투명한 원뿔의 보호막에 둘러싸였다.
콰콰콰쾅!
그 직후 울려 퍼지는 폭음.
허나,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다.
현은 발키리들의 투창 세례를 받아내는 즉시 경계의 낫을 힘껏 휘둘렀다.
[초월력 100을 소모합니다!] [다음 거인 가르기의 범위와 위력이 대폭 강화됩니다!] [초월력 100을 소모합니다!] [프로시아의 얼음 칼에 적중당한 적이 일정 확률로 동결됩니다!] [초월력 100을 소모합니다!] [10초간 잔상베기의 잔상 지속시간이 3배 늘어납니다!]콰드드득!
서리가 허공을 헤집었다.
경계의 낫이 지나간 뒤에도 그 자리엔 푸른빛을 내뿜는 서리의 칼날이 남았다.
“세세리, 기도해 줘!”
“집중할게요!”
“그리고 타르타르, 루이즈는 나한테 넘기고 달려!”
타르타르가 가장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현은 잠시 루이즈를 맡아 주었다.
지금은 아주 잠깐의 여유도 너무나 소중했다.
근처 발키리들의 대부분이 사라지거나 움직임을 멈춘 그 틈에, 현은 일행을 이끌고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별동대 쪽은 아직인가…?’
현은 옆을 슬쩍 훑어보았다.
빛의 안개가 콸콸 흘러야 할 대동맥의 수로는 너무나 잔잔했다.
대화 기록을 살펴봐도 살론과 라티스의 연락은 없다.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어.
대동맥이 활성화되기 전까진 파티의 전력만으로 어떻게든 하는 수밖에!
“면목이 없구나.”
품에 안겨 있던 루이즈가 신음을 흘렸다..
“아무리 강해져도, 심지어 그대보다 더 강한 힘을 갖추어도 이렇게 되는 것은….”
루이즈의 말이 잠시 끊겼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숨은 점점 가빠지고 있었다.
신단에 도착해 신성의 기운을 흩어버리기 전까진 계속 이 상태일 것이다.
“…분명 운명인거다.”
“운명…?”
“언제나 똑같지 않느냐. 난 항상 그대에게 의지만 하게 되는데….”
“하, 무슨.”
루이즈의 생각을 알아챈 현이 혀를 찼다.
“이 전쟁은 네가 핵심이야. 우리 전부 네 활약에만 의지하고 있다고. 구경하라고 널 데려온 줄 알아? 넌 그만큼이나 중요해.”
“…….”
“그러니까 그런 생각으로 괜히 힘 빼지 마. 힘들면 눈 감고 있고.”
현은 이제 루이즈의 사고방식을 알고 있다.
아무리 강해져도 루이즈의 소심한 성격은 사라지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는 것 같으면 의기소침해지는 것이 바로 루이즈였으니.
“현… 근처에.”
“아니, 자고 있으라니…!”
“천사의 기운이 느껴진다!”
“응…?”
루이즈의 말에 현은 천리안을 발동시켰다.
제단 근처의 먼 곳은 안개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후우, 현은 자신도 모르게 심호흡을 내뱉었다.
천사와 마주칠 것을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지만… 웬만하면 늦게 마주치고 싶었는데.
‘플레인…인가?’
날개의 형태로 그 천사의 등급을 파악알 수 있었다.
아스리안을 시작한 이래 처음 적으로 마주한 천사.
플레인이 등장했다는 것은 그 하위 등급인 서번트도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시간이 갈수록 일행과 천사와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천사는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음에도 현은 온몸의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
파츠츠츠- 파직!
창세의 기둥.
그 내부에 거미줄처럼 촘촘히 새겨진 마법진이 비명을 질러댔다.
충격완화 마법진이 싸움의 여파를 계속해서 가라앉히는 탓이었다.
유저끼리의 전투는 천사나 천인의 전투만큼 위력적이지는 않지만, 보다 정교하다.
게다가 지금 이들은 수억 유저들의 정점!
프로게이머들의 대회 이상 가는 긴장감이 맴도는 것은 당연했다.
팟!
라티스의 섬광이 고개를 젖힌 베라드의 시야를 가로질렀다.
그야말로 빛살처럼 날아든 공격!
베라드가 그 일격을 피할 수 있던 건 그저 간격을 크게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빗나간 직후엔 언제나 반격이 날아온다.
‘뒤틀린 눈’을 덧씌워 사각의 시야를 확보하고 있던 라티스의 눈동자가 빛났다.
자신에게 활을 겨눈 여자, 지팡이를 겨눈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번쩍!
구석에서 두 종류의 빛이 터져나온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콰득 콰드드득!
회전하는 화살과 얼음덩이가 바닥을 뜯어내며 라티스와 살론을 향해 날아들었다.
딱히 둘 중 누구를 노린 게 아니라, 그저 경로상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려는 듯한 의도의 공격.
“후우, 위험하군.”
미끄러지듯 회피한 살론이 감탄을 내뱉었다.
조금 전까지 그가 서있던 자리엔 X자 형태의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나 있었다.
두 종류의 원거리 저격이 지나간 흔적이었다.
사도의 자격으로 소환된 전(前) 회귀자 길드원들의 스펙은 상상 이상이었다.
물론, 그 공격이 맞지 않는 이상 의미는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몇 번의 합이 오가고.
‘근접 셋에 원거리 둘인가.’
라티스는 상대들의 전력을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 예상했던 대로 적의 인원수는 다섯 명.
무리 없이 2대5의 싸움이 가능하다.
적들이 사도의 버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둘은 제법 잘 싸우고 있는 셈이다.
‘좋지 않군.’
허나, 라티스는 구도의 불리함을 깨달았다.
적들은 여유롭게 싸워도 되지만 이쪽엔 시간제한이 존재한다.
기관을 가동시켜 대동맥을 활성화해야만 천사들이 지상에 강림하기 전에 본대가 사원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대론 승부가 나지 않아.’
한쪽이 움직이지 않는 한 견제만이 오가는 답답한 구도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예전 회귀자 길드에서도 최정예였던 다섯을 상대로 먼저 움직인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했다.
‘현.’
문득, 라티스의 머릿속에 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 놓여도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내던 그의 모습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기했다.
‘너라면 어떻게 할 거냐?’
그렇게 속으로 질문을 던진 그 순간, 라티스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잠시 귓속말이 온 건가 착각이 들 정도!
갑자기 자신에게 현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기 때문이다.
라티스는 망설임 없이 그 목소리를 받아들였다.
「살론, 후방으로 돌아가라.」
라티스는 자신이 말하고도 어색했다.
반사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 그림은 뭘까?
「나 혼자…?」
「뒤로 돌아가서 마법사랑 궁수를 암살해.」
「난 스킬이 없어. 적의 위치도 제대로 모르는데?」
「괜찮아.」
무수한 퍼즐들이 하나로 맞춰져 최후의 목적지에 이르는 길이 저절로 드러나고 있었다.
라티스는 그 내용을 그대로 살론에게 전했다.
「세 번째 기둥 뒤.」
「…!」
「왼쪽 탈출로를 없애 줄 테니 거기 숨어있는 마법사부터 잡아라.」
그리고 다음 순간, 엉뚱한 질문이 돌아왔다.
「지금 현 동화한 거 아니지?」
「뭐?」
「하긴, 귓속말이겠지.」
「…….」
「알겠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스스스. 곧바로 기척을 지운 살론의 몸이 흐릿해졌다.
어째서 살론은 방금 라티스의 말투에서 현을 겹쳐 보았는가?
그 이유는 단순하다.
한쪽은 눈에 띄고 싶어 하고, 또 한쪽은 눈에 띄기 싫어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살론과 라티스 사이엔 공통점이 많았으니까.
그렇다, 현을 따라잡고 싶다는 욕망이 없었다면 둘은 쉐이드 길드에 이끌리지 않았을 것이다.
“무슨 작전이지?”
살론이 사라진 모습을 목격한 베라드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뭔지 모르겠지만, 혼자서 우리 공격을 버텨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라티스는 베라드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다른 것에 집중하느라 대꾸할 시간이 없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라티스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스릉. 라티스는 베라드에게 겨누고 있던 검을 가만히 내렸다.
“잘 봐라.”
그 중얼거림은 전 회귀자 길드원들에 하는 말도, 어딘가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 살론에게 하는 말도 아니었다.
그렇다, 라티스는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현에게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라티스의 눈동자가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참고하는 것은 오직 하나.
현은 평소에 어디를 보고 싸우는가?
“보긴 뭘 보란 거야?!”
“허세 부리긴, 죽여 버려!”
세 명의 적들이 일제히 라티스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리 라티스라도 혼자 남은 이상 협공에 당할 수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었다.
라티스는 자신에게 육박하는 베라드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검은 날카롭고 정교하지만 분명 허점이 있다.
잘만 카운터를 날리면 해치울 수도 있겠지.
하지만 반격을 날리지 않는다.
아직 때가 아니기에.
‘일단은 방어만…!’
채앵!
라티스의 검에 화살 한 자루가 튕겨나갔다.
베라드의 등을 뚫고 튀어나오는 화살이었다.
빛의 경로를 따라 이어지는 라티스의 눈은 사각에서 날아드는 공격까지 모조리 포착한다.
반격에 눈이 멀었다면 결코 의식하지 못했을 기습이었다.
지지직!
허공에 여러 가닥의 섬광이 그어진 것은 바로 직후였다.
세상이 수십 조각으로 나뉘는 이펙트.
아마 누군가의 궁극기일 것이다.
쩌적! 쩌저적!
건물에 무수한 대각선의 실금이 가고 다시 봉합되는 와중에도 라티스는 멀쩡했다.
그동안 현과 아인을 보고 따라 연습해온 움직임이 촘촘히 날아드는 섬광 다발의 회피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온다… 마법!’
하지만 400레벨을 넘는 사도들의 협공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차가운 냉기의 돌풍이 라티스가 착지할 장소를 미리 휩쓸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 쩌저적 소리를 내며 얼어붙는 금속 재질의 바닥.
화르륵!
거기에 뜨거운 불꽃이 더해진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차가운 금속이 순간적으로 가열되면 어떻게 될까?
금속은 마치 수류탄처럼 폭발하고 만다.
수축된 물질이 열을 받으면 순간적으로 팽창하여 산산조각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라티스가 발을 디딘 바닥이 갈라지기 직전.
콰직!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라티스의 검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치이이익! 바닥으로부터 올라온 수증기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순식간에 냉각시킨 덕분에 열기에 들썩이던 바닥은 다시 잠잠해졌지만.
“잡았어…!”
베라드의 검이 연기사이를 갈랐다.
‘분명히 베었다! 감각이 있었어!’
손에 감각이 느껴진 순간 베라드는 승리를 확신했다.
아무리 라티스라도 그 상황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피할 순 없는 게 당연하다.
[81038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신체결손, 절단이 발동했습니다!]로그창을 슬쩍 확인한 베라드는 쾌재를 불렀다.
곧바로 이어서.
채잉!
수증기 속에서 튀어오른 라티스의 잘린 팔과 그의 검을 발견한 순간 씨익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분명 라티스의 상징과도 같은 대검
대검은 주인의 몸을 떠나는 즉시 인벤토리로 돌아갔지만, 팔은 잠깐 동안 그 자리에 남아 그가 심각한 상처를 입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큭큭, 여기선 절대 뒤집을 수 없지!’
베라드는 승리를 확신했다.
자신의 마지막 공격엔 10분간 ‘리커버리’계열 마법을 금지시키는 효과가 존재했다.
라티스의 팔을 되살릴 가능성은 아예 없다는 뜻과 같았다.
팔 없는 검사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파티원, 체르아가 사망했습니다!]마침 들려온 마법사의 사망 소식.
뒤로 돌아간 살론에게 죽임을 당한 모양이지만 베라드의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죽음 덕분에 라티스를 잡을 수 있었으니 충분히 가치가 있는 죽음이었다.
‘멍청한 놈,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니까 이렇게 되지!’
라티스의 전략을 한껏 비웃어주고 싶었다.
살론을 뒤로 보내서 협공을 노린다고?
지가 현이라도 되는 줄 아나?
그런 전략은 혼자서 다섯 명의 공격을 버텨낼 수 있을 때나 성립되는 것인데!
“하하… 하.”
베라드의 곁에서 옅은 웃음소리들이 새어나왔다.
아직 수증기가 걷히지 않아서 라티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중.
하지만 더 이상 그가 싸움을 지속할 수 없음은 분명했다.
그보다 약한 살론을 잡아내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1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전 회귀자 길드원들은 현의 퀘스트에 찬물을 끼얹어 준 것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쿠르르- 쿠르르르르!!
“응? 뭐야.”
“궁극기 연계시킨 충격이 너무 컸나?”
스스스스. 잠시 후 수증기가 걷혔고.
그곳엔 한 팔을 잃은 라티스가 왼손으로 제단에 꽂힌 검 손잡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어쨌든 할 일은 끝났고.”
라티스는 가만히 제단의 검을 뽑아냈다.
쿠르르르르- 그럼에도 진동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져만 갔다.
콰아아아아! 바깥에서 폭포가 흐르는 듯한 굉음이 들려온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베라드와 일행들은 아직도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해 눈만 깜빡거리는 중.
“이제 제대로 싸워보자.”
라티스는 왼손의 검을 전방으로 겨누었다.
한 팔을 잃은 그의 얼굴엔 여태껏 가장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현의 입가에선 신음이 흘렀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투창과 빛의 폭격을 받아내다 보면 저절로 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플레인의 천사는 아직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 다행일까?
하지만 그와 함께 등장한 서번트 천사들의 공격은 그대로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제길…!’
서번트 천사들이 일제히 검을 들어 올린 순간 현의 머릿속에 경고등이 켜졌다.
사방에서 폭발하는 마력과 신성력이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다.
이대로 저 공격이 이루어지면 루이즈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현은 재빨리 아인과 동화를 해제하며 소리쳤다.
“아인! 나머지 사람들을 지켜!”
“응? 현은…?!”
‘강신!’
현의 전신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의도적으로 ‘어둠의 그림자’칭호를 해제하여 마기를 피워 올렸다.
마기의 수치가 높지 않기 때문일까? 루이즈로 변했어도 루이즈처럼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문제는 다른 것.
화아아악! 휘몰아치는 마기에 서번트 천사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섰다.
‘이건… 위험한데.’
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시선을 끌 수 있을까?
서번트 천사 셋이 노리고, 그 뒤엔 플레인 급 천사가 노려보는 천계의 한복판에서…?
생각은 짧았다.
번쩍!
반응할 새도 없이, 눈앞이 새하얗게 변한 순간 자신은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었다.
[초월자가 보호하는 자는 한 번에 죽지 않습니다!] [3초간 체력이 1로 고정됩니다!]콰콰콰콰콰!
얼핏 보이는 시야로 빛의 파도가 휘몰아치는 광경이 보였다.
그래, 자신은 지금 천사 셋이 함께 발동시킨 공격을 받아내고 있는 중이다.
‘죽는 건가…?’
초조함이 온몸을 타고 올랐다.
천사 외에도 서번트가 있다.
천사들의 협공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서 지금 내가 죽으면… 루이즈는? 어떻게 되는 거지?
순간 현의 심장이 찌르는 듯한 격통과 함께 두근거렸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은발의 소녀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루이즈?’
루이즈의 얼굴엔 눈물이 가득했지만, 눈동자만은 언제보다도 또렷했다.
그녀의 상태를 몰랐다면, 패널티의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뭐하는 거야!’
현은 힘껏 소리쳤지만 충격의 여파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화아아악! 그 사이 루이즈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온몸에서 강렬한 마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뭐…?’
현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 눈동자 위엔, 일어나선 안 될 광경이 비추고 있었다.
자신들을 향해 날아드는 무수히 많은 은빛 검기의 세례
그리고 그에 맞서기 위해, 홀로 창을 들고 서 있는 루이즈.
그녀의 창끝은 평소와 달리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서번트 급이라도 천사는 천사다.
원래도 힘들었겠지만, 지금 상태의 루이즈에게 저들의 협공은 역부족이 분명했다.
‘당장 비켜!’
목소리가 꽉 막힌 것처럼 나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입을 뗄 수 없었다.
자신이 소리치는 것보다 루이즈의 몸뚱이가 천사들의 칼날에 난자되는 것이 더 빠를 것이기에.
‘시간이…!’
현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공격이 닿기 전까지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은 하나 정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화아악! 루이즈의 전신에 빛이 어린 것은 다음 찰나였다.
[시간 증폭 Lv.2]-선택한 대상의 체감 시간을 7.8배로 증폭시킵니다.
-2초 (15.6초)간 지속됩니다.
-유저에게는 아무런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마기 소모 : 10000)
(재사용 대기시간 : 60초)
콰아아아!
온 세상에 휘몰아치는 빛이 귀를 멀게 만들었다.
천계에서 천사는 말 그대로 절대자.
세 천사들의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일제공격에, 정면에 있던 현은 세상이 온통 빛으로 물드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그래, 마치 백색의 띠 한가운데에 놓인 것처럼.
‘큿…!’
모든 것을 소멸시킬 듯한 빛이 사그라진 후, 재빨리 루이즈의 안위부터 살폈다.
쿠구구구-
굉음이 잦아들어가는 가운데, 루이즈를 중심으로 양쪽엔 거대한 V자의 도랑이 패여 있었다.
이쪽을 등지고 있는 탓에 루이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닐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휘청-. 현은 쓰러지기 직전의 루이즈에게 재빨리 동화했다.
그와 동시 느껴지는 고통, 흐릿해지는 의식.
「루이즈!」
상태창으로 확인해 본 루이즈의 체력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루이즈는 원래도 천계의 기운에 힘들어하고 있었으니.
「내 말 들려?」
흐릿한 시야로 얼음을 흩뿌리는 아인의 신형이 스쳐갔다.
아인이 곧장 궁극기를 사용하여 천사들의 시선을 끌어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루이즈에게 말을 건넬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
“아….”
한 박자 늦게 루이즈의 정신이 돌아왔고.
잠시 후 동화로 루이즈의 생각을 눈치챈 현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이토록 무모한 행동을 벌인 이유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저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고 말했던가?
그 말은 이번만큼은 통용되지 않는다.
오늘의 전쟁에서 패배하면 모든 게 끝.
천사들은 지상을 소각하는 것은 물론이고, ‘조화’의 주동자이자 어둠의 씨앗인 루이즈 또한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옅은 숨결을 내뱉은 루이즈는 현에게 영혼 대화로 말했다.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선….」
「…….」
「현, 그대가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가…?」
현은 무어라 대답하지 않았다.
방금 루이즈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을 무모하다 탓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이번 것은 자신의 실수다.
사령관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을 위험에 빠뜨려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
살짝 입술을 깨문 현은 마음을 다잡았다.
모두를 이끌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후우, 심호흡을 하며 다시 머리를 차갑게 만들었다.
「고마워.」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없을 때.
승리의 가능성이 0에 가까울 때.
그 실낱같은 가능성을 잡아내는 방법의 첫 단계는 반드시 이겨야한다는 강박관념을 없애는 것이다.
“타르타르. 세세리.”
동화를 해제한 현이 자신을 바라보던 둘에게 뒤쪽의 먼 언덕을 가리키며 말했다.
“루이즈랑 같이 저기까지 물러서 있어.”
“넷? 하지만… 그러면 기도는.”
세세리가 괜찮겠냐는 표정을 지었다.
기도의 효과는 거리에 비례하니, 자신이 멀리 떨어지면 현에게 제대로 공감을 전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멀리서도 충분해.”
현은 옆을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천사의 시선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아인을.
“모자란 공감은 알아서 메꿀 테니.”
“알겠어요!”
눈치가 빠른 타르타르가 루이즈와 세세리를 잡아끌었다.
일행이 물러서는 모습을 확인한 현은, 바로 고개를 돌려 서번트 천사 셋의 협공을 힘겹게 감당하던 아인에게 동화했다.
‘현…?’
「가만히 있어!」
[121의 초월력을 사용하여 ‘충격증폭’을 강화합니다!]현은 모든 초월력을 소모했다.
카앙!
눈앞의 천사들을 후려치는 순간 단단한 철갑을 후리는 육중한 느낌이 손으로 전해졌다.
쿠구구구-! 허나, 거세게 튕겨나간 천사는 바닥에 쓸려 흙먼지를 피울 뿐, 곧 아무런 피해조차 입지 않았다는 듯 멀쩡히 일어서고 있었다.
「현!」
현의 합류를 깨달은 아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지만, 여전히 목소리엔 걱정이 묻어있었다.
그 정도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생각보다 적이 강해! 우리 이길 수 있는 거야?」
「……..」
「그 녀석들이 늦어서 현의 계획이 차질에 생겼잖아! 걔네는 대체 언제쯤…!」
「아인, 조용히.」
현은 한 마디로 아인의 입을 다물게 했다.
앞으로 실패는 용납되지 않으니, 실수를 줄이기 위해선 쓸데없는 대화를 줄이는 편이 좋았다.
「우리 싸움에만 집중해.」
「어…. 응!」
「실수하면 끝이니까.」
후우, 현은 심호흡을 하며 주위를 훑었다.
눈앞에 서번트 천사 세 마리. 뒤엔 보다 강한 천사 하나.
어느새 발키리들까지 천사들의 양옆에 모여들고 있었다.
반면 이쪽의 전력은 자신과 아인 뿐.
당장은 루이즈의 도움도, 세세리의 기도도 기대할 수 없다.
아마도 아스라, 아스리안을 플레이하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절망적인 상황들 중 하나일 것이다.
아인과 나. 단 둘… 천사들의 무자비한 공격을 버텨낼 수 있을까?
현은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의문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확률은 이제 의미가 없다.
그저 최선을 선택할 뿐!
‘온다!’
광휘가 번쩍였다 싶은 찰나. 왼쪽에서 천사의 검이 날아들었고.
파앙!
바람의 폭발과 함께 아인은 바닥을 굴렀다.
강신으로 루이즈처럼 바람을 터뜨리지 않았다면 결코 반응하지 못했을 공격이었다.
‘어떻게든…’
다시, 한 천사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힘껏 몸을 비트는 동시, 현은 섬뜩한 예기가 뺨에 스침을 느꼈다.
이를 악문 현의 시야로 검격에 잘려 흩날리는 아인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적과의 거리가 멀다 해서 방심할 수는 없다.
검격이 보이지 않고, 검신의 길이조차 큰 의미가 없는 것이 바로 천사의 검술이니.
‘할 수밖에 없어…!’
간절히 원하면 기도하라고?
우스운 소리야.
기도해 봤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 자신의 기도를 받아 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으니까.
[초월력 50을 사용합니다!] [이프리트의 발톱이 5초간 더욱 거세게 타오릅니다!]화륵! 화염이 공간을 잡아먹었다.
경계의 낫을 집어넣은 것은, 천사에게 피해를 입힐 방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얼음보다 불꽃이 조금이라도 더 천사들의 시야를 어지럽힐 수 있었다.
‘생체리듬 가속!’
운이 찾아오길 기다리는 것 또한 어리석은 짓이다.
믿어야 할 것은 오직 냉철한 사고와 판단.
이전부터 지닌 무기는 그것뿐이지 않았는가?
기적은 가만히 기다려서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기적이란, 미래에 대한 예측과 운의 흐름이 맞아떨어졌을 때 발생하는 것!
‘이런…!’
서번트들 뒤편의 하늘.
거대한 빛이 모여 가는 모습을 발견한 현의 머릿속에 경고등이 켜졌다.
마침내 플레인 급의 천사가 움직이려는 것이다.
‘저건 반드시 막아야 돼!’
파앙! 파앙!
현은 공기를 터뜨려 가며 순식간에 플레인 천사에게 접근했다.
아까부터 쭉 녀석만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움직일 수 있었다.
[57의 초월력을 사용하여 ‘충격증폭’을 1회 강화합니다!]카앙! 경계의 낫으로 무기를 바꾸고 있는 힘껏 아래서 위로 후려쳤지만.
‘…!’
손이 무겁다.
모든 천사는 적어도 1.5세대의 인공지능.
같은 공격에 두 번 당해주지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런.’
플레인의 천사가 미미한 웃음을 흘렸다.
얼핏 비웃음처럼 보이는 그 미소는 마치 인간의 것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현의 눈동자에 비춘 광휘가 점점 커져가기 시작했고.
‘안 끊겼나…?’
광휘가 온 세상을 집어삼킨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아-!
마치 번개처럼, 천계의 하늘에서 빛이 쏘아졌다.
하늘과 지면을 잇는 거대한 빛의 기둥이 생겨났다.
현과 아인을 완전히 집어삼킨 그것은 초고온의 불꽃처럼 닿는 모든 존재를 녹이는 정화의 빛.
유저에겐 악몽과도 같은 타겟팅 스킬이다.
“…….”
천계의 소란이 잠시 멎었다.
서번트들도, 발키리들도, 현의 동료들도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빛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읏….”
마침 기절했던 루이즈가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마자 가득 펼쳐진 빛은 그녀의 사고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이냐?”
루이즈는 힘겹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지만, 자신을 부축하고 있던 세세리의 표정은 어딘가 멍해 보였다.
표정 뿐 아니라 팔에도 힘이 빠져 있었다.
“저것은…?”
“…….”
“…!”
세세리의 반응으로부터 루이즈는 어떤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근처 어디에서도 현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오직 한 곳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루이즈는 숨을 삼키고 빛이 작렬하는 장소를 바라보았다.
멀리서도 피부가 따가울 정도의 빛줄기를 현이 버틸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한 게 당연하겠지!
‘기껏 구했더니 이 멍청이가…!
문득 루이즈는 숨이 잘 안 쉬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오늘 헤어진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별을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가슴이 아팠지만,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내뱉던 루이즈는 어느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균형을 잡지 못해 휘청거리다가 옆의 석상을 짚었다.
‘아니… 아직이다!’
루이즈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엔 아직 영혼의 끈이 연결되어 있어! 영혼으로 느껴지는 그 미약한 공명으로부터 현의 생존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이 원망한다 해도 상관없어.
후세에 가장 어리석은 자로 기록 되도 좋다!
이 몸은 그를 위해 나를 바칠 것이니…!
그렇게 결심을 마친 루이즈가 빛줄기를 향해 달려가려던 찰나, 누군가의 손이 루이즈의 옷깃을 우악스레 잡아끌었다.
“잠깐만….”
“이익, 이거 놓아라!”
루이즈는 악을 쓰듯 소리쳤다.
자신의 시야가 흐려지고 있단 사실조차 깨닫지 못할 만큼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였다.
그 순간, 타르타르의 외침이 루이즈의 어지러운 마음을 깨웠다.
“아직 둘 다 멀쩡해요!”
“뭐라…?”
“형도 누나도, 체력 바는 거의 그대로에요! 잠깐만 믿고 기다려 보자구요!”
유저인 타르타르는 파티 정보 창을 통해 파티원들의 체력 게이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신기한 일이다. 두 사람은 어떻게 평지를 절벽으로 변모시키는 무시무시한 공격을 버텨내고 있는 걸까?
잠시 후, 빛줄기가 그치고, 루이즈의 입이 벌어졌다.
방해되는 눈물을 닦고서 다시 바라보았다.
후우우웅. 거대한 바람에 휩싸여 있는 자신을.
아니, ‘강신’을 사용하고 있을 현의 모습을!
‘저 기술은…’
순간 루이즈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설마, 검은 바람인가…?’
현이 사용하고 잇는 스킬은 분명 자신의 것.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온몸을 휘감는 바람은 그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바람의 색깔이 검은색이 아닌 회색인 것은 어째서인가…?
‘아….’
안력을 높인 루이즈는 뒤늦게 깨달았다.
바람의 색깔은 회색이 아니었다.
백과 흑이 뒤섞여 멀리서 회색처럼 보였던 것일 뿐.
***
「늦어서 미안하군, 이쪽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 말이지.」
갑자기 들려온 살론의 귓속말.
현은 별동대의 임무가 예정보다 늦은 걸 탓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불가능에 가깝던 계획에 변수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겠지.
「우왓! 휴, 죽을 뻔했군. 정리되는 대로 다시 연락하지.」
‘…….’
현은 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현의 전신과 창대에는 순백과 칠흑의 회오리가 휘감겨 있었고.
회전하는 창에 담긴 새하얀 안개는 주위의 빛을 모조리 지워내는 중이었다.
휘이이잉-!
플레인 급의 천사도 빛의 근원에는 거역하지 못한다.
그 힘에 맞서고도 멀쩡할 수 있는 존재는 로열의 천사, 그리고 ‘바람’을 다루는 존재뿐!
콰아아아아!
언젠가부터 현의 바로 뒤편엔 ‘빛의 열차’가 질주하는 것처럼 백색의 격류가 흐르고 있었다.
라이트 캐슬을 가로지르는 대동맥에 가득한 담긴 격류는 정제되지 않은 빛의 신력.
빛의 근원이나 다름없을 힘이 악마의 손에 들려 천사를 위협하는 검이 되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제 내가 할게.」
현은 흑백의 소용돌이가 휘감긴 창을 앞으로 뻗었다.
「루이즈의 바람은 내가 더 자주 다뤄봤잖아.」
「응…!」
계획에 징검다리가 이어졌다.
허나, 타이밍이 마법처럼 들어맞긴 했어도 아직은 하나의 우연에 불과할 뿐.
이제 그 우연들을 하나하나 모아 기적으로 만드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