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d Carry Support RAW novel - Chapter (20)
천공과 심연
천공 침범
기사단장의 퀘스트
지름길
최후의 문지기 베티
예기치 못한 일
가치를 깨닫는 날
인연이 이어지는 길
돈을 버는 방법
천공과 심연
메인 스토리의 오프닝 영상이 시작되었다.
현의 눈앞에는 한눈에 담기 어려울 광활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별이 빛나는 우주에 행성, 아스라가 태양을 공전하는 중이었다.
현은 3D 영화를 관람하는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와우, 퀄리티 있는데?’
이렇게 멀리서 우주를 관조하고 있자니 마치 신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우주에 있으니, 시간의 흐름에 익숙해지는 것에 시간이 걸렸다.
아스라가 태양을 한 바퀴 공전하는 데는 채 1분도 걸리지 않는다.
또한, 스스로도 팽이처럼 1초에 몇 번이나 자전하고 있었다.
아스라의 뒤꽁무니를 따라가는 방식으로 카메라 시선이 고정되었기에 태양의 외곽을 따라 질주하는 느낌이 들었다.
현의 눈앞으로 문구가 떠오른 것은 그렇게 영상을 감상하던 때였다.
팟-!
어느 순간, 카메라 시선은 행성 위로 클로즈업되었다.
아스라의 표면이 붉다.
마치 지옥의 불꽃과 마그마로 껍데기를 두른 광경.
이것은 아마도, 행성이 우주에 갓 태어난 태초의 모습일 것이다.
표층의 불길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머지않아 마그마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신 푸른 바다가 차올랐다.
나무와 풀이 자라났고, 시들고, 다시 자라났다.
억겁의 세월이 단 몇 초 만에 흘러갔다.
시간이 다시 한 번 가속되었다.
자연의 일부가 파괴되었고, 대신 그 자리엔 인공의 것들이 높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팟-! 화면이 다시 전환되며 현의 눈앞에 불길한 존재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초월자.
그 중 악마라고 불리는 녀석들.
대부분 뿔이나 꼬리가 달려 있었다.
몇몇 악마들 중엔 현이 알고 있는 얼굴도 있었다.
검은 기운에 감싸인 그들이 땅속에서 솟아나와 천상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또 다시 눈앞의 광경이 변화했다.
이번엔 땅 속의 어딘가에 있었다.
깊은 지하속인데도 정돈된 웅장함이 엿보였다.
마치 어딘가의 던전과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공간이었다.
‘아니, 던전 맞잖아?!’
현은 깨달았다.
심연과 지상을 잇는 듯한 거대한 원기둥.
그 가장자리를 따라 잔도처럼 이어지는 끝없는 나선의 계단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번쩍였다.
‘루이즈와 탈출했던 장소잖아!’
또각- 또각-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텅 빈 공간에 메아리쳤다.
현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명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전신은 칠흑의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기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현은 단번에 그 둘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한 명은 키가 크고, 나머지 한 명은 작다.
잠시 후에 키 큰 쪽의 기운이 흩어지며 작은 쪽으로 스며들었다.
저것은 아마도 ‘동화’라는 이름의 스킬일 것이다.
‘설마… 지금 저게 나랑 루이즈란 말이야?’
아스리안의 스토리를 미리 알고 있는 현조차 이번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오프닝 영상에 왜 자신이 출연하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과 루이즈의 모습이 어째서 마치 악마의 종자인 마물처럼 사악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영상에서 둘의 신체는 인간의 살과 뼈가 아닌, 검은 기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어서 벌어진 광경은 현의 기억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고오오오-.
곧 나선의 계단이 모래처럼 흩어지듯 무너졌다.
자신과 루이즈로 추정되는 두 심연의 존재들은 지상을 향해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두 마리의 마물은 가끔씩 한 마리가 되기도 했다.
며칠 전 자신이 움직였던 자취를 한 마리의 마물이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몇몇 동작들은 지금도 기억난다.
영상의 모든 상황이 그 때와 정확히 일치했으니.
어째선지 복면을 쓴 추격자들의 모습이 마치 신성한 빛의 결정체로써 묘사되었다.
루이즈로 추측되는 마물은 던전의 입구에서 머뭇거리다 밖으로 빠져나갔다.
표정이 마기 속에 가려졌기에, 그것이 머뭇거리는 것이었다는 것은 오로지 현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영상은 끝났고, 현은 레턴 마을의 광장으로 이동되었다.
접속과 동시, 수많은 메시지의 물결이 현을 반겼다.
띠링-!
[퀘스트 ‘루이즈를 보호하라’를 클리어 하였습니다!] [보상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메인 이벤트, ‘대부활’을 저지했습니다!] [모든 스탯이 +10 상승합니다!] [메인 이벤트 ‘천공 방어’를 저지했습니다!] [모든 스탯이 +10 상승합니다!] [히든 이벤트, ‘악의 집결’을 발동시켰습니다!] [스킬포인트가 +20 상승합니다!] [세계의 인과에 강력히 간섭하였습니다!] [역사를 바꾸는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하였습니다!] [레벨 업!] x 25…….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세계는 ‘천공’과 ‘심연’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자신의 세력을 정할 수 있습니다!] [가까운 ‘천공’ 혹은 ‘심연’의 교단에서 ‘룬’(Rune)을 부여받으면 세력이 결정됩니다!] [세력은 여러 가지 지원과 함께 ‘버프 효과’를 추가로 제공합니다!]현이 정신을 차린 것은 한참 만이었다.
제대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상태 창을 열어보았다.
25레벨이 오르며, 업적 보너스 스탯까지 추가로 받았더니 어마어마한 스탯과 스킬 포인트가 올라가 있었다.
‘이건 뭐냐?’
솟구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현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한편으론 불안감도 들었다. 상황을 알기 전까지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아 그렇지!”
현은 한 가지 기억을 떠올려 냈다.
루이즈와의 약속.
헤어지기 직전, 루이즈는 5년이 지난 뒤에 던전의 비밀상점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그래, 일단 만나보면 만나면 알 수 있겠지?’
죽은 장소와 가까운 마을에서 부활했기에 던전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현은 들뜬 마음을 누른 채 달려갔다.
미로 같은 길을 지나고 공동의 절벽을 뛰어올랐다.
이전보다 민첩이 늘어난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이윽고 비밀상점의 앞으로 도달한 현은 문을 열었다.
끼익-.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살펴보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순간, 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없어? 무언가 잘못된 건가?!’
그리 생각하던 순간, 상점의 테이블 위의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로브.
피요정의 망토가 마법부여된 물건, 루이즈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자신이 입혀주었던 로브였다.
로브 위엔 사형 집행자의 반지도 함께 남겨져 있었다.
옆에는 조그만 금화 꾸러미가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편지가 함께 있었다.
현은 그것부터 읽어 보았다.
「글이 잘 써지지 않는 것을 이해해 주거라.
현, 오늘은 그 날로부터 1년이 조금 더 지났다.
5년째의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 같아 미안하구나.
이제 먼 곳으로 떠나기에 그 전에 편지라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느니라.」
훗- 현의 입가에 절로 안도의 웃음이 튀어나왔다.
적어도 갑작스런 변고가 생겨 나오지 못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글재주가 없어 늘려 쓰진 않겠다.
그대에게 빌린 물건들은 전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대가 장담한 대로라면 시간이 지나도 이곳엔 아무도 오지 않겠지. 따로 숨겨둘 데가 없어서 여기에 두었다.
외상으로 빌렸던 20골드도 함께 둘 테니 확인해 보거라.
누군가 가져가지 않으면 좋으련만.」
기억났다.
그러고 보니 초보자에게 기본으로 보급되는 빵을 팔아먹기도 했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제 내 얘기를 조금 해도 되겠느냐…?
어째서인지 난 세상 사람들에게 악마라고 인식되는 듯하구나.
성왕국에서 수배가 내린 탓에 태양이 없는 밤에도 돌아다니기 힘든 상황이다.
곧 멀리 떠난다는 것은 그와도 관련이 있지.」
종이의 아랫부분은 다른 곳보다 조금 더 구겨진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물기가 한 번 떨어졌다 마른 것처럼.
「현, 다시 보고 싶구나. 보고 싶어.
언젠가 한번 지나온 삶을 떠올려 봤다.
어린 시절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으니, 내가 즐겁다고 생각한 것은 그대와 함께 있을 때의 잠깐. 그 때가 전부였다.
추격자에게 쫓기던 것조차 잠시 잊을 정도로 즐거웠다.
그대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가? 나는 다시 만나고 싶어.」
편지는 거기서 끝났다.
아니, 자세히 보니까 뒷면에 작은 글씨로 좀 더 이어져 있었다.
「혹시 시간이 남는다면 나를 찾아와 주지 않겠느냐?
다만, 목적지를 알려줄 수가 없구나.
이 몸도 자신이 어디로 향할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다.」
띠링-.
퀘스트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현이 편지를 전부 읽은 순간이었다.
-어딘가에 있을 그녀를 찾아가세요. 하지만 위치에 대한 단서도, 생사에 대한 확신도 할 수 없어요. 어쩌면 이미 어딘가에서 죽어버렸을지도.
-그래도 퀘스트를 받으시겠어요? (Y/N)
*주의 : 루이즈의 사망을 확인하면 퀘스트는 실패합니다!
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퀘스트의 내용은 마치 포기를 종용하는 말투로 설명되어 있었다.
무모하다는 것은 안다.
이 광활한 세계에서 한 명의 사람을 찾아 나서는 것은 모래 속의 티끌을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녀석이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인과에 큰 영향을 끼친 탓에 중립을 취할 수 없습니다! 성향이 심연 쪽으로 치우칩니다! (현재 : -73)] [자동으로 ‘심연’의 세력에 배정되었습니다.]화르륵- 갑자기 현의 손등 위에 불꽃의 형태를 가진 룬이 생겨났다.
손등 위에서 화염이 타오르는데도 뜨거운 느낌은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심연의 세력임을 뜻하는 표식.
행동이 과도하게 한 쪽 성향으로 치우칠 경우 이처럼 저절로 정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루이즈가 심연 쪽이라는 건가…?’
현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도 심연의 세력에 배정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이렇게 되면 천공의 교단이나 성지 등의 구역에 접근하기가 힘들어진다.
심연이란 지하. 즉, 악마들이 속한 세력.
천공의 고위 신관들 앞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기 힘든 것은 당연했다.
‘뭐, 언젠가 바꿀 수 있겠지?’
퀘스트나 행동에 따라 자신의 성향을 변화시키면 세력을 다시 기울게 만들 수도 있었다.
평범한 유저들에겐 힘들겠지만 정보와 힘을 전부 가진 자신에겐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루이즈가 악마로 오해받고 있다고 했던가…? 퀘스트를 통해 오해를 풀어내면 단번에 성향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아직도 루이즈의 정체는 잘 모르지만 오프닝에까지 등장한 모습을 보면 세계관의 핵심 인물이 틀림없었다.
그녀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세력도를 바꾸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그래도 당분간은 심연의 세력에 속할 테니 그쪽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차근차근 정리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는 현이었다.
***
메인 스토리가 시작되면서 한국 아스리안 커뮤니티들의 열기가 폭발했다.
하지만 그들은, 오프닝 영상에 등장했던 검은 기운으로 둘러싸인 한 존재가 유저란 사실을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아인마저도 그것이 현이라고 눈치 채지 못했으니 오죽할까.
모두는 그저 한 편의 영화를 관람하는 느낌으로 감상에만 빠졌다.
평소에 스토리를 건너뛰는 유저들도 자신도 모르는 새에 집중할 정도로 오프닝 영상은 대단한 몰입도를 가지고 있었다.
-와… 동영상 보다가 숨 쉬는 거 까먹은 적은 처음이네.
-웬만한 액션영화보다 멋있네요. 특히 마지막에 절벽 올라가면서 싸울 때 속도감이 정말.
-게임 엔진만으로 이정도 모션을 구현해 낼 수 있나?
-진짜 천사와 악마의 싸움 그 자체.
몇몇은 앞으로 벌어질 이벤트를 추측해 보기도 했다.
오프닝 영상엔 아스리안 역사와 관련된 중대한 단서가 담겨 있다는 개발진의 말이 있었기에 많은 유저들에 의한 자세한 분석이 이루어졌다.
-마지막에 보면 악마 한 마리가 지상에서 탈출합니다. 스토리를 추측해 본다면 그 작은 악마가 앞으로 세계에 혼란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 되네요.
-그럼 다음 스토리는 악마랑 싸우는 건가? 난 천공 세력이니까.
-심연을 선택하면 저 악마랑 같은 편이 되는 걸지도.」
-근데 우린 어떤 식으로 스토리에 참여하는 거냐? 세력은 뭐 고르는 게 좋고?
패치 직후의 프롤로그 영상, 그리고 세력 선택이라는 것이 동시에 겹치자 게시판은 혼돈의 도가니로 변했다.
소란을 정리한 것은 이번에도 전 아스라 플레이어, 강철바위가 올린 하나의 공략 글이었다.
「전 아스라 온라인에서 랭킹 20위에도 들었던 강철바위입니다. 지금 아스리안에선 명예의 전당 819위고요.
다들 혼란스러워 하시는 것 같아 짧게 설명할게요.
우선, 아스리안은 일반적인 RPG와 달리 메인스토리가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네, 천공과 심연은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게 되고 특정 전투의 승패나 이벤트의 성공 여부에 따라 수많은 미래가 다시 생겨나죠.
간단히 말해, 각 유저들이 속한 세력도에 따라 아스리안의 역사 자체가 바뀌어 간다는 겁니다!
자기가 힘을 보태고 싶은 세력에 속하면 되는데, 중립은 추천 드리지 않아요.
세력 버프가 꽤 유용해서 어디든 빨리 소속되는 편이 훨씬 플레이에 유리하거든요.
아래 각 세력의 버프를 정리해 뒀으니 참고하세요. ^^」
-냉기, 전격 내성 10% 증가.
-사냥과 퀘스트로 얻는 경험치 15% 추가.
-천공 세력의 NPC들에게 지원을 얻을 수 있다. (*참고 : 대부분 인간의 국가는 천공 세력임!)
-화염, 바람 내성 10% 증가.
-업적으로 얻는 보상 30% 증가.
-자신의 룬을 맘대로 바꾸면서 세력을 숨길 수 있다. (*주의할 점 : 고위급 신관이나 몇몇 네임드 NPC는 못 속임!)
강철바위의 가이드는 아스리안을 처음 접하는 유저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천공과 심연이라는 세력의 개념을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커뮤니티엔 벌써 ‘천공’과 ‘심연’ 유저 전용 게시판까지 생겨났다.
아직 세력을 정하지 못한 유저들이 각 게시판을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질문을 날렸다.
-근데 심연 세력 보너스 중에 ‘업적 보상’이란 건 뭐에여?
-저도 잘 몰라요. 플레이하면서 한 번도 업적 보상이란 걸 받아본 적이 없는데.
-아, 제가 받은 적 있어요! 슬라임의 들판에서 1만 마리 슬라임을 잡았더니 업적 달성했다면서 힘이 1 올랐어요!
-음…… 힘 1에 30퍼센트 추가 보상이면 힘이 1.3 만큼 오른다는 건가… 뭐지? 반올림 하는 거야?
-x쓰레기네….
대부분 유저들은 천공의 세력을 선호했다.
무엇보다도 천공 버프 중 경험치 15% 추가의 효과는 아스리안을 플레이하는 누구나 탐낼 만한 것이었다.
15%가 작아 보일지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효과가 쌓인다.
6일을 플레이할 때마다 남들보다 하루를 앞서 나가게 될 테니까!
그렇게 유저들의 의견은 하나로 정해지는 듯했다.
암살자를 포함한 몇몇 직업군을 제외하면 무조건 천공의 세력이 유리하다고.
***
스타더스트 게임단.
코치와 감독, 선수들은 모두 모여 앞으로의 세력 선택에 대해 의논했다.
얼마 전 아스라 온라인을 3년 이상 플레이해온 한 명을 코치로써 구했기에 심도 깊은 사항까지 토의할 수 있었다.
“딱히 고민할 것도 없네요.”
논의된 결과에 따르면 심연을 선택하는 이점은 오직 하나. 자신의 룬을 바꾸며 세력을 숨길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장점은 솔로 플레이에서 빛을 발할지 몰라도 집단으로 이루어진 게임단에선 큰 효용을 갖지 못하리라.
반면, 천공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는 가시적인 효과들만 모여 있었으니 천공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우리 스타더스트는 전부 천공으로 통일하기로 하죠.”
결정은 아무런 반론 없이 이루어졌다.
감독의 한 마디에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
화랑 길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내 독보적인 1위로 이름을 날린 한국의 대표길드다.
최근 상당수의 프로게임단들이 아스리안을 파고들며 무서운 기세로 쫓아오고 있었기에 더 이상 독보적이라 말할 순 없겠지만 여전히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메인 스토리 패치 직후 화랑 길드에 전체 공지가 올라왔다.
***
다크니스 길드.
길드장 엑스라지. 부길드장 레이나. 그리고 랭킹 20위 이상의 간부급 유저까지 총 다섯이 모였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패치 이후 속할 세력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천공… 그리고 심연중 하나만 선택이네요….”
메이데이가 진중한 눈빛으로 고민했다.
그녀는 얼마 전 100레벨을 넘기고 승급 퀘스트를 완료해 ‘염력술사’로 전직했다.
랭킹 2위. 가장 고레벨인 그녀의 의견은 길드 내의 모든 논의에서 강력하게 반영되었기에 길드원들은 메이데이의 다음 말에 집중했다.
“길드 입장에선 당연히 천공이 좋긴 할 텐데….”
메이데이는 아쉬운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심연에 더 끌려요.”
“어째서죠, 메이데이?”
엑스라지가 끼어들며 물었고, 메이데이가 대답했다.
“후후… 그야 당연히 업적 보상 때문이죠! 저, 이래봬도 업적 킬러라고요, 업적 킬러!”
메이데이는 난데없이 자신의 상태창 일부를 공개했다.
상태창은 보통 프라이버시로 취급되지만 여기 있는 이들은 다크니스가 생겨날 때부터 함께해온 동료들. 메이데이가 믿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
메이데이의 상태창을 본 모두의 입이 벌어졌다.
“뭐야, 너 마력이 왜 그렇게 높아?! 다른 스탯에 소홀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정말 그렇군. 심지어 마법사에게 전혀 필요 없는 힘 스탯도 의외로 제법 높아.”
“이게 다 업적 보상 덕분이랍니다.”
메이데이의 설명은 이러했다.
그녀의 현재 레벨은 102. 하지만 스탯의 총합으로 계산해 보면 130레벨에 가까운 수치였다.
그동안 플레이해오며 수많은 업적 보상들을 달성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여기에 ‘심연’ 버프가 더해졌다면 그녀의 스탯은 140레벨에 달하고 있으리라.
“헉…! 나는 여태 업적 같은 거 하나도 신경 안 썼다고요!”
랭킹 20위권의 피아스가 머리를 감싸고 절규했다.
다른 이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레이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난 여태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어. 왜냐면 받아본 적이 없거든.”
“랭킹 2위의 플레이는 일반인들과 확실히 다르긴 하군.”
“그래, 후반으로 갈수록 레벨을 올리기 힘들어지니 언젠가 업적 보상의 영향력이 더 커지는 순간이 찾아오겠네.”
“그 말은 즉, 최상위 랭커들이 심연 세력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겠지요!”
엑스라지는 메이데이의 말을 경청했다.
자신이 분석력이 좋을 진 몰라도 게임 센스는 랭커들에 비해 조금 떨어진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길드장으로써 다른 랭커들의 관점을 흡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도 깨닫고 있었다.
엑스라지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 결정했다.
“좋아요, 정했습니다. 저희 길드의 대부분은 천공. 하지만 몇몇은 심연에 속하게 될 겁니다. 심연 쪽은 메이데이가 이끌어 주세요.”
“에? 그래도 돼요?!”
“물론이지요.”
엑스라지가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어차피 우리 길드에선 메이데이를 제외하고 ‘심연’에서 이득 볼 만한 사람이 몇 명 없어요. 기껏해야, 암살 계열의 도적 직업군 몇몇이 추가되겠지요.”
“그렇겠지.”
레이나가 동의했다.
심연의 효과 중엔 자신의 세력을 숨길 수 있다는 것이 존재했다.
암살 계열 도적들이 환영할 만한 버프였다.
그들은 아마 업적 보상 증가가 아니더라도 심연을 선호할 것이다.
“왕좌는 빼앗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어렵지요. 최고에 머무르기 위해선 양쪽의 정보가 모두 필요할 겁니다. 그리고.”
엑스라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우린 아직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두 명이 어떤 세력일지 알지 못해요.”
“두 명? 아!”
“그래요. 라티스. 그리고 아인 말이죠!”
엑스라지의 입에서 둘의 이름이 꺼내지는 순간 모두가 긴장했다.
특히 얼마 전 아인과 결투장에서 시비가 붙었던 피아스의 눈에서는 차가운 불꽃이 타오르는 듯했다.
“그들이 적이든 아군이든, 가까이 두어야 대응하기가 편합니다. 즉, 양쪽을 전부 봐야 해요.”
엑스라지의 말대로였다.
눈앞의 적보다 뒤에서 찌르는 아군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뒤에서 찌르는 적이면 더욱 무서울 테고.
“둘은 어디를 선택할 것 같나?”
베어쉴드가 툭 물었다.
메이데이가 인상을 쓰며 한참 동안 고민하다 대답했다.
“개인적으로는 둘 다 천공을 선택했으면 하네요… 왜냐면, 만약 그들이 심연 쪽을 택한다면 감당하기 힘들어질 것 같거든요.”
“아까 말한 업적 보상 보너스 때문인가?”
그 말에 메이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는 엑스라지와 레이나 역시 초조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생각도 메이데이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랭킹 2위인 메이데이도 무려 30레벨에 달하는 스탯량의 업적을 달성했는데.
랭킹 1위인 라티스는 대체 얼마나 많은 업적을 달성하고 있을까?
그것은 상상만 해도 오싹해지는 일이었다.
***
“훗, 당연한 걸 묻나?”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물음에,
남자는 오만에 가까운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심연이다.”
화륵- 불꽃의 룬이 그의 손등에 피어났다.
***
천공과 심연.
둘 중 어느 세력을 택하는 편이 좋은가의 논쟁은 며칠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한 커뮤니티를 표본으로 한 세력도의 통계조사 결과는 천공과 심연의 비율이 8대 2 정도로 나뉜 것으로 나타났다.
고작 20퍼센트의 유저들만 심연 세력을 택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천공의 다양한 혜택을 포기하면서까지 심연에 속한 이유는 가지각색이었다.
-전 네크로멘서로 전직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심연으로 왔어요. 천공에선 흑마법 계열로 전직이 불가능하더라고요.
-저도요, 전 암흑사제로 전직할 예정입니다!
-전 암살자로 가려고요.
-난 업적 보상 30퍼센트 효과 하나만 보고 심연 왔음. 결국 후반으로 가면 경험치보다 업적 보상이 훨씬 유리한데 왜 다들 경험치 15퍼센트에만 목매는지 모르겠다….
-그냥 심연이 더 간지 나서 온 건 나뿐인가?
다양한 이유로 심연을 선택한 유저들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대세는 천공으로 기울어 있었다.
-응, 후반 레벨까지 가는 것도 천공이 먼저 감 ㅎㅎ 경험치 15퍼를 더 주는 게 얼마나 큰 건지 모르나??
-심연은 NPC들한테 도움도 제대로 못 받잖아. 천공에서는 NPC들이 지원도 다 해준다는데 안 고르는 애들이 X신임.
-심연 애들은 쥐새끼처럼 숨어 다닐 거면 게임 왜하냐? RPG에서 서바이벌 장르로 바꾸고 싶나 보네 ㅋㅋㅋ 거의 모든 국가가 천공 세력이라는데.
천공을 택한 유저들의 말은 거칠긴 했지만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심연세력의 국가는 거의 없다시피 하기에 심연을 고른 유저들은 언제나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천공이 가진 어드벤티지는 패치가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확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