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172)
에피소드의 끝
믿을 수 없는 메시지가 지나가는 순간, 현은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루이즈가 어떻게 악몽에서 깨어났는지. 또, 왜 갑자기 검은 크리스탈의 날개가 생겨나고 있는지도.
빛은 어둠의 자아를 스스로의 몸속에 봉인해 두고 있었다.
그가 소멸했으니 사방으로 흩어진 자아의 파편들은 다시 본래 주인인 루이즈에게로 흡수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콰드드득!
등 뒤에서 점점 자라나는 한 쌍의 날개를 보며 루이즈는 당황한 듯 두리번거렸다.
이건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건 현도 마찬가지였지만, 최대한 침착함을 가장하여 물음에 답했다.
“각성.”
“뭣…?”
“네가 어둠의 대악마가 되기 위한 마지막 단계일 거아.”
“대악마…? 이 몸이 말인가?”
루이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면 정신이 점점 또렷해지는 것도 자아가 점점 커져가고 있기 때문이겠구나.
너무도 갑작스러운 마지막 각성.
대악마가 되면 더 이상 숨어 다닐 필요도, 천공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오래 전부터 그토록 바래오던 일일 텐데….
어째선지 이 상황이 그리 반갑지 않아.
“이번엔 몇 년이더냐…?”
루이즈는 조심스레 물었다.
NPC인 그녀는 유저에게만 떠오른 메시지를 읽지 못했다.
잠깐 숨을 삼킨 현은 사실대로 말했다.
“천 년.”
“그래, 천… 뭐, 뭐라고?!”
“천 년 동안 잠에 빠지게 되나 봐.”
“잔다고…?”
일순간 한껏 커졌던 루이즈의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천 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에 놀랐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도 있었다.
의식이 없다면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으니까.
이별의 순간도 찰나와 같이 지나가리라.
“그렇구나…. 이번엔 바로 만날 수 있겠어. 나 또한 유저가 된 것과 같구나.”
“…….”
“이런, 생각해 보니 파피에게 인사를 전하지 못했다. 그 녀석이라면 천 년 뒤에도 살아있을 것 같지만.”
“…….”
“조금 이상한 기분이다. 천 년이라니 실감이 나지 않아. 음…?”
그렇게 혼자 계속 말을 내뱉던 루이즈의 눈이 현을 향했고, 그녀는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현의 눈동자를 마주보는 순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한 것이다.
전쟁은 분명 승리했는데… 그는 왜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인가?
원래의 현이라면 천 년 동안 새롭게 변할 세계의 모습에 잔뜩 기대에 부푼 얼굴을 했을 텐데…!
‘설마….’
순간, 불길한 예감이 루이즈의 뇌리를 강타했다.
거대한 사건이 끝난 이후 현과 이토록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전에는 한 마디 나눌 틈도 없이 양쪽의 시간이 어그러졌던 탓이다.
루이즈는 짐짓 태연한 말투로 현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그런데 이번엔 여유가 조금 있구나.”
“…….”
“시간이 가속되기까지 얼마나 남은 것이냐?”
“그건….”
침묵하던 현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루이즈의 그 물음은 지금 답해줄 수 없는 것이다.
아까부터 메시지 창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지만, 시간축이 변한다는 말… 아니, 새로운 메시지조차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지도 몰라.”
한참 입술을 달싹이던 현은 자신이 생각한 바를 솔직히 말했다.
어둠의 씨앗인 루이즈가 점점 성장하여 결국엔 진정한 대악마가 되는 것.
그것이 ‘어둠’의 에피소드라면 굳이 뒷이야기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
실제로 아스리안의 몇몇 퀘스트들은 그런 식의 열린 결말로 끝나곤 했었다.
만약 이 추측이 맞다면…
루이즈가 잠에 빠지는 그 순간 자신은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을 테고 그걸로 어둠의 에피소드는 모두 마무리될 것이다.
그걸로… 끝일 것이다.
“아무것도…?”
“응…. 아마도.”
아직도 새로운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는 중.
추측은 거의 기정사실에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
갑자기 ‘검은 바람’을 손에 휘감은 루이즈가 자신의 날개를 뜯어내기 위해 날개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돌발행동에 현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이를 악물고 힘을 써 봐도 어깻죽지에 달린 크리스탈 날개는 멀쩡했다.
오히려 그 크기를 점점 불려가고 있었다.
“현… 나는…!”
순간 루이즈는 말문이 막혔다.
각성을 그만두고 싶다 말하려 했지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의문이 든 것이다.
“나는….”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현의 모든 행보는 자신을 대악마로 만들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럼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것은 일종의 배신이 아닌가?
약 20년에 걸친 세월동안 그가 보고 달려온 목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닐까?
현이 입을 연 것은 그렇게 루이즈가 어쩔 줄 몰라 머뭇거리던 때였다.
“안 돼….”
“…!”
“아직 아니야.”
루이즈의 눈동자가 커졌다.
동화도 하지 않았는데, 그저 시선이 마주친 것뿐인데도 상대의 마음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침착함을 가장하던 현의 눈동자엔 위태로움이 가득했다.
그래, 서로의 심정은 한 치도 다르지 않다.
‘이렇게 되는 거였다면…!’
카앙!
검을 뽑아 루이즈의 날개를 내리친 현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자신에게 크리스탈 날개를 부술 힘 따위 남아있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현은 과거의 말을 주워 담고 싶어졌다.
루이즈를 대악마로 키워주면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개소리다.
영웅, 황제, 혹은 신, 그 어떤 직위를 준다 해도 루이즈와 바꿀 수는 없어!
“무서워….”
문득 들려온 루이즈의 중얼거림에 현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아직도 악몽에서 깨지 못한 것은… 아니겠지?”
이어서 한쪽 손이 저려왔다.
루이즈는 아플 정도로 자신의 손에 깍지를 끼고 있었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너무도 졸리구나….”
하지만 온 힘을 다해 현의 손을 잡은 그녀의 손아귀 힘도 시간이 갈수록 느슨해졌다.
수마가 찾아온 루이즈의 힘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게슴츠레하게 뜬 루이즈의 눈으로부터 두 줄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비틀거리던 그녀의 몸이 기울며 흑백과 칠흑의 날개가 서로 겹쳐졌고.
“…….”
눈꺼풀을 파르르 떠는 루이즈의 모습이 현의 시야에 들어왔다.
10살, 15살, 20살,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기억을 스쳐갔다.
유저와 NPC 사이의 인연은 본래 깊게 이어질 수 없던 것이었나?
루이즈를 만난 순간부터 결말은 정해져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너무도 잔혹한 이야기다.
현은 곧 기나긴 잠에 빠져들 루이즈를 무력하게 바라보았다.
빛을 소멸시킨 게 실수였던 걸까?
할 수만 있다면 그 녀석을 다시 살려내고 싶어!
헛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시간과 가장 밀접한 혼돈의 힘도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이 순간 루이즈의 운명은 아무도 바꿀 수 없으리라.
그렇게 지독한 슬픔에 현의 고개가 숙여지던 그 순간이었다.
다시 한 번, 번개가 현의 뇌리를 관통했다.
“…!”
아니, 한 명 있어…!
갑자기 현이 귀신에 들린 사람마냥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보고 있죠?!”
인기척이 없는 숲. 방송용 드론도 떠있지 않은 곳을 향해 소리치는 그 이유.
“전쟁을 승리로 끝냈어요!”
바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존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최고 개발진인 권대호 회장!
이 세상의 창조주인 그라면 모든 인과를 무시하고 루이즈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으리라.
“세상을 안정시키면 루이즈를 현실로 데려다 준다고 했었죠…?”
권대호 회장이 부탁을 들어줄 거란 확신은 없다.
자신의 화면조차 보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존재한다면, 현은 마지막으로 그것에 모든 걸 걸어 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까 지금… 아…!”
말을 이어가던 현은 짧은 탄식을 흘렸다.
축 늘어진 채 자신에게 안겨 있던 루이즈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며 자신은 그대로 허공을 감싸 안았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에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다.
어딘가로 순간이동한 건가?
메시지에 적혀 있던 대로, 마계에서 1000년간 잠들기 위해 자동으로 옮겨진 걸지도 몰라…!
띠링!
곧이어 청천벽력같은 알림음이 들려왔다.
마음의 준비도 할 새 없이 현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고.
“아…?”
현은 의문이 섞인 탄식을 흘리고 말았다.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파티원 ‘루이즈’님이 로그아웃 하였습니다!]‘…?’
현의 머릿속에 무수히 많은 물음표가 떠올랐다.
생각이 완전히 정지한 현의 귓가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잠시 후였다.
「오랜만이군. 자네에게 알려줄 소식이 있다네.」
기억속의 목소리.
「이 세상도 제법 안정된 것 같더군. 자네가 먼저 약속을 지켰으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겠지.」
반가운 목소리에 현의 입가에 서서히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래서 바로 자네의 부탁을 시험해 봤다네.」
루이즈가 사라지고 나서도 크리스탈의 날개는 허공에 그대로 남았다.
쩌저적- 결정에 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의식의 대상이 사라져 버리자 어둠의 자아가 저들끼리 반발하는 것이었다.
파칭!
곧이어 크리스탈의 날개가 산산조각나자 수천 조각의 파편들은 흑색의 섬광이 되어 사방으로 비산했다.
산 너머, 하늘 위, 혹은 바다 아래로.
그렇게 주인을 잃은 자아의 결정체들은 또다시 세상의 어딘가로 모습을 감추었고.
한차례의 소란이 끝난 숲엔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이 내려앉았다.
「잠깐 시험해 본 결과 그녀의 감각동조율은 80퍼센트 정도로군. 하긴, 인간의 모든 감각을 재현한다는 게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
“…….”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간이 몇 달쯤 더 필요할 것 같아. 간단한 테스트 몇 가지만 더 마치고 나면 그녀는 곧 돌려보내 주겠네.」
하하… 하하하…
현의 입가에서 실소가 새어나왔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어둠의 각성이 취소되었습니다!] [재각성을 위해선 세상에 흩어진 자아의 파편들을 다시 모아야 합니다!]메시지의 로그 창을 보면 확신할 수 있다.
루이즈의 각성은 완전히 취소되었다.
다시 돌아와도 끊겼던 의식이 재개되지는 않겠지.
1000년간 잠드는 일도 없을 것이다.
어둠의 에피소드는 아직 끝나지 않은 셈이니까.
“후아…!”
온몸에 힘이 빠진 현은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긴장이 풀리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아스리안이 인류의 ‘두 번째 터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개발진들이 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섭과 통제가 없었던 덕분에 기업들이 마음 놓고 가상의 세계에 투자할 수 있었다고 많은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말하곤 했다.
그런데 이런 선례가 생겨버리면 문제가 되진 않을까?
고작 한 명의 손짓이 세상을 뒤흔들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NFM의 수입에도 타격이 생겨날 테고, 한 번 금이 간 유저들의 신뢰를 복구하기도 힘들 텐데.
권대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현이 그런 우려를 하던 때였다.
「아참,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자네 중요한 일을 하던 중이었나?」
“네…?”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중요한 순간에 개입한 건 아닐지 걱정이 되더군. 예를 들면 나 때문에 특정 퀘스트가 중단되거나 하는 일들 말이지.」
“…….”
잠시 그 의미를 헤아려 본 현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현은 신중하게 생각한 후에 대답했다.
“아뇨. 별 일 없었어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만. 하긴, 전쟁이 막 끝난 참인데 별 일이야 있겠어?」
“하하, 그렇겠죠….”
휘이이이- 바람이 목을 간질이는 가운데, 바닥에 누운 현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백색의 띠와 함께 절반으로 갈라졌던 하늘은 어느새 원래대로 봉합되어 있었다.
글루나와 일루나가 절반으로 갈라져 있지 않았더라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만 같은 밤하늘.
너무나도 익숙했던 그 밤하늘은 오늘따라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다.
전쟁은 끝났다.
지상에 가득하던 천사들은 천계로 역소환되었고, 하늘다리를 침공했던 천인 세력들 또한 사기를 잃고 패퇴했다.
모든 것은 현이 빛을 소멸시키는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와아아아아-!!
지상 곳곳에선 함성이 울려 퍼졌다. 유저와 NPC들이 함께 어우러져 내지르는 승리의 함성이.
1.5세대 NPC들이 대거 참여한 전쟁은 유저들에게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전장에서 모두는 한명의 병사가 되어 함께 지상을 지켰으니까.
직접 NPC들과 부대낀 유저들도, 랭커들의 방송 화면을 지켜보던 이들도, 후퇴하는 적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온 몸에 카타르시스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제 가상현실 공간에서 거대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의 파급력 또한 어마어마했다.
아스리안에서 벌어진 사건은 게임과 전혀 관련이 없는 뉴스의 헤드라인까지 장식했다.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인 TV에선 게임 속 전사와 마법사들이 격돌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세계 각국의 유저들이 적과 맞서 사투를 벌였는데요,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이번 전쟁은 세계의 경제마저 크게 흔들릴 수 있었던 결전이었다고 합니다. 유저들이 전쟁에서 패했을 시 아스리안에 기반을 둔 기업들은 천문학적인 손해를 입었을 거라 추정됩니다. 단 한 곳, SHA컴퍼니를 제외하고 말이죠.”
송출화면은 백색의 띠 한가운데 떠있는 하늘 섬으로 이동했다.
경계의 도시가 지닌 가치가 다시 한 번 급부상했다는 설명이 더해졌다.
천사들의 공격에 지상이 반파된 와중에도 경계의 도시는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덕분이다.
“유저들은 쉐이드 길드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쉐이드와 NPC세력 사이의 관계가 일부 드러났기 때문인데요. 많은 이들의 의문에도 쉐이드는 공식 답변을 내지 않은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쉐이드 길드장이자 SHA컴퍼니 회장인 서현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
이번 전쟁에 쉐이드 길드가 깊게 연관되어 있음은 여러 곳에서 밝혀졌지만 그 누구도 명확한 연결고리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전쟁 도중에 쉐이드 길드는 뭘 하고 있었는지.
아니, 현이 빛의 대천사를 소멸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저도 거의 없었다.
가장 격렬했던 바다위의 싸움을 목격한 인간은 오직 한 명. 마력폭풍의 흐름을 쫓아온 NPC 마법병단장 혼자뿐이었던 까닭이다.
몇몇 방송용 드론들이 흑색 섬광이 발산된 장소를 탐사하던 중 우연히 현을 발견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모든 싸움이 끝난 뒤.
현은 무사히 원래대로 돌아온 루이즈의 모습에 안도하여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던 상태였다.
유저들은 루이즈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성인이 된 루이즈가 미디어에 모습을 비친 것은 빛의 사원에서 한 번 뿐이었고, 그때마저도 마기에 온몸이 감싸여 있었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으니 스캔들 기사가 쏟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SHA컴퍼니의 압박 때문에 기사 금방 내려갔지만, 그것만으로도 유저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저 은발 여자 누구임?
-헐 아인 불쌍하다 ㅠㅠㅠ
-현 딱 걸렸네요. 저래도 아인은 현 좋아하겠지요?
-아니 대체 여자 몇 명이나고 ㅋㅋㅋ
-현재 지닌 것에만 안주하지 않는 자세. 저게 바로 『영웅』이다….
드론이 멀리서 자신을 찍고 있다곤 현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엔 다시 루이즈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에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흐응….”
아침식사 도중, 인터넷 뉴스를 읽던 아인은 묘한 소리를 흘렸다.
그녀의 스마트폰 화면에 떠올라 있는 사진은 논란의 그 장면.
무슨 상황이었는지는 안다.
어제의 자신도 마음 졸이며 방송으로 같은 화면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현이 어떤 기분으로 저런 행동을 벌였는지도 다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 해도 남들이 제멋대로 말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아.
“현.”
“으응…?”
아인의 화면을 힐끔거리던 서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후후후, 웃으며 점점 다가오는 아인을 보면서도 제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딱히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서현은 숨을 죽인 채 아인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지만.
“왜? 별 거 아니잖아.”
“어? 그런가…?”
“외국에선 안는 것 정도는 인사 대신으로 하는 사람도 많다고 하고.”
“음,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의외로 반응이 조용했다.
아인의 말이 이어진 것은 이대로 쉽게 넘어가는 건가 싶던 그 때였다.
“근데 그 정도가 평범한 인사라면… 연인끼리는 좀 더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면서 은근히 손을 잡아끄는 아인.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긴장하던 서현의 맥이 풀렸다.
이제 대충 그녀의 의도를 파악한 서현은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스리안에서와 달리 현실에선 아인이 아무리 애를 써도 성인 남성의 힘을 이길 수 없을 테니.
“지금? 밥도 마저 못 먹었는데.”
“밥 대신 내가 있잖아!”
절묘하게 균형이 무너진 탓에 서현은 침대 위로 무너졌다.
힘이 없는 현실에서도 아인의 기술은 여전히 남아 있는 듯했다.
이어서 이젠 조금 익숙해진, 하지만 매번 새로운 감각이 입술을 감싸왔다.
“….”
서현은 눈을 감았다.
구구절절 말하지 않고, 다짜고짜 몸으로 덮쳐오는 아인의 행동에 깃든 배려를 이젠 이해할 수 있다.
팔을 뻗어 아인을 마주 감싸는 서현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지상과 하늘 사이의 전쟁은 유저보다 NPC들의 의식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천사가 인간을 적대했다는 사실은 조화를 믿지 않던 아스리안의 주민들에겐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으니까.
그동안 믿어왔던 천인과 천사들에게 배신당했으니 전쟁 이후 조화의 신도가 급증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세상엔 새로운 변혁이 찾아왔지만, 현은 자신의 생활이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고 느꼈다.
가끔씩 길드를 관리하고 SHA컴퍼니의 중대 사항들을 결정할 때 정도를 제외하면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사냥을 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아스리안의 세상엔 아직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장소와 만만치 않은 강적들이 가득했다.
예를 들면, 미궁의 주인, 인터루프의 수호자 따위의 녀석들 말이다.
천계엔 ‘진실’의 세력들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어째선지 빛이 사라진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지만, 진실이 움직였을 때의 영향력은 빛보다 작지 않을 것임은 확실했다.
게다가 어둠의 에피소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1천년의 기다림 없이 루이즈의 힘을 되찾는 방법을 모색해 볼 생각이다.
수천, 혹은 수만 조각으로 흩어진 자아의 파편들을 찾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진 모르겠지만.
전쟁이 끝났어도 아스리안의 역사는 계속되며, 자신의 일상도 여태까지와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조금 달라지기는 했다.
“현. 재밌는 사실을 알아냈다.”
“응?”
“역사 공부를 좀 해 봤어, 아스라 국가의 왕들은 전부 셋 이상, 많게는 수십 명의 후궁들을 곁에 두고 있었다고 하더구나.”
바로 루이즈가 자주 달라붙어 온다는 것.
그리고 아인이 곁에 없을 때마다 조금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꺼내오곤 했다.
“현, 이 몸은 그대에게 너무도 큰 빚을 졌어. 평생에 걸쳐 갚아나갈 수밖에 없겠지.”
“어떻게 갚게…?”
“일단은 왕의 자세를 갖추는 것부터다! 진정한 왕이 되려면 후궁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후궁이라니…. 현대사회를 살아온 현에겐 너무도 파격적인 이야기였다.
루이즈가 말하는 사회가 실현되려면 ‘시대’가 완전히 변해야 하지 않을까?
아스리안의 등장으로 세상의 경계가 허물어졌던 것과 비슷한 수준의 변혁이 일어날 때쯤 한 번은 고민해 볼 수 있겠지.
물론 아인의 의견이 어떠할지 물어보는 것부터가 난관이겠지만.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
이번엔 아스리안이 아닌 현실의 인생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현, 뭐 잊어버린 거 없어?”
“응?”
“무사히 전쟁이 끝나면 우리… 뭐 하기로 했던 거 있잖아.”
말을 흐리듯 중얼거리며 왼손으로 머리를 매만지는 아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유난히 잘 보이는 것은 그저 우연일까?
“글쎄 뭐였더라.”
“뭐, 뭐냐니…? 후, 후후… 괜히 모르는 척 연기하지 말고.”
“으음,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어쨌든….”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결혼하자.”
“봐봐, 또 바보 같은 말… 으, 으응…?”
순간 아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잠깐 침묵이 이어졌고.
아인의 얼굴이 현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왔다.
“다시.”
“…?”
“제대로 못 들었단 말이야….”
“사랑해. 그러니까.”
아인은 다시 숨을 멈추었다.
조금의 목소리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결혼하자.”
감전된 듯 몸을 떨던 아인이 입을 연 것은 한참 만이었다.
“오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 그렇지…!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그럼 내일….”
“결혼을 하루 만에 어떻게 해.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하자는 거지.”
“그, 그렇지…! 후, 내 농담 어땠어? 재밌지?”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채 횡설수설하는 아인.
아인의 정신이 반쯤 나가있는 것 같았기에, 현은 조금 진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아인, 혹시 대학 다녀볼 생각 없어?”
자신과 아인이 남들과 조금 다른 삶을 살아왔음을 알고 있다.
정상적으로 대학에 들어갔다면 지금 2학년생이었을 아인은 자신과 함께 아스리안을 플레이한 탓에 제대로 된 고등학교 시절도 보내지 못했다.
“대학? 갑자기?!”
“나도 바로 다음 학기부터 복학할 생각이야.”
남들이 편견어린 시선으로 아인을 바라보길 원치 않는다.
물론 본인은 상관없다고 말하겠지만.
앞으로 자신의 영원한 동반자가 될 그녀에게 남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시켜주고 싶었다.
“현이 가면 당연히 나도 가야지! 아, 근데…”
자신만만하게 답하던 아인의 표정이 순간 의기소침해졌다.
검정고시를 보기 전 자신의 학창시절 성적이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도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으니, 3년간 공부를 손에 놓은 지금은 더 욱 심각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현이 다니는 대학에 들어갈 수는 있을까…?”
“그건 걱정 마. 예체능 쪽에도 아스리안 관련 학과들이 많이 생겼거든. 대회가 목표인 곳도, 랭커가 목표인 곳도, 너 정도라면 어디든 알아서 모셔갈 걸?”
“그래…?”
“그렇다니까.”
거기까지 말한 뒤.
기대감 어린 눈빛의 아인을 보며 현은 씨익 웃음지었다.
“그리고 나도 너랑 같은 곳으로 전과하려고.”
“…!”
“내가 이제 와서 공돌이 될 것도 아니고, 이왕이면 같이 학교 다니는 편이 재밌잖아?”
“너무 좋아!”
갑자기 뛰어오르는 아인.
그녀의 격한 반응에 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사소한 문제들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아인의 입학이 2년 늦다는 점은 그 엄청난 동안으로 커버가 되고도 남겠지만….
결혼과 대학을 병행하는 게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까 하는 의문.
자신이 다니던 대학이 그리 좋은 곳은 아니라 남들이 얕잡아 보진 않을까 하는 걱정.
하지만 그런 의문과 걱정들은 앞으로의 행복에 비하면 정말로 사소한 거겠지.
게다가 지금의 자신은 웬만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앞으로 다닐 걸 생각하면 좀 더 돈을 내야겠어. 우리나라 5위권 대학에 들려면 얼마쯤 기부하면 되려나? 아니면 경계의 도시에 캠퍼스를 지을만한 부지를 빌려주는 것도 도움이 될지도.’
귀찮게 편입 절차를 밟는 것보다 지금 다니는 대학의 명성을 올리는 쪽이 훨씬 수월하다고 여기는 현이었다.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결혼 준비를 시작한지도 어느덧 6개월.
세상엔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현은 이토록 다사다난한 6개월을 달리 겪어본 적이 없었다.
평소의 일상에, ‘대학’과 ‘결혼준비’가 추가될 뿐이니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었나?
완전히 오산이었다.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바쁜 탓에 매일 6시간 이상은 꼭 아스리안을 플레이한다는 규칙을 지키기도 힘들었다.
재밌는 점은 그래도 랭킹 1위의 이름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
유저들 사이에서도 ‘마의 410레벨’이라는 말은 제법 유명해졌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400레벨을 넘기지 못했고, 랭커 중에도 수년간 특정 레벨을 돌파하지 못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역대급 재능러라 불리는 라티스마저 4개월째 성장이 정체되어 있었으니 다른 유저들의 심정은 오죽할까.
물론 랭킹 1위, 2위를 유지하고 있는 자신과 아인도 전처럼 광속으로 레벨 업을 하진 못했다.
대충 계산해 보면, 그 마이너스의 수치가 없어지기까지 앞으로 1년.
빚을 청산하는 1년 동안은 가장 중요한 초월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남들에 비하면 여전히 성장이 빨랐고, 설령 따라잡힌다 해도 이제 와서 문제될 것은 없다.
초월력을 다룰 수 없는 1년은 맘대로 스킬트리를 바꾸며 놀 수 있는 기간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사실, 그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결혼식 날짜가 앞으로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인 어때 보여?”
“응, 밝은 배경도 나름 괜찮네!”
경계의 도시 꼭대기.
언제나 밤이었던 도시는 지금 대낮처럼 환했다.
지상의 모든 인간들이 조화를 섬기는 지금, 도시는 더 이상 백색의 띠 안에 숨어야 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거리낌 없이 양지로 나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래, 결혼식 날은 밝아야지.”
현은 난간에 기댄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결혼식이 예정된 장소엔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도 아스리안에서 결혼을 진행하는 것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이토록 규모가 컸던 적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유저와 아스리안의 NPC 모두 하객으로 참여하는 결혼식.
며칠 뒤, 저 넓은 단상이 수많은 사람들로 채워질 광경을 잠깐 상상해 본 현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자신만을 바라봐 준 아인을 위해서라면 역사에 새겨질 만큼 화려한 결혼식을 열어줄 수도 있었다.
‘어찌됐든 겨우 준비가 끝났네.’
상견례는 이미 마쳤다.
아인의 자유로운 성격은 그녀의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았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도중 갑자기 아스리안에 집중하겠다는 아인의 결정에 찬성해 준 것도 그녀의 어머니인 듯하다.
그리고 아인의 아버지는 아스리안이 맞이할 미래를 냉철하게 판단하고 나서 딸의 독립을 허락해 준 듯하다.
동거까지 허락했던 건 아닌 듯하지만…. 지금에 와선 결국 잘 해결되었다.
“오오, 현 역시 여기 있었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도시 꼭대기의 길드 건물엔 그동안 함께했던 쉐이드 길드원들.
아니, 이젠 쉐이드 길드의 최고 간부진들이 있었다.
“뭐야, 웬일로 다들 모였네요?”
“주말에 결혼식이 시작되면 제대로 말하기도 힘들 텐데, 그 전에 다 같이 봐 두려고.”
“아하….”
언제나 소파에서 뒹굴거리던 루이즈는 그렇다 치고.
살론, 타르타르, 그리고 평소엔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지니까지도 시간을 낸 듯했다.
자신과 아인을 더하면 초창기 쉐이드 길드원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으음, 화려한 것도 나쁘진 않다만. 나 때는 좀 더 어두웠으면 좋겠구나.”
난간에 다가간 루이즈가 결혼식이 세팅되어가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후후후, 이 몸은 어둠이니 화려함 보단 강렬함을… 좀 더 위엄을 담아서…!”
혼자 실실거리며 무언가 중얼거리는 루이즈.
하지만 그녀의 혼잣말에 집중하고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형, 저도 곧 대학 가요!”
“뭐야, 벌써? 타르타르 너 언제 성인이었냐?”
현은 길드원들과 잡담을 하느라 바빴고, 아인은 그런 현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리고 나머지 길드원들은 결혼을 앞둔 둘의 모습을 보는 순간부터 마음이 심란했기 때문이었다.
‘후우….’
지니는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결혼에 생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녀도 가끔은 남들처럼 가정을 꾸리는 상상을 하곤 했으다.
사실, 결혼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가능했다.
쉐이드 길드의 간부진이자 SHA컴퍼니의 최고관리자인 것만으로도 지니는 특급 신부감이었으니까.
‘나도 운명의 사람이 있으려나?’
하지만 눈이 너무 높아져 버렸어.
근처에서 현을 보다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그와 같은 남자가 이 세상에 또 존재할 린 없는 게 당연한데도.
훗, 결국 지니는 해탈한 웃음을 지었다.
당분간은 SHA컴퍼니와 결혼해야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결혼인가….”
그리고 살론은 홀로 벽에 기대어 쓴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자신의 감정을 삼켜둔 채로 말이다.
***
역사상 최대 규모의 결혼식이 열렸다.
현과 아인의 결혼식은 아스리안 밖의 세상까지 큰 화젯거리를 만들었다.
초청장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명문 길드장, 랭커는 물론, 현실의 고위 인사들, 심지어 권대호 회장까지 참석한 결혼식이니 그 정도는 당연했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축제.
둘의 결혼식은 경계의 도시뿐만 아니라 아스리안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의식을 치루는 신전들엔 한밤중까지 불이 밝았다.
지상 전체가 둘의 인연을 축복해 주는 것이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현과 아인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정신이 없으면서도 행복하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후아….”
입맞춤이 끝나고 아인이 열띤 신음을 흘렸다.
“한 번만 더….”
피식, 아인의 황당한 부탁에 현의 입가에서 웃음이 터졌다.
결혼식,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런 부탁을 하는 건 이 녀석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거절하면 안 되겠지?
다시 입이 마주치는 순간.
현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함성과 환호를 들을 수 있었다.
제국의 왕실 악단이 나팔을 부는 가운데 마도국의 폭죽이 터지고, 성가대의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중.
그렇다, 이곳은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곳.
여기가 바로 아스리안의 왕좌이리라.
***
[‘권대호’님으로부터 1통의 메일이 도착했습니다!]서현에게로 한 통의 메일이 도착한 것은 화려했던 식이 끝나고 몇 주가 더 지났을 때.
무언가를 예감한 순간부터 서현은 가슴은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권대호 회장의 약속. 루이즈를 현실로 데려다 주겠다는 그 말은 아직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세대 인공지능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드디어 완성되었다네. 특별한 요청을 만족시키느라 예상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린 점 이해해 주게나.
‘요청? 무슨 요청 말이지?’
서두에는 잘 이해되지 않는 말이 적혀있었지만, 상관없다.
쿵, 쿵, 심장의 요동을 어쩌지 못하는 채로 서현은 서서히 메일에 첨부된 영상을 열어보았고.
‘루이즈!’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미소 짓고 있는 은발의 소녀.
캡슐에 누워있는 루이즈의 모습은 마치 진짜 같아서 이 영상이 아스리안의 녹화 본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마침내 동영상이 끝나고, 서현은 이어지는 권대호의 설명을 읽어보았다.
-NPC가 세계를 오가는 방법은 유저와 크게 다르지 않다네.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통해 기억을 보존한 채로 아스리안에서 잠시 자신의 모습을 지울 수 있지.
-근력은 그 나이대의 여성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당연한 말이지만 현실에선 마법 같은 특별한 힘도 사용할 수 없다네.
-마음에 결심이 서면 날 찾아오게나. 자세한 설명은 그 때 계속하는 걸로 하지.
“그건 뭐야, 현?”
마침 다가온 아인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 그때 말한 그거구나.”
발신인을 확인하고 나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그런데…….”
서현은 눈을 깜빡거렸다.
다 좋은데 한 가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동영상에 비춘 루이즈의 모습은 지금의 루이즈와 상당히 다르게 보이는 것은 왜일까?
루이즈가 다른 사람처럼 낯설게 느껴진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왜 이렇게 어린 것 같지?”
겉으로 보이는 그녀의 나이는 왜 열 다섯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가?
후훗, 서현은 아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장면을 볼 수 없었다.
아인과 권대호 사이에 모종의 커넥션이 있었으리라고는 더욱 상상도 하지 못하는 그였다.
***
별다른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을 건너뛴 루이즈의 영혼은 최첨단의 기술로 만들어진 그릇에 무사히 안착했다.
다만 약간의 소란이 일어났다.
의식을 갖추게 된 루이즈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한 탓이었다.
“이 몸을 이렇게 작게 만들다니!”
“이건 무효다! 그래, 아인, 아인이 범인인 것이야…!”
소란을 잠재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조용히 해, 꼬맹이.”
고작 몇 센티 더 큰 아인에게 팔을 붙잡히자 루이즈는 아무것도 못하고 버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스킬도, 마법도 없는 현실에서 루이즈는 평범한 어린아이니까.
이후에도 며칠간은 종종 난동을 부리던 루이즈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용해져, 결국 어린 시절의 몸을 익숙하게 다루며 움직이게 되었다.
“나도 아스리안을 해 보고 싶다.”
“뭐…?”
“그대나 아인처럼, 유저가 되어 보고 싶다는 말이다.”
현실로 나온 루이즈가 처음으로 하고자 한 일은 그 좋아하던 연극이나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었다.
현실의 음식들을 맛보는 것 또한 나중이었다.
아스리안을 플레이하고 싶다는 것이 바로 루이즈의 첫 번째 부탁이었던 것이다.
“유저가 돼서 뭘 하게?”
“그건 아직 모르겠다.”
“…?”
“내게 가장 즐겁던 기억은 그대와 함께 여행하던 것이었지. 누군가에게 쫓긴다는 걱정 없이, 그저 자유롭게 이 세상을 누벼보고 싶을 뿐이야.”
“으음….”
루이즈의 말을 들은 서현이 의문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NPC가 유저가 된다니, 그게 가능할까?
“문제라도 있는가?”
“문제가 있지. 일단 캡슐을 접속하려면 유전 정보가 필요한데 너는 아마도… 으음…?!”
[신규 플레이어를 인식했습니다! 개인정보를 확인 중입니다.] [다음의 정보가 맞습니까? Y/N]이름 : 루이즈
나이 : 만 15세
주거지 : 서울특별시 OO구 XXX….
그 외 상세정보 : 비공개
“호오, 대충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뭐지…?’
서현은 멍한 눈빛으로 루이즈를 바라보았다.
아스리안에도 TV나 리모콘 따위의 전자기기가 출시된 덕분인지 캡슐을 조작하는 루이즈의 손놀림엔 거침이 없었다.
하핫. 그렇구나.
마침내 상황을 이해한 서현은 웃음을 흘렸다.
루이즈는 2세대 인공지능.
인간과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정교한 존재는 루이즈가 유일할 것이다.
그녀의 등장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 필시 시끄러워지겠지.
권대호 회장은 루이즈가 수많은 이들의 관심과 실험, 윤리 문제의 표적이 될 것까지 어느 정도 대비를 해 둔 것이리라.
‘그래, 어차피 누군가에게 추월당할 것 같지도 않고. 당분간은 초월력도 못 쓸 텐데.’
루이즈가 정한 아이디는 이름 그대로 루이즈였다.
캡슐 화면을 지켜보던 서현의 머릿속에 문득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인, 우리 두 번째 캐릭터 키워 볼래?”
“으응? 부캐릭터~?”
갑자기 게슴츠레한 눈으로 현을 바라보는 아인.
루이즈가 아이디를 만든 이 순간 두 번째 캐릭을 만드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크흠, 잠시 고민하던 아인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생각해보면, 자신은 어엿한 성인인 동시 현의 아내이기도 하다.
이젠 어린 꼬맹이에게 질투할 시기는 지난 거겠지.
“알겠어. 대신.”
“대신…?”
“하나 더 키우자.”
그래, 이제부턴 어른스런 대처를 보여줄 때였다.
“후후, 세 번째 캐릭터 아닌 건 알지?”
아인의 입꼬리가 언제나와 같은 호선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